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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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유선(騮先) |
출생 | 1893년 5월 30일 |
청나라 저장성 호주부 우싱현 (現 중국 후저우시 우싱구) | |
사망 | 1963년 1월 3일 (향년 69세) |
대만 | |
학력 | 의공전문학교 (졸업)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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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가.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3년 5월 30일 저장성 호주부 우싱현[1]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난징 정몽학당(正蒙学堂), 남송공학(南潯公学) 등 여러 학당에 재학했고, 1908년 가을에 상하이 동제덕문의학교(同济德文医学校)에 입학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에서 혁명파에 속한 중국 결사단(中国敢死团)에 가입했고, 1912년 동제 의공전문학교(同济医工专門学校)로 개명된 모교로 돌아와 전기과에 복학했다.1914년 전문학교를 졸업한 주자화는 장정강(張静江)의 지원을 받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공대에서 야금술을 배웠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1917년 귀국했다. 귀국 후 베이징 대학에서 독일어 교사로 일하다가 얼마 안가 스위스로 유학가서 베른대학에 입학했다. 1920년, 독일에 돌아온 그는 베를린 대학에 입학해 지질학을 공부했고, 1922년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24년 봄 귀국한 주자화는 베이징대학 지질과 교수 겸 독일어 교관을 역임했다. 1926년 3월, 베이징 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당시 베이징을 장악하고 있던 봉천군벌에게 무력으로 진압당했다. 이후 그는 학생 시위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수배를 받았고, 이를 피해 고향으로 도망쳤다가 그해 7월 국립광동대 지질학과 교수 겸 학과장으로 부임했다. 그 뒤 광동대가 국립중산대로 개편되었을 때 중산대위원회 위원장 대행을 맡았다.
1926년 11월, 광저우 국민정부의 광둥성 정부위원으로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27년 5월 저장성 정무위원회 위원 겸 저장성 노공청장을 역임했고, 6월에는 중상대 부총장 겸 양광지질조사소 소장을 맡았다. 이 밖에 중국 국민당 광둥성 당 집행위원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9월에는 중산대학 교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0월에는 저장성 정부위원 겸 민정청장, 중국 국민당 저장성 당사 집행위원을 지냈으며, 1923년 3월 중국국민당 3기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9월 중산대 총장에 부임한 주자화는 11월에 국립중앙대 총장으로 이직했으며, 1931년 4월에는 중영경금위원회(中英庚款委員会) 위원장을 맡았다. 9월에는 전국경제위원회(全国经济委員会) 사무총장을 맡았으며, 12월에는 국민정부 교육부 장관에 선임되었다. 1932년 10월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가 1935년 12월 교통부 장관에서 물러나 중앙정치위원회 사무총장 대행을 맡았다. 1936년 봄 차이위안페이 국립중앙연구원장의 초빙으로 국립중앙연구원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그해 12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저장성 정부 주석을 지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주자화는 1938년 3월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참사실 주임을 맡았고, 4월에는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장 겸 당무위원회 주임위원 겸 중앙조사통계국장을 맡았다. 그는 천리푸, 천궈푸 형제와 함께 대표적인 CC단 인사로 간주되어 국민정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8년 7월에는 삼민주의청년단 간사회 상무간사 겸 중앙단부 서기장 대행을 지냈다.
1939년 12월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장을 맡은 주자화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하자 중국이 살 길은 독일과 동맹을 맺는 것이라며 독일과 동맹을 체결할 것을 촉구했지만, 일본이 먼저 독일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면서 중독 협력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1940년 9월 중산대 총장을 맡았고 12월에는 중국대 총장으로 이직했으며, 12월에는 고시원 부원장을 맡았다. 1944년 11월에는 천리푸의 뒤를 이어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직후인 1945년 9월, 주자화는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중국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1947년 4월 12월에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중국위원회 준비회의를 주재했으며, 6월에 중국위원회를 난징에 출범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관은 중국의 전쟁 피해를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947년 4월 17일엔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4월 23일에 행정원 정무위원 겸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31일 행정원 정무위원 겸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주자화는 1949년 6월 12일 국공내전이 국민정부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돌아가자 교육부 장관 직을 내려놓고 광저우로 도피해 그곳에서 중화민국 정부행정원 부원장을 지냈다. 이후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철수했고, 1950년 7월 중국 국민당 중앙평의위원에 선임되었다. 1963년 1월 3일, 대만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중일전쟁 시기인 1940년에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을 지원하고 1945년까지 물질적 원조를 해줬으며,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장제스에게 건의해 승인을 얻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現 후저우시 우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