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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1 22:40:25

김이직

<colbgcolor=#0047a0> 출생 1875년 7월 17일
평안남도 용강군
사망 1920년 4월 7일
연해주 니콜리스크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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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 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70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한문을 수학했으며, 1900년 향리에 명신학원을 설립해 육영 사업을 하였다. 1904년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했으며,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로 망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자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쳤으며 애국지사인 김치보가 운영하고 있던 덕창국이라는 약국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출처]

김이직은 1912년 한인 학교인 동흥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주도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13년 1월 노동회의 발기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후 이갑 선생의 치료비를 모금하기 위해 니콜스크 지역 책임자를 도맡았다. 같은 해 안중근 의사 전기 간행을 위한 기념사진 판매 책임자로도 활약하였다. 러시아 2월 혁명 후인 1917년 10월에는 니콜스크 한인회 발기인 대표로서 한인회를 조직하였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6월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 니콜리스크 대표로 참석하였고 상설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3·1 운동 직전에 전로한족중앙총회가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 상설 의원으로 선출되었다.[출처]

1919년 9월 니콜리스크 지방의 부락에 전염병이 유행하게 되자 엄주필등과 함께 임시위생회를 조직하였으며 동포의 보건에 힘을 기울였고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해조신문의 재정후원을 담당하며 발간을 주도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단 조직에 참여하여 강우규 의사의 총독 암살 계획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무장 투쟁이 활발해지면서 최재형(독립운동가), 김이직, 엄주필 등이 한인 빨치산 부대들에 각종 군수품들을 공급하기도 했다. 1920년 4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국내 침투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만주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김이직은 독립군을 모집하고 군수품 공급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0년 일본군은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시베리아에 출병하였으며 러시아 적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니콜리스크를 급습하여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해주 4월 참변이 발생하고 김이직은 최재형, 엄주필, 황경섭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결국 김이직은 1920년 4월 7일 재판도 받지 못하고 일본군에 의해 총살 순국하였다.[출처]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세계한민족문화대전[출처]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