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36년 2월 중국공산당이 항일을 구실로 옌시산의 영토인 산서성을 침공한 일을 말한다. 항일동정이라고도 한다.2. 배경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며 천만에 헤아리는 인구를 지배하던 공산당은 1933년부터 행해진 제5차 초공작전에 박살이 나서 험난한 대장정을 거친 끝에 겨우 섬서성에 정착할 수 있었다. 계속되는 국민정부의 포위공격에 맞서기 위해 공산당은 국민정부의 주의를 돌리고자 화북분리공작을 진행 중인 일본을 비난하며 항일을 주장하였다. 1935년 12월, 마오쩌둥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 때문에 민족주의, 자본주의 세력 내에서도 분열이 있을 것이라 주장하며 모든 혁명세력을 결집하여 기존의 공농병공화국에서 인민공화국으로 전환, 공산당에 복종하면 부농, 민족자산계급과도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4계급 연합의 인민정부론은 항일로 닥쳐온 중국의 위기를 공산당의 기회로 활용하자는 것+기존의 부농을 마구 조지는 좌경화 정책의 문제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한편 소련과 코민테른은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민테른 7차 대회 이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명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연합하여 파시즘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에게도 장제스와 연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라는 것이 코민테른의 방침이었는데 마오쩌둥은 장제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국민정부를 토호열신, 군벌, 매판자본가, 고급관료들의 대표자, 중국인민의 적, 제국주의 세력의 주구로 마구 비난하며 코민테른의 방침을 수용하지 않고 계속 반장항일을 주장하며 중국의 반장파를 규합하는 형태의 연합전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1935년 12월, 중공중앙은 와요보 회의를 개최하여 1936년에는 일본과 작전하는 세력을 준비하고 홍군을 급격히 확대해야 한다고 결의, 산서와 수원으로 주요 발전 방향을 두기로 하였다.
3. 전개
3.1. 마오쩌둥의 새로운 계획
1936년 1월, 마오쩌둥은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였다. 위원들 앞에서 마오쩌둥은 소련으로부터 기술 및 물자 원조를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제1야전군을 몽골 인민공화국 국경 쪽으로 진군시켜 소련의 극동군과 직접 연락을 취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입안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위해 3단계 작전을 내놓았다.- 섬서 북부 소비에트 구를 안정시키고 산서성을 향하여 황하 도하를 준비.
- 옌시산이 지휘하는 산서성 지방군을 섬멸하고 산서성에 새로 근거지를 건설.
- 수원성 혹은 차하얼 성을 지나 외몽골까지 북진.
마오쩌둥은 새로운 군사원정에서 정치국 전원을 대동할 계획을 꾸몄는데 이는 오토 브라운, 보구를 비롯한 신중파에게 섬북 근거지를 포기하려는 의도가 아닌가를 의심하게 하였다. 이에 오토 브라운은 저우언라이에게 관련 사실을 물어보았으나 저우언라이는 자신이 섬서 근거지의 정군 최고지도를 인수할 것이라고 말하며 오토 브라운의 우려가 사실이 아니라고 확인하였다.
