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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4:46

부전사변

富田事變
Futian incident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홍20군과 강서성 당지부 숙청3.2. 홍20군의 반란3.3. 대숙청
4. 결과5. 여담
5.1. 음모론5.2. 근데 AB단이 있긴 했나?
6. 참고문헌7. 관련 문서

1. 개요

1930년 12월 7일, 마오쩌둥이 강서 소비에트 내부에서 자행한 적색 테러이자 대숙청, 대학살.

강서성 부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부전사변이라고 하며 이로 인하여 홍군 제20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중국어 독음으로는 푸톈사변이다.

이 사건으로 무려 약 10만명이 살해되었다.

2. 배경

최근 강서 서남부의 당 전체가 심각한 위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 전당이 완전히 부농 노선에 의해 영도되고 있다. (...) 각급 지도 기관 대부분은 내외를 막론하고 대다수 AB단과 부농이 영도 기구를 채우고 있다. (...) 강서 서남당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위기를 만회할 수 없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1930년 10월 중앙위원회에 보낸 보고

1925~1927년 사이, 중국국민당의 일부 반공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강서성에서 반공단체인 Anti-Bolshevik단, 즉 AB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AB단은 소비에트 지구 내부에 침투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방해하고 공산당의 정보를 캐내어 국민혁명군에게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제1차 초공작전도 이들의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강서 소비에트 내부에서는 초공작전과 간첩에 대한 공포가 만연하였고 마오쩌둥은 하루빨리 AB단을 색출해야 한다고 여겼다.

여기에 부농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외지 출신의 마오쩌둥, 주더와 토착민들로 구성된 지역공산주의자들의 사이가 악화되고 있던 것이 사태에 불을 질렀다. 이들은 서로를 AB단이라고 비난하였고 1930년 10월부터 AB단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1천명 이상의 공산당원들이 증거 없이 체포되어 심문받다가 처형당했는데 이는 강서 소비에트 공산당원의 30명 중 1명으로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이는 마오쩌둥이 사방에 국민당 간첩들이 깔려 있다는 음모론적인 시각에서 접근한 것도 있었지만 말을 듣지 않은 지역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여 자신이 소비에트 내부에서 확고한 권력을 잡으려는 의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마오쩌둥 자신도 자신에게 찬성하지 않으면 AB단이라고 비난하는 풍조가 있었음을 인정하였고 AB단에 대한 공포는 반대파를 잡기 위한 요술방망이처럼 사용되었다. 공산당판 매카시즘 이 때문에 지역 공산주의자들의 불만도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3. 전개

3.1. 홍20군과 강서성 당지부 숙청

"주요 지도자들을 너무 빨리 죽이지 말고 정보를 뽑아내도록 하라. (...) 그들이 제공한 단서를 이용해서 계속해서 다른 지도자들을 색출하라."
마오쩌둥이 리사오주에게 내린 지시.

1930년 12월 3일 마오쩌둥은 측근인 리사오주(이소구 李韶九)에게 자신의 정적의 명단을 주면서 이들을 AB분자들이라고 지목하고 숙청할 것을 지시했다. 12월 7일, 제1차 초공작전이 한창이던 와중에 리사오주가 홍군 제1방면군 소속 병력을 인솔하여 간장 강 동쪽 1.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부전 마을에 나타났다. 부전마을은 1930년 6월 강서성 출신 병사들로 편성된 홍군 제20군 수뇌부가 위치하였는데 리사오주의 임무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홍20군 정치수뇌부를 체포하여 AB단과 연계된 혐의가 있는 자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1방면군 병사들이 홍20군 사령부를 포위하여 정치수뇌부를 모조리 체포하여 투옥했다. 또한 다음날인 12월 8일, 부전에서 열릴 계획이었던 강서성 당 긴급회의에 참여한 대표자들 전원도 체포되었다. 홍20군 수뇌부와 대표자들을 포함해 120명이 체포되었다. 리사오주는 이들에게 AB단원이라는 것을 자백하라고 강요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은 스파이가 아니라고 혐의를 부인했다. 이에 리사오주는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마오쩌둥 스스로가 "1930년에 심문 과정에서 구타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피의자들이 어떻게 매를 맞았는지 직접 본 적이 있다."라고 고문이 있었음을 인정했으며 생존자 중 한 사람은 고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리사오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중농도 언제든지 반항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자백 뿐이다. (...) 당은 물론 의심할 바 없이 너희에게 과오를 시정할 기회를 줄 것이다.' (...) 그 다음에 그들은 등불 심지로 지지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 어떤 심문도 이럴 수는 없었다. 이는 단지 고문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에 답해야만 했다. 'AB단에 언제 가입했는가? 어떤 조직에 있는가? 전략은 무엇인가? 지도자는 누구인가? 오직 진실만 말해야 한다.' 만약 심문과 고문 과정에서 어떤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이 더욱더 심해졌다. (...) 동지들의 손톱이 고문으로 뭉개졌으며, 불로 지져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 사람들은 고문으로 인해 수감자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비명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몇몇 지도자들의 부인도 체포되었다. 그중에는 강서 서남부 당위원회 총서기인 바이팡의 부인도 있었다. 그들 역시 고문을 당하고 발가벗겨졌다. 날카로운 대나무를 손톱 안으로 집어넣거나 향불로 음부를 포함해 온몸을 지지는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예리한 칼날로 유방을 자르거나 두 손을 묶어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인 고문의 공포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마치 암송하듯이 무엇이든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심문을 받았든 아니든 간에 체포된 모든 이는 팔다리가 묶인 채로 분리 감금되었다. 그리고 총검을 부착한 소총을 든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했다. 그들은 총검을 가지고 작업할 때도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체포된 이들에게는 병사들이 먹다 남은 음식이 제공되었다. (...) 쉰명이 처형되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리사오주는 이어 부전 옆에 위치한 둥구에서 숙청을 진행했다. 그런데 체포된 사람들 중에 홍 20군 정치부 간부 류디(유적 劉敵)라는 자가 있었다. 류디는 리사오주에게 자신이 강서성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호남성 장사 사투리를 쓰며 "나는 전부터 리사오주 동지의 부하였습니다. 당신의 정치적 지시에 복종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마오쩌둥에게도 충성한다고 밝혔다. 이에 리사오주는 류디에 대한 심문을 중지하고 다음날 석방하면서 그의 연대 안의 AB단 분자들을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리사오주의 입장에서 큰 실수였다.

