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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12:42

계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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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계봉우
桂奉瑀[1]
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파일:계봉우_.jpg
이명 하근(河瑾)
사방자(四方子), 북우(北愚), 뒤바보
출생 1880년 8월 1일
함경도 영흥대도호부 홍인사 남산리
(현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읍)
사망 1959년 7월 5일 (향년 78세)
소비에트 연방 카자흐 SSR 크즐오르다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320실-144호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일생
2.1. 기독교 민족주의자2.2. 공산주의자2.3. 말년
2.3.1. 6.25 전쟁에 대한 논란
3. 저서
3.1. 역사3.2. 문학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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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역사학자.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함경도 영흥대도호부 출신으로, 항일운동에서 족적을 남겼으며 한국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2. 일생

2.1. 기독교 민족주의자

1880년 8월 1일 함경도 영흥대도호부 홍인사 남산리(현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읍)에서 빈궁한 관노비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 신분에서 해방된 뒤 서당에 들어가 공부했고, 1908년 동경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10년 함흥 영생중학 교사로 근무하다가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같은 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해 12월 조선을 탈출해 북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북간도에서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 간민회(墾民會) 등 중국 당국의 인가를 받은 민족운동단체에서 민족 교육과 한인 자치 강화를 위해 활동했다. 또한 길동 기독전도회에 가담해 기독교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계봉우는 북간도 소양자에 위치한 광성학교(길동기독학당)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청년친목회와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의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대동협신회의 기관지인 월간잡지 대진(大震)의 책임주필로 활약했다. 그는 이 잡지에서 '중등역사'와 수신 교과서인 '오수불망(吾讐不忘)'을 발행했다. 또한 그는 이동휘 등이 1911년경 북간도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광복단(光復團)에도 가입했으며, 한인자치기관인 권업회에 참여해 기관지 '권업신문'의 기자로 일했다. 1913년 말에는 이듬해에 있을 러일전쟁 10주년에 대비하여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이동녕, 이상설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당국은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고 이동휘, 이종호, 이동녕, 정재관 등 20명을 추방했다. 이때 계봉우 역시 추방 대상자에 포함되어 중화민국 길림성 왕청현 합마당(蛤蟆塘)[2]으로 도피했다. 계봉우는 자서전 '꿈 속의 꿈'에서 러시아 당국에 의해 퇴거 명령을 당한 후 합마당으로 이주하게 된 과정과 그 곳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권업신문의 기자로 있다가 퇴거 명령을 당하고 중령으로 다시 돌아와서 왕청 하마탕에 이주하였다. 그 이주는 소영자에서 고락을 함께하던 동지들이 그 곳에 깊이 근거를 정하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계의 대세가 우리의 운동을 휴식 상태에 밀어넣은 것에 있었다. 이동휘 선생이 가족을 데리고 거기에 이주한 것도 또한 그런 까닭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저 팔장을 끼고 있지는 않았다. 한쪽으로는 소학교의 학생을 가르치며 교회의 남녀 신도를 인도하고, 또 한쪽으로는 안중근전을 저술하였다.
그때 나의 여섯 식구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나의 일에 오원 삼십전을 지출했다는 학교의 년종결산이 설명해준다. 신접 살림에 식량의 구조는 동지들에게서 고맙게 받으면서도 그렇게 곤궁을 느끼었으니, 이동휘 선생의 가정 생활도 물론 그랬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것은 달게 여기었고, 동지들의 부담이 과중한 것을 돌이켜 미안하게 보았다.

