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윤세린(尹世麟) |
자 | 상원(庠元) |
단호 | 단애(檀涯) |
출생 | 1881년 3월 29일 |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연포리 (現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연포마을)[1] | |
사망 | 1960년 2월 13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대종교총본사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58호 |
본관 | 무송 윤씨[2] |
가족 | 형 윤세용, 6촌 동생 윤세주 아들 윤홍선(尹弘善)[3]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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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종교 3대 교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윤세주의 6촌 형이다.1910년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고, 1911년 중국으로 가서 학교 및 교당을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하는 한편, 독립단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도 힘썼으며, 포수단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항전하기도 하였다.
2. 생애
1881년 3월 29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연포리(現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연포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밀양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와 대구 협성중학교(協成中學校) 교사를 지냈다. 1910년 상경, 대종교에 입교한 후, 안희제(安熙濟)·서상일(徐相日)·신성모(申性模) 등과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11년 대종교의 시교사(葹敎師)로 임명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갔다. 환런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마오쑹현[茂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닝안[寧安]에 대종학원(大倧學園) 등을 설립하여 5년간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1916년 마오쑹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 7,000여 명의 교인을 모아 시교(示敎) 겸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한편,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을 조직, 독립운동에 힘썼다. 또한 창바이[長白] 등지에서 포수단(砲手團)을 조직, 홍범도(洪範圖)·조맹선(趙孟善) 등과 연합전선을 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1923년 제2대 교주 김헌(金獻)의 유언으로 대종교 제3대 교주가 되었다. 1942년 교단 간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8.15 광복으로 석방, 1946년 귀국하여 교단을 정비하고 민주체제로 전환하였다. 1960년 2월 13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