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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8:27:48

우덕순

파일:우덕순.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9년[1] 2월 26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수하면 황도리
(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2]
사망 1950년 9월 26일 (향년 71세)
조선인민군 치하 서울특별시
또는 1950년 9월 3일 ~ 9월 7일 (향년 71세)
평양교화소
본관 단양 우씨[3]
이명 우연준(禹連俊), 우홍(禹鴻), 우학(禹鶴)
일선(日善)
단운(檀雲)
종교 개신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59호
상훈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밀정 논란
3.1. KBS 시사기획 창 밀정편에 의한 1920년대 행적 논란3.2. 1930~1940년대 행적3.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기준3.4. 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3.5. 방송이후 신운용 박사의 반응3.6. 김규흥 문제 학계 합의 여부3.7. 민족문제연구소 견해와 일치 여부3.8. 기타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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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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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eb.pbc.co.kr/315750_1.0_titleImage_1.jpg
법정에서 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 주역 중 한 사람이며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하다.

2. 생애

1879년 2월 26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수하면 황도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에서 아버지 우시영(禹始映, 1857.12.27. ~ 1886.6.24.)[4]과 어머니 파평 윤씨(1856.10.10. ~ ?)[5]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밀양 박씨 박옥희(1895.9.17. ~ ?)[6]와 혼인하여 슬하에 외아들 우대영(禹大榮, 1915. ~ ?)을 두었다.

4, 5세 되던 해 상경하여 한성부 서부 여경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본적을 두었으며, 한성부 동서 창선방 동학계 양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흥인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국외에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서 1906년 초 사이에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워 청년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1907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 양성에 힘썼다.

1908년 300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군·회령군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교전하다 체포된 뒤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감옥에서 복역 중 탈옥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 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청나라 길림성 서북로도(西北路道) 신성부(新城府) 채가구역(蔡家溝驛)[7]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대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는 채가구역에 정차했으나, 일제가 채가구역을 폐쇄해 감금되어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고, 열차는 그대로 하얼빈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에서 함께 재판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0년 8월 11일 1심에서 이른바 내란 및 수도도주 혐의로 유배형 1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그해 9월 29일 함흥지방공소원에서 공소가 취하되었다.

이후 징역 3년으로 감형되었으나, 복역 중에 함흥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2년의 형량이 추가되어 1915년에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고, 1923년 11월부터는 헤이룽장성 빈장도(濱江道) 빈장현(濱江縣) 도리지구(道裡地區)[8] 조선일보 분국에 주소지를 두고 살기도 했다.

8.15 광복헤이룽장성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서 외아들 우대영과 함께 동포들의 본국 수송에 힘썼다. 귀국한 뒤에는 1948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 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우덕순이 어떠한 경위로 사망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고 다만 두 가지 이견만 존재하는데 첫번째는 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 해 9월 26일에 북한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9] 또다른 이견은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그 해 9월 평양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1950년 11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기반한 것이다.
서울서 납치당한 수천 명의 요인에 관하여서는 현재까지 그 행방이 확인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타나 부분적으로 소식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나 그 중 신의주(新義州) 출신인 류영목(柳榮睦:法專出身 往年의 蹴球選手 법전 출신 왕년의 축구선수)[10]씨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9월 3일부터 7일 사이에 평양형무소 감방에서 같이 있던 요인 10여 명이 학살된 것을 이번 평양 수복 직후에 확인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서울시 경찰부국장 최운하씨 등 다음 제씨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준호, 우덕순, 장기덕, 이광수, 최린, 옥선진, 최규동, 김일룡, 박원삼, 박열, 이성근, 고창일, 구자옥.
『조선일보』 1950년 11월 15일자 기사 中[11]
다만 이 기사에는 이광수, 최린, 박열, 고창일 등의 사례처럼 한국전쟁 이후에 사망했거나 다른 경위로 사망했다고 밝혀진 사람들도 전부 학살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액면 그대로 신뢰하긴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현재 우덕순의 유해가 한국에 있는 걸로 근거해 우덕순은 납북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옳다는 견해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68년 9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3. 밀정 논란

