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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33:10

대한민국 환

한반도의 화폐 변천사
조선 문 조선 양 대한제국 원 조선 엔 북한 원
조선은행 원 대한민국 환 대한민국 원


1. 개요2. 시리즈
2.1. 미제 시리즈 (1차)2.2. 이승만 시리즈 (2차)2.3. 세종과 모자상 시리즈 (3차)2.4. 동전
3. 대중문화 속 대한민국 환4. 관련법률5. 외부 링크

1. 개요

대한민국에서 1953년부터 1962년까지 유통시킨 통화. 통화에관한특별조치령에 의거하여 통용되다가, 긴급통화조치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통용이 금지되었다. 보조단위로 1/100 단위인 "전"이 이어받아 지정되었으나 실제로 쓰이진 않았다. 기호는 한자를 사용하여 ''. 한자키를 눌러 변환할 때 '환'이라고 치고 누르면 안 나오고 '원'이라고 쳐야 나온다. [1]

본래 圜의 음은 '원'이었으나, 화폐로 쓰일 때는 다른 '원'의 의미와 구별하기 위해 환이라고 읽게 된 듯하다.[2] 1953년 다시 환 단위가 들어왔을 때 원이라고 쓰인 것도 아직 이 한자를 공식적으로는 원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나 다들 환으로 사용해서 환으로 굳어졌다. 1962년 환 화폐가 폐지되면서 이 글자는 쓰일 일이 없게 되어 자연히 잊히면서, 이 글자의 독음이 처음에는 원이었다는 것도 잊혔다.


환에서 원으로의 화폐 개혁을 알리는 대한뉴스 제 369호. 당시 일본어 영향으로 인플레이션이 ‘인푸레숀’으로 표기되어 있다.

위 시기를 보면 답이 나오겠지만, 한국 전쟁의 후폭풍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1953년의 화폐개혁에 따라 100원=1환으로 교환한 것이다. 그러나 1962년의 화폐개혁에 따라 10환=1원으로 교환했다. 발권은 한국은행, 제조는 한국조폐공사로 되어있기는 한데 실제로는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소(동전 전량)와 워싱턴 D.C. 인쇄소(미제 시리즈(초기 지폐))가 일부 분담했다.

전란 직후라 그런지 환율이 참 다이나믹했다. 1953년 2월에 1달러당 60환(회계장부 환율)~100환(자유시장 환율)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인 1961년에 1달러당 1,250환이니 8년 평균으로 인플레가 50%에 해당되었다. (순간인플레는 300%를 넘었다.)

2. 시리즈

2.1. 미제 시리즈 (1차)

미리 기술했듯, 미국 워싱턴 D.C.[3]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흔히 미제라 부른다.

이 화폐의 도입에는 상당한 곡절이 있다. 이 화폐를 제작한 시점은 한국은행은 커녕 한국은행법도 공표되기 전 미군정 시기인 1947년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지만, 1945년 11월 2일 군정법령 21호에 의해 조선은행법 효력이 존속되어 미군 군표와 함께 조선은행권이 계속 통용되었다. 이후 도안이 동일한 상태로 조선은행 원을 발행하게 된다.
앞면 뒷면
파일:미제 일환 앞.jpg 일환[4][5]
(1953.02.17)
덩굴 무늬 한국은행 휘장
파일:미제 일환 뒤.jpg
파일:미제 오환 앞.jpg 오환
(1953.02.17)
파일:미제 오환 뒤.jpg
파일:미제 십환 앞.jpg 십환
(1953.02.17)
거북선 한국은행 휘장
파일:미제 십환 뒤.jpg
파일:미제 백환 앞.jpg 백환
(1953.02.17)
파일:미제 백환 뒤.jpg
파일:미제 천환 앞.jpg 천환
(1953.02.17)
파일:미제 천환 뒤.jpg

