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徐丙熙 |
본관 | 달성 서씨 |
출생 | 1866년 | 1867년 |
경상남도 양산 | |
사망 | 1909년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1. 인적 사항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인 서병희(徐炳熙/徐丙熙)는 경상남도 양산(梁山) 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했으며 향리에서 한의업에 종사하였다.2. 주요 활동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에 이은 군대해산이 일어난 이후 서병희는 임진과 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許蔿)의 휘하에 들어갔다.1907년 12월에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이동하여 의거하라는 명을 받은 그는 해산군 51명과 함께 남하한 끝에 윤정의(尹政儀)와 제휴하여 울산과 경주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의병항전을 벌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윤정의와 결별한 서병희는 양산으로 향해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지속하며 양산군 하서면과 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에는 경남의 산청(山淸)으로 활동지를 옮겨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휘하의 부장(部將)으로서 의병장 이학로(李學魯)와 함께 산청군 두량곡(斗量谷) 일대에서 일군수비대와 전투하며 큰 성과를 거머쥐었다.
몇 달간 이학로 부대의 향도관(嚮導官)으로 임하던 그는 1909년 독립하여 소모장 이성로(李聖老), 도포장 이춘실(李春實), 파수장 이국선(李局善), 연습장 김재익(金在益) 등으로 편성한 부대를 이끌며 경상남도 전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함안군 군북면의 일군수비대와 경찰서에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규탄과 의병활동의 정당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칠원주재소를 습격해 일순사를 중상 입혔으며 군자금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잇따라 창원군 양전면의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을 얻은 서병희는 재무주사를 처단한 뒤 의령(宜寧)과 고성(固城) 등지에서 일경을 교란시키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9년 하반기 즈음 밀고로 인해 마산주재소의 일경에게 체포된 서병희는 향년 43(42)세로 순국하였다.
그의 공훈을 기리는 의미에서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1:독립유공자 전자사료관
참고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3:양산시민신문
참고4:디지털진주문화대전
참고5:디지털양산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