이후 1916년 중국으로부터 21개조 요구를 승인받은 일제는 북간도 일대의 반일인사들의 체포에 열을 올렸다. 용정 일본총영사관은 이동휘의 합마당 방문 정보를 입수하고 6~7명의 형사들을 급파했다. 이들은 하마탕의 이동휘 본가를 덮쳤지만, 이동휘는 미리 탈출해 체포를 면했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계봉우가 체포되었다. 계봉우는 '꿈 속의 꿈'에서 집에서 끌려나오면서 가족들과 이별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집을 떠나갈 때 어머님의 낙루하시던 그 정경도 애가 끊어지는 듯 했고 품속에 안기어 자던 여섯 살 먹은 베드로가 뒤를 따라 나오면서 발을 구르며 울던 그 형상.... 만일 그 애가 죽지 않았다면[3] 지금에 그 일을 옛말 삼아 이야기나 할 터인데, 나를 보지 못하고 죽은 그 원한은 나의 가슴에 못을 박은 듯하다.

계봉우는 '메이지 29년 법률 제 80호 청국급 조선국 재류 제국신민취체법 제1조'에 의거하여 1916년 11월 28일부터 3년간 중국 재류금지 명령 처분을 받고 함경북도 회령군으로 압송되어 일본헌병분대에 인도되었다. 그는 길림성 연길현 배채거우, 연길현 국자가(延吉縣 局子街)[4],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延吉縣 六道溝 龍井村)[5]과 함경북도 회령군, 청진부, 함경남도 원산부 등에 있던 일본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마침내 경기도 경성부 왜성대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있던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 경찰에게 압수된 안중근전 초고와 관련해 취조를 받았으며, 특히 1916년 7월에 안중근전의 발간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하루 머문 사실에 대해 집중 추궁을 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치안법 제 5조' 위반으로 '영종도 1년 금고' 처분을 받아 경기도 부천군 영종면 운북리 예단포말(현 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 영종도 예단포)에 1년간 유배된 후 고향 함경남도 영흥군으로 돌아와 3년간의 거주제한을 받았다.

1918년 12월, 고향에서 거주제한을 받고 있던 계봉우는 함경남도 덕원군 적전면 당상리(현 강원도 원산시 적천동)에 있던 동지 강기찬을 방문했다가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을 만났다. 그는 강기덕으로부터 경기도 경성부에서 대중적인 항일운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봉우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수속을 밟는다는 핑계를 대고 1919년 2월 27일 상경하여 남대문 안 봉래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의 신학생 숙소인 신행여관에 머물렀다. 이윽고 3.1 운동이 발발하자, 계봉우는 시위에 가담했다. 그는 만세시위운동 지휘 책임자인 강기덕의 요청에 따라 경성부 남대문통5정목(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세브란스병원 밀실에서 선언서 초안을 집필하여 건네줬다. 이후 기차를 타고 평안남도 평양부로 갔다가 귀향한 후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자신의 망명을 도와줄 차장로(車長老)를 만났고, 차장로의 소개로 강우규, 최자남(崔子南)과 교제한 뒤 191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함께 망명했다.

계봉우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며칠 머무는 동안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했다. 이후 모친 등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북간도 하마탕을 잠시 들렀고 3.1 운동 이후 조직된 북간도 국민회와 연계하여 북간도 지역의 여러 항일단체들을 통합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북간도 국민회의 요청에 따라 유예균(劉禮均)과 함께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된 그는 북간도에서 20일 가량 머물렀다. 계봉우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뒤 철혈광복단 단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당시 철혈광복단 일부 단원들은 국민의회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통합되는 걸 반대했고 계봉우가 상하이로 가는 걸 저지하려 했다. 계봉우는 이러한 갈등에 직면하여 한동안 고심하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했다. 계봉우는 '꿈 속의 꿈'에서 상하이로 가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국민회에서 대표를 상하이로 파견한 것이 전날의 일이라면 철광단에서 나에게 대한 정지 운동은 오늘의 일이니, 일에는 선후가 있는지라. 앞서의 것을 좇아야 할까? 뒤의 것을 좇아야 할까? 상하이 임시정부는 전민족의 의사로서 조직된 기관이라면 국민의회는 아령에 거주하는 조선민족, 그것도 소부분의 의사로서 조직된 기관이니, 의사에는 다소가 있는지라. 전체적 의사를 존중하여야 할까? 부분적 의사를 존중해야 할까? 내가 기어이 상하이로 간 것은 일의 선후와 의사의 다소를 정당히 택한 것에 있었다.

