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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39:40

제1차 초공작전

第一次 剿共作戰
First Encirclement Campaigns

1. 개요2. 계획
2.1. 국민정부의 초공준비2.2. 공산당의 대응
3. 전개
3.1. 초기 전역3.2. 포위된 장휘찬3.3. 우문령 전투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1차 국공내전6.2. 30년대의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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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0년 12월 19일부터 1931년 1월 3일까지 계속된 중국공산당홍군에 대한 국민정부의 첫번째 토벌작전. 하지만 홍군을 지나치게 얕본 국민혁명군의 패배로 끝났다. 제1차 위초작전, 제1차 소공작전, 제1차 초비작전이라고도 한다.

2. 계획

2.1. 국민정부의 초공준비

1930년 7월, 중국공산당리리싼의 지시에 따라 창사 폭동을 일으켜 창사를 점령했다. 강서의 마오쩌둥주더도 이에 호응하여 7월 31일 난창을 공격했다. 8월 5일 허젠이 창사를 탈환했고 마오쩌둥과 주더도 패퇴당해 호남성 평걍, 유양 일대로 퇴각했다. 중원대전에서 남방의 리쭝런, 장파쿠이 연합군을 토벌한 국민정부는 8월 16일 우한 행영 주임 허잉친에게 호남, 호북, 강소의 병력을 소집하여 강서, 호남의 공산군 소탕을 명령했다. 8월 31일과 9월 2일에 재차 창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퇴각하는 와중에 강서성 중부 길안을 10월 초순부터 1개월 반동안 점령했다. 홍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1930년 11월 1일에 개최된 4차 전당대회에서 국민당은 3가지 사항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1930년 11월 5일, 1차 초공작전 시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국민당은 3~6개월 안에 공산당을 모두 소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강서의 중앙소비에트에 대한 공격은 12월에 이르러야 결정되게 되었다. 1차 초공작전의 총사령관은 강서성 정부주석 겸 9로군 총지휘 루디핑이었고 18사단 장휘찬을 전선 총지휘, 5사단장 공병번을 전위로 하여 강서성 길안에서부터 복건성 건녕에 이르는 400킬로미터에 이르는 구간으로 큰 호를 그리며 전진하게 했다. 또한 6로군 사령관 주사오량과 19로군 총지휘 장광나이에게 부대를 강서성으로 진입하여 루디핑을 돕도록 하였다. 여러 소비에트를 공격하기 위해 총 7개 사단[1], 1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는 지방군으로 중앙군에 비해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장제스는 12월 5일 <실수하여 공산비당에 가입한 민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귀순을 독려하는 한편, 난징을 출발하여 각지의 상황을 시찰하다가 12월 9일 난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난창에 행영을 설치하여 루디핑을 주임으로 임명한 후 초비 군사회의를 소집, 강서 소비에트의 마오쩌둥과 주더의 공산군에 대한 공격을 결정했다. 이때 공산군은 주더의 제1군단 휘하의 황공략의 제3군, 린뱌오의 제4군 나병휘의 제12군, 펑더화이 휘하의 3군단 및 이걸의 제8 군으로 구성된 4만 2천명으로 추정되었다. 12월 16일 장제스는 소비에트 중심 지역으로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2.2. 공산당의 대응

공산당도 이에 대응하여 10월 25일, 홍군 제1방면군 총전선위원회와 강서성 행동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국민정부의 초공작전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10월 30일 총전선위원회는 강서성 신위현 낙방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난창을 선제공격하자는 전략을 기각하고 유인전술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일, 홍군 제1방면군 총사령부는 "적을 공산당 지배 구역 내로 깊숙이 유인하여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섬멸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위해 홍군 주력부대는 원수(袁水) 유역에서 간장을 도하하여 근거지 중부의 황파(黃陂), 소포(小布) 지역로 이동했다. 11월 5일 국민혁명군은 원수 유역에 홍군이 없다는 걸 알고 원수를 도하하여 강서성에 진입하여 길수, 영풍, 의황 지구로 추격을 계속했다.

