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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7:30:01

이남규(독립운동가)

1. 충청남도 의병장, 이남규
1.1. 초년기1.2. 조선의 관료시절1.3. 의병에 가담하다
2. 전라남도 의병장, 이남규3. 서울의 의병장, 이남규4.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남규

1. 충청남도 의병장, 이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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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남규.jpg
원팔(元八)
수당(修堂), 산좌(汕左)
본관 한산 이씨
출생 1855년 11월 3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 노첨정계 미동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1]
사망 1907년 9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서훈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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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1. 초년기

이남규는 1855년 11월 3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 노첨정계 미동(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부친 이호직(李浩稙)과 모친 청송 심씨 심중윤(沈重潤)의 딸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한산 이씨로, 목은 이색, 이산해, 이경전(李慶全) 등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명문 가문이었다.[2] 그는 어려서부터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7살 때부터 기호유림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남규는 1875년 사마시(司馬試) 양과(兩科)에 합격하였고, 1882년(고종 19) 4월에는 경복궁 춘당대에서 시행된 정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했다.# 이듬해인 1883년, 그는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그는 사간원 정원,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승정원 동부승지, 우승지, 공조참의, 형조참의 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1.2. 조선의 관료시절

1894년 4월,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 혁명을 진압하는 게 어려워지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청군이 조선에 파병하면서 이 사실을 일제에게 통보하자, 일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해 5월 7일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조선 정부는 5월 8일 <전주화약>을 체결해 외세 개입의 소지를 제거했다. 그러나 일제는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한성에 진주시켰다. 청나라 측이 군대를 동시에 철수시키자고 제안했으나 일본군은 거부했고, 외국 공사들이 중개해주겠다고 제의한 것 역시 거부했다. 이에 이남규는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을 경고했다.[3]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한 뒤 깅홍집을 필두로 하는 내각을 수립시켰다. 이에 이남규는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저 일본 공사가 나라를 방위하고 험한 곳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고 군대로 도성을 둘러싸게 하고, 성(城)과 진지에 자기네 병사들을 벌과 개미처럼 모여 있게 하였습니다. 나라가 있었던 이래 있지 않았던 변고입니다. 또 자주 독립 등의 말을 하면서 겉으로는 충성을 바치는 체하고 속으로는 협박을 일삼습니다. 이 또한 나라가 있었던 이래 있지 않았던 일대 변고입니다. 불경함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또한 저네들(일본)의 의도는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다 하여 우리나라를 우롱하고, 사타구니에 끼고 손바닥에 올려 놓고서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는 우리를 높이는 것 같이 하고는 안으로는 실상 우리를 약화시키며, 밖으로는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이 하고는 안으로는 실상 우리를 외롭게 만듭니다. 또 우리나라가 변고 있음을 엿보고, 우리나라의 구폐를 혁파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으려고 합니다.
(중략)
급히 외부(外部)에 엄한 말씀으로 저네들(일본) 자신의 글을 퇴각시키라고 명하십시오. 또 저들(일본)이 동맹을 어긴 죄를 천하와 동맹 각국에 알리십시오. 곧 정부로 하여금 저네들(일본) 나라의 집정자를 책망하여 명분 없는 군대의 철퇴, 무례한 공사(公使)를 죄 주어서 옛 우호관계를 되찾고 서로 도와 의지함이 진실로 두 나라의 다행이라는 글을 주게 하십시오. 저들(일본)이 만약 어리석어 뉘우칠 줄 모르고 혼매하여 깨닫지 못하면 또 한 번 마땅히 관항(關港)을 닫고 조약을 폐기하여 각국과 힘을 합하여 토벌한다면 비록 지자(智者)라도 저들(일본)은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절왜소(請絶倭疏)

그러나 이미 일본군에게 장악당한 조정은 일본군을 철수시킬 힘이 없었고,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도발해 청군을 한반도에서 물리치는 한편 관군 및 양반들이 중심이 된 민보군과 연합해 동학 농민군을 진압했다. 그 후 이남규는 영흥부사로 전출되었다.

