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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9:00:43

천진사변

만주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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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탕산 사건 1931년 2월 28일 후한민 감금
제1차 양광사변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나카무라 사건 1931년 6월 27일 나카무라 중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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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초공작전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류탸오후 사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눈강 전투 1931년 11월 4일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천진사변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관동군의 푸이 옹립
영월합작 1932년 1월 1일 1차 양광사변 종식
진저우 침공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사쿠라다몬 의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폭탄 투척
마옥산 사건 1932년 1월 18일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28일~5월 5일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훙커우 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폭탄 투척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이시모토 사건 1932년 7월 17일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열하사변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일본군의 열하 침공
당고정전협정 1933년 5월 31일 열하사변 종결 }}}}}}}}}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관동군의 음모3.2. 청나라 소조정의 갈등3.3. 푸이와 일본의 결탁3.4. 1차 텐진사변3.5. 2차 텐진사변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1년 11월 8일과 26일, 관동군 봉천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가 사주한 폭동. 톈진에 거주 중이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만주국의 수괴로 옹립할 겸 금주 침공의 구실을 얻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2. 배경

핍궁사건으로 자금성에서 추방된 푸이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1929년 7월, 푸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안복파의 정객 루쭝위(陸宗輿)가 세놓은 집으로 이주하였다. 푸이가 믿고 있던 봉천군벌국민혁명으로 장제스에게 패배하고 봉천군벌의 새 수령 장쉐량동북역치를 선포하면서 복벽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푸이의 유신들과 문객들도 흩어지는 등 푸이는 이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있었다. 하지만 푸이는 반장전쟁을 보면서 장제스의 치세가 생각보다 위태롭다고 판단하였고 복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정샤오쉬가 수차례 일본을 방문, 고노에 후미마로, 우가키 가즈시게, 요나이 미쓰마사, 스즈키 간타로, 미나미 지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기요우라 게이고 등 일본의 정계와 군부의 실력자들을 두루 만나 복벽의 의사를 타진하였고 이들은 시기가 되면 지원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황고둔 사건의 주모자였던 고모토 다이사쿠가 육군 국무국장 고이소 구니아키와 결탁하여 푸이의 복벽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931년 봄, 푸이의 유신인 뤄전위가 길림성을 방문하여 길림성의 지배자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를 만나 그와 복벽을 논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7월, 도쿄의 학습원에서 유학 중이던 아이신기오로 푸제가 방학을 위해 귀국한 상황에서 녹아도에 주둔한 일본군 대대장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로부터 편지가 왔다. 요시오카는 푸제를 초청하여 자신의 집에서 극진하게 대접한 후 몰래 푸제에게 "당신이 톈진에 가서 형에게 알려도 좋습니다. 지금 장쉐량이 떠드는 것은 다 말도 안되는 것들입니다. 머잖아 만주에 아마도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입니다. 선통제께서는 모쪼록 잘 보존하라 하십시오. 그분에게 희망이 없는게 아니에요!" 라고 귀띔하였다. 이어 푸제와 정샤오쉬의 안내로 일본의 미즈노(水野生邦) 자작이 방문하여 고다이고 덴노가 끝끝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겐무 신정을 다룬 시구가 쓰인 부채를 선물하였다. 얼마 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푸이는 몸이 달아서 만주로 가서 일본에 청원을 올려 복벽을 하고 싶었으나 정샤오쉬는 서두를 것 없으며 다만 사방에 연락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만주사변을 획책한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등은 만주를 국민정부로부터 독립시켜 신국가를 세우는 것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푸이를 주목하게 된다.

