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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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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2. 이승만개신교3.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

1. 여담

파일:b70037c6ae0d60531e4bd137cb74b857.jpg 파일:Korean Poetry by Syngman Rhee.png [1]
파일:f95179af38fd6d7bdfeae737daf29801.jpg
파일:Syngman Rhee's Painting.jpg
1911년, 이승만이 그린 채색수묵화. 옆에 한자로 '지재 대인[9]의 환갑연을 축하드립니다. 부귀하고 장수하십시오. 우남 이승만. 신해년(1911년) 국추(9월)'라고 써있다. 좌측 상단에는 '박사. 자는 치성. 호는 우남. 전주 사람. 양녕대군 16대손. 미국 화성돈(워싱턴) 대학 졸업생'이라는 작품 설명이 달려 이 전 대통령이 그린 그림임을 밝히고 있다.
파일:Syngman Rhee with his pet Happy.jpg
파일:Syngman Rhee and Francesca Donner Playing.gif
1952년 1월 1일, 새해부터 최전방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추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두툼한 파카 후드 모자를 꽉 쪼여서 대통령이 당황하고 있다.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
파일:이승만 얼굴 변화.jpg

2. 이승만개신교

생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종파는 감리회[32]이며,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33] 조선시대에 태어난 그는 그 시절 태어난 여느 사람들처럼, 과거시험을 공부하고 유학(儒學),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불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와도 친화성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고종의 전제왕권과 친러정책에 반대하여 만민공동회에서 고종이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입헌군주제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반역죄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34] 한성감옥 옥살이 당시 1901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원래 미국 선교사들과 만남을 가지던 시절에는 성경에 큰 관심이 없다가 감옥에 갇혀있고 나라의 앞날이 어두웠던 시절 마음이 힘들어 성경을 감옥으로 들여와서 읽기 시작한 뒤 감명을 받아서 개종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도 기독교 관련한 얘기가 잠깐 나온다. 정동교회에서 장로직[35]을 맡으며 교회 내에서도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미국 기독교 사회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인들에게 105인 사건 등과 같은 일본의 한국교회핍박 사실을 알리며, 미국 기독교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거나 청중 강연을 통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

광복 후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개신교를 우대해주기 시작했고, 대한민국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제헌의회 개헌식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축사를 하거나, 목사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이 국회 시작 전 기도를 맡기도 했다. 이 후 취임식에도 매번 목사가 취임선서를 하기 전 기도를 했고, 크리스마스공휴일로 지정했다.[36][37] 대통령직 사임 이후 하와이로 간 이후에는 하와이에 있는 한인기독교회를 다니다가 사망한 뒤 장례예배 등은 정동제일교회에서 치러졌다. 당시 장례는 전통 상여식 장례식과 개신교식 예배를 혼용한 형태였다.[38]

다만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이승만 외에도 개화기 이래 정치가와 지식인들 가운데 개신교인들이 많았다. 개신교를 통해서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 이후에 대립하기도 했던 김구[39]와 독립운동기에 이승만과 협력, 갈등 관계에 있었던 안창호 등도 개신교인이었고, 정치적/민족적으로 중요한 상황에 신앙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40]

그런데 이러다 보니 훗날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의 중심이 되는 세력이 기독교 우파가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3.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