계봉우는 1920년 말 상하이에 도착했고,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과 독립운동사 재료수집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상하이에서 <독립신문> 주필인 이광수의 청탁에 따라 1920년 1월부터 5월까지 거의 매호에 걸쳐 민족운동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는데 특히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으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를 발표했으며,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아령실기(俄領實記), 김알렉산드라 소전, 의병전을 각각 발표했다.

1920년 4월 19일, 임시정부는 계봉우를 서간도 파견원으로, 안정근과 이탁을 북간도 파견원으로 선정했는데, 이는 서북간도와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세력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계봉우의 멘토였던 이동휘이승만 대통령이 미주 지역의 독립애국금을 독점하는 것에 반발해 이승만 불신임 운동을 전개하자, 계봉우는 차츰 임시정부에 마음이 떠났다. 이동휘는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추구하면서 계봉우가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게 했다. 대동단은 국가 평등, 인종평등, 세계평등의 이념을 가진 단체였다. 하지만 계봉우는 대동단에 대해 "그 목적을 완성할만한 학설의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단원들을 결속할 만한 규율조차 없는 것이 나에게 불만을 주었다"며 탐탁지 않게 여겼다.

2.2. 공산주의자

그러던 1920년 4월, 계봉우는 김립의 권고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의 <사회주의신수(社會主義神髓)>를 탐독했다. 그는 회고록 '꿈 속의 꿈'에서 이 책을 읽은 뒤 자신의 길이 사회주의에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내가 사회주의 서적을 처음으로 보고 그것을 애동하는 중에서 이런 각오가 있게 되었다. 조선 민족이 일본의 기만에서 해방되어 만일 완전한 독립을 얻자면, 만일 진정한 자유를 누리자면, 그러고서 또 자손만대에 가장 안전한 생존권을 전하자면 사회주의적 혁명밖에는 다른 길이 더 없다는 그것이 입당의 동기가 되었다.

이리하여 계봉우는 한인사회당에 입당했고 그해 5월 초 임시정부 북간도 파견원 직을 사퇴했다. 이후 한인 사회당은 러시아의 지원금을 받은 뒤 1920년 9월 초 한인사회당 당대표대회를 개최하고 당의 명칭을 한인공산당으로 개칭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이동휘는 한인공산당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김립은 이한영, 김만겸, 안병찬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인공산당은 대회가 끝난 후 모스크바이르쿠츠크 등 러시아에 파견할 대표로서 김립, 이한영, 그리고 계봉우를 선정했다. 이들의 임무는 국제공산당에 원동의 상황과 한인공산당의 조직을 보고하고, 이르쿠츠크에 원종의 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그곳의 고려공산당체중앙간부와 협의하여 장차 전 한인 공산당 조직 문제를 협의하고, 임시정부 특사 한형권과 당대표 박진순의 교섭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계봉우는 보이틴스키가 이르쿠츠크의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보내는 밀서를 휴대한 차 9월 23일 상하이를 떠났다. 그는 10월 말 또는 11월 초 김립과 함께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모스크바로부터 온 박진순과 한형권을 만났다. 이후 그들은 조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에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공산당 조직을 후원할 동아총국(東亞總局)을 조직하기로 했다. 또한 그들은 레닌 정부로부터 박진순과 한형권이 받아낸 40만 금 루블을 상하이의 한인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간부들이 사용하기로 했다.