3. 전개

3.1. 관동군의 음모

만주사변은 일본군 내부의 일부 과격한 장교들이 육군 중앙의 통제를 피해서 독단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만주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 대해서 결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1931년 4월, 일본군 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쇼와 6년도 정세 판단>에 따르면, 일본군은 만몽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1단계를 국민정부의 주권 하의 친일정권의 수립, 2단계를 만몽 독립국가 건설, 3단계를 일본의 만몽 점령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군대신과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일본군 육군 수뇌부는 1단계를 시행하는 것조차 반대하였다. 맨 처음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를 일본이 완전히 점령하여 일본의 영토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친일 괴뢰국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최고지배를 지나인에게 맡겨서는 끝내 불가능하다. 기껏 만들어봐야 종래와 마찬가지 폐해에 시달릴 것은 뻔한 일이다. 고로 백척간두 일보를 나아가 중앙정부는 이를 완전히 일본에 위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시와라의 과격한 주장에 대해서 육군 중앙은 물론이고 만주사변에 참여한 장교들조차 반대하였다. 9월 22일, 관동군 참모장 미야케 미쓰하루가 주재한 관동군 참모회의에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가타쿠라 다다시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만몽 문제 해결책안>이라는 것을 결정하여 선통제를 수뇌로 하는 독립국 건설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만몽 문제 해결책안>은 상당히 느슨한 합의로 이시와라는 끝끝내 만몽의 영유를 주장했으며 도이하라는 일본인이 맹주가 되는 오족공화국을 주장하는 등 의견이 엇갈렸다. 여기서 러시아반장 하시모토 긴고로와 육군 중앙이 파견한 다테카와 요시쓰쿠 작전부장이 만몽 영유론을 가차없이 반대하면서 중앙의 뜻을 분명히 하자 이시와라도 끝내 독립국가 건설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관동군은 장징후이, 위안진카이, 장하이펑,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등을 움직여 곳곳에서 자치위원회를 수립하게 하는 한편 탕위린, 마잔산 등 거취가 결정되지 않은 군벌들을 포섭하였다. 허나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은 만주사변 불확대 방침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이 국민정부와의 협상을 주장하는 등 군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했다. 하지만 이 움직임은 만주사변 초반에 불확대 방침에 동조하고 있던 육군 중앙이 9월 30일, 만몽에 독립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일본군은 10월, 금주를 폭격하였고 국제적 고립의 위기에 처했고 10월 사건이라 불리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결국 와카쓰키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참모본부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는 관동군 측에 만주에 독립정권을 세울 것을 재촉하였다.

이때 청조 복벽을 꿈꾸던 황족 출신의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는 관동군에게 푸이를 기용할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당시 독립국가 건설을 제일 먼저 주장하고 있던 것은 도이하라였는데 도이하라는 공화국을 지지하였으나 필요하다면 푸이나 쿵더청을 끌어들여 군주정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천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출생한 우노 신타로의 증언에 따르면, 도이하라 겐지가 지휘하는 봉천 특무기관은 이미 1931년 4월에 푸이를 위한 대원수 군복을 맞춘 상태였다고 한다. 여하튼 도이하라는 이타가키와 함께 푸이를 포섭하기 위한 움직임에 착수했다.

3.2. 청나라 소조정의 갈등

1931년 9월 30일, 일본군 천진주둔군 사령부 통역관 요시다 츄타로(吉田忠太郞)가 푸이를 예방하여 천진주둔군 사령관 가시이 고헤이(香椎浩平) 중장이 긴요한 일로 만나고 싶어한다고 알렸다. 푸이는 즉시 천진주둔군 사령부를 방문하였는데 푸이가 가보니 이미 사령부에는 나진옥과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파견한 사절인 우에카도 리이치(上角利一)가 와 있었다. 가시이 중장은 우에카도를 소개시켜주고 곧바로 나갔고 그는 시치아가 보낸 편지를 전달하였다. 시치아의 편지에는 20년간 기다렸던 기회가 오늘에야 마침내 왔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조상들의 발상지로 가서 큰 계획을 도모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푸이가 움직이기만 한다면 관동군은 즉시 군함을 보내 푸이를 관동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푸이는 이 제안에 대해서 정샤오쉬와 진보침과 좀 더 상의해 보는 게 낫겠다고 여겨 돌아가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이때 갑자기 가시이 중장이 나타나 톈진의 치안이 불안정하니 동북으로 떠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푸이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여기고 자신이 들은 것을 유신들에게 말하였으나 진보침은 나진옥이 또 경솔하게 일본인들의 말에 부화뇌동하여 실수한 것이며 일본인들을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호사원, 진증수 등 다른 유신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진보침은 동북의 정세변화와 국제열강의 태도, 동북의 민심을 두루 살펴본 후에 결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미 황위에 눈이 먼 푸이는 시치아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진보침의 간언을 무시하였다. 이에 진보침은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의 뜻이 다시 사람에게 돌아오고, 일의 형세가 반드시 이치대로 되며, 옛날을 회복함이 어찌 소신이 일평생 바라던 바가 아니겠사옵니까? 다만, 국세가 어지러우니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면 가기는 쉬어도 돌아오기가 어려울까 근심되올 뿐이옵니다."

