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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06:34:18

만보산 사건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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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만보산 사건 1931년 7월 1일 한중 농민 충돌
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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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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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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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수로공사에 따른 충돌과 갈등3. 7월 2일 충돌4. 만보산사건 오보사건5. 영향6. 관련 문서

1. 개요

萬寶山事件. Wanpaoshan Incident.

1931년 7월 1일 중화민국 국민정부[1]길림성(吉林省) 장춘현(長春縣) 삼성보(三姓堡)[2][3]에서 발생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의 소요 사태.

단 1명도 죽지 않고 끝났지만 그 다음날인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에서 무려 200명의 재중 한인 교포가 살해당했다는 오보를 냈고 그 여파로 7월 4일 평양과 인천 등지에서 100명이 넘는 화교가 참혹하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931년 화교배척폭동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조). 그리고 그 결과로 수천 명의 화교 난민이 테러 위험을 피해 한반도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2. 수로공사에 따른 충돌과 갈등

사건은 길림성 장춘현향 만보산 삼구 삼성보(吉林省 長春縣鄕 萬寶山 三區 三姓堡)에서 일어났다.#

중국인 학영덕(郝永德)은 일본과 몰래 결탁해서 수전 경작 알선 회사인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했다. 지주 12명과 4월 16일 수작경작에 대한 소작계약을 맺었고 조선인들과는 임대 이전 계약을 맺었다.[4] 4월 16일에 지주들과 계약한 13항을 보면 "이 계약은 현 정부의 허가가 있는 날부터 효력을 발생하는데 만일 현 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으면 무효로 한다." 고 나와 있다.[5]

실제로 길림성 당국은 "농사에 종사하는 자는 중국인에 한하고, 그 외 한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학영덕은 정부에게 허가도 받지 않고 조선인과 계약을 맺었다.[6]

장춘영사 타시로 시게나루(田代重德)가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외무대신에게 4월 7일에 보낸 기밀보고에 따르면 "계약을 맺을 때 장춘현장의 승인을 얻어 장차 중국관헌의 압박을 받지 않도록 수단을 강구할 예정"이며 "경영이 잘 될 경우 상당한 규모의 조선인 부락이 건설되어 소작농민의 복음 되는 것은 물론 이곳 장춘과의 관계도 밀접하게 되어 장춘 조선인민회 및 금융회의 사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일본의 금융 및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음)이라고 판단했다. 중국은 만보산에서 재만 한인의 거주와 개장 자체를 허가한 바 없다. 그런데 수로의 개발과 수중보를 건설하려고 했으니 용납할 수 없었다. 침수 피해와 하운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였다.

5월 25일 장춘공안국 순경은 수로 개착 공사를 지휘하던 한인 감독 1명을 체포하고 한인 2명을 구타했다. 장춘영사는 26일 장춘영사관 서기관과 영사관 경찰 4명을 현장에 파견하였다. 이런 장춘영사관 경찰의 현장 파견과 한인 보호는 중국 당국을 자극했다. 장춘시정주비처장은 5월 6일 "기존 거주자 이외에 새롭게 이주하는 한인을 절대 거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성정부로부터 받았고 27일 "방침에 따라 공사 제지에 불복하는 한인을 조사하고 경우에 따라 일본영사 및 사법기관에 인도하여 의법 처리하겠다"고 보고했다. 중국 측은 5월 30일 200명의 순경과 기병대를 출동시켜 6월 1일 한인 10명을 체포했다.

6월 3일 장춘시정주비처는 일본장춘영사에게 문서를 보냈다. 수전개발 문제, 수로 개발에 따른 피해 배상 문제, 그리고 공안국의 명령을 거부하고 공사를 강행하다가 체포된 10명을 돌려보내주겠다는 내용이다. 장춘현장과 주비처장은 6월 2일 일본장춘영사를 방문해서 이번 체포가 지역민의 청원과 성정부의 명령 때문에 한 부득이한 조치이며 체포한 한인도 주비처를 통해 영사관으로 바로 인도하겠다고 하였다.

