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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5년 5월 27일 |
대한제국 경기도 이천군 이천읍 창전 (現 경기도 이천시 이천읍 일대) | |
사망 | 1929년 2월 27일 (향년 23세) |
일본령 조선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제166호(봉안묘) |
본관 | 연안 이씨(延安 李氏) |
상훈 | 1962년 3월 1일(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사후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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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일제강점기의 독립유공자 겸 스님.2. 생애
그는 1905년(광무 9년) 5월 27일[1] 경기도 이천군 이천읍 창전에서 유학자 이일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좌성(佐聖)이고, 법명은 성좌(聖佐)다.그는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1923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했다. 만주에서 대한통의부에 가입하고 지린성 어무현에 있는 신명무관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속·직할부대로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자, 1924년에 가입해 제2중대 특무정사로 활동했다.
1925년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참의부원 다수가 전사한 고마령 참변 이후 그는 1926년 5월 국내로 다시 돌아와 의열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황해도 평산군, 경성[2], 경기도 안성군, 여주군, 이천군 등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순사·친일 부호·친일 토호 처단과 면사무소·헌병분대·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일경의 삼엄한 감시와 경계 속에서도 선생의 활동은 1926년 11월까지 계속됐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3]의 밀고로 끝내 일경에 붙잡혀,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형량이 강화된 소위, 치안유지법 1조에 의거 사형을 언도받고, 1년 후인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향년 23세)
참고로 그가 교수형으로 순국하기 직전, 남긴 마지막 유언이 구전으로 전해진다.[4]
내가 기필코 대한 독립을 성취시키려고 하였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가게 됨이
원통한 즉,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기를 바란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가게 됨이
원통한 즉,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기를 바란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사후 추서했다. 2015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사후 그의 유해는 외부(외지)에 묻혀있다가, 정식으로 독립장 추서 받은 것을 토대로 1976년 10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제166호에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