3.2. 동정의 개시
2월 중순, 중국 공산당은 출정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1야전군 총사령부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은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의 의도가 몽골을 점거하여 새로운 혁명 근거지로 삼으려는 것이라 추측하고 정치국에 편지를 써 마오쩌둥의 새로운 전략은 소련의 평화정책을 위협하는 것이며 일본이 외몽골을 공격할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현재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군사원조를 얻는 것보다는 광범위한 항일연합전선을 수립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번 원정은 그것에 부합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또한 펑더화이의 견해를 인용해 이번 원정으로 자칫하면 섬서성의 근거지마저 잃을 수 있다고 보았다. 오토 브라운은 저우언라이에게 서신을 전달하여 이를 정치국원들에게 배부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것이 실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회고하고 있다. 결국 오토 브라운은 동정항일에서 제외되어 와요보에 잔류했으며 정치국은 오토 브라운이 기회주의 태도를 보이며 소련의 평화정책을 오판하고 상대방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홍군과 공산당의 힘은 과소평가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2월 20일, 홍군은 새로이 편성된 28군과 29군 및 지방유격대를 후방에 남겨둔 후 나머지 주력을 이끌고 양후청의 국민혁명군 17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의천(冝川), 수덕(綏德) 두 도시 사이의 간격을 횡단하여 황하를 도하했다. 이 지역에는 약간의 산서군 외에는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전진할 수 있었다. 2월 21일, 마오쩌둥은 동정항일을 선언하고 "도적일본에 대한 저항과 화북자치 정책에 책임이 있는 반역자의 징벌"에 목표가 있다고 선언, 1야전군을 항일전위군으로 개칭한 후 펑더화이를 사령원으로, 마오쩌둥을 정치위원에 임명하여 산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5군이 황하 도하지점을 확보하고 전군의 좌익을 타이위안에 집결한 옌시산 군의 주력부대로부터 엄호하는 사이 1군이 하곡 지대까지 진출하여 공산당 행정기관을 설치한 후 대대적으로 지원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5~6천이 되었다. 또한 부농, 상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약탈을 벌여 50만 멕시코 달러에 달하는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여기에 쌀, 소금, 기름을 비롯한 식량과 옷가지, 약간의 무기도 노획했다. 저우언라이가 병참기지를 건설하자 마오쩌민이 책임자를 맡았다.
2월 22일, 공산군은 중양과 석루현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이석, 습까지 진출하는 등 쾌속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옌시산은 일단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력부대를 타이위안에 집결, 오보(吳堡)와 분하(汾河)를 잇는 가도를 수비하는 방어적인 전략으로 나왔다. 3월 하순, 중앙정치국은 진서회의를 개최하여 군사전략방침을 논의한 후 더 이상 홍군을 따라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3.3. 정부군의 반격
한편 장제스는 옌시산에게 2사단과 25사단을 비롯한 중앙군을 지원해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옌시산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장제스는 즉각 섬서성에 대한 초공을 준비, 천청을 섬서초비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20만의 병력을 주어 옌시산을 증원하게 하였다. 또한 수원, 차하얼, 하북, 하남, 강소에 동원령을 내리고 장쉐량이 지휘하는 동북군과 양후청이 지휘하는 17로군에 지시하여 1야전군이 섬북으로 퇴각하지 못하게 섬북 근저지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3월 말까지 국민혁명군의 배치가 완료되었고 천청이 지휘하는 중앙군이 분하 연안의 철도를 따라 주둔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산서군이 장악한 도시를 거점으로 2,3개 사단으로 부대를 나누어 서진을 실시했으며 북부의 산서군도 이에 호응하여 전진에 나섰다.국민혁명군은 강서성에서 홍군을 토벌할 때 재미를 보았던 토치카 전술을 활용하여 홍군을 압박하였는데 3월 8일 효의서교 전투에서 3일간의 전투 끝에 정부군이 공산군을 격퇴했고 3월 22일의 기가원 전투에서는 28군 군장 류즈단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3월 27일에는 옌시산이 장제스 앞으로 승전보를 올렸다.
우리 군은 24일 공산군의 요충을 일제히 공략하였다. 포로의 말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각 요충을 지킬 수 없다고 보고 홍군 5백여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도중에 우리 군이 길목을 저지하여 3백여명의 사망자를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오쩌둥과 그의 처 허쯔전, 정치주임 양상쿤은 간신히 도망쳤다. |
이로 인하여 4월에 이르자 전황이 크게 악화되어 홍군의 작전구역은 크게 축소되었고 기동전 수행도 불가능해졌다. 여기에 일본까지 개입하여 중국 측에 화북반공협정을 제시하며 반공을 이유로 일본이 몽골 접경 지역에 군대를 증강하고 화북 지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겠다고 설치고 있었다.
