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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987ab><colcolor=#ffffff> 중화민국 제2-3대 부총통 천청 陳誠(진성) | Chen Cheng | |
출생 | 1898년 1월 4일 |
청 절강성 청정현 | |
사망 | 1965년 3월 5일 (향년 67세) |
중화민국 타이완성 타이베이시 | |
재임기간 | 제2대 부총통 |
1954년 5월 20일 ~ 1960년 5월 20일 | |
제3대 부총통 | |
1960년 5월 20일 ~ 1965년 3월 5일 | |
학력 | 바오딩군관학교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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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청은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장제스의 심복으로서, 탕언보, 후쭝난과 함께 3대심복으로 불린다. 이 셋은 모두 장제스의 고향인 저장성 출신이다. (여기에 장제스의 또다른 심복이자 통계조사국 총수인 다이리도 저장성 출신) 초공작전과 중일전쟁에서 활약했으나, 제2차 국공내전에서 전략적 실책을 범해 결과적으로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후 대만으로 도피해서 부총통 및 행정원장을 지내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장제스의 직계 부하지만, 국민혁명군 내에 자신의 분파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을 토목계(土木系)라고 하며, 이런 이름을 붙은 이유는 천청이 맡았던 제18 (十八:木)군의 제11(十一:土)사단의 인맥이 이 분파를 이루었으므로, 18군 11사단의 한자숫자를 상형해서 만든 이름이다. 이들 말고도 국민당군에는 후쭝난계와 탕언보계도 있었으나, 천청의 토목계는 군대 최대 세력이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및 북벌
대부분의 장제스의 심복들이 그렇듯이 저장성 출신으로, 칭톈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상업에 종사했으나, 천청은 학교를 더 다니고 싶어했다. 이후 가족이 베이징으로 이사를 갔고, 천청은 그곳에서 북양군벌 산하의 바오딩 군사학교 8기 포병과에 입학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위치한 베이징은 군벌들간의 세력다툼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922년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안휘군벌 쑨촨팡의 저장성 주둔군에 소위로 임관했으나, 그만두고 1924년 다시 중국국민당이 지배하는 광저우로 내려와 황포군관학교에 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학교장 집무실 보좌관 중위를 맡았는데 야밤에 학교를 순시하고 있던 장제스와 마주치고 있었다. 이때 천청은 쑨원의 <삼민주의>를 정독하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그 자리에서 천청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천청을 크게 칭찬하며 그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이후 야전으로 돌아가서 국민혁명군의 지휘관이 되었고, 광동군벌 천중밍을 상대로 하는 국민당의 1차 동정과 국민당의 2차 동정에 참여하여 광동성과 해남도를 국민정부 산하에 복속시켰으며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 및 국민당의 2차 북벌에 참가했고 여러 군공을 쌓아서 1928년에는 경위군 군장으로까지 승진했다. 승진의 속도는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인 후쭝난과 마찬가지로 최선두급이었으나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북벌이 끝난 후인 1928년 중장까지 승진했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18군 군장 겸 11사단장에 임명되어 진포로 방면에서 펑위샹군을 저지하여 장제스의 톡톡한 신임을 받는다.
이때부터 천청은 장제스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는데 그는 장제스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는 분명 한마리의 호랑이다. 그러나, 또한 개의 모습으로도 변장을 해야 한다."
이는 장제스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오욕이든 뒤집어써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실제로 천청은 장제스가 영수로의 위엄을 지키게 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아 장제스의 최측근 반열에 들게 된다.
