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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년 시절
대구사범학교 시절 | 문경 훈도 시절 |
태중에서 워낙 고생한 탓인지 박정희는 당시로선 훤칠한 장신인 아버지나 형들과 비교해 성인이 되어서도 왜소한 체격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운 사정에서도 박정희를 보통학교로 내보냈기에 집안에서 박상희와 같이 근대식 교육을 받은 2명 중 1명이었으며,[5] 1932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6]에 응시하기도 했다.[7]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지만 1932년 4월 박정희는 정원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고, 대구사범학교 심상과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대구사범 시절에는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고, 품행 평가에서 '양(良)'이 4번, '가(可)'가 1번이었지만 '군사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고 한다.[8]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이렇게 학교 선생 일을 하고 있던 박정희는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간청으로, 18세이던 1936년 4월 1일에 15~16세의 김호남과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그러나 자유연애로 결혼한 것이 아닌 순전히 아버지의 강요로 인한 정략결혼인 데다가 박정희가 김호남에게 호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기에 김호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2. 만주국 육군 장교 시절
교사로 재직하던 중, 어린 시절부터 군인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 가족 문제[9] 등의 이유로 20~21세였던 1938년 11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10][11]에 1차로 지원했다. 처음엔 나이 제한[12]으로 거절당했지만, 동료 유증선 선생의 권유로 탈락을 재고시키기 위해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 '혈서'를 학생시험 용지에 써서 보낸다.(동료 선생 유증선의 증언) 이 혈서는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게재되었고, 이후 고향 선배이자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선인 출신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가 신문을 보고 후원자가 되었다. 이러한 도움을 얻은 박정희는 1939년 10월 드디어 군관 선발 시험을 보았으며,[13] 결국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였다. 이때가 1940년으로 박정희의 나이는 23세였다. 입학생 대다수는 17~19세였으니 나이 차가 꽤 있었던 셈이다.박정희의 혈서 관련 논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일생/진위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14] |
관동군 견습사관 시절의 박정희 |
이 시기에 대해선 같은 해 7월 말 8월 초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중국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했다는 주장[17]과 실제로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아 비교적 편히 지냈고 전투에 참여한 경험은 없었다는 주장[18]이 공존한다. 박정희는 부대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1944년 12월 23일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 관리하게 된다.
1945년 7월 만주군 중위로 진급한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해제당했다.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월 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19] 4월 평진대(제1대대)가 해산한 후, 5월 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20] 일설에서는 소설 <광복군>과 이를 근거로 '비밀 광복군'설을 주장하나 근거가 미약하다. 그렇게 고향 구미로 돌아오게 되었다.
3. 대한민국 육군 장교 시절
1946년 9월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는데, 사관학교에 20대 초반 정도가 많았던 반면에 당시의 나이가 만 29세로 만주군관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다소 늦은 편이었다. 입학 후에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전체 3등의 성적으로 2기로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서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 받는다. 군번은 10166.3.1. 남조선로동당 군사총책
복무 도중에 셋째 형이자 공산주의자였던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은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러던 중 우익에게 피살된 형 박상희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갈 때,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이 신원 보증을 서줬다.[21]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아동교육학과 1학년이었던 이현란(당시 24살)과 처음 만난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으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처지였다. 박정희는 이현란과 약혼한 후 서울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 동거를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3년 정도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1948년 11월 중순~12월 말 사이 이현란은 광화문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약 6개월 뒤 아들은 병명도 모른 채 사망했고, 이현란이 남긴 편지에 따르면, 이현란은 저녁에 황 장군 부인하고 같이 용산 관사의 뒷산에다가 아이의 시신을 붉은 상자에 입관하여 암매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연루되면서 감옥에 있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아들은 작명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창룡 소령이 차트를 펼쳐 보였다. 남로당 군사조직표가 그려져 있었다.(중략)박원석 대위는 맨 끝에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바로 그위에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116p)
박원석이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 위가 바로 박정희 소령이라 하니 더욱 더 황당한 일이었다.(중략)그래서 김창룡에게 물었다. "박원석 대위가 박정희 소령의 세포라고 하는데, 박정희 소령도 내가 보기엔 빨갱이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는 빨갱이인 것이 확실합니다." 김창룡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118p)
(중략)김창룡이 간 뒤 채병덕 육군참모 총장이 내게 “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 한 가닥 실마리가 풀려가는 소리였다.(중략)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10번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첫째, 박정희 소령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둘째, 설사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10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그 결과 확실하게 전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21p)
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소령의 고난 p.116-121의 일부 (원문)(발췌)
1948년 11월 11일, 제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 도중에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연루돼 박정희가 체포되는데, 우선 남로당 군총책 이재복이 '거동수상자'로 잡혔다. 이재복에 이어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 수사가 급진되는데, 수사팀은 연락책 김영식을 통해 명단을 얻게 된다. 이 명단에 '박정희 소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11월 11일 박정희는 체포된다. 같은 만주국 출신이자 당시 육본정보국장으로 김창룡의 직속상관 백선엽 대령[22]과 정일권, 김정렬, 장도영, 원용덕, 채병덕, 강문봉, 송요찬 등의 육군군관학교 출신 군인들의 구명으로, 처벌을 면하고 예편되었으며 전향하게 된다. 수사 과정에서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제공하고 그 공로로 숙군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13일 1심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다.박원석이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 위가 바로 박정희 소령이라 하니 더욱 더 황당한 일이었다.(중략)그래서 김창룡에게 물었다. "박원석 대위가 박정희 소령의 세포라고 하는데, 박정희 소령도 내가 보기엔 빨갱이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는 빨갱이인 것이 확실합니다." 김창룡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118p)
(중략)김창룡이 간 뒤 채병덕 육군참모 총장이 내게 “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 한 가닥 실마리가 풀려가는 소리였다.(중략)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10번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첫째, 박정희 소령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둘째, 설사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10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그 결과 확실하게 전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21p)
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소령의 고난 p.116-121의 일부 (원문)(발췌)
동거녀(약혼녀)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람이었고 아들마저 죽자 박정희에게 실망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아내와 딸내미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이현란에게 들통났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막내아들 박정희마저 무기징역 선고를 받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백남의는 세상을 떠났다.