3.1. KBS 시사기획 창 밀정편에 의한 1920년대 행적 논란

시사기획 창 밀정 1부 - 배신의 기록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KBS뉴스 2019년 8월 13일 방송에 따르면 우덕순이 1920~30년대에 하얼빈 조선인민회장 및 치치하얼 조선인민회 간부를 맡았다는, 이미 예전에 학계에서 확인된 내용이 방송에 보도됐다. KBS가 입수한 자료중에는 1925년 우덕순이 일본 외무상 시데하라 기주로에게 보낸 공문서가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외무성의 보조로 많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예산지원을 요청합니다"라면서 하얼빈 조선인민회의 예산보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일단, 독립운동가였단 사람이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는 단체의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방송에 따르면 이 단체의 성격이 만주의 한인들을 통제 감시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친일 단체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실제 이 단체의 예산중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것이 소위 첩보비, 밀정비 등의 자금으로 특히 조선인민회가 밀정의 월급으로 지급한 액수는 당시 50원으로 오늘날 가치로 20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신입교사의 초봉이 45원이었고, 일제가 조선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관료들에게 조선어를 익히게 하고 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주는 포상금이 50원이었으니# 밀정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덕순이 하얼빈의 고급호텔인 북만호텔에서 식사를 한 영수증도 발견되었는데 그가 식사를 하는데 쓴 비용만 25엔, 오늘날 가치로 수백만원이다. 더군다나 같이 식사한 사람이 일본의 특무기관원인 것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만주의 찬바람속에서 가난과 고통속에 독립운동을 하는동안 우덕순은 고급호텔에서 일본특무기관원과 수백만원짜리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민회는 밀정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우덕순은 이런 밀정들을 관리감독한 최고책임자였다는 의견이다.# 실제 일본 외무성 기록에 의하면 우덕순이 이끌던 하얼빈 조선인민회에 대해 외무성은 모범적인 민회라고 높게 평가했다. 위에서 우덕순을 밀정으로 분석하게 한 자료의 근거는 1925년을 비롯한 1920년대 행적이다. 시사기획 창은 1925년을 비롯한 1920년대 행적을 근거하여 우덕순을 밀정으로 확정한 방송을 하였다.

그런데...

3.2. 1930~1940년대 행적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1934년에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분명히 이런 내용이 있다.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
우덕순에 대해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에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 기록한 내용[12]

위의 KBS 방송에선 20년대 문서를 근거로 우덕순을 밀정으로 추정하였는데 정작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1934년 문헌에선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있는 인물이라 하며 외국의 용의 조선인명부에 적고 있다.

그리고 해당 변절 의혹은 이미 전에 제기된 내용이다. 우덕순이 일본총영사관에서 1925년 4월 30일 6,175엔을 받았다는 기록은 이미 한참 전에 발굴됐고 신운용 박사가 이미 2010년에도 친일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신운용 박사는 일제문헌을 연구하는 도중 그런 의견을 철회하였다.[13]

그리고 당시 언론내용을 보면 우덕순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치치하얼 감옥에 갇혀있다고 나온다. 또한 만주에서 귀국한 한인들로 구성된 동삼성한인협력회의 회장을 맡았고 이에 대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규탄당한 문헌을 확인할 수 없다.[14]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신운용 박사는 "이는 그가 친일로 경도되었다고 볼 수 없는 증거"라고 논문에서 결론을 내렸다.[15]

물론 위의 언론보도가 거짓이란 가설은 가능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러니 이에 대해 일제문서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데 정작 KBS 방송에서 이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일제내부는 우덕순을 1934년에 농후한 배일사상을 갖고 있다고 기록하며 주의해야할 명단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좀 더 이후에 대한 자료를 봐야 밀정인지 아닌지 확인이 가능할텐데 이에 대해 관련 방송이나 논문을 확인할 수 없다.