일본 장춘영사는 장춘현장과 주비처장과 면담하면서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했다. 중국 측의 한인 구축의지를 확인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외교적 경로를 통해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생각했지만 바로 포기했다. 6월 2일 이후 일본제국 경찰 6명과 중국 경찰 180명이 대치하는 상황에 대해 외무성에게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재만한인에 대한 현지 보호방침을 포기하고 경찰을 즉시 철수하는 것, 다른 하나는 수로공사 완성 때까지 경찰을 증원하여 실력으로 중국의 '반성'을 촉구시킨다는 태도였다. 보호 방침 포기 아니면 무력시위 둘 중 하나뿐이라 보고한 것이다. 사태는 현장의 외교교섭과 라인과 무관하게 봉천총영사와 길림성 주석의 교섭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일본 봉천총영사는 현지 파견 중국 군경과 일본제국 경찰의 동시 철수와 평화적 교섭에 의한 해결에 장쭤샹이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장쭤샹은 지방적 차원에서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양국 군경의 출동방지에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6월 6일 장춘주비처 외교과장은 일본장춘영사관 서기관이 있는 곳에 방문했다. 재만한인의 현지 거주는 절대 불가하지만 이 문제의 발단은 학영덕의 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한인의 선의는 분명하고 퇴거하면 개간 비용 배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군경철수, 학영덕의 사기 행위 인정, 한인의 선의 확인, 피해 배상 등을 내놓았지만 재만한인 구축이란 방침은 변함이 없어서 장춘영사는 '일본의 세력범위에서 일본의 정당한 사업을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면 향후 만주발전의 퇴영적 경향이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양측은 합의하여 공동조사단을 구성했다. 6월 9일과 10일 조사가 진행됐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고 양쪽 다 합의를 얻지못했다.

장춘 주비처장은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한인의 수전개발을 선의인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단념하면 학영덕에게 보상토록 하며 대신 밭경작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장춘영사는 이 제안을 속임수라고 판단했다. 현지가 습지고 한인이 밭벼 경작의 경험이 없는 건 물론 경작 도구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안을 거부했다.[7]

분쟁 당시 중국 정탐원은 당시 '만주·한국 주둔 일본군'을 정탐했으며 이후 침략할 움직임을 포착하고 보고했다. 이런 움직임 때문에 장쭤샹은 만보산 사건 역시 동삼성의 치안을 혼란시키고 그 틈을 이용해 국토를 침략하려는 음모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8] 그렇기 때문인지 중국 측은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중국 측이 계속 반대했으나 일본 측은 결국 6월 26일 공사를 재개했다. 장춘영사는 지역민이나 중국 관헌의 반대가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공사가 재개되면 묵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만보산 사건에 보여준 장쭤샹의 태도, 장쉐량의 건강 상태, 반장운동의 대두 같은 시국 상황의 변화를 고려하면 일본 측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측은 공사를 재개하면서 주민의 반대를 완화시키는 노력과 중국 측과 교섭하는 것을 같이 하고자 했다. 일본 측은 공사 재개는 물론이고 경찰 5명도 추가 파견하였다. 이런 공사 재개와 추가 파견은 중국측을 자극했다.

7월 1일 일본의 예상과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이날 오전 중국 농민 400여 명이 삽 등을 휴대하고 공사현장에 집결했다. 일본제국 경찰이 만류하는데도 수로와 물막이 시설을 대규모로 파괴했다. 이러자 일본제국 경찰은 한인에게 '작업을 중지하고 저항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장춘영사는 사태가 나빠지자 영사관원을 주비처에 파견해 외교과장에게 농민 진압을 요청했다. 그러자 "농민이 본래 합법적 권리를 소유하였지만 불법 침해를 당해 정당방위를 실행하여 원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 관부는 억압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9]

물론 중국이 정말 방조했던 건 아니다. 7월 1일 오전 10시 중국 관할 공안분국장 전사곡과 7명의 순경이 현장에 출동했다. 순경들은 현장에서 농민들을 말려서 못 하게 하려고 했다. 농민들은 전사곡 일행을 폭행했다.[10]

3. 7월 2일 충돌

이후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 "내일도 올 것이냐?"
"그렇다"
"몇 명이나 오냐?"
"오늘은 700명이지만 내일은 천명이 될 것이다."
"(화를 내며) 내일 천 명이 올 거면 천 개의 관도 같이 가져와라. 우리 (일본) 제국이 오늘 늦게 군대를 파병할 것이고 비행기 대포 기관총 수류탄 등을 준비해 둘 것이다. 천 명이 온다면 다 죽어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농민이 돌아간 후 일본제국 경찰은 바로 일본 영사관으로 전서구를 날려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 무장경찰 30명이 총과 탄환을 휴대하고 경찰서주임 중천의소(中川義沼)의 통솔 하에 출동하여 수로 좌우에 배치되었다[11]. 오전 8시경 각 촌의 농민이 XXX(해석불가-블로거)에 집결하여 호미등을 들고 마가초구에 도착하였다. ……중천은 (농민대표) 손영경 등의 태도가 매우 강경하자 돌연 태도를 바꿔 경찰에게 그를 체포토록 명령했고 4~5명의 경찰이 그를 막사 악으로 끌어넣으려고 했다. 이 때 일반 농민이 일제히 달려 나가 일본제국 경찰을 포위하고 송영경을 탈취하였다. 일본제국 경찰이 바로 사격하여 농민을 위협하자 농민들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였고, 그 중 백여 명은 가까운 집으로 돌아가 총을 갖고 돌아와 마가초구 하성옥의 담을 엄폐물로 하여 응사하였다. 서로 총격적을 1시간 가까이 벌였지만 양측 모두 사상자는 없었다. 이 때 (만보산) 제3구 공안분국은 이 소식을 접하였다. 분국장 전사곡(田錫穀)은 수명의 부하를 인솔하여 서둘러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쏟아지는 탄알을 무릅쓰고 중재에 나서 농민들에게 사격중지를 명령하였다. 농민 가운데 흥분한 자가 있어 전사곡은 가래로 가격하여 그의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전사곡은 그래도 더욱 열심히 중재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약각 감동하여 사격을 중지하였다. 일본경찰에 대해서도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격을 막았기 때문에 10시경 농민부대는 해산하였다. 이것이 7월 2일 충돌의 실제 정황이었다. 』[12]