2.2. 초공작전
한편 중국 공산당은 국민정부가 북벌, 반장전쟁, 1차 양광사변, 만주사변 등 내우외환에 시달려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한 틈을 타서 대대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930년의 창사 폭동 이후 국민정부도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 초공작전을 실시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1932년 제4차 초공작전에서 천청은 12개 사단, 16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대별산맥의 홍군 거점을 소탕하였고 1933년 마오쩌둥의 중앙 소비에트를 토벌하기 위해 중앙군을 지휘하여 강서성으로 진입했다. 천청은 중앙군 10개 사단, 15만명을 통솔하여 의황을 점령하고 광창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홍군의 저항으로 끝내 광창을 점령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홍군의 기습작전으로 3개 사단을 상실하였다. 여기에 열하사변까지 터지면서 천청은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초공작전을 중단하고 일단 퇴각했다.1934년 5월 21일, 난창 행영이 소공전최고사령부로 개편되어 광동, 복건, 강서, 호남, 호북을 관할하게 되었고 천청은 산서성 노산군관훈련단 단장에 취임하여 7500명의 장교들에게 정치교육 및 레인저 훈련을 실시하여 홍군의 유격전에 대비하기 위한 장교들을 육성했다. 1934년 10월 제5차 초공작전이 시작되자 천청은 동군 제3로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루이진을 향해 남하했다. 1935년 1월에 이르러 천청은 북로군 사령관으로 승진, 4월에 이르러 루이진의 관문인 광창을 공격하여 4월 28일에 펑더화이를 격파하고 광창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5월 하순에 이르러 루이진 공략을 위해 석성으로 이동하여 10월에 함락시켰으나 이미 홍군은 대장정에 오른 후였다.
1936년 2월, 마오쩌둥이 근거지 확보를 위해 동정항일을 실시하자 천청은 섬서초비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이를 격퇴했고 장제스의 명을 받아 제6차 초공작전을 계획했으나, 서안 사건이 벌어지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작전은 취소되었다. 천청은 서안 사건 때 장쉐량군의 기습을 받아, 장제스와 함께 체포-감금된 상태에서도 충성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장쉐량을 크게 질책하였다.
이렇게 눈에 띄는 충성심을 보인 천청은 장제스의 더욱 돈독한 신임을 얻었다. 또한 이로 인하여 쑹메이링, 장징궈를 비롯한 장제스의 가족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아 장제스 일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장제스는 옌시산에게 천청이 아니었다면 단 하루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천청을 크게 총애하며 그를 사실상의 군사적 2인자로 대우했고 이는 기존의 군사적 2인자로 간주되던 허잉친의 불만을 사 허잉친 파벌과 천청 파벌의 오랜 불화가 시작되었다.
2.3. 중일전쟁
2.3.1. 상하이 전투 ~ 우한 전투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발단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어 8월에 훙차오 공항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를 빌미로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했는데 장제스는 8월 16일 전선 시찰을 위해 절강성장 슝스후이와 천청을 파견하여 전황을 알아보게 했다. 8월 20일 슝스후이와 천청은 난징으로 복귀하여 일본군의 상륙부대가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있으나 중국군의 병력이 불충분하며 예비대가 부족하여 지속적인 공격이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하지만 슝스후이가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한 반면 천청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공격할 수 있느냐 공격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격이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의 문제다. 적이 남구를 공격하려 하고 동시에 우리 또한 반드시 방어하고자 하니 화북에서 전투는 확대되어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적이 화북에서 우세해 진다면 반드시 그 기동부대를 이용, 평한선을 따라 남하하여 곧바로 우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한을 방어하지 못한다면 중국전장은 종심이 2개로 끊어져 우리가 불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송호전장을 확대하여 적을 송호전장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민국 25년의 예정된 전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공격! 공격! 반드시 공격해야지!"라고 대답하며 천청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천청은 만약 공격을 할 것이라면 상하이로 병력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장제스는 광서의 리쭝런을 초청하여 룽윈, 류샹을 비롯하여 운남과 사천의 군벌들에게까지 병력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여 수십만의 대병력을 상하이에 증파했고 천청도 18군을 배치하여 오송에서 일본군에 맞서 후지타 스스무가 지휘하는 일본군 3사단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등 활약했다. 1937년 10월 말까지 상하이에는 85개 사단, 80만의 대군을 투입했으나 대병력을 운용해본 적이 없는 당시 중국군의 능력 부족과 장교진, 무기, 보급체계의 빈약함으로 항저우의 우회 상륙을 허용, 결국 상하이를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결국 1937년 12월 난징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었다.