2.2. 이승만 시리즈 (2차)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사진이 주를 이뤄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으며,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이승만 박사 초상의 위치에 따라 좌(左)이박, 중앙(中)이박, 우(右)이박 등으로 불린다. 여담으로 한국 지폐사에서 갖은자가 쓰였던 마지막 시리즈다. 명칭은 발행 순서에 따라 갑을병정(甲乙丙丁)순으로 불렀다. 거기에 개정판이라면 개(改)를 붙여 개갑이라는 식이다.
앞면 뒷면
파일:신 십환 앞.jpg 신(新) 십환[6]
(1953.03.17)
숭례문 총석정[7]
파일:신 십환 뒤.jpg
파일:신 백환 앞.jpg 신(新) 백환[8]
(1953.12.18)
이승만 독립문
파일:신 백환 뒤.jpg
파일:오백환 앞.jpg 오백환
(1956.03.26)
당초 무늬
파일:오백환 뒤.jpg
파일:오십환 앞.jpg 오십환
(1958.08.15)
독립문 이순신 동상, 거북선
파일:오십환 뒤.jpg
파일:개 백환 앞.jpg 개(改) 백환
(1957.05.16)
이승만 당초 무늬
파일:개 백환 뒤.jpg
파일:신 오백환 앞.jpg 신(新) 오백환
(1958.08.15)
액면가
파일:신 오백환 뒤.jpg
파일:신 천환 앞.jpg 신(新) 천환
(1957.03.26)
한국은행 휘장
파일:신 천환 뒤.jpg
이승만 시리즈의 발행 순서는 신 십환 → 신 백환 → 신 오백환 → 신 천환 → 개 백환 → 오십환, 신 오백환 순서이다.

2.3. 세종과 모자상 시리즈 (3차)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새롭게 도안된 환권이다. 1962년 화폐 개혁 전까지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쓰였고, 이 환권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대한민국 원으로 회귀했다. 처음으로 한자가 사라지고 한글로 표기한 권종들이다.
앞면 뒷면
파일:개 오백환 앞.jpg 개(改) 오백환
(1961.04.19)
세종대왕 한국은행 본관
파일:개 오백환 뒤.jpg
파일:개 천환 앞.jpg 개(改) 천환
(1960.08.15)
횃불
파일:개 천환 뒤.jpg
파일:개갑 백환 앞.jpg 개갑(改甲) 백환
(1962.05.16)
모자상 독립문
파일:개갑 백환 뒤.jpg
발행 순서는 개 천환 → 개 오백환 → 개갑 백환 순서이다.

파일:모자상.jpg

2.4. 동전

파일:십환 주화.jpg
화종 <colbgcolor=#FFF,#222>10환화 최초 발행 <colbgcolor=#FFF,#222>1959.10.20 소재 <colbgcolor=#FFF,#222>구리(95%),
아연(5%)
도안 <colbgcolor=#FFF,#222>무궁화(앞면), 액면(뒷면)
지름 19.1mm 무게 2.46g 제조처 미국 필라델피아 제조국 발행
중지
1962년 6월 10일[14]
파일:오십환 주화.jpg
화종 50환화 최초 발행 1959.10.20 소재 구리(70%)
아연(18%)
니켈(12%)
도안 거북선(앞면), 액면(뒷면)
지름 22.86mm 무게 3.69g 제조처 미국 필라델피아 제조국 발행
중지
1962년 6월 10일[15]
파일:백환 주화.jpg
화종 100환화 최초 발행 1959.10.30 소재 구리(75%)
니켈(25%)
도안 이승만(앞면), 액면(뒷면)
지름 26.0mm 무게 6.74g 제조처 미국 필라델피아 제조국 발행
중지
1962년 6월 10일

환화 동전 발행을 알리는 대한뉴스 제 237호.

10환(무궁화), 50환(거북선), 100환(이승만과 청와대 상징) 3종류가 있었다. 1959년 10월 20일에 10환과 50환이 먼저 발행되었고, 10월 30일에 100환이 발행되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주조 기술이 부족해서 미국의 필라델피아 제조국에서 주조했다.