우덕순이 밀정일 수 있다. 하지만 밀정이 아닐 수도 있다. 정확한 증명은 밀정을 주장하는 측에서 해야할 필요가 있다. KBS 방송이 잘못한 점은 증거로 제시한 일제 내부 문서가 다 1925년을 비롯한 1920년대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1934년의 일제 문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추적하지 않았다.

위에서 근거한 논문들은 신운용 박사의 논문인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신운용 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안중근의 민족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으로 안중근 의사 관련 대표적인 전문가이다.

일단 우덕순을 국립현충원에서 빼버려야 할 증거는 부족하거나 없다. 빼고싶으면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하나 증거가 없으면 우덕순을 빼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부분들은 연구를 기다려야지...조급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판단하는 것은 무리고 있고...(이후 KBS가 박사의 발언을 편집)[16]
배경한 박사가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KBS뉴스(News)" 20분에서 김규흥 관련 내용에서 한 답변[17]

일제강점기 전체도 아니고 겨우 1920년대 일부 행적만 방송에서 본 것 가지고 밀정으로 판단하는 건 상당히 무리가 있다. 전문가의 연구자료를 확인해봐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우덕순 밀정여부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좌진 비서에 대해서는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의 비서는 밀정이었다”』고 인용하는 것과 다르게 우덕순에 대해서는 『‘안중근 거사 동지’ 우덕순의 이상 행적 포착』 등 "이상 행적"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 외 우덕순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사람의 글도 참고해볼만 하다. 이 글도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근거하여 쓴 글이기 때문에 오마이뉴스의 뇌피셜에 근거한 글은 전혀 아니다. 안중근의 동지가 일제의 밀정? KBS 결론 아쉽다

3.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기준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은 친일반민족행위 기준미달이다.

국회도서관 링크 여기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1-2 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3,4,를 검색을 해보자. 무료로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보고서 3-4 482-486 쪽 부록에 등록된 조선인민회 회장은 141 명 이상인데 이중 보고서 238-247쪽 기준으로 (다른 경력이 아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으로, 그 외 조선인민회장 출신들은 다른 경력으로 선정된 것이다.[18])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을 만족한자는 겨우 6명(이희덕, 김명여, 김여백, 장우근, 원용국, 박승병)이다. 회장의 단체의 대표 책임자인데 부록에 나온 141명 이상의 명단 중 겨우 6명이라는 극소수만이 기준을 통과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은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분류가 아예 다르다.

3.4. 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

친일인명사전을 기준으로 하면 편찬위원회에는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의 교수 학자 등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방송에서 우덕순 친일변절설을 주장하고 발언한 인물은 겨우 김주용, 장신, 반병률 3명이다. 학계논문심사를 통과한 논문도 아니다. 그에 비해 신운용 박사는 논문 심사를 통과한 논문이 있고 학계에서 반론[19][20]이 없다.

3.5. 방송이후 신운용 박사의 반응

2019년 10월 9일 신운용 박사는 기자쪽에서 신운용 박사에게 연락한 일이 전혀 없었다며 방송을 보고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그리고 학자는 논문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며 언론에게 찾아가서 발언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3.6. 김규흥 문제 학계 합의 여부

김규흥에 대해서는 방송만 보면 학계정설처럼 보이겠는데 정작 친일인명사전에 참가한 학자 150여명에 비하면 극소수고 그 극소수중에서 배경한 박사가 확정에 반대하고 있다. 인터뷰에서도 그런 부분들은 연구를 기다려야지...조급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판단하는 것은 무리고 있고[21]라고 답변했다.

3.7. 민족문제연구소 견해와 일치 여부

KBS의 밀정 2부작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학계가 주도적으로 심사하는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3·1운동 계보도와 임정 초기의 사진을 공개하는 등 희귀자료를 발굴하고 소개"가 이유지 우덕순 부분 때문이 아니다. 그 상이 "밀정 혐의자 895명을 특정하고 이들의 행태를 고발함으로써 그간 언설로만 전해져 오던 ‘밀정’의 실체와 죄상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특히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가운데서도 밀정 또는 친일 혐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학계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고 하는데 혐의자는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봄. 또는 그 가능성."#을 가리키지 사실 그 자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시사기획 창 제작진들의 주장은 민족문제연구소와 다르다. 증거가 있다.