하지만 노신의 충언에 푸이는 늙은이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불평하면서 정샤오쉬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정샤오쉬는 진보침보다 3살 연하로 역시나 노인이었으나 일찍이 문호개방을 주장하고 베니토 무솔리니와도 교류하는 등 과단성 있는 인물이라 자신을 지지하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정샤오쉬도 신중론을 주장하였다.
"뒤집고 뒤집힘이 반복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만주의 정세는 필시 먼저 광복이 필요한 것이며, 일본은 폐하를 맞아들이지 않고선 역시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동하시는 시기는 퉁제후가 돌아온 후에 정하심이 보다 타당하리라 여겨지옵니다."

다음날인 10월 1일, 톈진 영사관 부영사 고토(后藤)가 푸이를 찾아왔다. 영사관 측은 의외로 푸이에게 만주로 가고 싶은 그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톈진을 떠나는 것은 위헙하니 푸이를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자신들의 입장에선 톈진에 남아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요시자와 켄키치와 인연이 깊었던 진보침은 문치통치가 합당하다 여겨 일본의 내각이 만주사변 불확대 방침을 주장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군인들의 주장에 부화뇌동해선 안된다고 하였지만 푸이는 일본 정치가들보단 일본 군인들이 더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이어 푸이를 고무시키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천진주둔 영국군 사령관 니잔트 준장이 푸이를 예방하고 푸이가 다시 만주에서 황제에 오른다면 자신은 푸이의 신하가 되길 원한다고 푸이를 부추겼다. 푸이는 이를 두고 영국이 일본이 지지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여기에 푸이의 스승인 레지널드 존스턴이 자신의 회고록인 <자금성의 황혼>의 출판에 앞서 푸이에게 서문을 청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푸이에게 만주로 돌아갈 것을 청하면서 자신의 책에 <황제, 고향으로 돌아가다>라는 단락을 추가하겠다고 하였다. 도한 만주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퉁제후가 위안진카이로부터 시기가 무르익었으니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받아왔다고 전했고 역시 만주를 돌아보고 온 유양업도 이타가키 등을 만나 나진옥과 우에카도가 푸이를 기만한 것이 아니라고 전해왔다.

이쯤되자 푸이는 만주에 가고 싶어 안달이 되었다. 게다가 푸이가 일본 병영을 방문한 것을 두고 언론은 푸이가 만주행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미 차를 타고 만주로 떠났다는 허위보도까지 떠돌고 있었다. 이에 푸이는 톈진 총영사관 측에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 당장 봉천에 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관동주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 톈진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하지 않겠냐는 뜻을 타진하였다. 이에 총영사인 쿠와시마(桑島)는 관동주도 갈 필요가 없으며 만철의 책임자인 우치다 야스야(內田康哉) 역시 푸이의 만주행에 대해 반대한다고 알리고 여전히 자신들이 푸이를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일을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 다음날 부영사 고토가 다시 찾아와 쿠와시마가 가시이 중장을 찾아가 회담을 가졌는데 그 결과 가시이 역시 푸이의 만주행에 반대하기로 합의했다고 알렸다. 푸이는 당황하여 천진주둔군 통역관 요시다를 도로 불러 진위를 물었는다 요시다는 반대로 가시이가 즉시 푸이가 만주로 가길 원한다고 알리면서 푸이에게 자신의 뜻을 확고히 편지로 쓰라고 제안했다. 푸이는 시키는대로 편지를 썼는데 이번에는 쿠와시마 총영사가 그 편지가 진짜인지 등을 소란스럽게 물어왔다. 이쯤되자 푸이는 일본의 군부와 정계의 혼선에 대해서 몹시 짜증이 났고 마침 유양업으로부터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가 아직 만주가 완전히 일본군에게 장악되지 않았으나 우치다가 직접 푸이에게 만주로 갈 것을 청하기 전에는 톈진에 머무르길 원한다고 보고하자 푸이도 만주행을 잠시 포기하고 톈진에 눌러앉게 되었다.