이후 3차 통화조치 때 10환과 50환은 그대로 1원5원으로 계승되었으나, 100환은 박정희 정권때 다보탑 10원으로 갈아버렸다. 원래 100환은 첨성대로 도안을 변경하여 발행할 예정이었으나 백지화 되었다. 참고로 10환과 50환 주화는 임시조치법으로 1975년 3월 22일까지 각각 1원과 5원으로 통용되었다. 당시에 동전이 상당히 부족했으며, 1965년까지는 원 단위 주화는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쓰게 된 것이다. 100환 주화는 앞에 언급된 이승만 초상화 때문에 10원 주화로 통용되진 못했다. 링크

10환과 50환 동전은 13년동안이나 더 시중에 돌아다닌 덕택에 현재도 잔존량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100환은 회수되어 폐기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잔존량이 적은 편이다.

한편 한국은행으로 회수된 100환 동전은 수 년간 묵혀져있다가 훗날 등장한 백원 주화의 재료로 쓰이기 위해 녹여졌다.

파일:external/www.sixbid.com/375989m.jpg

다른 여담으로는 1893년에 발행된 일환 은화가 있다. 그런데 분명히 저 주화는 일환이 맞는데도 액면의 절반에 해당하는 닷량(5냥)이라는 글자가(왼쪽 우측을 볼것) 찍혀 있다는 것. 이는 재정 충당을 위해 전년도에 닷냥 은화를 만들고 남은 소전(동전의 디자인을 새기지 않은 금속판 상태의 동전)에다가 액면을 두 배로 써서 발행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극인(주화에 디자인을 새기는 기계)의 디자인을 제대로 고치지 않은 것.(...)[16] 그래서 일환과 닷량은 액면상으로는 두 배의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규격이 완전히 똑같다.

3. 대중문화 속 대한민국 환

4. 관련법률

5. 외부 링크



[1] 圜은 '둥글 원', '돌 환'이라는 두 가지 훈음이 있는데 어차피 圜은 완성형에 없는 확장한자라 그냥 '원'에만 배당한 듯. 참고로 대한제국 원 시절의 '원'도 圜이라는 한자를 붙여썼다.[2] 실제로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원을 환이라고 읽은 작품들이 좀 있다.[3] 필라델피아에 있는 것은 동전 주조창이며, 지폐 인쇄창은 로널드 레이건 시절 포트워스에 인쇄창을 추가로 세우기 전까지는 워싱턴 D.C.의 그것이 유일했다.[4] 미제 시리즈 중 유일하게 백색지와 황색지 버전이 존재한다.[5] 황색지는 판번호 1~43번, 백색지는 판번호 43~50번이다. 여기서 판번호 43번은 황색지와 백색지가 혼재하는 영역이다. 판번호의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듯, 백색지가 황색지보다 발행량이 적기 때문에 황색지보다 훨씬 고가에 거래된다.[6] 백색지와 황색지 버전이 존재한다. 십환은 백색지와 황색지의 가격 차가 크지 않은 편이다.[7] 북한의 건축물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는 아직 남북이 갈라졌다는 인식이 적었던 걸로 보인다. 당연한 것이 저때는 분단되고 나서 8년, 6.25 전쟁으로 북한 대부분을 일시 수복했던 게 불과 2년 반 전이다.[8] 십환권과 마찬가지로 백색지와 황색지 버전이 존재한다. 황색지가 백색지보다 훨씬 고가에 거래된다.[9] 법률 제277호 긴급금융조치법 제3조 제1항 참조.[10] 대법원 1960.1.14. 선고 4292민상493 판결. 본문 중에 단기 19XX년(...)이라는 표기가 보이는데 아마 기존에 단기 42XX년으로 제대로 표기되어 있던 걸 숫자만 일괄적으로 변경해서 이 모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11] 법률 제1091호 긴급금융조치법 제3조 제1항 참조.[12] 대법원 1991.6.28. 선고 91다9954 판결. 전술한 4292민상493 판례를 참조했다고 되어 있다.[13]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소송상 불요증사실, 즉 증명이 필요 없는 사실의 일종이다. 역사 사건, 천재지변, 전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14] 유통은 1975년 3월 22일까지 허용[15] 유통은 1975년 3월 22일까지 허용[16] 당시는 조선에 근대적인 동전을 발행하는 기술이 없어서 이런 일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17] 게임상의 이미지로 1000환이 버스토큰이며 1만 환 내외는 버스토큰을 엽전처럼 꿴 뭉치로, 1,000만 환부터는 골드바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