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노을룡(盧乙龍) |
이명 | 노월룡(盧月龍), 노일룡(盧一龍) |
생몰 | 1905년 3월 3일 ~ 1935년 |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
사망지 | 중국 정저우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국가보훈처 기록에 따르면, 노을룡은 1895년 3월 28일에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홍성읍사무소에 보관된 노을룡 제적등본에 따르면, 노을룡은 1905년 3월 3일 홍성읍 오관리에서 부친 노영선과 모친 장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하여 암살 및 파괴 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성사시키고 군벌 토벌 작전을 단행하자, 그가 속한 의열단 역시 의열투쟁에서 대중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이에 따라 1924년 4월 김원봉이 광동에 머물면서 국민정부에게 한중연합을 통한 반제, 반일투쟁을 강화할 것을 역설했고, 1926년 봄 장제스로부터 황포군관학교의 입교를 허락받았다.1926년 3월 의열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노을룡은 보병과에 소속되어 전술학·군제학·병기학·군대정치공작 등을 학습하고 10월에 졸업했다. 졸업 후 국민혁명군 초급장교로 임관했고, 김원봉과 함께 광동에 머물며 의열단을 혁명정당(革命政黨)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동년 12월 일어난 광저우 폭동에 박건웅 등과 함께 참여하여 반일혁명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1927년 4월 왕자량(王子良) 등과 함께 의열단 남창지방집행위원회(南昌地方執行委員會)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동년 8월 난창 폭동에 참여해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 사변을 단행한 후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그는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의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중연합방안을 타진했다. 1932년 장제스의 원조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의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가 설립되자, 그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 대부실(隊附室) 교관으로 부대교련 등을 담당, 사관생도를 양성·파견하여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했다. 1933년 말에는 난징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육총대 제4대 교관으로 근무했고, 1935년 베이징에서 의열단원 김시현 등과 함께 한인 부일배를 처단했고, 하남성 개봉에서 일제 비밀 정보원인 중국인을 처단했다.
1935년 7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노을룡은 중국 정저우에서 피살되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남 출생으로 15, 16년 전에 상해에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의열운동에 종사해 왔는데, 그의 동창인 중국인에게 자금의 융통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권총으로 사살 후 다른 곳으로 가다 그 역시 총살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노을룡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