시사기획 창 제작진들은 김달하를 밀정이라 확정하고 방송하였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하니 견해가 다르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2017년 김달하에 대해 문의하니 2017-06-07에 "해당 인물이 실제로 어떤 밀정행위를 했는지, 어떤 이력을 갖고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연구,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 등의 1차 사료 등이 현재로서는 부족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도 <친일인명사전>을 준비하면서 주목했던 인물이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점으로 인해 현재까지 확정지을 수 없어 보류중입니다."라는 답변이 왔으며 2019-08-21에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방학진 씨에게 메일로 문의하였는데 "2017년 연구소의 어느 연구원님이 회신드린 답변에 추가할 내용이 없네요."라는 답변이 왔다.

이 내용을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직접 확인할 수도 있다. https://www.minjok.or.kr 이곳에선 '열린광장' 클릭하고 문의를 눌러서 직접 이 내용을 문의하면 확인이 가능하다.

임경석 교수는 KBS 보도에 나온 김복 관련 문서를 근거로 김달하를 밀정이 아니라는 의심이 가셨다는 글을 투고하였다. # 그러나 정작 사료를 발굴하고 조사한 배경한 교수의 견해는 다른데 배경한 교수는 그 문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 부분들은 연구를 기다려야지... 조급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이후 KBS가 박사의 발언을 편집)[22]
배경한 박사가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KBS뉴스(News)" 20분에서 김규흥 관련 내용에서 한 답변[23]
결론적으로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또한 둘다 논문이 아닌 글로 전달했으므로 둘다 학술적으로 제대로 검증된 설명도 아니다.

1920년대에 있었던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 우덕순이 독립운동을 하다 전향했고 일본에 도움을 줬기에 금전적인 도움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해방 후 우덕순의 삶은 빈궁했고 그의 유일한 외아들 우대영은 집도 재산도 없이 병원비도 내지 못해 쫓겨나 행려병자로 살다 사망했다.
서울시내 명동에 있는 "대한중석부속병원" 제 208호실에 심장병으로 지난 5개월동안 입원치료중인 홀홀단신 집도 재산도 없는 외로운 불구자(오른발이 없는)가
쌓이고 쌓인 입원료, 치료비를 낼길이 없어 병도 다 고치지못한 채 쫓겨나게 되었는데,
살기 어려운 세상에 이런일 쯤은 예사이겠지만
이 불쌍한 환자란 우대영(43세) 씨로 다름아닌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의거에 참가하였던 유명한 우덕순 씨의 자제라
이사실을 알게된 내무부에서는 며칠전 보건사회부에 선처를 부탁했는데
그러나 보건사회부 당국자들은 입맛만 다시고 아직 도와주겠다던가 못도와주겠다던가하는 확실한 표시를 않고있어 딱한 사정(이다)
1956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휴지통 #

우덕순이 실제로 밀정 혹은 밀정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일제가 밀정에게 지급했던 두둑한 급여로 미루어보아 우덕순이 사망한 지 고작 6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자손이 저 정도의 비참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은 낮다고 하겠다.

3.8. 기타

만약 우덕순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KBS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가능성이 컸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우덕순의 후손이 있는지 수소문했지만 무소식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우덕순의 후손은 독신이었으며 이미 사망하여 대가 끊겼다.

