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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47a0> 출생 | 1898년 10월 17일 |
| 충청남도 직산군 이동면 모전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모전리) | |
| 사망 | 1969년 8월 11일 |
| 충청남도 천원군 |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유민식은 1898년 10월 17일 충청남도 직산군 이동면 모전리(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모전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유정근(兪政根)이며, 호는 만송(晩松), 후단(后檀)이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안고 고국을 떠나 만주와 해삼위(海蔘威)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국권회복 운동을 수행했다. 1919년 3.1 운동 이전에 상하이로 이동했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그는 홍진·신규식·이명교(李命敎) 등과 함께 임정의정원에 충청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이어 재정심사위원회, 예결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였고, 민단부장(民團部長)에 임명되어 교민(僑民)들의 활동을 통활하였다. 1922년 3월경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의 요청으로 다시 만주로 건너가 군정(軍政) 양면에서 김좌진을 충실히 보좌하였다. 1923년 5월 독립군의 군비강화를 위하여 김좌진의 밀명을 받고 보천교 신자인 신찬우(申贊雨)와 함께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는 '대한독립군총사령부파견 군자금 모집책' 또는 '김좌진장군의 밀사'로 불리었는데, 주로 김좌진의 본관인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으며, 당시 교세가 대단하던 보천교주 차경석을 만주로 데려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김좌진의 동생인 김동진을 비롯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김완규(金完圭), 그리고 김항규(金恒圭)·김병희(金炳僖)·신찬우(申贊雨) 등과 접촉하여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며,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11월 27일 출옥하여서는 "썩은 만주밤(滿洲栗)을 7일이나 먹고 단식동맹운동을 벌였다"고 옥중투쟁의 일화를 말하기도 하였다. 출옥후에는 일경의 끈질긴 감시를 따돌리고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1925년 3월에 김혁(金赫)·김좌진 등이 영안현에서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다. 그는 중앙집행위원회의 경리부 위원장에 선임되어 무력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하얼빈 일영사관경찰대는 중국 군벌의 지원을 받아 중동선 석두하자에서 신민부의 비밀본거지를 포위 습격하여, 1927년 2월에 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하여 그와 본부 직원을 모두 체포했다. 그는 국내로 송환된 뒤 1928년 6월 13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평양복심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1929년 7월 2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이 시기 그와 함께 마포 형무소에서 복역했는데, 훗날 회고록에서 유민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유정근(兪政根) 선생은 과묵한 편이고 인품이 중후 온화해 보이나 항상 눈빛만은 빛나고 있었다. 글씨를 잘 써서 목공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형무소에서 나가는 간판은 모두 그 분이 만들었다. 말기에 몸이 몹시 쇠락해진 것 같다.
1934년 5월, 유민식은 옥중에서 수감자들을 독려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게 했다가 간수들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받고 심한 고문을 당했다. 1942년 1월 형기를 1년 남기고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며, 이후 은거 생활을 하다가 1969년 8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민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