이러한 국민혁명군의 움직임에 대해서 상하이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과 소련 첩보원들이 국민정부의 여러 요인들과 국민혁명군의 독일 군사고문단을 통해 정보를 얻어 홍군에게 전달하고 있었고 또한 국민당이 사전에 군사계획을 언론에 공표하였기 때문에 그 동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마오쩌둥이 홍20군을 AB단으로 몰아 숙청하다가 부전사변이 일어나는 위기를 겪었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이용하여 강서 소비에트 내부를 공포정치로 통제했다. 11월 4~6일, 홍3군은 공강 서안에서 국민혁명군을 견제하기로 했고 주더와 마오쩌둥이 홍3군단, 홍4군, 홍12군을 인솔하여 원수 유역에서 동쪽으로 돌아 공강을 건너 국민혁명군을 섬멸하기로 했다.

3. 전개

3.1. 초기 전역

장제스는 강서 소비에트 공략을 위해 6로군, 9로군, 19로군의 각군 항공대 소속의 5개 사단, 4만 4천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9일 고병번이 지휘하는 1개 사단이 동고를 점령하고 홍군을 남쪽으로 밀어붙히자 홍군은 남쪽 산악지대로 후퇴했고 이것을 1차 초공작전의 시작으로 본다. 국민혁명군은 산악지대로 숨은 홍군을 추격하여 깊숙히 진격했다. 장제스는 12월 26일 강서성 주석 겸 9로군 사령관 루디핑을 육해공 총사령 겸 난창 행영 주임에 임명하여 공격을 지휘하게 했고 12월 29일 중앙 소비에트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국민혁명군의 신편 5사단은 홍군 천여명과 교전한 뒤 보전을 점령하고 동고까지 전진했으나 홍군의 주력을 발견하지 못했다[2]. 공병번은 홍군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의 공에 대해 과대포장한 보고를 올렸다.
장 총사령! 출격하자마자 공비와 지방 잡패를 격멸하고 동고를 점령했습니다. 부대의 손실은 없습니다.

이에 장제스는 공병번에게 은 1만냥의 상금을 내렸다. 이후 1차 초공작전의 양대 주력세력 중 하나인 담도원의 50사단은 원두에 주둔하고 나머지 9로군 18사단장 장휘찬이 흥국현 용강으로 전진했다. 이때 19로군의 1개 여단은 후방인 태화에, 6로군과 9로군의 후속부대도 보급의 애로로 인하여 배치가 되지 않았다. 즉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담도원과 장휘찬의 부대는 만안, 태화, 건녕에 이르는 800리에 달하는 구간에 걸쳐 들어왔고 홍군은 18,50사단을 격파하면 국민혁명군을 동서로 분할시켜 각개격파가 가능하다고 결정, 대대적인 출전궐기대회를 열고 적군은 이미 올가미에 걸려들었고 홍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도래하였다고 선언, 12월 27일 반격 작전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담도원의 50사단을 공격하려했지만 담도원이 고지를 점령하고 이동을 하지 않자 장휘찬의 부대를 먼저 공격하기로 한다.

3.2. 포위된 장휘찬

장휘찬 부대는 원래도 늦게 출정했지만 12월 17일에 또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12월 21일 아침에야 동고에 이르렀다. 12월 21일 아침에는 안개가 많이 끼였던 탓에 공병번 부대와 장휘찬 부대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여 4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장휘찬은 이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공병번은 장휘찬이 자신을 시기하여 그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부대를 인솔하여 인부로 떠나버렸다. 공병번이 이런 태도로 나오자 장휘찬도 공병번과 연락을 끊어버렸고 두 사단의 합동 공격 계획은 무산되었다. 12월 24~28일, 국민혁명군 5개 사단이 인부, 남농 지구로 진입했고 공병번과 장휘찬은 만안, 태화, 흥국으로 진군해왔다. 홍1방면군은 먼저 담도원의 50사단을 타격하여 큰 피해를 준 후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장휘찬의 부대를 포위하였다.