파일:이승만박정희.jpg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박정희 5사단장
현대에는 두 사람의 지지세력이 겹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에 비해서 두 사람의 행보는 상당히 다르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으나 박정희는 만주군에서 복무했고, 광복 후에도 이승만은 극렬 반공주의자였던 반면 박정희는 남조선노동당에서 군사총책으로 활동한 바 있다. 특히 이 남로당 활동으로 인해 사형을 당할 뻔까지 했었으니 개인적으로 박정희가 이승만을 좋게 볼 리 없었고, 이승만 역시 남로당 활동을 한 박정희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즉, 이승만과 박정희는 근본부터가 서로 반대였으며, 서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박정희가 집권했을 때 이미 4.19 혁명으로 하야했음에도 여전히 인기 있던 이승만은 그에게 장벽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하였으며 장면 총리는 죽어서야 집 밖에 나오도록 했다. 당시 상황이「60∼64년 외교문서」공개를 통해 드러났는데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귀국을 고집하면 그와 프란체스카여사의 여권을 취소하라』며 절대 귀국치 못하게 호놀룰루 영사관에 강력지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이승만의 실정과 무능은 경멸의 대상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고 줄곧 비판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실제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군인의 횡포, 여기서 비롯되는 인사 적체 문제 등 이승만 정권의 총체적 난국과 문제점들을 집권기에 직접 겪은 바 있다. 1차적으로는 여순반란사건이 박정희와 이승만의 앙금을 만드는데 기여했고, 2차적으로는 전후 진급심사에서 곽영주가 자신의 남로당 행적때문에 진급을 누락시키려하자 백선엽이 말려 겨우 진급한 것 때문에 박정희와 이승만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발췌 개헌 당시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상관인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수립한 바가 있다. 즉 5.16 군사정변은 두 번째 계획이었다. 본래 5.16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계획되었다. 시행날짜는 3월 15일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8일이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이 송요찬인데 그 송요찬이 미국으로 가는 날이 5월 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8일로 정한 것이다.[41]

이승만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는 이승만에 대해 매우 안 좋게 평가했다.[42]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 즉 박정희가 이승만을 계승했다는 식의 주장들은 대다수 비공식적이거나 지엽적인 증언들에만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는데, 당연하게도 이승만의 장례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었다. 거기서 양자와 의견 조율이 안 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박정희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독립운동가와 그 일족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비하했다.#[43]

