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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7:26:42

안병찬(1881)

성명 안병찬(安秉瓚)
성암(誠菴)
생몰 1881년[1] ~ 1921년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군 송장면
본관 순흥 안씨
사망지 만주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을사조약 반대 상소2.3. 안중근을 변호하려 하다
3. 해외에서의 독립운동4. 사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안병찬은 1881년경 평안북도 의주군 송장면에서 순흥 안씨 가문의 의관(議官)인 안익호(安翼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그해 11월 만민공동회 때 간부로 적극 활동했으며, 12월 말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할 때 한때 체포되기도 했다. 1904년 7월 법관양성소를 제3회로 졸업했다.

2.2. 을사조약 반대 상소

1905년 법부주사로 임명된 안병찬은 그해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관을 청원하면서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렸다. 그의 상소문 전문은 황성신문 1905년 12월 5일자와 6일자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은 나이가 어리고 식견이 밝지 못하며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하는 일개 하찮은 사람일 뿐입니다. 더욱이 지위는 구품에 지나지 않고 직책은 주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막고 말을 막는데도 당돌하게 법을 범하는 것을 무릅쓰고 감히 밝으신 임금님께 생각을 올리려 하오니, 신이 어찌 스스로 그 죄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법을 만들어 말을 막는 것은 본디 나라를 망치는 일입니다. 기르고 또 지금 나라 일은 이미 (우리에게서) 떠나 일본의 통감이 장차 부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며칠만 지난다면 폐하께서는 비록 (원문이 빠져 있음) 말을 바라시더라도 말을 올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령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장차 그것을 듣고서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가령 말할 것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가령 말할 것이 있다면 어찌 자격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꼐서 가령 쓰지 않으신다면 그만이지만 가령 말 가운데 쓸 것이 있다면 어찌 법으로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춘추 시대의 법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군부를 죽이는 악인은 사람들이 그들을 벨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저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오적은 어찌 사람들이 베어버릴 수 있는 난신적자가 아니겠으며, 다섯 대의 수레로써 찢어죽이더라도 어찌 그 죄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나라가 되는 까닭은 법제와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이 행해지지 않고 권세가 서지 않는다면 비록 임금의 지위가 변함이 없고, 종묘사직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망한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지금 이미 다른 사람에게 통솔받고 감독을 받게 되어 임금과 신하 그 모두가 장차 포로가 되고 참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아! 저들 오적은 이들 또한 우리 역대의 임금님들의 신하입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500년의 종묘사직과 삼천리의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조금도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까?

바야흐로 바깥 사람들이 조약을 맺기를 억지로 부탁했을 때, 위에서는 이미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셨고 아래에서는 벼슬을 하는 이들이 굳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무슨 마음으로 마음대로 스스로 허가하고 마음대로 스스로 조인을 한 것입니까? 곧 이들은 국가와 백성을 한낱 티끌보다도 못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아! 도적의 무리들이 평소에 바깥 사람들은 안으로 이끌어들였으며, 타고난 바탕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익어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이 없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입니까? 폐하께서는 이들을 십여 년 동안 길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효험은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습니다.

아! 폐하께서는 또한 뉘우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마땅히 빨리 그들의 목을 베시어 이로써 역대의 임금님께 사죄하고 백성들에게 사죄함에도 겨를이 없으실 것인데, 과단성 없이 다시 그들을 참고 용서해 주시어, 그들의 기만하는 마음에서 나온, 그리고 거짓을 꾸민 상소문에 답을 내리시어 그들에게 공공되이 행동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무슨 아직 다하지 않은 일이 있어, 오히려 그것이 떠나버릴까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또한 폐하께서 이들을 충성스럽게 여긴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위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함부로 그들의 죄를 꾸짖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만약 임금의 자리에 있지 않다면 그만입니다만, 아직까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시지 않았다면 법은 아직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며, 권세는 아직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 하늘도 환히 살펴보시고 계실 것이니 반역을 한 자들은 결코 죄에서 달아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로 폐하께서 하늘을 함께 하지 못할 원수들이요,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들의 한 점 고기 조각을 먹어볼 수 있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이렇게 심하게까지 부드럽게 참아주시는 것입니까? 또 저들 바깥 사람들 또한 우리의 역신들을 제압하기가 쉬워서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 나라가 존재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큰 고비입니다. 따라서 비록 폐하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마음대로 스스로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하물며 폐하께서 불가하다고 하셨고, 정부의 우두머리가 되는 대신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며,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또한 모두 불가하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손에 넣은 것은 어린 아이를 꾀어서 집안의 재물을 뺏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숨만 사람의 눈이 본 것인데, 어찌 그것에 기대어서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스스로 그들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일을 헤아려보건대 오직 빨리 박제순 이하 다섯 도적의 목을 취하시어 그것을 고가(藁街: 한나라 때 장안에 오랑캐들이 살던 구역)에 걸어놓고서 온 나라에 호령하시고, 다시 여러 나라들에게 두루 알리시어 일본 사람들이 속임수를 사용하여 나라의 권세를 빼앗고 준 죄를 환히 내걸어 보이시며, 그 억지로 이루어진 거짓 조약의 문서들을 취하여서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버리시어, 우리 대한이 독립국이며 자주권이 있음을 되풀이하여 설명하여 다시는 침범하여 어지럽히는 폐단을 없애셔야 하실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아마 법은 행해질 수 있을 것이고 권세는 세워질 수 있을 것이며, 내정과 외교는 비로소 두서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이와 같이 우유부단할 뿐이라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포로가 되고 참살당할 것이며, 폐하의 옥체 또한 쉴 곳을 알 수 없을 것이니, 아아, 아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당한 삼천리의 예의를 가진 오랜 나라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감독을 받고 통솔을 받게 되었습니다. 페하께서는 혹시 그 까닭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면 모르십니까?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이 일을 참고 계십니까? 신은 비록 착한 행실은 없지만, 차마 선왕의 유민으로서, 그리고 부모께서 남겨준 몸을 가지고서 저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잠시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이미 법무부에 사직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격분한 마음에 감히 이렇게 법을 범하면서까지 상소문을 올린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깊이 생각하시어 오적을 다스리고 거짓된 조약을 파기해 달라는 저의 부탁을 시행해주십시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하실 수 없다면, 신은 바야흐로 도끼를 쥐고서 대궐문에 엎드려 오직 엄하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원컨대 이 도끼로써 빨리 저의 목을 베시어 이로써 저들 나라를 팔아먹은 여러 도적들에게 사과하십시오. 신은 지극히 애통하고 박절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안병찬은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끌려갔다가 70여 일만에 석방되었다.