아래는 KBS 취재진의 글이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문서 글이다.
KBS 취재진에서 나왔다는 출처불명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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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취재진이 직접 밝혀둡니다. 바람직한 토론을 위해서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임의로 타인의 글을 삭제하지 말 것과, 가급적 개인의 주관적 견해로 일관하는 서술이 아닌 객관적 서술을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1. KBS 밀정 2부작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사실상 주관하는 임종국상을 비롯해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 올해의 방송기자상 대상 등 다수의 수상을 기록했으며 위의 주관적인 서술과 달리 임종국상 시상문에는 "밀정 혐의자 895명을 특정하고 이들의 행태를 고발함으로써 그간 언설로만 전해져 오던 ‘밀정’의 실체와 죄상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특히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가운데서도 밀정 또는 친일 혐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학계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2. 우덕순은 1945년 해방 뒤 안중근 추모사업 회장직을 맡다가 주변의 지탄으로 스스로 물러나고 만다. 1920년대 이후 그가 조선인민회 지회장 등 일제에 적극 협조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직접 상황을 목도하고 경험한 사람의 증언이며, 꽤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다가 취재진에게 익명을 요구했다는 점 등의 이유로 방송에선 반영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3. 조선인민회는 조선인 사회의 각종 정보를 전반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며, 특히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었다. 우덕순은 1920년대에는 하얼빈에서, 1930년대에선 치치하얼에서 조선인민회 지회장을 맡는다. 위의 서술에선 KBS 취재진이 새로 찾아낸 1930년대 치치하얼 조선인민회 지회장 부분을 의도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적시하지 않고 있다. 조선인민회가 어떤 곳이었는가에 대해선 친일반민족 진상규명위 등 정부와 학계 차원에서 이미 성격 규정이 끝난 부분이다.

4. KBS 취재진은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다 읽고 검토했으며, 그러나 신 박사의 과거 논문이 미처 반영하지 못한 새로운 발굴 사료 등으로 우덕순의 친일 행적이 더욱 명료화했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은 취재진이 자의적으로 내린 판단이 아닌 다수의 학계 전문가의 판단이다.

5. 위의 서술에는 우덕순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김규흥을 언급하며 논점을 건너뛰고 있는데, 김규흥에 대해서도 KBS 밀정 2부작은 배경한 교수의 신중론과 다른 학자들의 비판론을 함께 병치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배경한 교수는 최종적으로는 "판단을 더 해봐야 한다"는 신중론을 펴긴 했지만 김규흥의 행적이 경악할 만한 내용이라며, 만약 과거 서훈 심사 당시에 이런 자료가 있었더라면 훈장이 수여될 수 있었겠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판단이 유보되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앞으로 학문적 토론이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법원에서도 인정한 대로, 다큐멘터리는 합리적 근거에 기반한 의혹 제기를 매우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김규흥에 대해서도 기존 의혹에 새로 발굴된 자료가 있는 만큼 언론의 비판적 문제제기가 충분히 가능하다.

6. 김달하는 문제적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논쟁과 토론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방송에 반영된 대로 우쓰노미야와의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강하게 의심되기에 김달하의 밀정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고 봐야 합리적일 것이다. 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는 KBS 방송 이후 한겨레21 기고문에서 김달하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밀정이 맞다고 보는 게 합리적임을 서술하고 있다.(...이 편지에서 김달하가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훼절과 조선 귀환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 대가로 거액을 청구했다는 점이 뚜렷이 드러났다.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던, 억울한 죽음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말끔히 가시는 것을 느낀다.[24]