3.3. 푸이와 일본의 결탁

한편 관동군은 10월 24일 <만몽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방책>을 작성, "중국 본토와 절연하고 표면적으로 중국인에 의해 통일되게 되지만 실권을 우리 수중에 장악하고 동북 4성 및 내몽골을 영역으로 하는 독립된 신만몽 국가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정권의 신속한 변동을 촉진한다."라고 결의했다. 이 구상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 악명높은 도이하라 겐지가 봉천 임시시장에서 사퇴, 10월 25일 톈진으로 파견되어 10월 29일 도착했다. 이 움직임에 외무성은 11월 1일, 외무상 시데하라 기주로의 명의로 푸이의 동정을 엄중히 감시하여 일본 조계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력 저지하라고 지령했다. 당시 시데하라는 푸이가 무리하게 탈출하였다가 11월 16일로 예정된 국제연맹 이사회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였다. 도이하라는 톈진총영사 쿠와시마 가즈에를 만나 푸이를 만주에 옮기는 문제에 대해 상의했는데 쿠와시마는 "적어도 장쉐량이 명실상부하게 만주와 관계를 단절하든가 혹은 조금이라도 만주에서 지방 정권의 형태가 갖추어져 황제를 요망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하는 경우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와같은 요청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라고 시데하라에게 보고했다. 11월 1일, 시데하라는 "선통제 옹립과 같은 일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계획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장래 제국의 만몽 경영에 대한 중대한 화근이 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된다."라면서 도이하라의 옹립운동을 저지할 것을 추가지시했다. 하지만 도이하라는 외무성이 뭐라고 하든가 들은 척도 할 인간이 아니었다.

톈진에 머무는 동안 푸이는 장하이펑 등 일본에 투항한 봉천군벌 인사들에게 미옥을 하사하고 마잔산과 몽골 왕공들에게 일본에 투항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쓰는 등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이때 정샤오쉬가 신중론을 번복하고 흑룡회의 도야마 미쓰루 등 일본의 정객들과 연락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푸이는 육상 미나미 지로 등 일본의 거물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이때 11월 2일 밤에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가 나타났다. 중국의 로렌스로 불리던 도이하라는 중국어는 물론 중국어의 사투리에까지 매우 능통한 중국통이었는데 푸이의 회고에 따르면, 그리 중국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도이하라는 통역관 요시다를 대동하고 푸이를 방문하였다. 도이하라는 푸이의 건강에 대해 잠시 물은 다음에 장쉐량이 만주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조차 위험해진터라 부득불 일본군이 출병하였으며 자신들이 영토에 대한 야심은 결단코 없고 다만 만주인민들이 스스로 신국가를 세우기를 원한다고 뻔뻔스럽게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푸이는 도이하라의 말을 한마디도 믿을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의 말을 경청했다. 푸이가 주목한 것은 오로지 그가 관동군의 대표냐 아니냐의 여부 뿐이었고 도이하라가 관동군에 큰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 여기자 바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푸이:"이 신국가는 어떤 형태의 국가이오?"
도이하라:"저는 이미 신국가를 독립자주국이고 선통제께서 완전히 주인이 되는 국가라고 말씁드렸었습니다."
푸이:"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오. 나는 이 국가가 공화국인지 아니면 제정인지를 알고 싶소. 제정국입니까?"
도이하라:"이 문제는 심양에 가면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푸이:"아니오. 만일 복벽이라면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지 않겠소."
도이하라:"그렇다면 선통제께서는 하루 속히 출발하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16일 이전에는 만주에 도착하셔야 합니다. 상세한 방법은 심양에 가서 다시 얘기하시지요. 출발 방법은 요시다가 처리해 드릴 겁니다."