1920년 12월 2일, 원동공화국 내의 한인공산주의단체들의 주요 간부인 장도정, 김진, 박창은, 권화순, 박애, 조응순, 그리고 계봉우 7명이 치타시에서 회합하여 원동부 내에 한인부를 조직하기로 했다. 한인부는 5두제로서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이 위원으로 되었고 조응순과 권화순은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계봉우는 의장으로서 한인부의 간부를 선출한 이 회의를 주재했으며, 한인부 위원과 하인부 규정집 작성을 위한 3인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한인부 내에 서무부, 선전선동 출판, 조직훈련부, 재정부, 비공식부 등의 부서를 두기로 했다. 또한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단체 중앙간부와 연해주의 한족 공산당에 대해서는 중앙위원회를 해산하고 지방위원회로 개칭할 것을 권고하기로 했다.

1920년 12월 14일, 한인부는 러시아 공산당의 관할하에 있는 한인공산주의 단체들을 자치적인 단일체로 분립하며, 고려공산당중앙위원회가 창립될 때까지는 임시로 러시아공산당 원동부 한인부에 직접 복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러시아 공산당 및 국제 공산당과의 관계에서 앞으로 조직될 '전한 공산당'의 독자성을 상정한다는 것으로, 러시아 공산당원 신분을 유지한 채로 러시아의 동양비서부의 지휘와 명령에 복종하기로 한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단체중앙간부의 뜻과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이후 계봉우는 1921년 1월 16일에 열린 한인부 정기회의를 주재하고 박애, 장도정과 함께 3인으로 구성되는 간부회의 위원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선전선동 출반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단체중앙간부는 한인부의 결정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미 1920년 말에 대한국민의회를 장악한 이르쿠츠크파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계봉우 등 한인부 인사들을 출당 조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동양비서부 책임자 보리스 슈미아츠키는 1921년 2월 8일 치타에서 한인부 간부들을 만나 러시아와는 별도로 당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그들의 뜻을 거부하며 "절대로 공산당이나 군인이나 막론하고 대의회는 이르쿠르크에서 할 것이며 한인부 역시 이르쿠츠크로 이전할 것"을 일방적으로 명령했다. 이후 슈미야츠키는 이르쿠츠크파를 일방적으로 옹호한 반면 상하이파 공산주의자들을 권력에서 배제시켰다.

결국 계봉우는 한인 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5월 16일 이르쿠츠크로 연행되었으며, 5월 18일 박애, 김진, 장도정 등과 함께 취조를 받았다. 8월 8일 소비에트 러시아 제5군단과 동시베리아 군대혁명법원은 박애를 5년 징역, 계봉우, 장도정, 김진은 3년의 징역을 선고했다. 재판장 이성이 계봉우 등의 범죄 사실을 제시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피고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등은 신분이 불량한 박일리야와 김민선을 한인군대로 파견하여 박와실리의 총살사건을 발생케 하였고, 필경 군대간에 군장(軍裝)적 충돌을 야기하였고 한인의 사정을 상지(詳知)하지 못하는 극동총사령부의 군대에 사실을 기만하도록 언급함으로써 낭패케 한 일 많고 또 군사상 지식이 없는 박창은을 임시총사령에 선발했기 때문에 군기를 문란케 하였고, 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에서 소집한 한인의병대의회에 응하지 않고 전단한 일 그리고 전한공산당대표소집원(이는 이성, 김철훈, 박승만[6], 채성룡을 말한다)의 원동행을 방해함과 동시에 기만적인 통신을 각 지방에 다수 발송한 일 등으로서 그들은 한국광복운동의 방해자이며 공산 운동의 방해자임과 동시에 세계무산자혁명운동의 최고기관인 제3국제공산당에 대방해를 가하였던 것이다.

이후 계봉우는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이동휘, 박진순, 홍도 등 상하이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해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전횡을 폭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코민테른은 사건 조사에 착수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이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 것을 우려해 1921년 12월에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을 석방시켰다. 계봉우는 석방된 뒤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상하이, 이르쿠츠크 양파 고려공산당의 통합대회에 참석해 '통합고려공산당'의 중앙간부로 선출되었다.