3.2. 홍20군의 반란

1930년 12월 12일 류디는 휘하의 부대 400명을 이끌고 부전을 공격해 리사오주와 수행원들을 체포해 구금하고 홍20군 간부들과 강서성 당원들이 감금된 감옥을 장악하고 1방면군 병사 100여명을 사살했다. 류디의 거사에 홍20군 소속 장병 3천명이 모두 지지를 표명하며 반란에 가담했고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살해하고 기만하고 억압하는 마오쩌둥을 타도하자!", "주더, 펑더화이, 황공뤠 만세!" 등의 구호를 외쳤다. 류디는 홍1방면군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리사오주와 부하들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고 마오쩌둥을 비난하는 통지서를 발송했다.
마오쩌둥은 지극히 일탈적이고 교활하며 이기적이고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자기 동지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죄목을 씌워 그들에게 겁을 주며,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는 당의 제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 그가 어떤 의견을 내놓으면 모두 그 의견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 기구를 이용해서 그 사람에게 족쇄를 채우거나 어떤 이론을 날조해서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 마오쩌둥은 항상 정치적 비난으로 동지들에게 타격을 가한다. 그가 당 간부들에게 쓰는 상투적 수법은 그들을 자기의 개인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혁명 지도자가 아닐뿐더러 볼셰비키도 아니다.

풀려난 강서성 공산당원들은 중앙위원회에 마오쩌둥이 당내 동지들을 파멸시키려는 교묘한 책동을 획책했다고 비난하고 마오쩌둥이 우경기회주의자이자 계급 투쟁 전개의 범죄라고 지목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우경 기회주의적 목적과 도피자의 관념, 온갖 더럽고 치욕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 마오쩌둥은 줄곧 중앙위원회를 반대해 왔다. (...)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당 지도부와 강서 공산주의청년단 간부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여 중앙위원회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의 무기로 삼고 마오쩌둥 집단만을 위한 배타적인 당을 건설하고자 했다.
강서성 공산당원들이 중앙위원회에 보낸 보고

류디 역시 1931년 1월 11일 상하이로 편지를 보냈다.
나(류디)는 결코 마오쩌둥을 신임하지 않았다. 한차례 전투가 끝난 후, 나는 각기 다른 부대 소속의 많은 장교들과 만났다. (...) 그들은 모두 매우 불안해했으며 풀이 죽어 있었다. 그들은 공산당에서 일하는 데 아첨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공산당에서 아첨이 무슨 말이냐고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의 볼셰비키 정신이 나날이 쇠퇴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오쩌둥은 일단 부전을 포기하고 간장 강 서쪽 영양(永陽) 일대로 철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홍20군의 반란을 반혁명 정변으로 규정하며 12월 20일에 홍군 안에 4400명의 AB단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1930년 10월에 강서 소비에트에 파견된 중앙국 서기 대리 샹잉은 마오쩌둥과 류디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면서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했지만 홍 1방면군이나 마오쩌둥은 샹잉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홍20군의 반란이 반혁명 정변이라는 마오쩌둥의 주장에 주더, 펑더화이, 황공뤠 모두 동의했고 마오쩌둥은 1931년 1월, 류사오치가 이끄는 특별 대표단을 보내 상하이에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들 반란자의 음모는 첫번째로 마오쩌둥을 전복시키기 위해 주더와 펑더화이, 황공뤠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사람을 전복시키는 데 자신들의 병력을 집중시킨 다음 차례대로 다른 이들까지 전복시키려는 것이다. 결정적인 계급 투쟁의 관건이 되는 이 같은 시기에 장제스는 외부에서 '마오쩌둥 타도'를 외쳐대고, AB단과 청산주의자들이 혁명 대열 안에서 '마오쩌둥 타도'를 외쳐댔다. 그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외쳐 대는 모양이 복제하듯 어찌 이리 같을 수가 있는가?

