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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01:40:07

12.9 운동

一二•九運動
December 9th Movement
파일:12.9운동기념물.jpg
베이징 식물원에 설립된 12.9운동 기념 조형물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베이핑 학생연합회의 결성과 기찰정무위원회3.2. 12월 9일 시위3.3. 12월 16일 시위3.4. 민선대의 조직과 당국의 탄압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12월 9일, 베이핑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본 제국의 화북분리공작에 저항한 학생 운동.

2. 배경

1931년 일본 제국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 삼성을 병탄했다. 이어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세계의 시선을 상하이로 돌린 다음에 선통제를 집정으로 추대하여 괴뢰국가 만주국을 수립, 1933년에는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까지 함락시켰다. 굴욕적인 당고정전협정의 체결 이후 일본 제국의 확장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었으나 일본은 화북 또한 분리시켜 제2의 만주국으로 삼으려는 화북분리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위원장 허잉친을 위협하여 6월 하매 협정을 체결하였고 차하얼 정부주석 겸 29군 사령관 쑹저위안을 위협하여 진토 협정을 체결하는 등 화북에 대한 무력간섭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위원장 장제스행정원장 왕징웨이는 일본을 군사력으로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공산당과 군벌들을 먼저 정리한 다음에 힘을 길러 일본에 맞선다는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추구하면서 <돈목방교령>을 비롯한 정책을 발표하여 국내의 항일 여론을 단속하였다. 이에 반장파와 중국공산당은 항일을 매개체로 국민정부를 맹비난하였으며 공산당은 8.1 선언을 발표,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부추겼다. 일본의 음모의 배경이 되는 화북에서는 1935년 11월 8일 베이핑 학생연합회가 성립, 청원방식으로 항일구국 운동을 조직하였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중국을 위협하자 11월 24일, 베이핑의 각 대학 교장들이 "중앙을 이탈하여 특수한 정치 기구를 조직하는 매국적 음모와 책동을 단호히 반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11월 25일 한간 인루겅이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수립하자 분노한 교수들은 26일 기찰 수정주임 겸 29군 사령관 쑹저위안을 항의방문하였다.

12월 6일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화북의 자치운동이라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성명하면서 일본의 팽창에 대해 경고했고 12월 7일 허잉친은 국민정부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동시에 일본의 회피를 강요할 수 있는 정치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중앙에 상신했다. 이에 따라 국민정부는 기찰정무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3. 전개

3.1. 베이핑 학생연합회의 결성과 기찰정무위원회

12.9 운동의 주역이었던 베이핑 학생연합회의 결성은 1935년 10월 말로 거슬러올라간다. 10월 말에 연경대학, 제일여자중학, 베이핑 법상학원의 학생자치회 재표와 회문, 성성 중학교 대표, 동북대학, 베이징대학, 칭화대학의 일부 대표들이 첫 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11월 1일 평진십교 학생자치회라는 이름으로 항일 구국 투쟁을 위한 자유를 달라는 선언을 발표하였고 칭화대학, 연경대학, 베이핑 사범대학, 성립 여자사범학원, 성립 법상학원과 톈진과 베이핑의 다섯 중학교의 연명으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학생의 불법 체포 금지를 호소했다. 평진십교 학생자치회는 11월 8일 베이핑 학생연합회로 거듭났다.

그러던 중 국민정부가 화북에 기찰정무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기동사변을 통해 수립된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기찰정무위원회의 정무위원에 친일파 치셰위안 등이 섞여있다는 사실에 기찰정무위원회는 일본의 괴뢰조직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학생들은 기찰정무위원회의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12월 3일에 비밀 회의를 열고 위장된 자치 활동, 난징 국민정부로 이탈하려는 운동 등에 반대하는 전통을 행하고 베이핑의 각 대학교와 중학교에 연락하여 허잉친을 상대로 12월 9일 대규모 청원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 청원시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은 연경대학과 칭화대학이었다. 칭화대학생 황성, 양학성, 연경대학의 왕여매, 베이징대학의 황경[1]이 대표를 맡았다.

12월 8일, 학생들은 연경대학에 모여 12월 9일에 열릴 청원시위의 계획을 작성했다. 학생들은 오전 10시에 천안문 앞에 집합하여 시위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3.2. 12월 9일 시위