당시 일본제국 경찰과 중국 농민은 양측이 총을 쏘긴 했으나 위협사격만 해서 죽긴 커녕 맞지도 않았다. 그러다 전사곡이 직접 끼어들어 몸으로 막아서니 양쪽은 더 이상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충돌은 결국 1명도 죽지 않고 끝났다.

진짜 문제가 된 사건은 만보산 사건이 아니라 조선에 있었던 언론들의 보도였다.

4.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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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향

사실 사건 자체는 그다지 영향력이 없다. 실제로 당시 중국에서도 만보산 사건 자체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중국인들이 만보산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조선에서 1931년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난 게 알려진 후부터였다.[13] 이것만 봐도 사건의 중요성은 만보산 충돌보다 1931년 화교배척폭동이 훨씬 압도한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20세기 하반기까지만 해도 흔하였다. 그뿐 아니라 묶어서 설명할 때 전자만 주로 설명하며 후자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편협함까지 보였다.

윤휘탁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보산사건 연구물들을 보면, 만주를 매개로 형성된 동북아 각 민족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민족관계들을 포괄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한↔중 또는 중↔일 양자 차원의 상호인식이나 쌍방관계에만 주목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 연구들은 표면상 연계되어 있지만 발생지역이 다르고 별도의 발생요인들까지 내포하고 있던 만보산사건과 조선화교배척사건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 설명함으로 써 두 사건의 차별성을 간과해버리고 있다.』[14]

6. 관련 문서



[1] 실질적으로는 봉천군벌.[2] 중국어 발음으로는 지린성 창춘현 싼싱바오[3] 현재 행정구역상 지린성 창춘시 콴청구(宽城区) 싼싱바오(三姓堡)[4] 교육학 석사 논문 - 사보혜, 만보산 사건과 인천 화교배척사건 연구-재만한인과 재한화교의 관계사적 입장에서-,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2009, 18[5] 교육학 석사 논문 - 사보혜, 만보산 사건과 인천 화교배척사건 연구-재만한인과 재한화교의 관계사적 입장에서-,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2009,21[6] 교육학석사논문 - 사보혜, 만보산사건과 인천 화교배척사건 연구-재만한인과 재한화교의 관계사적 입장에서-,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2009,24~25[7]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44~50[8]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2~53[9]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4~55[10]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3~55[11] 당시 한 산모가 출산하고 있었는데 이때 무장 경찰의 모습 때문에 놀라서 아이와 함께 산모도 사망했다고 한다. 관련 내용을 인용한다. 『중국 농민이 집결하여 수로 파괴를 계속. 일본경찰은 무력시위. 무장경찰 50명으로 증가. 사복경찰 10여명. 마가초구 주변을 점령. 가성방원에 포대설치. 경부 중천의소는 비둘기를 이용 관동청에 군대천명 증원을 요청. 마가초구 둔민호 우택의 며느리 분만 도중 일본제국 경찰의 위세 때문에 태아와 함께 죽음』 손승회, 소설 만보산과 만보산사건, 大東文化硏究 54, 2006, 197[12] 만보산안조사상기, 혁명문헌, 제33집 602~603면, 손승회, 소설 만보산과 만보산사건, 大東文化硏究 54, 2006, 206에서 재인용[13] 윤휘탁, 萬寶山사건 전후 동북아의 민족관계와 민족모순- 중국인의 사건 인식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10, 2011.6, 269-270쪽[14] 윤휘탁, 萬寶山사건 전후 동북아의 민족관계와 민족모순- 중국인의 사건 인식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10, 2011.6, 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