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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파일:external/data.godpia.com/20111115171812.jpg
<colcolor=#fff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웅천군 북부동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1]
사망 1944년 4월 21일 (향년 46세)
평안남도 평양부 평양형무소[2]
(現 평양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63호[3]
아명 기복(基福)
소양(蘇羊)
본관 신안 주씨 [4]
부모 아버지 주현성, 어머니 조재선(1863~?)
형제 형 기원(基源)
배우자 안갑수 (1900 - 1933 사별)
오정모 (1903 - 1947 재혼)
자녀 장남 주영진 (1919 ~ 1950)
차남 주영만 (1922 ~ ?)
3남 주영묵(1925 ~ 1928)
4남 주영해 (1927 ~ 1990)
5남 주광조(1932 ~ 2011)
장녀 주영덕(1930 ~ 1931)
친인척 사촌형 주기용
손자 주수현[5], 주승중[6], 주현[7], 주원[8]
손녀 주OO[9], 주소희[10], 주미혜[11]
직업 목사, 독립운동가
학력 웅천 개통학교[12] (졸업)
오산학교 (졸업)
조선기독대학교 (상과 / 중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장로회)
약력 평양 산정현교회 초빙목사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청년기2.3. 장년기,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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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사각오(一死覺悟) 주기철[13]

한국의 장로교 목사. 마산 문창 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목회자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신사참배 요구에 대항하여 맞섰지만, 장기간의 투옥과 여러 차례의 고문을 겪으며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주기용의 사촌동생이다.

2. 생애

2.1. 유년기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웅천군 읍내면 백일리(現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백일마을)에서 웅천군의 아전 출신인 아버지 주현성(朱炫聲)과 어머니 조재선(曺在善)[14]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주씨 집안은 머슴을 두고서 농사를 지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었다.

원래 이름은 주기복(朱基福)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름을 주기철(朱基徹)로 바꾸었다. 이는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였다. 호는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의 의미의 '소양(蘇羊)'이다.

유년기 때 교회에 다니게 된 주기철은, 누구보다도 교회를 섬기면서 사랑했다. 웅천 개통학교[15]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학교[16]로 유학을 떠난 주기철은, 졸업 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5년 조선기독대학 상과에 2기로 입학했다. 하지만 안질이 심해져 학업을 그만두고 낙향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온 주기철은 야간학교에서 일하다 이기선 목사의 주선으로 안갑수와 결혼하였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때 만세운동을 벌이다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했으며, 이듬해 김익두[17]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주님 가신 길’을 뒤따르기로 한다.

2.2. 청년기

192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주기철은 당시 지역별로 찢겨 있던 학교 분위기를 일신하고, 양산읍교회에서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한다.[18] 약 3년 간의 사역을 거친 주기철은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사직을 친구 이약신에게 맡긴 채 부산의 초량으로 내려갔고, 이약신은 흔쾌히 수락하며 가족과 함께 양산으로 이사했다.

주기철은 부산 초량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주 목사는 구제와 기도로 신앙생활에 힘썼다. 이후 마산문창교회에서 담임하며 아내 안갑수와 의신학교에서 일하던 오정모를 교사로 삼았다. 1933년, 아내가 병에 걸려 사별했고, 과로와 허약에 시달렸다. 이를 보다못한 제직들의 권유로 오정모와 재혼하고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다. 초량교회 시절 그는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정비하여 당회와 제직회를 확장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손양원, 한상동 목사 등도 경남성경학교에서 그에게 성경을 배웠다.

그는 강단에서 철저히 복음을 고수했다. ‘민족의 광복’보다 근본적인 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주기철 목사가 조국의 광복에 무관심했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그가 3.1 운동에 동참해 옥고를 치른 것을 봐도 민족의 광복을 간절히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한민족이 새롭게 거듭나야 비로소 조국의 광복이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에 가깝다.[19]
주 목사 평전의 저자는 이에 대해 “산정현교회가 무너져 가는 조선 교회의 마지막 그루터기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방침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신사참배 거부와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설교는 거기서 나왔다.

2.3. 장년기,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자, 오늘 성도들 여러분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 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소.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 반대를 고집한다면 주 목사는 이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오!
일본 헌병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주 목사는 못위로 걸어갔다.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정책으로 가고 있었던 조선총독부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총독부 경무국은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였고, 학교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기독교회에서 파견된 목사 토미다(富田)는 경성일대를 왕래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본의 압박이 가해지자 다수의 개신교 목사 들은 "신사참배우상숭배가 아니라, 그냥 국가의 의식[20]"이라는 도미다의 뜻에 동조하면서 신사참배를 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기철을 비롯한 여러 목사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했다.[21] 평양에 있던 개신교 미션스쿨숭실학교숭의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당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도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했다.[22]

결국 그 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속당했지만, 일본은 결사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곧 풀어주었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히고, 풀려났다가 다시 붙잡히는 경우가 잦아졌다. 점점 구속되는 시간이 길어지고, 일제는 주기철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라, 그러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한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이미 결심했고, 일본의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조선인 출신 고문기술자인 배만수 형사가 주기철 목사를 맞이했고, 농우회 사건의 간부였던 조만식이 산정현교회의 장로라는 사실을 빌미삼아 교인들을 몰아세웠다.