마오쩌둥은 또한 주더, 펑더화이, 황공뤠가 작성한 마오쩌둥 변호 성명서, 홍20군 병사들에 보내는 호소문 및 멕시코 달러 5~6만 달러를 중앙위원회에 전달했다. 1931년 2월 중국 공산당 정치국과 코민테른 대표 파벨 미프는 마오쩌둥의 손을 들어주었고 AB단은 장제스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므로 홍군을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적을 이길 수 없다고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또한 정치국은 저우언라이, 정치국원 왕자샹, 런비스에게 부전사변 조사를 지시했다.

3.3. 대숙청

부전사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던 저우언라이는 부전사변을 AB단과 그 연합세력에 의한 반혁명활동으로 규정했고 3월 28일 정치국이 마오쩌둥이 당의 적들을 상대로 지속적인 투쟁을 벌이는 올바른 노선을 걷고 있었다고 확인하는 결의를 채택한 후 런비스, 왕자샹, 구줘린을 강서로 파견해 AB단 제거를 돕게 했다. 1931년 4월, 런비스와 왕자샹이 도착했다. 이들은 마오쩌둥의 견해를 지지했고 1931년 4월 16일 중국 공산당 소비에트 지구 중앙국 제1차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5월에 마오쩌둥이 샹잉으로부터 중앙국 서기 대리 자리를 넘겨받았다. 마오쩌둥은 6월에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 자리까지 차지했다. 이에 힘입은 마오쩌둥은 강서성 당지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가했다. 1931년 4월 주더가 군사법정을 열어 류디에게 참수형을 언도했고 시가 행진으로 조리돌림한 후 처형했다. 홍20군에서 소대장 이상 간부들은 모조리 처형되었다. 1932년 봄까지 강서 서남 지역 간부의 90%가 체포, 구금, 처형되거나 정직 처분을 받았다.

저우언라이는 이에 우려를 표하며 8월 30일, '무절제와 공포, 지나친 단순화'를 지적하면서 마오쩌둥이 좌경 기회주의의 과오를 범했고 이는 마오쩌둥에게 '명확한 계급 노선'이 없다는 증거라고 비판했다. 9월 1일자의 서한에서도 당중앙은 도처에 AB단의 망령이 있다고 보는 경향에 대해 비판했다.
과거 AB단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 막연하였고 이를 확대해석했다. AB단이 지주와 부농의 조직이라 하여, 모든 지주와 부농의 잔당을 AB단이라고 간주하였다. AB단이 당의 잘못된 노선을 이용하려 하였고 또 이용했다 하여, 잘못된 노선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AB단의 문제와 관련지워서 그들이 모두 AB단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AB단원이 혁명공작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부로 오류를 범하려 한다 하여, 오류를 범한 당원과 인미을 모두 AB단의 문제와 관련시켜 그들을 믿을 수 없고 그들이 모두 AB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단순히 마오쩌둥의 학살을 중앙국에서 비판적으로 보았다기 보다는 그동안 마오쩌둥을 우경 군사기회주의자로 보고 좋아하지 않던 중앙국의 반 마오 노선이 강화된 결과에 가깝긴 했다. 부전사변이 마오쩌둥의 대학살에 가까웠다는 것은 1931년 12월, 상하이 당중앙이 강서 소비에트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명백해졌다. 저우언라이는 숙청에 가담한 사람들을 상대로 조사를 행해 숙청 범위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주 위험한 사고 방식이 만연했다. (...) 반혁명분자 색출을 마치 일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다."

1932년 1월 7일 중앙국 제1차 회의에서 저우언라이가 내린 결론이 결의안으로 확인되었고 마오쩌둥에게 자아비판 정신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강서 소비에트에서의 살육도 일단락되었다. 잔혹한 숙청으로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리사오주는 1932년 1월 확대화의 과오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6개월 정직 처분을 받는 것으로 그쳤고 불과 5개월 후에 1방면군 총사령부 서기장으로 승진했으며 10월에 복건 서부 소비에트 군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중앙이 AB단에 대한 지나친 공포를 비판하여 AB단 색출의 광풍은 잦아들었으나 근절된 것은 아니라서 1934년까지도 AB단을 색출한다는 명목의 체포와 숙청이 이어졌다.

