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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6:07:38

훙차오 공항 사건

파일:오오야마사건.png
오오야마가 사망한 현장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미야자키 사건3.2. 오오야마 사건3.3. 송호정전협정의 파기
4. 결과5. 장융의 음모론6. 참고 문헌7. 관련 문서

1. 개요

1937년 8월 9일 일본 제국 해군 특별육전대 중위 오오야마 이사오가 훙차오 공항에 난입하려고 행패를 부리다가 사살된 사건이다. 제2차 상하이 사변의 도화선이 되었다. 오오야마 사건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의 발생으로 중일 양국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7월 11일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29군 군장 쑹저위안이 일본 측과 현지교섭을 체결함에 따라 정전협정이 성립되었으나 일본중국의 반일감정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구실로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였다. 장제스는 이것이 일본이 평화를 찾는 척 하면서 전쟁을 도모하려는 구실로 파악하고 대규모 군대를 하북성으로 북상시켜 전쟁에 대비했다. 결국 7월 25일부터 일본군이 베이핑을 공격함에 따라 베이핑-톈진 전투가 발생, 화북전역이 개막하였다. 이것으로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었으나 아직까지는 하북성을 중심으로 한 국지적인 충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일간의 군사적 긴장은 역시 중일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하이로 번지기 시작했다. 상하이는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의 전장으로 송호정전협정 체결 이후 2500~3000명의 일본군 육전대가 조계지 사수를 이유로 주둔하고 있었다. 루거우차오 사건 발생 이후 대만에 주둔하던 3함대는 중국군 견제를 위해 황해로 출격했는데 마침 육군이 화북에서 활약하는 것을 본 일본군 제3함대 사령장관 하세가와 기요시 등은 해군이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의 굴복을 위해 상하이, 난징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등 상하이에서의 긴장은 높아져만 갔다.

3. 전개

3.1. 미야자키 사건

그러던 중 1937년 7월 24일, 일본군 해군육전대 소속 미야자키가 중국 관할구역인 북사천로와 적사위로 교차점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해군육전대는 중국인들이 미야자키를 납치하여 연행해갔다고 주장하며 상하이 시정부와 공동조계 공부국에 조사를 요청하며 갑북 일대에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중국군 보안대도 이에 대응하여 중국군 보안대와 일본 해군육전대는 무려 3일을 대치하였다.

하지만 미야자키 사건은 황당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중국인들에게 잡혀갔다던 미야자키가 7월 27일 상하이로부터 300킬로미터 떨어진 진강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알고보니 미야자키의 실종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군규를 위반하고 놀러나갔다가 후에 처벌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몰래 일본 배에 숨어들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도중에 투신자살을 꾀하였으나 죽지 못하였다."
미야자키의 진술

그렇게 장강에 빠졌던 미야자키가 중국인 선원들에게 구출되면서 화중의 루거우차오 사건이 될 뻔 했던 미야자키 사건은 황당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7월 25일 베이핑-톈진 전투가 개시됨에 따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7월 29일, 한커우의 일본인 거류민들에 대한 철수명령을 내렸으며 이어 중국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들에게 8월 19일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전면전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937년 8월 시점에서 상하이에 3만, 중국 전체에 9만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본토에서 인양선이 파견되어 일본 함정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 거류민들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8월 9일, 일본인들을 수송하기 위한 마지막 인양선이 상하이로 오고 있었다.

3.2. 오오야마 사건

그러던 중 1937년 8월 9일 오후 5시,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 서부파견대 대장 오오야마 이사오(大山勇夫) 중위가 훙차오 공항 인근의 군사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일등수병 사이토 요조(斎藤與蔵)에게 차를 운전하게 하여 훙차오 공항으로의 난입을 시도했다. 이에 중국군 보안대 위병들이 정차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오야마는 위병들의 제지를 무시하고 권총을 발사하여 중국군 보안대원 1명을 살해했다. 이에 중국군 보안대가 발포하여 오오야마 중위와 사이토를 사살했다. 일본군은 이것이 송호정전협정 위반이라면서 사건의 공동조사와 중국군 보안대 철수를 요구했다.
파일:사이토수병.jpg 파일:오오야마중위.jpg
사이토 일등수병 오오야마 중위

하지만 이날 경호 경비총사령 장즈중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일본군이 상하이 병력을 증원시키고 있다. 기존의 해군육전대 5000명에 재향군인 3000명과, 지원병 3500명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일본 해군 9척이 장강 상류를 경유, 상하이에 도착하였는데 해군육전대 3000명을 싣고 왔다."

또한 일본군 3함대가 13척에서 29척으로 증강되었고 2함대까지 사세보에서 상하이로 오고 있다는 정보 역시 들어왔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였으나 장제스는 이미 상하이에서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8월 11일 장즈중에게 공동조계지 반경 20킬로미터 지점을 비무장지대로 둔다는 송호정전협정을 무시하고 일본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상하이의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예하부대를 상하이 부근으로 추진배치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장즈중은 8월 11일 심야, 과거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활약한 바가 있는 최고 정예부대인 87사단과 88사단을 비롯한 예하 부대를 상하이 교외에 배치하였다. 마침 상하이는 1935년 겨울부터 진지공사가 행해져 용화, 홍차오, 진여, 갑북, 강만, 대장 등 상하이를 멀리서 감싸면서 튼튼한 방어진지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 방어진지는 완전히 지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상하이 전투 발생 이후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게 된다.

3.3. 송호정전협정의 파기

8월 10일, 공동조계지를 관할하는 4개국 대표가 광동성 정부주석 겸 상하이 시장 대리 우톄청에게 상하이가 전쟁터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했으나 우톄청은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며 중국은 전쟁을 바라지 않으나 자위를 위해 행동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8월 11일, 주 상하이 일본총영사 오카모토가 상하이 시장 위훙쥔에게 중국군 보안대 철수와 보안대 방비 시설 철거를 요구했다. 이들 보안대는 상하이 교외에 주둔한 87사단, 88사단과 무관하게 송호정전협정에 따라 주둔하는 보안총단, 경찰총대, 보위단으로 송호경비사령 양호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은 이들 보안대의 존재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무작정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위훙쥔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8월 13일 해군육전대 1개 분대가 황빈로, 보흥로에서 도발을 감행하고 오후에 팔자교, 천통암, 보산로 일대에서 해군 함정의 포격에 발맞춰 공세를 가하기 시작함으로 제2차 상하이 사변이 시작되었다. 이날 국민정부는 송호정전협정의 파기를 선언했다. 이날 심야 장즈중이 9집단군 총사령관에, 장파쿠이가 8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4. 결과

8월 14일에서 8월 15일, 장즈중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본격화되었고 중국은 화북과 화중 양면 전장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5. 장융의 음모론

그런데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집필하여 유명해진 장융과 존 핼러데이 부부는 이 훙차오 공항 사건에 대한 중요한 음모론을 제기한다. 경호경비사령 장즈중이 사실 공산당의 스파이라서 마오쩌둥의 지령을 받고 훙차오 공항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장융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문제는 논리가 빈약하고 근거가 결핍된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장 1번 명제부터 저명한 마오쩌둥 연구가 알렉산드르 판초프는 그렇다면 황포군관학교 교장인 장제스부터 공산당 특무로 봐야 한다고 혹독하게 비판했고, 장융의 저서는 일부 고평가할 점이 있음에도 너무 빈약한 음모론을 신봉했기 때문에 현대까지도 학계에서 혹독하게 씹히고 있다.

6. 참고 문헌

7.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