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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04:29:33

조경환(독립운동가)

파일:조경환.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조정거(曺丁擧)
이명 조준환(曺準煥)
경락(敬洛)
묵헌(默軒), 대천(大川)
본관 창녕 조씨[1]
출생 1876년 2월 14일
전라도 광주목 기례방읍면 누항리
(현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2]
사망 1908년 12월 19일
전라남도 광주군 소지면 강동리 어등산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어등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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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조경환은 1876년 2월 14일 전라도 광주목 기례방읍면 누항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서 아버지 조병주(曺秉周)와 어머니 진주 강씨 강영규(姜永奎)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재일(王在一)이 편찬한 <전병장 조경환 순국사실>에 따르면, 조경환은 8살 때부터 25살까지 유학을 배웠으며, 23세부터 30세까지 전국의 명산대천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는 최익현의 문인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최익현은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관료 생활을 하거나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활동하던 조경환과 대면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조경환이 전국을 돌아다니던 1900년 초반에 최익현과 대면했을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사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는 현재로서는 없다.

그렇게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던 그는 을사조약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귀향한 후 시국을 관망하는 한편 서당의 훈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10월 창평 출신의 고광순 의병장이 지리산 연곡사에서 전사하자, 조경환은 고광순을 추모하는 만사(挽詞)를 지었다.
백발이 되어서도 충성스런 마음으로 의로운 깃발 세웠건만
홀연 불어오는 북풍에 무궁화꽃 떨어지네.
광산모임 약속있으나 어디로 다 갔는지
등불 앞에 잠들지 못한 나 홀로 슬퍼한다네.
당나라 장수 허원이 우리나라에 다시 태어나
의로운 북소리 연곡사 골짜기 드높였건만
국운이 비색하여 능히 승전하지 못했으니
서쪽 바람에 만장을 쓸 제 눈물만 가득하네.

전라남도 경무과가 1913년에 기록한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 따르면, 조경환은 전남 나주 출신의 의병장 김준(金準)과 만나 시사를 논한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 감옥에 수일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고 한다. 이후 조경환은 1907년 음력 12월 중순 전남 함평군 해보면 배암동에서 김준 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함평읍,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월암산, 광주 어등산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때로는 여러 의진이 합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때 조경환은 연합의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던 1908년 음력 3월 25일 어등산 전투 중 김준 의병장이 전사하자, 조경환은 함평의 당산촌 나평집 가옥에 잠적하며 일본 군경의 추적을 따돌렸다. 이후 그는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전해산의 부대와 합세해 200명의 의병대를 재편성했다. 전열을 정비한 조경환과 전해산은 두 개의 의진으로 나눈 뒤 서로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며 활동했다. 조경환은 먼저 김준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의 시신을 어등산에 안장한 뒤, 인근의 용진산 석봉에서 주둔한 후 광주 흑석리의 순사대를 공격했다.

조경환 의진은 1~2백 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하여 전라남도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조경환 의병장은 이들을 8~9명씩 단위로 9개조로 편성하여 통솔하였다. 아울러 그는 일본 군경에 대한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 30명을 운용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제 30년식 보병총과 기병총 4정, 한병총(韓兵銃) 12정, 천보포(千步砲) 8문, 개조한 화승총 약 60정, 쌍안경 등을 보유하고서 일본 군경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요새 산병호(散兵壕)를 견고하게 구축하고서 일제 군경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1908년 12월 24일 대한매일신보는 조경환 의진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본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 부근에서 의병장 조경환씨가 인솔한 약 200명이 충청남도 주재 日(일) 헌병 및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또한 1909년 1월 15일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본월 10일 광주군 서방 30리 되는 산중에서 의병장 조경환 씨가 인솔한 의병 50명이 해지 日(일)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 조경환은 대부분의 부하를 일시 귀향시키고 귀가하지 않은 의병 50명을 이끌고 어등산에 주둔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 3개 부대는 야마다 소위의 지휘하에 1908년 12월 19일 오전 10시 40분경 습격을 가했다. 조경환 의진은 이 전투에서 전사 20명, 체포 10명이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30년식 보병총 1정, 동(同) 기병총 1정, 한병총 4정, 화승총 12정, 5연발 엽총 1정을 빼앗겼다.

이때 조경환은 총탄을 맞고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자 목에 걸린 망원경을 벗어 놓고 왼쪽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던 의진의 명단을 불사른 뒤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순군 북면 안심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10월 16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부인 이동임(李同任)과 함께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경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화순파 24세 환(煥) 항렬.[2] 지금의 신안동 693-2번지에 생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