29일 오전 10시, 장휘찬의 부대가 용강에 진입하였지만 공산당의 소개 작전으로 인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국민당에 적대적인 <자림서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때 18사단은 홍군이 남긴 많은 금전을 노획하여 긴장이 풀어졌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은 보도이다. 장휘찬은 공산군 척후병을 사로잡아 공산군의 위치를 추궁하였는데 이에 포로는 동쪽 및 북쪽의 산에 공산군이 숨어 있다고 자백했다. 이에 장휘찬은 30일 새벽, 공산군의 위치를 어림잡아 동쪽의 우문령으로 공세를 개시했는데 이는 명백한 실수였다. 이미 공산군이 12월 21일부터 공세작전으로 전환하고 황피, 마전에 매복하여 장휘찬의 18사단을 멀리서 포위하고 그들의 상황을 살피며 반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3.3. 우문령 전투

새벽 5시에 첫 전투가 벌어졌고 소수의 습격부대는 순식간에 대부대로 늘어 세방면에서 공격해왔다. 장휘찬은 2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공산군 40명을 포로로 잡고 1천여명을 사살했다. 공산군 포로들이 주더, 마오쩌둥, 펑더화이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고 하자 장휘찬은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무리한 공세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6천명에 불과한 18사단과 달리 홍군은 2만8천명이나 되었고, 장휘찬은 급히 동고(銅鼓)의 잔류부대 등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때는 늦어 좌우의 방어선이 무너져내리고 토벌군은 분산 포위되었다. 거기에 비까지 와 시야가 차단되면서 지형을 잘 모르는 토벌군은 퇴각도 못할 지경이 되었고 지형을 잘 아는 공산군은 더욱 유리해졌다.

결국 30일 오후4시 홍군의 총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철의 사단'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부여단장과 연대장들이 잇달아 전사하고 사단 사령부가 돌파당해 31일 오전 10시에 18사단의 생존자들은 홍군에 투항했고 장휘찬이 포로로 잡혔다.

장휘찬은 마오쩌둥과 동향인으로 마오쩌둥이 호남제1사범학교 시절 (1915년) 함께 학생운동을 한 사이었던 동지였다. 마오쩌둥은 옛동지였던 그를 살려주고 싶었고, 공산당으로 전향할 것을 권유했으나 장휘찬은 거부하였다. 하는 수 없이 우문령 전투 1개월 후 장휘찬을 인민재판에 붙였고, 흥분한 군중이 장휘찬을 참수해 죽였다. 공산당은 장휘찬의 참수된 머리에서 혀를 도려내고 뺨에 구멍을 뚫은 다음에 귀를 판자에 못박아서 붉은 천으로 싼 다음에 난창에 있는 장제스에게 보내는 선물임을 의미하는 흰 깃발을 꽂은 나무상자에 담아 강에 띄워 보냈다. 용강에서 주민들이 그 나무상자를 수습, 장사 교외 악록산에서 장휘찬의 장사를 치러주었다. 한편 국민당 측은 장휘찬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난창의 감옥에 있는 공산당원 백여명을 참수하였다. 한편 18사단의 생존자중 3천명은 홍군에 가담하였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한편 18사단의 전멸 소식을 듣고 구하러 가던 9로군 50사단장 담도원은 즉각 철수하였으나 1월 1일 동조(東詔)에서 18사단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무장한 홍군 12군,제3군단,제3군단의 습격을 받아 역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담도원은 겨우 퇴각하였으나 50사단은 와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은 크게 기뻐하며 시를 지어 이를 축하했다.
산천초목 서리 맞아 붉게 물들고
천병의 노한 기세 하늘을 찌를 듯 하네.
안개 용강 만한척봉 깊은 골 에워쌌는데
일제히 울려 퍼지는 환호성, 적장 장휘찬을 잡았다네.
이십만 적군 또다시 간장 강을 건너 침범하니
사방에 봉화 일어 하늘을 가렸네.
천만 노동자 농민 불러 모아 함께 싸우니
부주산 아래 홍기 바람에 펄럭이네

4. 결과

두 차례의 승전을 통해 공산군은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소총 4천정, 기관총 40여정을, 중국 인민해방군사에 따르면 1만 3천정의 소총을 노획하였다. 알렉산드르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에 따르면 소총 1만정, 기관총 40정, 박격포 4문, 무전 송신기 1대[3]를 노획했다고 하며 중국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1만 2천 정의 각종 무기를 노획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혁명군은 1만 3~5천 명의 전사자와 3천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결국 1931년 1월 3일 장제스는 1차 초공작전의 중지를 명령했고 1차 초공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1931년 1월 말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정비하여 전선에서 철수시켰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1차 국공내전

6.2. 30년대의 주요 사건



[1] 혹은 11개 사단[2] 이후 신편5사단은 28사단으로 개칭하였다.[3] 다른 문헌에서는 2대와 무전요원 6명을 확보했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