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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10:10:56

정환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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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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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전투의병
민종식 신돌석 정용기, 정환직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정치우(鄭致右)
이명 정관직(鄭寬直)
본관 연일 정씨[1]
자 / 호 백온(伯溫) / 동암(東巖)
출생 1844년 5월 19일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검단마을)
사망 1907년 11월 16일
경상북도 청하군 각전 남쪽 교외
묘소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2. 생애
2.1. 의병 활동 이전의 경력2.2. 의병 활동2.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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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의병 활동 이전의 경력

정환직은 1844년 5월 19일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검단마을)에서 아버지 정유원(鄭裕元)과 어머니 순천 이씨(順川 李氏)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연일 정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파조 정습명(鄭襲明)의 25세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해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다. 그는 자라면서 성품이 강직하고 영민했다고 한다. 비록 가세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꾸준히 학업을 닦았고 1885년 향시에서 장원급제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 상 더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의술에 연마해 각처를 돌아다니다가 1887년 44세의 나이에 형조판서 정낙용의 추천으로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가 되었다.

정환직은 1888년 충무위사용행의금부도사 겸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고,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삼남창오령(三南參伍領)으로 임명되어 동학 농민군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이어 그해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완전사(翫戰使)로 임명되어 군무대신 조희연과 동행해 청, 일 양군의 전투를 지켜봤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조선 정책을 강화하고 내각 재편과 내정개혁을 진행했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1894년 9월 항일구국을 표방하며 재거병하자, 조선 정부는 일본군이 동학 농민군 토벌에 개입하는 걸 허락했다. 이에 정환직은 '일병의뢰반대상소(日兵依賴反對上疏)'를 올려 동학군 토벌을 일본군에 의뢰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묵살당했고, 10월에 선유사겸토포사(宣諭使兼討捕使)로 황해도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어 구월산 일대의 농민군을 진압했다. 그는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8년, 정환직은 '토역상소'를 올려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역신들을 소환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을미사변을 저지른 후 일본으로 도주한 8명의 역신을 아직 잡아 치죄하지 못했으니 각국에 외교활동을 벌여서 역적 8명의 소재를 파악하여 인도받아야 할 것을 주청했다. 1899년에는 삼남경찰 겸 토포사로 삼남 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봤으며,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했다가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되었다. 얼마후 석방된 그는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901년 11월 20일 궁궐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고종과 황태자를 구출해 고종의 신임을 더욱 받았다.

2.2. 의병 활동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정환직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에 대해 전해들은 뒤 밀지를 받았다. 이에 정환직은 의병을 일으키라는 고종의 뜻을 파악하고 관직에서 물러났고, 1906년 1월에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의병을 일으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용기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영천창의소'를 걸치하고 권세가를 비롯한 각종 통문, 격려문을 지어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역적과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고 호소했다. 그해 2월, 정용기는 의병 1,000여 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되었고,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을 이름으로 정하여 항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1906년 4월, 신돌석의 의병대와 합세하기 위해 진군하던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유인하기 위해 경주 진위대가 흘린 거짓 정보였고, 결국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어 대구경무소에 구금되었다. 한편, 정환직은 영남 일대를 돌며 동지를 모았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군자금으로 고종의 하사금 5만냥과 전 참찬 허위로부터 받은 2만냥을 확보한 뒤 무기와 군수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어떻게든 아들을 구하기 위해 석방운동을 벌였고, 정용기는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산남의진은 대장을 잃은 여파로 병사들이 상당수 떠나버려서 해산되었다.

1907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정용기는 아버지로부터 다시 의병을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고 의병대를 재소집해 '산남의진'을 조직했다. 그는 관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돌석 의병대를 지원했고, 동해안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해 북상의 길을 찾았다. 이후 영해, 청하, 청송, 포항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던 1907년 8월 29일, 정용기는 관동으로의 북상 및 각지의 의병대와의 연락을 위해 의병들을 경상북도 각지에 파견한 뒤, 자신은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에서 이동했다.

1907년 9월 1일 일본군이 입암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정용기는 9월 1일 새벽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매복을 했다. 그러나 도중에 정보가 누설되고 말았고, 일본군은 매복한 산남의진을 역으로 급습했다. 그 결과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李韓久),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수십 명의 장령들이 전사하고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정환직은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1907년 9월 산남의진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진영을 재편성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9월 3일부터 9월 12일 사이에 보현산 인근 지대에 집결하고 여러 장령과 종사들을 각지로 보내 적세를 살폈다.

9월 12일 밤 북동대산으로 진을 옮긴 정환직은 청하, 영덕, 청송 등지에서 군량을 모았고, 울산분견대 병사 출신의 우재룡, 김성일(金聖一), 김치현(金致鉉) 등에게 군대를 훈련시키게 했다. 이후 산남의진은 9월 22일 흥해, 9월 28일 신녕, 9월 29일 의흥 등지를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10월 2일 청송 두방에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고, 10월 5일 적의 추격을 가까스로 뿌리치고 보현산으로 후퇴했다. 이후 정환직은 진영을 2대로 편성해 한 부대는 청송으로 가고 다른 부대는 기계로 이동하게 했다. 10월 11일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흥해분파소를 습격한 후 청하, 영덕, 북동대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2.3. 최후

일본군이 안강, 기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전을 가해오면서 병력과 물자 손실이 갈수록 심해지자, 정환직은 진용을 분산시켜 북상시키기로 했다. 그는 "내가 먼저 관동으로 들어가 그대들을 기다릴 테니 그대들은 각자 나아가 탄약 등을 구하여 관동으로 들어오라."며 병사들을 상인, 농부 등으로 변장시키고 사방으로 보냈다. 그는 몇몇 간부들과 함께 신분을 숨긴 채 관동으로 가려다가 도중에 병이 들어 청하면 각전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 밀정이 그의 정체를 간파하고 밀고하면서, 결국 그는 1907년 11월 6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정환직은 일본군으로부터 귀순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끝내 거부했고, 1907년 11월 16일 청하면 각전 남쪽 교외에서 총살되었다. 향년 64세.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身亡心不變)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義重死猶輕)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後事憑誰託)
말 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無言坐五更)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환직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1962년에 아들 정용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지주사공파-사정공파 25대손 치(致) 목(睦)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