아내 오정모 사모의 신앙도 못지않았다. 자녀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정 형편도 궁핍했지만, 약한 소리와 앓는 소리 대신 감옥에 있는 남편을 면회한 자리에서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당부했다.[23] 1940년에는 주기철 목사를 굴복시키려는 일환으로 남편을 면회 온 자리에서 일본제국 경찰들에게 붙들려 남편과 아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들에게 가했던 고문을 당했다고도 한다.[24] 후에, 주 목사의 입관예배에서도 조용히 일어나 비장한 얼굴로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7개월만에 석방된 주기철 목사는 다시 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25]를 연설하며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더욱 더 굳건히 지켰고, 이틀 뒤 일제는 다시 주 목사를 구속했다. 10월[26]에는 목사 대리로 수요예배를 진행하려던 장로를 구속하여 주 목사가 있던 지하로 끌고 내려가 구타하는 등 산정현교회를 압박해 주기철을 파면시켰다. 가족까지 동원한 온갖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27]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주기철 목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했으나, 4월 21일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후 5시간 뒤인 밤 9시 병으로 숨을 거둔다.[28]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주기철 목사가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기나긴 수감 생활과 잔혹한 고문으로 무너질 대로 무너진 그의 앙상한 육신은, 목을 축이고 속을 덥혀줄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한 예수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은 5일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1944년 4월 25일 평양 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29]에 안장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4남 주광조 장로[30]간증.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온갖 고문 속에서도 복음으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주기철 목사는,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8년 9월 18일 성경을 비롯한 유류품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983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3. 기타

손양원 목사와 신앙적 교류가 있었다. 손양원이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주기철 목사와의 만나면서 손양원 목사가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주기철 목사의 로마서 강해를 통해 "신사참배 문제 이후로 설교할 때에 우상 죄를 공격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으며 "가장 잘 죽은 사람 누구인가? 주를 높이다가 죽은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14:13),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가 가장 잘 죽은 사람일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손양원 목사는 옥중에서 주기철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부모나 자녀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도 더 슬퍼서 30일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애곡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조용기 계열인 순복음교회에서 내던 월간 신앙계에서 2000년 20세기 개신교인으로 '한국을 빛낸 위인 20명'을 선정하면서 당연히 주기철 목사가 들어가 있었으나, 그 20명에 악명 높은 친일반민족행위자김활란도 넣으면서 주기철 목사에 대한 고인모독을 벌였다는 비판을 실컷 듣은 바 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아들 주광조 장로[31]의 이야기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은 주기철 목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이를 안타까이 여긴 전문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 저자는 유족들의 육성과 다양한 자료들을 섭렵하여 주기철 목사 부자(父子)의 삶을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특히 막내아들로서 아버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주광조 장로의 삶도 함께 조명하고 있다.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주기철 목사는 피를 흘려 신앙의 절개를 지켰지만, 해방 이후 한국 개신교회는 그의 신앙을 계승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지금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도, 그의 증거자 주광조 장로도 없지만, 한국 교회가 살아있는 한 이들의 이야기는 곧 한국교회사요, 순교사이며 살아있는 믿음의 전승이므로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사실 1930년대말 일제가 총동원체제에 돌입하면서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요구하자, 당시 개신교, 카톨릭, 불교 등 종교계 인사들은 대체로 순응하는 분위기였다. 한경직 목사, 김재준 목사 등 조선의 주요 개신교 지도자들도 초기에 약간 반대한다는 의사를 보이다가, 일제가 압박하자 곧바로 돌아서 모두 신사참배에 동참하고, 모든 교단들이 신사참배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주기철 목사와 극소수의 신도들만이 저항한다. 그리고 1939년 12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결정한 교단의 결정에 거부한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를 아예 면직시키게 된다. 공식적으로 추방된 것이다.

해방이후 교단을 가리지 않고 당시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목사들이 그대로 한국 개신교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담스러웠던 주기철 목사의 행적은 은근슬쩍 묻히게 된다.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의 수많은 개신교단 중에서 신사참배와 친일행적에서 자유로운 곳은 주기철 목사를 끝까지 따르던 신도들이 해방후에 조직한 예장고신뿐이다. 1950년대부터 여러 교단들이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내놨지만, 언제나 말뿐이었고 주기철 목사를 따르던 신도들은 해방 후에도 개신교계 내부에서 철처히 외면당하는 신세였다. 주기철 목사 순교 70주년 추모예배가 2014년 4월 13일 후손인 주승중 목사가 시무하는 주안장로교회에서 거행됐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심지어 주기철 목사에 대한 복권도 2016년에야 이루어졌다. 예장합동총회, 77년 만에 주기철 목사 복권

2015년 12월 25일 성탄절 특집으로 KBS 1TV에서 밤 10시에 '일사각오 주기철'이란 이름의 다큐를 방영했다. 스미요시 겐이 아버지 에이지 목사가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았던 이유인 주기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여정이 주 내용.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위치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32]이 함께 소개되었다. 2016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 특집방송으로 재방송되었으며, 추가로 해당 다큐멘터리2016년 3월 17일영화화되어 개봉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장남인 주영진은 전도사[33]로 활동하면서 해방 이후 북한에 남아 조선로동당의 기독교 탄압에 맞섰지만 6.25 전쟁 발발 직전에 총살당한다.[34][35]

그의 손자로는 주승중 인천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 주현 산업연구원 원장, 주원 흥국증권 사장이 있으며, 손녀는 주소희 사모[36], 주미혜 사모[37]가 있다.

