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하산(荷山) |
본관 | 평산 신씨[1] |
출생 | 1882년 12월 8일 |
충청도 연산현 적사곡면 안천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안천리 166) | |
사망 | 1930년 7월 13일[2] (향년 47세) |
서대문형무소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73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현구는 1882년 12월 8일 충청도 연산현 적사곡면 안천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안천리)에서 신지균(申智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미국인 선교사 윌리암스를 만나고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더불어 기독교에 입교해 논산에서 교회를 세워 전도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한편, 1913년 발행되어 일제강점기 초기 당시 조선귀족 및 유명 인사를 수록한 일종의 인명사전인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 등재된 것이 특이한 점이다.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옥천동(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옥천동)에 거주하면서 민족교육을 목표로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지속했다. 그러다 3.1 운동에 참가하고, 좀 더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같은 해 5월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했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신현구를 비롯해 권인채, 안창호, 박건병, 엄세섭, 박화진, 이강, 이시우, 안황, 한용운, 이성춘, 여운형 등이 경기도 경성부에 본부를 두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에 지부를 두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연락망인 연통제에 해당하던 단체로, 신현구는 연통부원으로서 활약했다. 또한 아직 남아있는 만세운동의 열기를 이용해 만세시위를 다시 계획하는 일도 했다.
그러나 1919년 11월에 같이 교류하던 대동단이 발각되면서 신현구도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 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면서 원심 판결이 적용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출옥한 그는 1927년에 신간회에서 서기를 하며 활동을 지속한다. 그런데 1927년 1월에 발매된 잡지 심경(心鏡)에 항일사상과 관련된 글을 실었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30년 7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74~27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