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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2:25:29

이명하

파일:이명하.jpg
성명 이명하(李命夏)
초명 이계윤(李桂允)
우문(又文)
몽학(夢鶴)
생몰 1878년 1월 23일 ~ 1921년 2월 2일
출생지 경기도 광주군 궁촌
본관 전주 이씨
사망지 만주 구련성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교육계몽운동과 의병 활동2.3. 대한독립단2.4. 보합단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명하는 1878년 1월 23일 경기도 광주군 궁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인협(李寅協)이며, 백부 이인규(李寅奎)는 진사가 된 뒤 별시 문과에 합격하고 안악, 신계, 장연 등지의 군수를 역임했다. 이명하는 어려서부터 총기를 발휘해 일찍부터 면학에 힘섰고, 1887년 9살 때 부모와 함께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 산곡리로 이사갔다.

이명하는 1888년부터 4년간 유인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6년 2월에 유인석이 의병대를 통솔하여 항일 투쟁에 나서자 자신도 여기에 가담하려 했지만 미처 그러기도 전에 의병대가 패퇴하고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는 바람에 가담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897년 3월, 중국 동북지역 회인현 호로두(胡蘆頭)에 은거하던 유인석은 고종의 초유문을 받고 귀국했다.

그러던 중 유인석은 문하생인 백삼규(白三圭), 박재관(朴在觀), 우병렬(禹炳烈)[1], 최락구(崔洛九) 등과 함께 잠시 제천 지역을 들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명하는 그들을 찾아가 교류했고, 여러 국내외 사정을 들으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898년 3월 유인석 일행은 귀국한지 1년만에 다시 요동으로 떠났다. 이때 제자 74명이 따라 나서자 이명하도 이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부모가 그를 적극 만류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이윽고 마을의 유지인 정씨 집안의 딸 정운이(鄭雲伊)와 결혼한 그는 몇년 간 조용히 지내다가 부모의 권고로 서울로 상경해 성균관에 다니면서 임관하기 위한 공부에 전념했다.

2.2. 교육계몽운동과 의병 활동

1901년 성균관을 졸업한 이명하는 시험을 치른 뒤 제천군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해 황학수, 구연학(具然學), 김진태(金鎭泰) 등과 함께 동명학교를 세워 제천군 백성들에게 계몽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해 한국의 전반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1907년정미 7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일본인 2,080여 명을 관리로 임명하자, 이명하는 이 상황을 참지 못하고 주사직을 사임한 뒤 이강년 의병대에 가담해 소모장(召募將)을 맡아 모병 활동을 벌였다.

이명하가 속한 이강년 의병대는 친일 관리인 안동관찰사, 단양, 영춘, 청풍 군수 등을 참살했다. 이후 1907년 12월 10일 13도 창의군에 가담하기 위해 북상한 이강년 의병대는 경기도 접경지역까지 왔지만 제천을 통과하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자 부득이 평창을 거쳐 태백산맥을 따라 북상하는 험난한 길을 택해야 했다. 결국 이강년 의병대는 13도 창의군에 가담하지 못했고,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퇴한 뒤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이명하는 이강년의 지시를 받고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려 했지만 체포되었고, 이강년 역시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이후 이명하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09년 말 또는 1910년 초경에 석방되었는데, 그가 어떻게 풀려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스승 유인석이 1910년 6월 21일 13도의군을 조직하고 도총재로 추대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실시하려 하자, 이명하는 42명의 동지들과 연합하여 의병과 해산 군인들을 모으는 <통문>에 서명하여 7월에 반포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추적해오자, 이명하는 황해도로 피한 후 그곳에서 유인석의 문인인 이진룡의 의병대와 합세해 일본군과 여러차례 접전을 치렀지만 끝내 패하자 이진룡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2.3. 대한독립단

1911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망명한 이명하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만주 각지를 오가며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고 서간도 지역에서도 1919년 3, 4월을 전후해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만주의 무장독립세력은 통합된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1919년 4월 15일 보약사, 농무계, 향약계, 포수단 등의 대표 및 다른 의병 계열의 인사 등 560명이 자신들의 단체를 해체하고 대한독립단을 창단했다. 이때 이명하는 대한독립단 제3중대에 배속되었다.

이명하는 중대장인 백송암(白松菴)을 따라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 군경과 수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5개 사단 25,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경신대토벌을 단행하자, 제3중대 대원들은 국내진공작전을 중단하고 원래의 주둔지로 돌아오다가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이며 피해가 누적되었고, 본대와의 연락이 두절되자 공포에 질린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이명하는 의주 지역에 은신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노렸다.

2.4. 보합단

1920년 9월, 이명하는 박초식 등 일부 대한독립단원과 함께 의주군 비현면 정산동 김중량(金仲亮)의 집 뒷산에 있는 굴에서 성립된 보합단에 가입했다. 그는 보합단원들과 함께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안평동의 박초식의 집에서 폭탄을 제조하고 이를 가지고 가서 용천, 의주, 선천 등지에서 부호들을 위협해 군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밀정 등을 숙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거지가 발각되자, 그들은 2개의 대열로 나뉘어 타지로 이동해야 했다.

이명하 등 보합대원들은 일제의 추격을 받으며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가까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후 사방으로 흩어져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명하는 중국 안동 지역으로 가서 한인들을 설득해 독립군에 가담시키려 애썼다. 그러던 1921년 2월 2일, 이명하와 백학원, 안중석, 김근배, 박초식 등은 안동현 삼도구만에 와서 군수품 등을 마련하다가 일본 영사관 분관의 한 관원 경찰의 검문을 받자 그를 사살했다. 이후 그들은 출동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경찰 오카무라[岡村] 경부보(警部補)와 한인 순사 주계주(朱啓柱, 혹은 朱桂守)를 사살하고 수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평안북도 제3부 경찰대와 의주 경찰서에서 다수의 지원대를 파견했고, 안동현에서도 수명의 경관을 파견해 지원했다. 결국 보합단원 7명 중 3명이 피살되었고, 이명하 등 생존 단원들은 다른 대원들이 은거하고 있던 구련성 부근의 소운수(蘇雲樹, 혹은 蘇雲朱)라는 중국인 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뒤를 추격하고 있던 일본군 탐정이 이들의 은거지를 알아냈고, 의주 대안에 있던 평북 의주경찰대와 평북 제8부 경찰대 30명이 습격했다.

이에 이명하와 다른 대원들은 소운수의 집을 요새로 삼고 집을 에워싼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1921년 2월 2일 전원 사살되었다. 이후 이명하의 시신이 어느 곳에 매장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1963년 이명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우병렬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