7. 어떤 문제적 인물이 친일인명사전에 설령 등재되지 않았다 해서, 혹은 서훈이 아직 취소되지 않았다 해서 그 자체로 그의 삶이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서훈 심사가 얼마나 부실하게 이뤄졌는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사료는 꾸준히 발굴되는 것이고 그에 따라 학문적 교정과 정부 차원의 서훈 재심사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따라서 언론 보도를 무작정 비판하기 전에 그러한 언론 보도가 다수의 전문가들의 진단을 충실히 담았는가, 나름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언론 보도는 최초의 문제제기를 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다시 당부하지만 타인의 글을 임의로 삭제하면서 본인의 글만 남겨두는 행위는 나무위키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적어도 학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이 KBS 취재진의 글이라는 내용을 검증할 수 없다. 해당 글이 KBS 취재진의 글이라는 것은 나무위키에 작성된 글 외엔 전혀 확인할 수가 없다. 참고로 나무위키 출처를 근거로 실존하는 기자를 비판했다 틀렸다면 명예훼손 범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글이 KBS 취재인 것과 별개로 확실히 오류(혹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가 있는데 조선인민회 관련부분이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근거로 보면 알겠지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은 친일반민족행위 기준미달이다. 국회도서관 링크 여기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1-2 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3,4,를 검색을 해 볼 수 있다. 다운로드는 무료이니 돈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고서 3-4 482-486 쪽 부록에 등록된 조선인민회 회장은 141 명 이상인데 이중 보고서 238-247쪽 기준으로 (다른 경력이 아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으로, 그 외 조선인민회장 출신들은 다른 경력으로 선정된 것이다.[25])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을 만족한자는 겨우 6명(이희덕, 김명여, 김여백, 장우근, 원용국, 박승병)이다. 회장의 단체의 대표 책임자인데 부록에 나온 141명 이상의 명단 중 겨우 6명이라는 극소수만이 기준을 통과한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은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분류가 아예 다르다. 다시 말해 조선인민회장 자체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도 아니고 그중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건 극소수이며 그 극소수조차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와 조선인민회장 관련 내용과 다르게 쓴셈. 물론 위 글도 '조선인민회장 자체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했다'고 직접 말하지도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선 조선인민회장을 밀정으로 분류한다'고도 말하지도 않았므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로 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실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기준으로 조선인민회장 자체는 극소수만 제외하면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되지 않는다.

4. 대중매체에서



[1] 1880년생이라고도 하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876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3] 예안군파(禮安君派) 29세 순(淳) 항렬.[4] 족보명 우중현(禹重鉉). 자는 윤삼(允三).[5] 윤계철(尹啓哲)의 딸이다.[6] 박주현(朴疇鉉)의 딸이다.[7]중국 지린성 쑹위안시 푸위시(扶餘市) 차이자거우진(蔡家溝鎭) 다오시지에(道西街) 차이자거우역(蔡家溝站).[8]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리구.[9] 당시 곳곳에서 인민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우덕순도 여기에 휘말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10] 원문에는 柳榮睦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 유영목(兪榮穆)이 맞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재학 시절 축구부 코치를 맡기도 했다. 1931년 봄에 졸업하고 신의주지방법원에 임용된 사실이 전한다.[11] 신운용,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 2014, 169쪽에 재인용[12] 신운용,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 2014, 159쪽에 재인용[13] 신운용,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 2014, 159쪽[14] 신운용, 같은 논문[15] 신운용, 같은 논문[16] 배경한 박사의 답변을 보면 존댓말인데 이부분은 뒷부분이 짤려서 반말처럼 보인다.[17] 해당 KBS 방송과 제작진측은 배경한 박사의 설명을 무시하고 밀정으로 확정했다.[18] 이 인간들은 김동만, 김희영, 손정룡, 이갑녕, 임한룡으로 이거 추가해도 5명 추가다.[19] 20191221 기준[20] 정확히는 안중근의 종교관에 대한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반론한 논문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덕순의 밀정논란과는 하등 아무런 관련도 없다.[21] 배경한 박사가 "시사기획 창 밀정 2부 -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KBS뉴스(News)" 20분에서 김규흥 관련 내용에서 한 답변, 해당 KBS 방송과 제작진측은 배경한 박사의 설명을 무시하고 밀정으로 확정했다.[22] 배경한 박사의 답변을 보면 존댓말인데 이 부분은 뒷부분이 짤려서 반말처럼 보인다.[23] 해당 KBS 방송과 제작진측은 배경한 박사의 설명을 무시하고 밀정으로 확정했다.[24]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7751.html[25] 이 인간들은 김동만, 김희영, 손정룡, 이갑녕, 임한룡으로 이거 추가해도 5명 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