어찌된 일인지 도이하라와 푸이가 만났다는 소식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베이핑에 머물던 진보침은 이 소식에 놀라 달려왔고 11월 5일 푸이는 어전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날 회의에 진보침, 정샤오쉬, 호사원, 원대화, 철량 등 유신들이 참여하였다. 정샤오쉬는 만주행을 적극 주장했고, 진보침은 격렬히 반대하였다. 철량, 원대화, 호사원 등은 침묵을 지켰으나 대체적으로 진보침을 지지하였고 푸이는 일부러 누구의 의견도 지지하지 않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장제스가 청조 사학관 출신의 옛 유신인 고우당을 푸이에게 파견하였다. 고우당은 장제스로부터 펑위샹이 없애버린 청실우대조건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매년, 혹은 한꺼번에 우대비를 지급할 테니 원하는 액수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주나 일본을 제외한다면 어느 곳이던지 푸이가 원하는 곳에 살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푸이는 냉소하면서 쑨뎬잉동릉 도굴 사건을 언급하며 이제서야 겨우 우대를 생각하느냐며 빈정댔다. 고우당은 국민정부의 조건이 꽤 유리한 것이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청하고 원한다면 외국은행이 이를 보증할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장제스를 소인배로 여기던 푸이는 장제스의 조건이 참말이라고 믿지도 않았고 설령 참말이라 해도 도이하라가 제시한 조건만 못하다고 여겼다. 이후 여러 유신들과 아이신기오로 황족들이 푸이를 예방하여 중국인의 존엄을 지켜줄 것을 푸이에게 간청하였으나 만주에서 복벽할 꿈에 부풀어 있던 푸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3.4. 1차 텐진사변