천청은 우한으로 퇴각, 1938년 1월 우한방어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리쭝런, 청쳰과 합작하여 우한을 방어하고자 했으나 일본군의 맹공으로 결국 우한을 내주고 내륙으로 퇴각했다. 이후 창사의 방화하여 대참사를 일으킨 호남성 정부주석 겸 9전구 사령관 장즈중이 해임되자 호남성을 관할하는 9전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업무는 호남성 정부주석 쉐웨가 대리하였다. 1938년 4월 6일 중국 국민당 5기 4중전회에서 삼민주의청년단 조직요지가 통과되면서 7월 9일, 삼민주의청년단이 성립되었는데 장제스가 단장을, 천청이 서기장을 맡았다. 1938년 11월 28일 호남성 남악 군사회의에 참여,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미래의 관건은 적군 병력을 괴롭히고 교란하여 역량을 소모시키고 철저하게 궤멸하기 위해, 우리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국적인 범위 내에서 게릴라 전을 펼수 있느냐에 달렸다."
남악회의 결과, 장파쿠이의 4전구와 우학충의 기찰전구가 유격전구로 결정되면서 천청은 중국 공산당의 예젠잉과 함께 유격 교육을 맡아 부주임에 임명되었다.
2.3.2. 9전구 사령관
1939년 동계공세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1940년 1월부터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0년 5월 일본군이 중국군 5전구의 병참기지이자 충칭의 식량공급원인 의창을 공격했는데 장제스는 천청에게 18군을 주어 의창을 구원하게 했다. 하지만 6월 11일 끝내 의창이 함락되었으며 장제스는 호북성 서부 지역을 6전구로 편성해 천청을 사령관으로 임명, 의창을 탈환하라고 지시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이 거세 천청의 탈환 시도는 격퇴되었다.이후 중국 공산당이 화북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공산당과 협상할 것을 건의했고 장제스는 이를 수용하여 1939년 11월부터 공산당과 협상하여 군수품과 군비 지급 문제, 활동 범위 문제 등을 논의했으나 이미 화북 지역에서 수천만의 인구를 통치하는 거대 세력으로 확장한 공산당은 무리한 요구를 남발하여 협상은 진전이 없었다. 1941년 8월 2차 창사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9월 28일, 의창 반격 작전에 돌입, 15개 사단을 동원하여 독일에서 들여온 강력한 중포로 일본군 13사단을 분쇄하고 의창을 함락시킬 뻔 했으나 일본군 39사단의 증원과 독가스 공격으로 10월 10일 의창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1942년 11월 운남성에서 Y군의 지휘를 잠시 맡게 되었다.
1943년 3월, 일본군 13사단과 58사단이 사천과 호북 경계의 삼사 협곡에 위치한 석패(石牌) 요새를 공격하자 석패 요새에 배치된 11사단에게 경사 방어를 지시하여 끝내 공격을 격퇴, 충칭을 사수하였다. 천청은 일본군 점령하에 놓여 있던 어양관을 탈환, 일본군 13사단이 석패요새를 공격하는 틈을 타 13사단을 앞뒤로 포위했다. 13사단은 전멸 직전에 이르렀으나 3사단의 지원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이어 1943년 11월 일본군이 호남성을 공격하자 천청은 10집단군, 26집단군, 29집단군을 배치하고 74군에게 상덕을 수비할 것을 지시, 18군을 예비대로 두어 일본군을 포위 섬멸하고자 했다. 하지만 장강의 범람으로 10집단군의 배치가 늦어져 일본군이 상덕을 포위했다. 상덕 전투는 결국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상덕을 수비하던 57사단장 위청완은 끈질긴 저항으로 일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강요했다. 이때 천청은 호북성 북부에서 반격을 개시, 일본군을 역포위하려 했고 천청의 공격에 일본군은 작전을 중지하고 병력을 상덕에서 철수시켜 상덕은 다시 중국군에게 탈환되었다. 미군이 일본군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약탈이라서 중국군의 공세와 무관하게 철수한 것이라고 중국군의 분전을 폄하하자 천청은 즉시 반박했다. 이후 9전구 사령관직을 쉐웨에게 내주었다.
