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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7:36

탕지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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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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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탕지야오
唐繼堯[간체] | Tang Jiyao
중화민국 호법정부 원수
검천전악예 5성 연군 총사령관
운남성장
파일:당계요.jpg
출생 1883년 8월 14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운남성 회택현
사망 1927년 5월 23일 (향년 43세)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운남성 곤명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별칭 호(號): 동대륙주인(東大陸主人)
자(字): 명갱(蓂賡)
직업 군인, 정치가
원수 임기 1917년 9월 2일 ~ 1918년 5월 4일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한국식 독음 당계요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호법전쟁2.3. 몰락
3.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4. 참고문헌5.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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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전계군벌이라 불리는 운남성의 지역군벌로, 한때 대서남주의를 주장하며 중화민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후반부에 허무하게 몰락하고 사망한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3년 운남성 회택(會澤)에서 태어났다. 1903년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수재가 되었고 1904년 일본 도쿄의 진무학교에 유학하여 1906년 졸업했다.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2] 1908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귀국 후 운남강무당(講武堂) 교관, 신군 진참모관(鎭參謨官) 등을 역임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운남에서 차이어의 쿤밍 중구 봉기에 참여했고 운귀총독 리징시를 몰아내고 차이어의 부하가 되었다. 1912년 귀양을 점령하여 귀주도독에 올랐고 1913년 운남도독 겸 민정장관, 1914년 개무장군 겸 운남 순안사가 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단행한 이후 리춘, 옌시산과 함께 1등 후작에 봉해졌지만 이를 거부하고 12월 23일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제제 취소와 제제를 부추긴 인물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위안스카이가 대답하지 않자 12월 25일 호국군을 일으켜 도독 겸 제3군 총사령관에 취임, 위안스카이에 맞서는 호국전쟁을 벌였다. 각 성이 호응하면서 1916년 군무원이 설립되자 국무총리 격인 무군장에 추대되었다. 1916년 3월 23일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다. 1916년 11월 차이어가 사망하자 사천성을 차지하기 위해 나패금을 사천도독에 임명하고 사천군벌 류존후와 싸움을 벌였다.

2.2. 호법전쟁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 복구를 약속하자 7월 14일 군무원은 해산되었고 8월 1일 국회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국회에선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라는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돤치루이가 남방의 군벌들과 리위안훙을 제압하고 중국을 무력통일하기 위해 무리하게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주도하여 복벽파인 안휘독군 장쉰을 끌어들였다가 장훈복벽이라는 황당한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탕지야오는 장훈복벽을 토벌하겠다는 통전을 보냈다. 돤치루이에 의해 장훈복벽은 12일만에 진압되었으나 돤치루이는 구국회와 약법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독재를 일삼았고 이에 분노한 쑨원1차 호법운동을 벌여 광저우로 남하하게 된다. 탕지야오는 세력확장을 위해 호법운동을 이용하기로 결정, 쑨원을 환영하는 한편 돤치루이에게 구국회 회복을 요구했다.
첫째, 총통이 만약 복직하지 않겠다면 국회에 사직을 청해야 한다. 둘째, 국회를 회복시켜야 한다. 셋째, 국무원은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으면 무효이다. 넷째, 군사를 일으켜 항명화수를 엄벌해야 한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서남파의 요구를 철저히 씹었고 결국 쑨원은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라 불리는 1차 광동정부를 조직, 대원수에 추대되었다. 탕지야오는 계계군벌의 수장 루룽팅과 함께 원수로 추대되었지만 취임하진 않았다. 탕지야오는 호법운동에 호응한다는 구실로 사천성에 출병했고 9월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사천성을 장악, 12월 전검천 3군회의를 통해 정국군을 일으켜 정국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슬슬 쑨원이 귀찮아진 탕지야오는 루룽팅, 천춘쉬안과 결탁하여 쑨원 축출을 기도했고 1918년 군정부 개조를 관철시켰다. 실망한 쑨원은 5월 21일 광저우를 떠나버렸고 1차 호법운동은 끝났다. 탕지야오는 1918년 5월 검천전정국연군 총사령관, 9월 검천전악예 5성 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후 1918년 11월 북양군벌과 휴전하고 서북 지배를 꿈꾸게 된다.

1919년 중국국민당이 조직되자 가입을 제안받았지만 거부했으며 이후 군정부와 의회를 농단하는 루룽팅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1차 광저우 군정부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했으며 1920년 6월, 쑨원의 루룽팅 토벌선언에 연명하는 등 2차 호법운동에 정부총재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1921년 쑨원의 북벌론에 호응한 부하 구핀전에게 운남성에서 축출당했다. 그러나 근성있게 1922년 구핀전을 암살한 후 권좌에 복귀, 운남성장에 취임하여 운남의 지배자가 되었다.

2.3. 몰락

1924년 운남군을 건국군으로 개편하고 7성 건국연군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사망하자 3월 18일에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자신을 국민당 대본영 부원수로 자칭하고 연성자치를 주장하였다. 이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탕지야오 토벌을 선언하였다. 탕지야오는 양시민, 유전환 등 국민당 산하의 군벌들과 결탁하고 천중밍과 연계하여 국민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양시민과 유전환은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듣지 않고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고 천중밍도 국민당의 1차 동정에 이은 국민당의 2차 동정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탕지야오는 이에 직접 광저우 국민정부를 공격했지만 1924년에 국민당에 가입한 광서군벌 리쭝런바이충시의 공격으로 패배했다.

1925년 천중밍과 결탁하여 중국치공당을 조직하고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대항하여 반공, 토적을 주장하며 우페이푸와의 동맹을 시도했지만 1927년 2월 6일, 휘하의 룽윈, 쓰전서우(四鎭守) 등이 정변을 일으켜 치공당을 해체하고 탕지야오를 실각시켰다. 탕지야오는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운남성 정무위원회 총재로 좌천되었다가 몇달 만인 5월에 사망했다.

3.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

탕지야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과[3] 교류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국권 회복을 적극 지지하였다. 특히 “한국인민(韓國人民)은 망국지민(亡國之民)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한국을 위하여 최소한도 2개 사단의 군관 인재를 양성하고 귀국 혁명을 원조할 것을 맹서”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약 30명의 한인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편의를 제공하였다. 1925년에도 육군강무당 제19기생과 신규 비행대에 한인이 입학 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힘쓰기도 했다.[4] 육군강무당은 탕지야오가 1909년 쿤밍(昆明)에 설립한 군사학교였다. 탕지야오는 운남강무당에 한국임시정부가 증명한 신분증을 지참한 학생들은 모두 수용해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해 주면서 50명을 졸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탕지야오는 일찍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근대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일본과 한국 모두에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육군강무당은 중국 근현대 주요 군사지도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사로 주더펑더화이가 있다. 한인 독립운동가들 역시 육군강무당에서 훈련을 받고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이범석을 비롯하여 이준식·김관오 등이 모두 육군강무당 출신이었다.

일본 관헌은 탕지야오의 한국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고, 한국인 학생들이 강무학교에 수학할 수 없도록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탕지야오는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우의를 저버리지 않고 한인 청년들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968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간체] 唐继尧[2] 이때 동기가 상계군벌 청첸이다.[3] 특히 신규식과의 사이가 매우 각별했다고 한다.[4] 이때 비행사가 된 인물이 그 유명한 권기옥.[5] 정말 뜬금없게도 3위 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