복음성가인 ‘영문밖의 길’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로 시작하는 성가인데 마지막절 마지막 가사에 꽤 인상적인 가사가 있다.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란 것으로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역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리고 이 역십자가형은 베드로가 자청해서 받은 것이다.


[1] 신안 주씨 집성촌이다. 주기용 제헌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평양형무소는 광복 이후 북한이 형무소로 활용하였다.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인 채응언도 이곳에서 사형되었다.[3] 유해는 순교 직후 평양에 안장되었기 때문에 현충원에 있는 묘소는 유류품을 묻은 가묘이다.[4] 웅천파. 신안 주씨 30세 O基 항렬.[5] 장남 주영진의 아들[6] 3남 주영해의 차남[7] 5남 주광조의 장남[8] 5남 주광조의 차남[9] 장남 주영진의 딸[10] 3남 주영해의 장녀[11] 3남 주영해의 차녀[12] 현재 웅천초등학교(경남)[13] 한번 죽기를 각오한다는 의미이다.[14] 신안주씨대동보 2권 1465쪽의 주현성 항목에는 경주 이씨 이기영(李基榮)의 딸만이 부인으로 기재되어 있다.[15]웅천초등학교(경남)[16]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 남북 분단 이후 남쪽으로 이주,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에 있다.[17] 이름난 깡패 출신이었고, 선교사를 만난 후 회개했다고 한다.[18] 아이러니하지만, 함께 공부하던 이들 중에는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 가결을 선포한 홍택기가 있었다.[19] 이는 도산 안창호민족개조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역시 개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20] 여기서 말하는 '국가'는 일본이다. 때문에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이라는 미명으로 수용하는 것은 기독교도로서 우상숭배 금지라는 계명을 어길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본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하나님과 민족을 동시에 거스르는 이중의 잘못을 범하는 셈이다.[21]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알려진 손양원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대광중학교대광고등학교를 세운 한경직 역시 이 축에 있었는데, 얼마 안 가 굴복하고 만다. 비록 많은 조선인이 참배를 했고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도 신사참배를 했지만, 먼 훗날 한 목사는 이에 대해 반성하며 사죄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22] 주기철 曰, 도미다 목사께서는 십계명을 알고 계십니까? 일본에도 신앙심에 목숨을 걸 수 있는 훌륭한 이들이 많다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신다면, 조선인에게 참배를 권하기보다는 가까운 일본인에게 복음을 먼저 전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23] 당신이 살아서 돌아오면 내 남편이 아니며 죽어서 돌아오면 내 남편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24]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의 증언. 이 충격으로 인해 주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한동안 실어증을 앓기도 했다.[25]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 오랜 고난을 감내하는 것, 이웃의 안녕을 비는 것, 의로움에 살고 죽는 것, 혼을 주님께 맡기는 것[26] 1940년 10월 23일[27] 주기철 목사를 다룬 만화에서 이게 묘사되는데 온갖 고문에도 그가 거부하자 고문실 바로 옆방에서 유리창문을 통해 지켜보던 아내를 붙잡아 주기철이 보는 앞에서 욕설을 하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붓는 게 나온다.[28] 같이 수감되었던 안이숙 여사의 말로는, 일본제국 경찰이 주사를 놔서 살해했다고 한다.[29] 이태석 목사,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 이현속 장로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교하여 안장된 곳이다.[30] 2011년 6월 29일 소천.[31] 다섯 중 막내이다.[32] 주기철 목사의 고향이며 웅천읍성 바로 옆에 있다[33] 이것도 사연이 참 기가막힌데, 목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가서 신학교를 다녔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한학기를 남기고 퇴학당하여 목사안수조건을 맞추지 못해서 해방 이후에 목사가 아닌 전도사로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34] 일설에는 생매장 당했다는 말도 전해진다.[35] 주영진의 가족 또한 북한 치하에서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부인인 김덕성 여사는 남편 사후 1.4후퇴 때 88세의 시어머니를 데리고 월남하려 했으나, 건강문제로 인하여 포기하였고, 어려운 와중에도 북한에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나 1971년 1월 15일 총살당한다. 슬하에 1남 1녀가 있었으나, 불온분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기존에 거주하던 평양에서 쫒겨나서 함경도 산악지대로 추방당했다고 한다.[36] 서바울 목사의 부인[37] 이윤호 목사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