1943년 11월, 쑹쯔원과 스틸웰의 권력 다툼 중 쑹쯔원이 패배하면서 병을 이유로 Y군의 지휘권을 잃고 소환되었으나 1944년 쑹쯔원이 행정원장 대리에 취임하자 허잉친을 대신하여 신임 군정부장에 임명되었다. 개혁적인 성향으로 허잉친 파벌과 계속 충돌했으며 장제스가 신용하지 않는 쉐웨 등을 계속 장제스에게 추천했다. 천리푸, 천궈푸 형제의 CC단과도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후 군정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종전을 맞았다.
2.3.3.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
천청은 1937년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군사위원회 정치부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여러 방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38년 봄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우한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 등 좌익계통의 정당과 합작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한 뒤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때 천청은 조선의용대 창설을 적극 지원하여 그들에게 무기와 물자를 보급해줬다. 이때 천청이 그들을 교육시키고자 보낸 인물이 바로 임정 출신이었던 김홍일 상교였다.또한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무기 등 군수품을 원조했다. 김구 주석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신변 보호는 물론 한국청년들의 군사교육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1945년에는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청년을 중국군에서 광복군에 인도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1945년 6월에 천청이 작성한 문건에 의하면, 당시 제9전구사령부 정치부에 다수의 한국 청년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충칭으로 가 한국독립운동에 참가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을 한 곳에 모아 훈련시키고자 하니 해당 군부에 연락하여 속히 한국 청년들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인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김구 주석의 요청입니다. 만일 해당 군부에서 연락이 오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미군에 요청하여 비행기편으로 이들을 충칭으로 이송하여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라 합니다. 김구 주석의 이같은 요청을 전하오니 귀 정치부에서는 이런 사정을 제9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는 의견을 보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천청의 독립운동 지원을 인정하여 196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4. 제2차 국공내전
종전 이후 질 낮은 부대들을 해산하고 부대들을 통폐합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장령들의 시위와 중국 공산당의 선동으로 난황에 부딪혔다. 리쭝런이 그를 찾아가 해산된 병사들이 홍군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자 천청은 단호하게 말했다."만일 공산당에 투신하면 그들을 홍군과 함께 한 솥에 끓여버립시다."
리쭝런이 항일전쟁 전에 홍군 격멸에 실패했다고 지적하자 천청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건 우리 공군이 충분히 강하지 못한 탓이었소."
결국 천청은 300만이 넘던 군대를 1946년 중순까지 260만명으로 감축시켰으나 전쟁으로 중국의 경제와 기반이 너무 황폐화된 상황이라 중국군은 제대로 된 전투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의 조지 C. 마셜 장군이 특사로 파견되어 국공합작을 주장하자 장제스의 명령으로 난징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평한철로를 3주 이내에 점령해야 한다는 장제스의 명령을 낭독하며 공산당과의 전쟁을 주장했으나 리쭝런의 반대로 이 계획이 실행되진 않았다.
하지만 1946년 내전이 재개되었고 만주 공격을 담당하던 바이충시가 국방부의 신설로 초대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 천청은 군정부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만주전역이 급격히 불리해지면서 천청은 1947년 일급상장으로 승진, 동북행원주임(東北行轅主任)에 임명되어 두위밍을 대신하여 만주전역을 지휘하게 되었다. 여기서 천청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와 그의 부대는 만주군및 옛 만주국 영역의 인민들을 일본부역자 (한간)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당시 치안업무를 맡고 있던 만주군 및 보안군을 "한간"으로 매도하며, 자군에 편입시키지 않고 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서 점령군처럼 행세하면서 민심을 악화시켰다. 여기에 웬일인지 고위 지휘관들을 해임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인사를 하면서 지휘권에 혼선을 주었다.