2.3. 안중근을 변호하려 하다

이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1907년 4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러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는 평양에 있던 변호사 안병찬을 찾아가 변호를 의뢰했다.

안병찬은 사무원 고병은(高秉殷)과 함께 안중근이 수감된 여순으로 달려갔다. 그는 여순에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지방법원, 여순민정서, 경찰서, 그리고 일본인 변호사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자신이 안중근을 변호하기 위해 온 것은 문명국인 일본의 재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한국인 중에 안중근의 재판에 대해서 일본이 혹 불공평한 판결을 내릴까 염려하는 사람도 있고 또 친척의 의뢰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여순 지방법원의 일본인 판사는 이를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일본인 변호사만 허용했다. 안병찬은 이에 대해 미조부치 타카호 검찰관을 만나 따졌지만 자신이 대답할 사안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구치소에 있던 안중근을 찾아가 일본 육법전서 한 권을 건네주고 여관으로 돌아가 피를 토했다. 이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안중근의 공판을 방청하고 기주(記注)를 작성했다. 또한 <대한민보>에 "일본은 피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를 유린함으로써 피고에게 미리 사형을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내용의 논설을 기재하기도 했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이완용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안병찬은 자진해서 변호를 담당하고 이완용은 매국역적이므로 이재명이 이완용을 공격한 것은 애국열성에서 나온 당연한 거사임을 주장했다.

3.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1911년, 안병찬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장형을 선고받고 지도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석방된 그는 만주로 망명했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3월에 조재건(趙在健), 함석은(咸錫殷), 오학수, 지중진(池仲振) 등 동지들과 함께 안동현에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19년 9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어 1년 6개월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병에 걸려서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었다.

그는 병이 어느정도 낫자 다시 망명했고, 1920년 남만주의 관전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또한 남만주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할 필요를 느끼고 김찬성(金燦聖)과 같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대표해서, 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대표 조병준(趙秉準). 김승만(金承萬), 독립단(獨立團) 대표 김승학(金承學) 등과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서 통합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1920년 12월 12일 기원독립단, 한족회 등의 통합안을 도출해내고 1921년 2월 향로구에 남만주 독립운동 통일기관인 대한광복군(大韓光復軍)을 설치했다.

1920년 4월, 안병찬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평안북도독판부의 독판에 임명되었고, 5월에 김승학, 이탁 등과 함게 상하이로 가려 했다가 중일 합동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하지만 관전현 지사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고, 이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협의했다. 그 결과 남만주의 교민통치기관은 대한광복군참리부(大韓光復軍參理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내무부의 직속기관으로 하고, 남북 만주의 군사기관은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의 직할로 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법무차장(法務次長)에 임명되고, 임시정부 법률기초위원회(法律起草委員會)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경, 안병찬은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제1차대회에 참석해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상하이로 돌아와서 국내 연락기관으로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결성했다. 이해에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얻어 돌아오다가 그의 3남과 동지 독고종식(獨孤宗植)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공산당 내 반대파의 짓이라는 설과 거액의 자금을 노린 마적단의 소행이라는 설이 나돌았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4.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안병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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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안병찬의 출생일을 '1854년'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동시대인 의병 '안병찬(安炳瓚)'의 출생일과 혼동해서 발생한 착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