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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7:34

탕위린

파일:탕위린.jpg
중화민국 열하성 정부주석
정체 湯玉麟
간체 汤玉麟
한국식 독음 탕옥린
영문 Tang Yulin
각신(閣臣)
출생 1871년 청나라 열하성 조양현
사망 1937년 5월 중화민국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봉천 강무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정부 시절2.3. 만주사변열하사변2.4. 말년
3. 참고문헌

1. 개요

봉천군벌의 원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물로 열하사변의 참패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이후 만주국 건국에도 발을 담갔으나 의외로 만주국 합류는 거부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1년, 현재의 랴오닝성에 성하는 청나라 열하성 조양에서 태어났다. 뭔래 마적질을 하다가 1902년, 청군에 귀순하여 봉천 순반영 방판을 지냈으며 조이손이 동삼성 총독에 부임하자 장쭤린의 배려로 봉천 강무당을 졸업했다. 중화민국 건국 후 장쭤린위안스카이에게 잘 아첨한 대가로 봉군 27사단 산하 27 기병연대장을 거쳐, 52여단장을 지냈다. 1917년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했다가 돤치루이가 복벽을 진압한 후 은거했고 1919년 장쭤린에게 의탁하여 11여단장을 거쳐 동변진수사 겸 7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안직전쟁에서 베이징에 입성하여 안휘군벌들이 두고 간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노획하는 공을 세웠고 이 때문에 직예군벌의 수장 차오쿤우페이푸를 분노케했다.

1924년 5월 19일,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만주를 방문했을 때 지방 수비대가 그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격노한 일본 측이 만주 내부의 한국 독립군을 단속하라고 지시하자 1924년 6월 말, 통화 지방을 순시하고 압록강변에서 한국 독립군들이 상당수 세력을 구축하였다고 보고한 후 부대를 이끌고 독립군을 토벌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11사단을 지휘하여 참전했다. 이후 1925년 6월 11일에는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사를 파는 사람들에게 안좋은 이미지로 찍히게 되었다. 1925년에 궈쑹링반봉사건을 일으켰을때 그에게 합류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했지만 궈쑹링은 고압적인 태도로 참의 자리만 주겠다고 하였고 이 때문에 탕위린이 참여를 망설이자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탕위린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탕위린은 장쭤린에게 다시 충성을 맹세하여 궈쑹링을 진압했다. 반봉사건 진압 후 1925년 12월 29일에 열린 3성 군정회의에 참여하여 하야하겠다고 쑈를 하는 장쭤린을 뜯어말렸다.

1925년 동북국방군이 조직되자 동북국방군 1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26년부터 열하도통에 임명되어 1933년까지 7년간 열하성을 지배하였다. 1927년, 안국군 정부가 조직되자 안국군 5방면군 산하 12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2.2. 국민정부 시절

1928년 동북역치 과정에서 7월 19일, 동북4성 중 제일 먼저 열하성의 역치를 선언하여 국민정부에 귀순하였고 이 때문에 훗날에는 장쉐량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역치를 선언한 것은 어디까지나 장쉐량의 지시였다. 이후 열하성 정부주석 겸 국민혁명군 36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장쉐량은 봉천군벌 구파에 대한 배려의 일환으로 장제스에게 열하성에서의 탕위린의 지위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지만 동시에 낡은 구파 세력의 일원이자 관내 진출을 위한 주요 길목인 열하성을 지배하는 탕위린을 눈엣가시로 여겨서 엄중히 감시하였다. 1929년 편견회의의 결과에 따라 동북육군 11사단장에 임명되어 열하성의 성도 승덕에 주둔했다. 열하를 지배하면서 아편 재배는 물론 아편 흡입을 주민들에게 강요하였으며 열하성민의 삼분의 일이 아편 재배에 참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는 옌시산을 설득하여 차하얼성에 대한 지배권을 장쉐량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봉천군벌의 참전을 요청하였다. 장쉐량은 이를 솔깃하게 여겨 탕위린을 차하얼로 보내버리고 자신이 열하성을 차지하여 관내로 가는 길목도 확보하고 구파의 세력도 축소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탕위린이 자신이 차하얼과 열하성을 모두 지배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리자 위안진카이를 비롯한 봉천군벌의 원로들이 모두 장제스의 제안을 반대하게 되면서 결국 봉천군벌의 참전은 물건너갔다. 1929년 7월 15일에 열린 중국국민당 24차 상무회의에서 열하성 당무지도위원에 임명되었다. 1929년 10월 19일, 2차 장풍전쟁이 끝난 직후 장쉐량의 소집 요청에 응해 위안진카이, 허펑린 등 봉천군벌의 요인들과 함께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탕위린은 옌시산펑위샹을 모두 견제하며 보경안민해야 한다는 구파의 입장을 반복하였다.

1930년, 중원대전의 서막이 오르자 장쉐량과 논의하여 옌시산과 제휴, 평진 지역에서 할거하는 장쭝창, 저옥박의 잡색군에 대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30년 7월, 장쉐량이 중화민국 육해공 부사령관에 임명되자 이를 내전에 봉천군벌을 끌어들이려는 장제스의 술수로 보아 장쉐량의 부사령관 취임에 반대했다. 1930년 8월, 장쉐량이 강력하게 관내진출을 주장하였으나 여전히 반대했다. 결국 장쉐량은 탕위린을 비롯한 구파 세력에게 각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위임하겠다고 약속한 후에 9월,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장제스를 옹호하며 중원대전에 참가했다.

2.3. 만주사변열하사변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길림성과 요녕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흑룡강성도 사실상 무너지자 열하성이 장쉐량이 장악한 사실상 유일한 영토로 남게 되었는데 관동군은 1931년 9월 22일 작성한 <만몽문제 해결책안>을 통해 장징후이,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장하이펑 등을 만주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수적으로 포섭할 인물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관동군은 탕위린에 대한 각종 포섭공작을 실시하였고 이에 탕위린은 1932년 3월 16일, 봉천에서 조직된 동북 행정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만주국 건국에도 어느 정도 개입하였다. 이후 선통제 옹립에 대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로부터 누구보다도 먼저 제거해야 할 간첩으로 지목받았으나 장쉐량은 탕위린을 해임하라는 장제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1932년 12월, 열하성과 하북성에 남은 동북군에 대한 재편 작업이 이루어지자 열하성 병력 2만명으로 편성된 동북군 55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탕위린은 일본의 침략이 목전에 닥쳐 왔음에도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열하성 정부주석 공서에 아편공작을 설치하고 만주의 유물을 약탈하여 톈진의 이탈리아 조계지에서 판매하는 짓이나 하고 있었다. 결국 1933년 열하사변이 일어나자 재산을 챙겨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는데 열하에서 그의 학정이 심하여 주민들은 일본군을 반길 정도였다. 참다못한 장쉐량은 탕위린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지만 200명의 호위병과 함께 말을 타고 난평으로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2.4. 말년

이후 펑위샹이 조직했던 항일세력에 잠시 참여했다가 그곳의 펑위샹계 장령들을 숙청한 후 쑹저위안에게 귀순했다. 1934년 5월, 쑹저위안은 탕위린을 29군 고문 겸 북평시 고문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탕위린은 6개월만에 직책에서 은퇴하여 톈진에 은거했고 1937년 톈진의 이탈리아 조계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