이에 반해 공산군을 지휘하던 린뱌오와 뤄룽환이 거느린 동북인민해방군(제2야전)은 소련의 무기 지원 및 광범위한 대중동원, 구 만주국 군대를 비롯한 한간들의 적극적인 포섭을 활용하여 창춘, 선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 사수에 골몰하는 국민혁명군을 차례로 각개격파, 포위섬멸했다. 1948년 9월 린뱌오는 선양을 함락시켰고 창춘, 진저우 등의 도시들을 포위 전략으로 차례로 점령했다. 결국 천청은 만주 전역에서 150만의 대군을 잃고 참패했고 이에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만주가 뚫리자 화북도 위험해졌고 푸쭤이가 수비하던 베이핑이 항복하면서 중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이미 붕괴되고 있던 국민정부가 나머지 반을 잃는 것 역시 시간문제였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의 천도를 고려, 1949년 1월 천청을 대만성 정부주석에 임명하여 국부천대를 준비하게 했다. 천청은 1949년 5월, 대만성 정부주석의 명의로 대만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이는 향후 30년 간 유지되다가 당시 총통인 장징궈에 의해 해제된다.
2.5. 국부천대 이후
1949년 12월 27일 국민정부는 국부천대를 단행하여 타이완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11월에 부총통 리쭝런은 장제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국령 홍콩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1950년 3월 1일 장제스는 타이베이에서 정식으로 총통에 복직했다. 이에 따라 3월 8일 천청이 388명이 출석한 입법원 회의에서 306표의 찬성을 얻어 신임 행정원장에 선출되었다.행정원장 선출 직후, 천청은 천리푸와 CC파가 장악한 입법원과의 권력 투쟁에 들어가 천리푸를 완전히 중화민국 정계에서 제거하여 미국으로 추방하고 장제스 직계가 완전히 중앙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켰다. 이후 토지개혁에 착수, 심하면 80~90%까지 떼던 소작세를 37.5% 상한으로 삼는 감조정책을 시작으로[1] 1953년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에서 시행한 토지개혁을 참조하여 경자유기전법을 시행, 지주들로부터 강제로 토지를 매입하여 소작농들에게 판매함으로 토지개혁을 이룩하여 2.28 사건 이후 국민당에 적대적이었던 대만 민심은 어느 정도 회복하고 산업화를 위한 자본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토지개혁 외에도 늘어난 세입을 바탕으로 의무교육을 6년에서 9년으로 연장하여 교육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세법을 개혁하여 대중의 복지를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시키는 등 대만을 크게 발전시키는 여러 정책을 입안, 집행하였다. 대만은 그가 기초를 놓은 정책 아래에서 고성장을 하여, 1990년대까지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한국을 앞섰다.[2]
1954년 2월,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부총통으로 당선되어 장진체제라 불리는 자신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1958년 7월 위훙쥔이 건강상의 이유로 행정원장직을 사퇴하자 7월 4일의 입법원 회의는 천청의 행정원장 겸임을 460명 중 364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던 중 1960년 총통 선거가 다가오자 천청 총통론이 대두되었고 후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장제스의 3선을 반대하면서 천청을 총통으로 추대할 것을 요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장제스를 껄끄러워했던 미국도 장제스 하야와 천청의 승계를 요구했지만 천청은 계속 장제스를 지지하면서 1960년 5월 20일, 장제스가 3대 총통에 선출되었고 천청 역시 부총통에 재선되면서 권세의 절정을 달렸다. 역시 장제스의 심복이었던 후쭝난은 정치가로서 서툴러서 대만에서 저장성장을 하는 것으로 정계를 떠났고, 탕언보와 허잉친은 완전히 장제스의 신임을 잃어서 탕언보는 일본에서 병사하고 허잉친은 97세로 사망하는 1987년까지 정계에서 소외되어 잡기로 소일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들에 비하면 천청은 장제스의 부하 중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성공한 축에 든다.