한편 11월 16일, 파리에서는 국제연맹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지난 10월 24일 제네바에서 열린 이사회는 11월 16일까지 일본군이 원 주둔지인 만철로 철퇴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가 있지만 상임이사국인 일본의 깽판으로 부결되었다. 하지만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13개국이 모두 철군에 찬성하는 등 일본은 완연히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일본군의 진공이 계속되어 11월 19일, 치치하얼이 함락되고 마잔산이 일본군에게 투항하였다. 11월 24일, 일본군 총참모장 가나야는 국제여론을 고려하여 치치하얼에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관동군은 이를 두고 가나야가 출세에 미쳐 육군의 신의와 국제대국이라는 구실로 포장하고 있다고 마구 비난하였다. 이 시점에 도이하라 겐지는 푸이를 탈출시키기 위해 11월 8일, 중국인들에게 돈을 주어 폭동을 사주하였다. 이날 푸이는 천진소보 기자 유염공의 방문을 맞아 그에게 자신이 만주로 떠났다는 소문은 유언비어라고 해명하는 인터뷰를 하고 그로부터 시국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었다. 한창 강의가 이어질 때 푸이의 시종 기계총이 뛰어들어와 폭탄이 배달되었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날 동북보안총사령부 고문이자 훗날 봉천시장에 임명되는 한간 조흔백의 명의로 과일상자가 선물로 들어왔는데 그 상자 안에서 2개의 폭탄이 나온 것이었다. 놀란 푸이는 일본 경찰을 불러 폭탄을 전달하였고 11월 9일, 요시다가 나타나 폭탄이 장쉐량의 병기창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주장하며 푸이에게 빨리 만주로 떠나라고 재촉했다. 결국 푸이는 마음을 굳히고 정샤오쉬 부자와 한두명의 시종만 데리고 만주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어 푸이에게 텐진을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는 협박 편지가 날아들었으며 푸이의 단골식당인 빅토리아 식당의 종업원이 기계충에게 전화하여 푸이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을 식당 근처에서 발견했으니 식당에 와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한가지 웃긴 것은 이 종업원이 그 자객들을 슬쩍 보고 이들이 장쉐량이 보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단숨에 간파(?)했다는 점이었다. 이날 톈진시 중국 군경기관에는 장벽, 이제춘 등 구 군벌의 불만분자가 일본 조계지에 잠입하여 소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톈진시장 장학명은 일본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 불온분자의 구속과 인도를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톈진 공안국은 오후 8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기병과 보병을 동원해 일본 조계지로 가는 길을 봉쇄하였다. 또한 톈진 교외의 군부대를 도시 안으로 진입시켜 경비를 맡게 했다. 밤 10시, 일본 조계지의 해광사에서 도이하라 겐지가 사주한 편의대 2천명이 집결했다. 밤 11시, 이중 100명이 경찰을 공격했고 이어 일본 조계지를 빠져나와 하북성정부, 톈진시정부와 텐진시 공안국을 공격했다. 이들은 수류탄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거리에 마구 발포했다;. 공안국은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일본 조계지에 피해가 갈 까봐 손쉽게 제압할 수도 없었다. 이 소동으로 상당수의 중국인과 중국 군경이 살상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보고받은 하북성 정부주석 왕수상은 각국 영사관에 이 사실에 대해 통보하는 한편 일본 조계지에 편의대를 단속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11월 9일 새벽 4시, 가시이 사령관은 중국측에 자신들의 부하 수명이 유탄에 맞아 부상당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오전 6시까지 중국 보안대를 일본 조계의 경계선으로부터 300야드 바깥으로 철수하라고 요구했고 불응하면 자유행동에 들어가겠다고 위협했다. 왕수상은 일본 조계지에 편의대가 출입하고 있고 300야드 안에 중국군이 출동하지 않았으며 보안대와 경찰이 치안유지 뿐이라고 일단 거절했다. 허나 새벽 5시 반, 일본군이 재차 이를 요구해왔을때 편의대의 소동이 어느 정도 진압된 상황이라 치안유지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왕수상은 이를 수락하였다. 하지만 이 조건이 수락되었음에도 일본군은 장갑차를 동원하여 시가지에 계속 포격을 퍼부었다. 일본 조계지는 중국 시가지에 30발의 폭탄을 발사했는데 이중 공안군 앞에 떨어진 폭탄에는 다이쇼 15년제라고 적혀 있는 등 일본군의 공격임이 명백했다. 또한 체포된 폭도들로부터 일본군 육군 38식 보병총과 심양 병공창에서 제작된 총기가 다수 노획되었고 이들이 1인당 40원의 수당을 일본으로부터 받았다고 자백하면서 일본 측의 개입이 명백해졌다. 일본 측은 사태를 중지하지 않고 일본 조계지 백화점인 중원공사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편의대를 조직적으로 지휘하였으며 10일, 반일 대학생이 많던 난카이대학을 폭격하였다.

한편 진증수 등 유신들이 마지막으로 일본으로부터 확실히 약조를 받은 후에 가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충고했으나 푸이는 11월 10일 저녁, 몰래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기로 했다. 푸이는 시종 중 한 사람을 운전사로 삼은 후 기계충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에 자신은 트렁크에 숨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어 중국인 차는 통행이 불가능했지만 푸이의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시다가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초병이 막을 때마다 요시다가 소리쳐서 물러나게 했다. 푸이는 부도 요리점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관으로부터 일본군복을 받아 변장한 후 일본 군용차에 탑승하여 영국 조계지로 이동했다. 영국 조계지에서 푸이는 정샤오쉬 부자가 대기하고 있던 기선에 탑승하여 만주로 떠났다. 가시이 사령관과 협의가 되어 있던 쿠와시마는 각국 영사들의 푸이의 소재에 관한 문의에 "내사한 결과 이번달 6일부터 10일까지 사이에 자신의 거주지를 탈출하였다고 판명되지만 그 행선지는 물론 소재지도 명확하지 않다."라고 응수했다. 시데하라는 11월 14일, 지급전보를 보내 다음과 같은 공식발표를 하도록 명령했다.
푸이씨는 만주사건이 발발한 이래 많은 협박에 시달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11월 6일 밤 어떤이가 과일선물 가운데 폭탄 2개(민국 16년제)를 넣어 보냈으며 <중국 공산당 천진지부 철혈단 본부> 명의로, 또는 익명으로 협박장을 보낸 자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8일 밤 현지 중국인 거리 쪽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점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데 최근 당지의 중국 신문에서 그의 탈출을 전해듣고 측근자를 취조한 결과 폭동이 일어나자 갑자기 은밀하게 탈출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행선지에 대해서는 아직 당지에서 판명되고 있지 않다.