2.3. 말년

그러나 1922년 2월 6일 자신의 동지 김립이 상하이에서 김구를 추종하는 무리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 벌어지자(김립 피살 사건), 계봉우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임시정부의 거두가 비록 이념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제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는데 뜻을 같이했던 동지를 암살하는데 개입한 것에 깊은 회의를 느꼈고, 이후로는 정치에 손을 떼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는 그곳에서 22년 동안 살면서 한인들에게 모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문학사>,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을 집필했다. 그렇게 말년을 조용히 보내던 그는 1959년 7월 5일에 별세했다. 향년 7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계봉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9년 4월 21일, 계봉우와 그 배우자 김야간(1893~1968)의 시신은 황운정 지사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7] 3층 320실 144호에 안장되었으며, 여기에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가 사용되었다.

2.3.1. 6.25 전쟁에 대한 논란

계봉우는 1952년 2월 11일 탈고한 <조선역사> 3권에서 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6.25 전쟁미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으로 인해 야기된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따라 반일투쟁의 정신으로 미 제국주의도 물리쳐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재작년 가을에 조선역사 제7편 즉 반일투쟁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미구(米寇)[8]가 청천강의 좌안(左岸)에까지 침입하였던 때이었다. 일면적으로 그것을 본다면 조선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최후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는 자부심이 나로 하여금 사필(史筆)을 잡게 하였다.
미구(米寇)는 일본제국주의의 엎드러진 전철을 신통히 밟고 나간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하고서 저의 패권을 전 세계에, 먼저 아시아에 붙엄 수립하려는 환상 중에서 덤베다가 그만 패망하고 말앗다. 온흘에 미구(米寇)가 남선(南鮮)으로 붙어 북선(北鮮)까지 강점하기 위하여, 그러고서 태평양 연안의 패권을 전취하기 위하여 고금에 유례 없는 비행을 조선에서 범하고 있다. 패권 갈망자의 패망은 우리 시대에 잦우 보는 바이다. 제1차 전쟁에서는 게르마니야 웰리암의 패망을 보앗다. 제2차 전쟁에서는 게르마니야 ○○○○와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을 보앗다. 제3차― 조선전쟁에서는 미제국주의의 패망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역사의 실증이며 예언이다.
이현주, 계봉우의 사회주의사상과 역사서술 체계: 독립운동사 서술체계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한국학연구 2011. vol., no.25, 142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저런 인물을 굳이 현충원에 안장하여야 하느냐"는 시각이 존재하였으나, 보훈처가 훈포장 추서, 현충원 안장 등의 예우 대상으로 잡은 독립운동가의 기준에는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된 사람으로서 북한정권 창건에 기여하지 않은" 인물을 대상으로 삼으며, 계봉우의 말년 행적에서 종북주의적 요소가 일부 보이기는 하나 북한 정권에 부역한 행적은 없는 점이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에 부합하므로, 계봉우의 시신은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 저서

3.1. 역사

3.2. 문학

4. 여담

증손인 계 에두아르드가 2017년에 한국에 입국해 일용직 근로자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22년 8월 15일, 증조부의 공적을 기려 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고, 비로소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아직 한국어가 서툴지만 쉬는 동안 틈틈이 한국어를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1][2]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다싱거우진(大興溝鎭) 하마탕촌(蛤蟆塘村).[3] 계봉우의 아들 베드로는 1910년 또는 1911년 생으로 큰딸 계화림(1909년생) 다음으로 태어난 장남이었지만, 계봉우가 국내로 압송된 지 얼마 후에 사망했다.[4]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5]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6]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승만과 동명이인이다.[7] 매장 부지는 포화상태인데다 계봉우는 이미 유해가 화장된 상태이므로 제1충혼당에 안장되었다.[8] 쌀 미에 도적 구로, 미 제국주의 도적떼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