4. 결과

부전사변 내내 살해된 사람의 숫자는 총 10만명 정도로 예상된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역사에서조차 "이 투쟁에서는 혁명을 반대하는 일부 지주, 부농 분자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많은 동지들을 'AB단원'으로 오인하고 살해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 AB단 및 사회민주당 숙청 투쟁은 고문으로 강요한 자백만을 믿고 동지들에게 경솔히 피해를 입힌 억측의 산물이었다. 진정한 적을 혼동하여 위조, 오판이 넘치는 억울한 사건들을 다수 만들었는데 이는 심각한 교훈을 남겼다."라면서 혹독하게 비판할 정도면 말 다했다.

부전사변 자체는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 내부의 권위를 강화시켜주었지만 국민정부의 탄압으로 상하이 임시 당중앙이 강서 소비에트로 옮겨오면서 마오쩌둥을 공격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11월 25일 대회 이후 마오쩌둥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에서 쫓겨났고 1방면군 총사령부가 폐지되면서 마오쩌둥의 총정치위원과 총전적위원회 서기직도 폐지되었다. 마오쩌둥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한동안 마오쩌둥은 자신의 진가를 입증하기 위한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명을 집행하여 많은 피를 흘렸던 리사오주는 1935년 복건성에서 국민혁명군에게 사살되었다.

5. 여담

5.1. 음모론

장융은 부전사변이 마오쩌둥의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계획적인 학살임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일화들을 소개한다.
반란 후 상하이에 보낸 편지에서 류디는 그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고문자들이 희생자들을 그들의 발치에 방치한 채 자기네들은 '술과 고기와 햄'으로 잔치를 벌이고 입으로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을 보았고, 또 리사오주가 자기는 '기쁜 마음으로 신나게' 고문을 한다고 큰 소리를 치자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그에게 아첨하는 것을 들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리사오주가 이 모든 일이 'AB와는 관련이 없는 정치적 문제'라고 털어놓았다. 류디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모든 일이 AB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했다. 마오쩌둥이 더러운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자신의 충견 리사오주를 보내 이곳 장시 성의 동지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마오, 132~133페이지
마오쩌둥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난 직후에 장시 성의 공산당원들은 주더와 펑더화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렇게 호소했다. "동지들, 우리 당이 언제까지 이렇게 암흑 속에서 헤매야 합니까?" 이 두 사람은 마오쩌둥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날 밤 술을 잔뜩 마시고 난 후, 주더가 한 오래된 친구에게 말했다. "많은 옛 동지들이 숙청에서 살해되었소. 이 살해의 뒤에 누가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 거요." 그 친구는 주더가 마오쩌둥을 지칭함을 알고 있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썼다. 다음에 그는 주더가 이렇게 말했다며 그의 말을 인용했다. "푸톈 사건 역시 전에 마오쩌둥이 AB를 학살한 일 때문에 일어난 것이오. 아주 많은 동지들이 살해되었소." 주더는 '무척 슬퍼보였다' 그러나 그와 펑더화이는 계속 마오쩌둥의 편을 들었다. 상하이와 모스크바가 마오쩌둥의 뒤에 있었다. 따라서 장시 성의 공산당원들 편을 든다는 것은 당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마오쩌둥은 주더와 펑더화이를 얽어넣기 위한 정치 작업을 이미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는 주더의 참모들을 숙청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주더의 부관 5명 중 2명을 이미 처형했던 것이다. 또 마오쩌둥이 어떤 피고문자로 하여금 주더와 펑더화이의 혐의를 자백받도록 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에 파견된 GRU 책임자는 "펑더화이가 AB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전문을 받기도 했다.
마오, 136~137페이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장융의 글이니 일단 걸러서 듣고 다른 기록이나 연구와 교차검증해서 각자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

5.2. 근데 AB단이 있긴 했나?

한가지 문제는, 국민당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AB단은 성립된지 6개월도 못되어 1927년에 해산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강서 소비에트 내부에서 AB단의 활동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AB단이 안티 볼셰비키의 약자라는 공산당의 주장도 거짓말이며 실제로는 각 성과 지역의 등급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를 수용한다면 마오쩌둥은 있지도 않은 것을 없애겠답시고 대숙청을 자행한 셈이 된다.

물론 주더는 최소 1930년까지 AB단이 활동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고 <중국 소비에트 운동사>를 서술한 뢰트바이트 박사의 경우 일부 반공 국민당원들이 AB단을 조직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1930년대 초까지 AB단이 활동했다고 볼수는 있지만 그 활동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보고 있다.

6. 참고문헌

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