허나 국제 여론이 이를 납득하지 못하자 11월 20일, 시데하라는 앞선 발표의 일부를 정정하여 "푸이는 지난번 톈진에서 폭동이 발발하였을 때에 위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10일 당지를 탈출한 듯하다. 그런데 13일 돌연 영구에 상륙하여 보호를 요청하였는데 그 요청을 거부할 경우 실제로 동인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 없는 사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인도상의 견지에서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안전한 곳에 수용하여 보호하게 되었다."라고 발표했다. 또한 1차 천진사변에 대해서는 <헤럴드 오브 아시아> 지를 통해서 톈진의 주민들이 친 장쉐량파와 반 장쉐량파로 나뉘었는데 그중에서 반 장쉐량파가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치안당국을 공격하고 정치시위를 벌였으며 일본 측은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중국 보초들이 일본 조계지를 향해 마구 사격하여 응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중국 측은 일본이 편의대와 건달을 고용하여 일으킨 조직적 폭동이며 일본제 총기를 압수했고 체포된 폭도들의 자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1차 천진사변은 11월 17일, 중국 보안대의 300야드 바깥으로의 철수를 규정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일본 측은 협정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다.

3.5. 2차 텐진사변

몇주 전까지 톈진 주재 기자는 '종군기자다'라고 하면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지금은 실로 종군기자이다. 지금은 숱한 인물들, 그럿도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파리에 모여서 머리를 짜내며 중일간의 충돌을 해결하려 하는데 (...) 그러는 동안에도 세계의 역사는 파리와 국제연맹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 텐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양일간 또다시 편의대가 일본의 조계지에서 출격하여 (...) 성내는 전쟁지대가 되었다. (...)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편의대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텐진덕화일보 기사 <전선에서>

한편 톈진에서는 도이하라가 추가 폭동을 조직하였다. 톈진총영사 쿠와지마는 시데하라에게 극비전문을 보내 "도이하라가 5만 원을 들여 편의대, 보안대를 매수하고 관동군 지급 무기를 나누어서 폭동계획을 지급한 증거가 있다. 제국의 위신과 국제적 입장을 손상시킨 바 크다. 도이하라에 대해서는 몇차례씩이나 폭거를 일으키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계쏙해서 장쉐량 타도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경진지방에서 또다시 어떤 사변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1월 26일, 도이하라는 해안사의 일본병영에 5천엔 상당의 은화를 주고 고용한 중국인 폭도 수십명을 풀어서 중국 보안대와 충돌하게 했다. 이 충돌 과정에서 유탄이 일본병영에 떨어지자 천진주둔군은 즉각 응사하여 산포와 12센티 대포를 동원하여 중화기를 동원한 보복공격을 퍼부었는데 쿠와시마 총영사조차 이 공격이 과도한 응사였다고 보고했다. 이 교전으로 중국인 4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오후 11시, 텐진에서 중일 양측의 충돌 소식을 보고받은 관동군은 이를 구실로 열하, 하북에 틀어박힌 장쉐량을 완전히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시와라 간지가타쿠라 타다시와 함께 가나야 참모장에게 금주를 공격하고 산해관으로 진격하여 천진주둔군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조 시게루 사령관은 이를 승낙하여 치치하얼에 2개 대대를 남겨두고 나머지 군대를 금주에 집중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다음날인 11월 27일 오전 1시, 혼조 시게루는 "군은 지나주둔군의 위급을 구원한다는 목적으로 금주 부근의 적을 격파하고 가능한한 신속히 산해관 부근으로 진출하도록 한다."라고 지시하고 봉천의 독립수비병 제2대대에게 진격명령을 내렸다. 오전 5시 30분, 2대대가 장갑열차를 타고 출발함으로 금주 공격이 시작되었다. 8시 10분, 봉천의 혼성 제4여단에게도 북녕선(북평-요녕)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길림, 장춘에 주둔한 혼성 제39여단에게는 봉천으로 전진하라는 지시가, 치치하얼의 2사단에는 보병 2대대만 치치하얼에 남기고 나머지는 봉천으로 내려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가나야는 혼조에게 단독작전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고 이시와라 간지는 마지못하여 병력을 철군시켰다.