2.6. 사망
하지만 대만의 안정과 재건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결과, 부귀영화가 무색하게 일흔도 채우지 못하고 1965년 3월 5일 부총통 재직 중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장제스가 빈소를 두번이나 찾아 왔을 정도로 부하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대륙에 있던 저우언라이도 천정의 부음을 듣고는, "사수(辭修, 천청의 자)는 애국장군이었다"고 논평.유해는 화장되어 타이베이 기념공원에 안치되어 있다가 1995년에 가오슝에 있는 포광산(佛光山)으로 이장되었다.
3. 기타
- 아내는 상계군벌 출신으로 정부주석, 행정원장을 지낸 탄옌카이의 네번째 자녀인 탄샹(譚祥)이었다. 이는 쑹메이링이 주선한 결혼으로 장제스의 신임을 받는 천청에게 국민정부의 원로이자 존경을 받던 탄옌카이 일가와 엮어주고 정치적 입지를 확보해주려 한 것이었다. 마침 탄샹 역시 쑹메이링을 양어머니처럼 모시던 사람이었고 이로 인하여 천청은 단순한 측근이 아니라 장제스 일가의 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 맏아들 천뤼안(陳履安:진리안, 1937~ )은 MIT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대학교에서 수학박사를 받고 쿠란트 수학연구소를 졸업한 수재이다. 미국 뉴욕 시립 대학 (CUNY) 교수를 하다가 대만으로 돌아와서 여러 대학의 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다. 이어 중국국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리덩후이 총통 아래에서 경제부장 (1988-90), 국방부장 (1990-93),[3] 감찰원장 (1993-95)을 역임했다.[4] 하지만 양안합작을 주장하는 천뤼안은 대만 독립을 선호하는 리덩후이와 충돌했으며, 이에 따라 중국국민당을 탈당하고 1996년 총통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4명중 10%를 못미치는 지지율로 꼴찌를 했다. (리덩후이가 당선) 낙선 후 대륙에 가서 장쩌민과 우호적인 회담을 하기도 했다. 리덩후이가 국민당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국민당에 복당했다.
* 장남 천뤼안뿐만 아니라 천청의 다른 아들들도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들이다. 때문에 중화권 등지에선 이런 짤방까지 만들어지면서 자식농사를 가장 성공한 인물로도 종종 화자되기도 한다.
- 천청의 손자들, 그러니까 천뤼안의 자식들의 이력이 이채롭다. 천뤼안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딸 천위후이(陣宇慧)는 MIT를 졸업하고 홍콩에서 네덜란드계 은행의 이사를 하면서, 정펑(鄭豊)이라는 필명으로 무협소설을 쓰고 있다. 좀 알려진 작품은 "천관쌍협(天觀雙俠)" 막내 아들 천위취안(陣宇全)은 티베트 불교에 심취하여 출가하였다. 법명은 켄포 로드로 톈계(Khenpo Lodro Tengye).
- 대만에 있던 그의 자택은 개조되어 현재 중화민국(대만) 부총통 관저로 쓰이고 있다.
4. 매체에서
영화 건국대업에서 중국 배우 이강(李强)이 분했다.
게임 호이4에서 중화민국 참모로 등장, 사단 회복율을 8% 부여한다.
5. 참고 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전쟁과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 당대 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대만 현대정치사 상,하, 장성구, 지영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중국 인민해방군사,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
6. 관련 문서
[1] 그가 타이완성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던 시기인 1949년 2월부터 이미 추진하였다.[2]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2003년이 되어서야 대만을 앞질렀다.[3] 중국어권에서 부장(部長)은 장관을 의미한다. 그의 국방부장 임명은 민간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리덩후이 당시 총통이 추진하던 개혁,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군의 정치적인 중립성과 문민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4] 대만의 감찰원은 한국의 감사원에 비해 매우 강력한 기관이며, 중화민국 5권분립 체제에 따라 행정원장, 사법원장과 동급의 위상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