하지만 시위 정보가 사전에 새어나가면서 당국은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군경을 풀어 학생들의 행선로를 봉쇄하기로 했다. 12월 9일 심야, 성안의 각 대학들이 봉쇄되고 서성의 문도 모두 폐쇄되었다. 칭화대학과 연경대학 학생들은 서직문으로 성안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서직문이 폐쇄되어 있어 고성문으로 이동했으나 고성문도 닫혀 있었다. 그 시각 성 안에 있던 동북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전학대회를 개최, 시위를 거행하여 서사패루에서 경찰대와 충돌했다. 경찰은 천안문에 이르는 각 거리에 통행금지령을 내려 천안문의 군중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이에 시위 총지휘부는 시위 장소를 허잉친이 체류하고 있던 신화문으로 변경하여 자전거를 탄 연락원들을 풀어 각 대학에 전달하였다.
파일:12.9운동.jpg
베이징 시내를 행진하는 학생들
결국 5~6천명의 학생들이 봉쇄를 뚫고 신화문에 집결하였다. 학생들은 각교의 청원대표를 정해 허잉친에게 회견을 신청했지만 허잉친은 이미 서산으로 떠나고 없었다. 이에 학생들은 허잉친의 대리인에게 6개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 소위 방공자치운동을 반대한다.
  2. 일본군과의 교섭경과를 공개하라.
  3. 인민을 함부로 체포해서는 안된다.
  4. 영토의 안전을 보장하라.
  5. 일체의 내전을 정지하라.
  6.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요구한다.
요구를 제출한 다음에 학생들은 각 학교별로 대오를 갖추어 오후 2시에 서장안가로 행진하였다. 서장안가의 서단패루에는 쑹저위안의 29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이에 경비병들이 데모대를 저지하여 학생들은 경산동가를 따라 사탄으로 향했다. 이에 중법대학, 양길여자중학 등의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여 시위대는 크게 불어났다. 이들은 왕부정대가를 통해 "화북 자치운동 반대!", "타도 일본제국주의!", "타도 한간 매국적!" 등의 구호를 외치고 의용군 진행곡을 부르며 일본 대사관으로 행진했다. 베이핑 시장 친더춘은 시위대가 일본 대사관으로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질 것을 염려, 동장안가에 소방차를 배치하였다. 결국 동장안가에서 일본 대사관이 위치한 동교민항으로 진입하려는 시위대를 군경이 저지, 물리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12월의 강추위 속에서 소방차가 물대포를 살포했고 한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날의 시위로 동북대학생 12명과 베이징대학생 6명을 비롯하여 30명이 체포되고 100여명이 부상당했다.

3.3. 12월 16일 시위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평진 지역의 언론들은 대부분 학생시위를 보도하지 않았다. 12월 10일, 베이핑 학생연합회는 <선전 강령>을 발표,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내전 중지를 요청하며 매국 정책과 행동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고 천보다 등이 주도하여 베이핑 전 시내의 학생들이 동맹휴학하여 영토와 주권을 팔아먹는 괴뢰조직에 대한 반대와 정부의 투항외교를 반대하는 뜻을 알리고 전국에 항일에 동참하기를 호소하자고 하였다. 또한 학생들은 남하 선전대를 조직하여 농촌에서 항일운동을 선전하기로 결의하였다.
파일:연설하는황경.jpg
12.16 시위 중 연설하는 베이징대학생 지도자 황경
12월 16일, 기찰정무위원회가 성립되던 날 베이핑 학생연합회의 조직과 호소에 의해 1만명의 학생들이 4개 대대로 나뉘어 천교에 모여, 2만명의 시민들과 합류,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기찰정무위원회를 승인하지 말 것이며 화북의 어떠한 괴뢰조직도 반대, 동북의 실지를 회복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시위에서 400명이 부상당하고 2~30명이 체포되었다. 대규모 반대시위 때문에 기찰정무위원회는 수립을 이틀 연기하여 12월 18일에 성립식전을 거행하였다.

베이핑 학생들의 궐기 소식에 즉각 광저우, 우한, 난징, 톈진, 상하이, 창사, 타이위안, 바오딩, 구이린, 충칭, 시안, 카이펑 등의 전국 각지의 대도시의 학생들이 호응하여 각종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12월 12일 상하이에서 <상하이 문화계 구국운동 선언>이 발표, 전국 각지에서 구국회가 조직되어 학생, 부녀자, 영화계, 문화계, 교육계의 명사들이 앞을 다투어 구국회를 조직하였고 1936년 5월 31일 전국각계구국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상하이에서는 학생들이 갑북 경찰국과 북역을 점거하여 장제스가 학생 지도자들을 접견하여 달래야 했다.

3.4. 민선대의 조직과 당국의 탄압

전국 각지에서 항일을 선전하던 남하 선전대 학생들이 1936년 2월 1일 베이핑에서 집결하여 중화민족해방선봉대, 소위 민선대를 성립시켰다. 중국공산당의 지하 조직은 이 민선대와 긴밀히 접촉하였다. 이에 화북의 공안당국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로 결정, 2월 하순부터 동북대학, 베이징대학, 칭화대학을 비롯한 주요 대학과 중학에 대한 수사를 실시하여 1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 2월 탄압에 분개한 민선대는 중국 공산당에 더욱 기울어 서산에서 항일 게릴라전을 연습하는 등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29군을 상대로 화북을 지킬 것을 호소하였다.

1936년 8월에 이르러 민선대는 완전히 중국 공산당에 장악되었고 중국 공산당 베이핑 위원회 연락책인 황경을 통해 연안의 지시를 받았다. 1936년 여름방학 이후 민선대는 세갈래로 갈라져 한무리는 장쉐량의 동북군의 학병대에 대거 입대했고 한무리는 타이위안의 산서 희생구국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한무리는 아예 섬서성의 중국 공산당 근거지에 합류했다. 잔류한 학생들은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한 이후 29군과 함께 서원, 남원에서 일본군에 저항했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수천명이 사망했다.

4. 결과

이후 12.9 운동의 지도자들은 시안에서 초공을 맞고 있던 서북초비부사령관 장쉐량의 동북군과 양후청의 17로군을 상대로 내전정지, 일치항일을 선전하였고 동북군은 크게 동요했다. 1936년에 이르러 7군자 체포 사건이 일어났고 시안에서는 12.9 운동 1주년 기념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불과 3일 후인 12월 12일 장쉐량이 시안을 찾은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이 벌어진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본명은 유계위(俞启威). 황화처럼 중국공산당에서 출세하여 제1기계공업부장, 톈진 시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이 정치국 상무위원, 정협주석을 지낸 위정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