그외에도 이승만 정부의 삼백 산업 등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갈아업는 동시에 수출주도산업화로 전환시키고 혁명 재판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무력으로 지탱하던 정치 깡패들도 재판을 통해 다수 제거하는 등 실질적인 정책 면에서도 이승만 정부를 계승하는 것보단 단절하는 특징이 강했던 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재임 기간이 두 번째와 첫 번째로 길다.[44] 또한 보수, 우익 진영에서는 찬사와 높은 평가를,[45]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비난을 받는다. 다시 말해 70년 현대사에서 절반 가까이 재임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굵직한 행적을 남긴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1] 1947년 2월 19일, 이승만이 도미하여 워싱턴 D.C.의 칼튼 호텔에서 쓴 한시. "내 염원은 3천만 동포가 함께하는 통일된 나라를 이룩하는 것. 그러면 내 임무는 끝나고 여생을 산간의 아름다움에 의탁해 고요와 평안속에 살련다."[2] 프린스 문서로. 물론 조선과 대한제국에 실제로 서양의 프린스에 비견되는 작위 내지 칭호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한국사를 모르는 서양인들에게는 17대 전에 왕실에서 갈라진 사람이 프린스라도 말이 안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3] 미국이 막 성장하던 시절 이런 평민 거부들은 유럽의 귀족들과 결혼하는게 일종의 유행이었다. 모 왕이 미국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까지 포기한 사례도 있을정도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이런 시대상이 표현됐는데, 여주인공인 로즈가 미국의 모 거부에게 팔려가듯 결혼할 예정이었다.[4] 순종황제의 계후(繼后). 한국의 마지막 황후다.[5] 齊(제)로 썼지만 거처를 뜻하는 齋(재)를 대신해서 쓰는 경우도 있어서 수인'제'가 아니고 수인'재'로 읽는 것이 옳다.[6] 해리스 목사[7] 신한민보[8] 현상금 액수에 대해 공식 확인된 바는 없다.[9] 중추원 의관을 지낸 지재(之裁) 이규익 선생의 환갑잔치 때 61명의 유명 인사가 선물로 만든 이 서화첩은 '헌수첩(獻壽牒)'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책으로 이 전 대통령의 채색수묵화와 글씨는 물론 해사 김성근, 동농 김가진, 우하 민형식, 경석 이우면 등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구한말 고위관료도 대거 이름을 올렸다.[10] 대학용 추천서만 있는건 아니고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이 미국 현지에서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기를 요청하는 추천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1] 처음에는 1과목을 낙제하여 하버드 대학교 석사학위 취득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과정 입학허가를 받은 뒤에 다시 하버드 대학교에 돌아와서 석사과정을 신청했는데,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이례적으로 낙제한 그 과목만 계절학기에서 재이수하면 석사학위를 주겠다고 했고, 이승만은 그 과정을 재이수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취득과정이 굉장히 이례적임을 알 수 있다. 단, 학위취득은 1910년이다.[12] 한국의 석박사과정은 유럽-미국의 동일 과정보다 다소 오래걸리는 편이다.[13] 그것도 당시 한국 남성 평균 수명이 60년이 채 안되던 때다.[14] 이우 왕자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의 노력이었다. 장남인 이청 명의로 사유화되었다.[15] 맥아더의 부친은 일찍이 일본 주재무관을 지냈으며, 더글라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이미 1905년에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16] 월튼 워커도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이승만이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가 죽었을 때 매우 슬퍼하면서 사고를 낸 병사를 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정은 들었는 듯하다.[17] 애초에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의 방침이 한국이야 어찌되든 전쟁부터 끝내고 보자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사령관이었던 시절에도 그랬으나 2차 대전 동안 비대화된 군대에서 육해공군의 최선임자씩이나 되었으니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18] 밴 플리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상관이었던 리지웨이에게 전선을 북상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리지웨이는 압록강까지 진격해도 미군의 희생이 너무 큰데 비해 전략적 가치는 없고 그저 땅만 더 얻을 뿐이라며 작전을 승인하지 않았다.[19] 동양권 군주가 자신을 가리키는 과인이나 짐, 고 등의 표현도 3인칭이다.[20] Assiated Press[21] 첫째 누나는 단양 우씨에게, 둘째 누나는 청송 심씨에게 시집을 갔다.[22] 양녕대군파 안에서 이승만의 조카뻘 자손 중 이승만과 가장 멀려면 마지막 공통조상이 당연히 양녕대군이어야 하는데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바로 아랫대 사람은 17대손이므로 이를 고려해 계산하면 이승만과 가장 먼 조카 항렬인 사람은 33촌이 된다. 아무리 항렬이 조카뻘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먼 촌수인데 어떻게 양자로 입양되었냐면, 영어를 잘해야 하고 나이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 하고, 아직 미혼이어야 한다는 등 이승만 부부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 초기까지는 양자를 일족 중에서 들이고 진짜 자식으로 취급했다. 이를 보종차원에서 한다고 한다. 물론 제사를 지내게 할 목적으로 빈한한 먼 친족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23] 서구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고도의 문명국을 이루었던 청나라, 조선, 그리고 빨리 개화된 일본에 대해서는 흑인보다 우등한, 이른바 명예 백인 취급을 해 주었다. 히틀러가 손기정과의 악수는 흔쾌히 한 게 그 사례다.(물론 손기정이 메달리스트였던 것도 있지만) 반면 진짜 백인이라도 유대인슬라브족의 취급은 좋지 못했다. 그 당시의 서구 사람들의 인종 구분은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다분히 문명화 수준이나 자기들 마음에 드느냐의 여부에 따른 구분이었고, 이로 인한 폐해는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그 최악의 사례가 르완다 내전이다. 