한편 톈진에서는 오전 10시, 가시이 총사령관이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당고의 해군 육전대를 불러들이고 하북성장 왕수상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전달하였다.

가시이 중장은 12시까지 회답할 것을 요구하였고 왕수상은 이날 오후, 3,4항은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나머지 요구조건은 승낙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이 대답에 불만족하여 28일 새벽, 기관총을 동원한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사태 확산을 우려한 톈진시장 장학명이 11월 29일, 자발적으로 보안대를 철수하겠다고 일본 측에 통고함으로 3항을 사실상 수락하였다. 이후 부대를 요하 서쪽으로 이동시키지 말라는 육군중앙의 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금주의 상황은 호전되었다. 11월 28일, 참모본부의 명령에 따라 관동군 1개 대대 500명의 천진 파견이 결정되었고 혼성 39여단 보병 77연대 제3대대가 파견되었다. 29일 아침, 중국 보안대가 철수하고 30일에 방어 구축물이 제거되면서 2차 천진사변도 일단락되었다.일본 측은 2차 천진사변에 대해서 1차 천진사변의 진정 이후, 일본 측이 26일에 의용대를 해산하자 중국 측이 이를 틈타 일본 병영을 공격했으며 이에 대해 항의했음에도 27일 정오가 되어서도 공격이 어이지자 부득이하게 반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주공격을 이뤄낸다는 목적에 실패한 도이하라는 상반관에서 할복하겠다고 소동을 벌였으나 미나미 지로 육상 등으로부터 격려전보를 받고 그만두었다는 얘기가 있다. 12월 1일, 상황이 다 끝난 후에야 관동군의 증원부대가 도착하였으나 이미 상황이 마무리되어 별 일은 없었다.

4. 결과

만주사변을 금주로 확대하여 장쉐량 정권을 끝장낸다는 관동군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푸이를 만주로 빼내는 데는 성공했으며 푸이는 1932년 3월 1일 건국된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하게 된다.[1] 한편 11월 23일, 외교부장 대리에 취임한 구웨이쥔은 일본의 금주 공격이 임박했다고 세계 각국에 호소하였으며 국제연맹 대표 스자오지도 중립지대 설치를 호소했다. 국민정부 측은 국제연맹 사무총장 드루먼드와 프랑스 대사 다미엥 드 마르텔을 통해 전 병력을 관내로 철수할 용의가 있다면서 일본군의 금주 공격을 저지하고 열강의 개입 시간을 벌려고 하였다. 일본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는 그렇게 된다면 돌발상황이 없는 한 일본군이 중국군의 철수지역을 침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이를 근거로 중국공사 넬슨 존슨을 통해 금주의 중국군에게도 산해관 이내로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구웨이쥔은 중국 내의 항일 여론과 장제스의 북상 등을 이유로 이는 어렵다고 거절하였다.

허나 와카쓰키 내각은 12월 13일 내각의 불일치 문제로 총사퇴하였으며 관동군은 12월 24일, 금주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여 금주를 점령함으로 만주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축출하기에 이른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푸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가 황제가 아니라는 데 잠시 격노했다고 한다. 1934년에 만주국이 제국을 칭하면서 황제 지위를 다시 가지게 되긴 했지만 그래봤자 꼭두각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