1895년 8월 20일,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후 조선 정부는 일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명성황후를 폐서인한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영흥부사 이남규는 곧바로 상소를 올려 강력하게 항의했다.
8월 20일에 있었던 일을 어찌 차마 다시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천지의 큰 변고이고, 종사(宗社)의 지극히 욕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원수 놈의 부림이 되어 지존을 짝하신 몸에게 죄를 돌려서 폐하여 서인으로 만든다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8월 22일 내리신 칙명(명성황후의 폐서인 조칙)을 빨리 거두시고, 왕후의 위호를 이전대로 회복하시어 왕태자를 비롯하여 온 나라 신민이 의지할 바를 잃어 방황하는 뜻을 위로하옵소서. (중략) 이어 외무를 맡은 관서에 명하여 일본이 맹약을 어기고 환란을 일으킨 죄를 동맹국 여러 나라에 알리고, 함께 이를 칠 것을 약속케 하옵소서.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 討賊復讐疏)

이후 조선 정부가 일제와 친일파들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1895년 11월 15일에 단발령을 발표하자, 이남규는 이에 반대하며 영흥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향리인 중남 예산으로 귀향했다. 이후 그는 예산에 묻혀지내다가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다시 관직에 복귀해 안동부 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안동부 관찰사로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수행한 뒤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민심 수습이 매우 어려우며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뒤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4]

그 후 이남규는 1897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잇달아 열어 고종에게 여러 요구 사항을 진언하자, 이남규는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5]

고종은 이에 대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겠다며 마땅히 유념하겠다고 비답했다. 이후 이남규는 1899년 비서원승이 되었고, 연이어 궁내부 특진관, 함경남북도 안렴사 등에 임명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개시한 일제는 1905년 11월 승기를 잡자 그해 11월 18일 을사조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에 분노한 이남규는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6]

1.3. 의병에 가담하다

이후 이남규는 전 참판 민종식이 충남 흥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함락시키자 비록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히고 선봉장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다. 이에 이남규를 따르던 문인들이 민종식에게 대거 가담하면서 민종식 의병대의 세력이 늘어났다. 그러나 민종식 의병대가 홍주성에서 10여 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에게 패하고 홍주성이 다시 함락되자, 이남규는 민종식을 평원정에 숨겨줬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그와 장자 충구(忠求)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한 달 만에 풀려났다.

1907년 6월 고종이 일제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대신들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7월 24일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이에 이남규는 의병에 가담하려 했지만 사전에 그를 감시하고 있던 일본군이 1907년 9월 26일 그가 거처하던 평원정을 포위하고 그를 포박하려 했다. 그러자 이남규가 꾸짖었다.
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 수 없다.

이후 그는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가마가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를 무렵, 일본군은 길을 멈추고 그를 마지막으로 회유하려 했다. 그러자 이남규는 다시 꾸짖었다.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

이에 일본군은 그를 회유할 수 없음을 알고 칼로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맏아들 이충구와 가마를 메고 가던 김응길(金應吉)이 온 몸으로 일본군의 칼을 막았지만, 일본군은 이남규와 아들 충구, 그리고 김응길 모두를 참살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충남 예산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남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전라남도 의병장, 이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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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전라남도 함평군
사망 1907년 11월 7일
전라북도 고창군
서훈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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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는 전라남도 함평 출신이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이남규는 기삼연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후군장에 임명되었다. 1907년 9월 23일, 기삼연 의병대는 고창 문수암으로 진군했고, 일본군과 접전을 치러 적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안겨줬다. 이후 고창성을 함락시킨 이남규는 성 아래에서 부하들을 지휘했으나 일본군의 역습으로 성이 다시 무너지자 중상을 입고 인근에 은신했다가 어느 여인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907년 11월 7일에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남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서울의 의병장, 이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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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사망 1907년 10월 4일
전라북도 임실군 상동면
서훈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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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암규는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던 대한제국 군인이다. 1907년 10월 1일 서울의 해산군인 10명을 포함한 부하 50명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임실군 상동면에서 사립학교 일어교사를 맡고 있던 일본인 한 명을 살해했다. 이후 10월 4일 장수군에서 파견나온 남원, 전주 지방 경찰관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4.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이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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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8년 9월 17일
충청도 은진현 가야곡면 등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등리)[7]
사망 1934년 2월 27일
충청남도 논산군
서훈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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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1913년 고종으로부터 소모사(召募使)의 직어(職禦)를 받아 국권회복의 기회를 모색했고 1920년 임철규(林喆圭), 이응숙(李應淑)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펴기로 결의했다. 이후 오석영(吳碩永), 오은영(吳銀泳)으로부터 32원을 모금받는 등 충남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으나 대전에 거주하는 박홍래(朴鴻來)로부터 군자금을 받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4월 18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강도, 총포화약류추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치렀다. 이후 일제의 간섭을 받으며 조용히 지내다가 1934년 2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이남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국조방목에는 거주지가 충청도 예산으로 되어 있는데, 예산은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수당 고택이 남아 있다.[2] 이남규는 아계 이산해의 12대손이기도 하다.[3] 고종실록 고종 31년 6월 23일자 기사[4] 고종실록 고종 33년 4월 28일자 기사[5] 고종실록 고종 35년 12월 10일자 기사[6] 고종실록 고종 42년 11월 30일자 기사[7] 합천 이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