물론 이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청과 한국을 깔보았으며 일본도 마냥 좋아한 건 아니었다.[24] 이승만 사망 소식을 보도했던 대한뉴스에서도 이승만 박사라고 말하고, 지금도 아주 나이 많은 어르신들 중에는 종종 이승만 박사로 호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25] 이것은 대대로 내려온 사회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은데, 조선시대에도 문형이라고 해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사서 영의정보다도 대제학을 역임한걸 더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명, 청 시대 중국도 마찬가지로 (사실상)재상의 공식 명칭이 내각 대학사였다.[26] 특별히 그녀가 조선의 YWCA 선교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터라 이승만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미국 YWCA 전국위원회에서 근무하였다.[27] 林炳稷,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1964, 女苑社, p. 132[28] “맥아더情報의 壽命 : 48時間”, 《月刊中央》, (중앙일보사), 1968년 12월, p. 247-255[29] 같은 19세기 후반 출생으로 1차대전 때 이미 사단장이었고 한 번 퇴역했다가 2차 대전 때 복귀해 6.25까지 현역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태평양 전쟁부터 인천상륙작전정도까지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짬밥이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정도 짬밥이냐면 영미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의 옛 부관 출신이다.[30] 김일성을 만날 볼 생각이 없느냐? 는 기자의 질문에 김일성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와의 만남은 없다고 말한 바가 있다.[31] 당대 활약하였던 대다수의 독립운동가 또는 해외 거주 한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조선인 또는 고려인으로 기재한 사실은 여러 자료를 통해 교차검증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석시 작성한 입국조서에서 입국목적을 고려독립으로 기재한 바 있다.[32]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 개신교도인 대통령은 이승만 포함 윤보선, 김영삼, 이명박까지 총 4명인데, 뒷사람들의 종파는 장로회인 것과 달리 이승만만 유일하게 감리회다.[33] 참고로 정동교회는 소래교회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아펜젤러가 세웠다.[34]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경도된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파들이 많았는데 고종 퇴위와 반러활동은 일본이 의도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훗날 '청년 이승만 자선전'에서 이 때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의 과오라고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박영효처럼 노골적인 친일은 아니었고 일본처럼 근대화를 이루자는 지일에 가까웠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활동하던 대한제국 초기의 이승만의 성향은 친미이자 지일이었으나 그 후 반일로 전향하여 민영환의 대미 밀사로 활약하게 된다.[35] 장로직은 감리회에도 있는 직책이며,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감리회에서는 장로 임직식도 여러번 가졌다. 또한 권사 역시 장로회처럼 여자만 맡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권사직을 부여했었다.[36] 공휴일로 지정된 첫 종교 기념일은 개천절이다. 개천절이 공휴일로 지정되자 그 이유로 크리스마스도 공휴일로 지정됐고 같은 논리로 불교계의 요구에 따라 부처님오신날까지 공휴일로 지정됐다.[37] 다만 이와 별개로 제헌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와 함께 정치와 종교는 분리할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38] 본래 개신교는 장례 내의 미신적 행위를 허용하지 않지만, 대통령의 장례라는 특성상 아예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된 것으로 보인다.[39] 원래는 친한 사이였다. 김구도 처음부터 개신교 신자는 아니었다.[40] 애초에 독립운동가들 중 개신교 신자가 천도교 신자 다음으로 많았다. 당장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목사들만 10명이며, 전도사, 장로 등까지 따지면 더 많다.[41] 다만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데는 군 인사에서의 소외, 진급 지체 등 개인적인 불만과 군의 파벌 및 비리에 대한 반감, 장면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 등이 함께 작용했고, 그 바탕에는 만주군 시절의 경험군국주의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5.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내세우는 '국가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상당 부분 언어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무능한 민주당 정권에 들고일어난 것이라 해석한다 하여도, 5.16 군사정변이 합법적인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한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라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42] 심지어 우익 세력에서 이승만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히는 토지개혁조차 별 효과가 없었다며 비판하고 있다.[43] 실제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독립운동에 몸담은 공산주의자였는데, 미군정 시기에 좌우파 충돌이 있었을 때 우파의 공격에 의해 죽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서 활동한 것도 사실 이런 배경이 있었다.[44] 임시정부시절까지 포함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햇수로 18년, 박정희 대통령이 16년으로 대통령직 자체를 역임해 본 사람 중에는 재임기간이 가장 길긴 하다[45] 정작 이승만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애매한 정책을 펼쳤다.또한 박정희 또한 계획경제중절수술 장려 등 좌파에 더 가까운 성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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