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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3 23:42:15

지달수

파일:스크린샷 2025-01-03 234027.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달수(李達洙), 이경옥(李慶玉)
동수(東洙)
출생 1909년 8월 5일
한성부 북서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사망 1969년 5월 16일 (향년 5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89호
본관 충주 지씨 (忠州 池氏)[1]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09년 8월 5일 한성부 북서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지청천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용자[2]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성부 내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

일찍이 아버지 지청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고, 1932년 한국독립군에서 중사(中士) 급 분대장으로서 한·중 연합군의 일원으로 지린성 솽청시(雙城市)[3]·아청현(阿城縣)[4]·우가둔(牛家屯)[5] 등지에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며 만주군과 교전했다.

그 뒤 한·중연합군이 와해되고 독립군의 근거지가 중국 본토로 옮겨지자, 아버지를 따라 난징으로 가서 둥관터우(東關頭)[6]에 거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민족혁명당 군사부원이 되었다. 그리고 1938년 봄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화베이쑤이위안성(綏遠省) 지구 공작대장으로 특별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주계(主計) 및 경리로 임명되었고, 그해 11월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간부에 보임되었다. 1941년 2월 나태섭·고시복·유해준(兪海濬) 등과 함께 쑤이위안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민혁명군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으며, 쑤이위안성 일대부터 관동군 점령 하에 있는 허베이성베이징·톈진·탕산지구와 장자커우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전방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전에 장자커우에서 포섭했던 조선인 청년 최준(崔俊)이 관동군 헌병대에 자수하여 밀고함으로써 동지들이 검거되자, 산시성 시안으로 복귀하여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평수(平綏)[7]지구 적 후방 공작단 부단장에 임명되어 활동했고, 1943년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장 및 난징 임시편입 지대 부대장을 역임했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가,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다.

1969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 경력공파 33세 수(洙) 항렬.[2] 윤기희(尹基喜)의 딸이다.[3]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솽청구(雙城區).[4]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아청구(阿城區).[5] 쌍성보와 약 20km 떨어져 있다고 하나 현재 어딘지 확실하지 않다.[6]중국 장쑤성 난징시 친화이구(秦淮區) 둥관터우샤오취(東關頭小區).[7] 베이징의 옛 이름인 베이핑(北平)과 후허하오터시에 있던 쑤이위안(綏遠)까지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