3.4. 홍군의 퇴각
사태가 이쯤되자 마오쩌둥과 정치국 및 군사위원회도 섬북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때 공산당이 동북군과 섬서군을 상대로 한 정치공작이 주효했는데 중앙 혁명군사위원회 통일전선공작 책임자인 2국 국장 리커눙을 동북군 67군 군장 왕이철에게 파견하여 장쉐량과의 회견을 요청하는가 하면 공산군이 포위하고 있던 감천 지역의 포위를 풀어 동북군에게 적대감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67군을 동원해 감천에서 홍군 300명을 사살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리는 등 장제스를 속이고 공산군과 협상하여 섬북에 대한 공격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는 장쉐량이 얼마 전에 있었던 초공작전에서 3개 사단을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초공에 매우 혐오감을 드러내는 상황과 맞물린 결과였다. 장쉐량은 4월 4일, 낙천에서 초비회의를 열겠다는 구실로 낙천으로 이동하여 리커눙과 비밀리에 회담하였다. 그 사이에 1야전군과 공산당 지도부는 섬서성 근거지로 철수하여 4월 말 즈음에 모두 돌아왔다. 한편 1군 사령관 린뱌오는 동정항일 기간 동안 15군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류즈단 등의 전사를 야기한 책임을 지고 1야전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육군대학 교장으로 전임되었다.섬서로 돌아온 마오쩌둥은 5월 3일 정치국 회의를 소집, 동정항일의 종식을 선언하고 1야전군 내부의 불화를 진압하였다. 이 회의에서 오토 브라운은 마오쩌둥의 기동전략을 찬양하며 정치국이 자신에게 가한 비판이 옳았다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대신에 마오쩌둥도 후방에 남아있던 오토 브라운이 국민정부군 민병기병대의 습격에 맞서 취한 조치가 훌륭했다고 칭찬했다. 뤄푸, 왕가상 등도 마오쩌둥의 전략을 초반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을 자아비판하며 마오쩌둥을 칭송했으나 1군 사령관에서 쫓겨난 린뱌오는 시종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어 마오쩌둥은 <난징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전육해공군, 각 당파, 각 계층, 각 조직, 각 신문사, 노예적 식민지의 사슬을 이 이상 짊어지기를 원치 않는 국민에 대한 중국 홍군으부터의 전문>, 소위 <5.5 통전>을 보내 자신들의 퇴각은 내전을 피하여 항일세력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화자찬한 후 장제스를 장제스 씨로 호칭하며 1개월 이내에 정전화의를 행하여 항일 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군사력으로는 국민정부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마오쩌둥의 깨달음이 낳은 결과였다.
한편 마오쩌둥은 장쉐량, 양후청에 대한 정치적 침투를 강화하는 한편 항일근거지 확보를 구실로 서북의 마씨 군벌 및 후쭝난에 대한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여 영하, 감숙으로의 서정을 실시했다. 이는 장궈타오 산하의 4야전군과 2군과의 접촉 및 소련과의 직접 연락도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전진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4. 결과
중국 공산당은 동정항일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대중사업을 광범위하게 진행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동정항일은 분명한 군사적 실패였으며 코민테른에게 좌경모험주의로 비판받았다. 또한 장제스로 하여금 섬서성에 대한 포위를 강화하고 제6차 초공작전을 준비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섬서 소비에트 역시 강서 소비에트처럼 토벌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 공산당은 기존의 반장항일 노선에서 핍장항일 노선으로 전환, 국민당에게 정전협상을 제의하여 저우언라이와 판한녠을 대표로 파견하여 국민당측과 협상하게 되었다.또한 장제스는 대장정 추격을 위해 사천, 귀주, 운남 등지에서 국민정부의 통제력을 강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섬서, 산서 지역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양후청과 장쉐량은 중앙에 불만을 가지고 홍군과의 전투에 더욱 소극적이 되었으며 아예 홍군과 부전조약을 체결하고 12월 서안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5. 매체에서
호이4의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모드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초기 국가집중으로 구현되어 있다. 치트를 쓰지 않는 이상 역사대로 옌시산 지배 구역을 잠깐 찔러보고 처참하게 실패한다.6. 참고문헌
- 나가노 히로무, 서안사변(서울: 일월서각, 1982).
- 서문당 편집실,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고양: 서문당, 2014).
- 서진영, 중국혁명사(파주: 한울아카데미, 2004).
- 신상초, 中國共産主義運動史(서울: 집문당, 1980).
- 오토 브라운, 코민테른과 대장정(서울: 일월서각, 1984).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서울: 서교출판사, 2016).
7. 관련문서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