다만, 박정희만 특별 대우를 받아 사면된 것은 아니고,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이 혐의자들과 일일이 개별 면담한 뒤 상당수를 군문을 나가는 조건으로 훈방 조치했다고 한다. 당시 김창룡의 숙군작업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무고한 피해자가 매우 많았다. 이 때문에 군대 고위층이 최대한 구제하는 방침을 세우면서, 박정희도 같이 살아났다.
이후 박정희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백선엽의 추천으로,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인 군속(군무원)으로 육군 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곳에서 박정희는 훗날 자신의 쿠데타 주축 세력이 되는 육군 8기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중에서 8기 우등 졸업으로 정보과에 배속된 김종필과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이후락 역시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전투정보과에 근무하던 6·25 남침 6개월 전인 49년 12월 육본 정보국은 ‘연말종합적정(敵情)판단서’를 작성했다. 북한 남침 준비상황을 소상히 파악해 아군의 대책을 건의한 방대한 보고서였다. 작성을 지시·주도한 건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이었던 박정희 문관(文官)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징후가 보이고 있다. 종합적인 적정보고서를 만들자”고 의견을 냈고, 종합판단을 하였는데 요점은 "적(敵)이 1950년 3월에 공격해올 것이 확실하다. 다만 중국 국공(國共)내전에 참전했던 동북 한인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이 늦어진다면 침략 시점은 6월로 연기될 것이다. 동두천·의정부·서울 선에 전차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 이상이 주공(主攻)을 지향할 것이다. 또 개성·파주·서울 선과 춘천·원주·평택 선엔 각각 1, 2개 사단이 조공(助攻)을 하게 된다. 함경북도에서 훈련 중인 유격 전문부대인 766부대는 배를 타고 후방에 투입될 것이다. 적은 2, 3개월 이내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기 위해 전 병력을 일제히 투입할 텐데 총 병력은 최초 단계에서 약 12만, 서울 이남 공격 단계에선 20만으로 예상한다. 적의 전차부대는 아군에 결정적인 위협이 될 것이고 항공기는 지상군 엄호(掩護)를 주 임무로 삼을 것이다. 소련의 직접 개입은 없으나 중공은 경우에 따라 직접 지원할 수 있다.” 6·25 반년 전 박정희 “늦어도 6월엔 북한군 남침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복귀하였고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3.2. 6.25 전쟁
6.25 전쟁은 박정희는 원래 남로당 좌익 출신으로 사실상 출세의 길이 불가능했던 상황속에서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제공하여, 사상의 전향을 인정받게 하였으며 아르바이트성 비공식 직함인 정보과 상황실장에서 다시 국군 소령으로 복귀하여 이후 1953년 11월 준장까지 진급하게 되는 출세의 길을 열어 주었다.6.25 전쟁 당시 박정희의 경력은 반공 국가에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엄청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방파제가 되어주며 박정희를 향후 대통령으로 만드는 기반이 되었고,[23] 70년대부터 20여년간 박정희의 삶의 궤적을 당시 생존해있던 관련자들을 통해 취재하고 연구하였던 조갑제는 1998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박정희의 전기인 박정희의 생애에서 인민군의 남침이 박정희를 구한 셈이며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이 박정희를 살려내 자신의 적수로 만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음의 내용은 한국전쟁 전후 1948~1953년 박정희의 행적과 그리고 이후의 삶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서술한다.[24]
숙군사업 실무책임자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몇 안되는 사람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소령은 김창룡에게 붙들리자마자 '이럴 때가 올줄 알았다' 면서 순순히 자술서를 쫙 써내려 갔다고 합니다. 육사 재학시절 형 박상희가 대구 10.1사건에 연루돼 구미에서 경찰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내려가 보니 형 친구인 이재복이 유족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더랍니다. 이재복은 박정희에게 '공산당 선언' 등 불온책자를 건네주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유했고, 또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부추기더랍니다. 자술서 내용으로 보면 박정희는 인간관계에다 형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한 것같았습니다" 김안일 특무과장의 증언대로라면 박정희가 남로당에 마지못해 가입만 해놓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박정희는 사상적인 좌익과는 거리가 멀었고 친형을 비롯 인간관계에 얽혀 설득받아서 휩쓸리듯이 가입만 해놓고 남로당 활동은 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에 박정희가 공산당 좌익성향이었다면 당시 한국군의 핵심 멤버들이 나서서 박정희 구명운동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48년 10.19 여순 사건 이후 남로당에 포섭된 것이 발각되어 체포돼 국군 소령에서 축출 되었고 이후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등, 꼼짝없이 사형수 신세였다. 체포 이전 같은 군내 남로당 프락치로 박정희와 밀접하였던 최남근 15연대장이 먼저 체포되었기에 박정희는 남로당에 포섭된 사실이 들통나 체포 될 것을 사실상 짐작하고 있었지만 도주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약혼녀이던 이현란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된다.[25] 박정희는 당시 이화여대생인 이현란에게 깊게 빠져 열애 관계에 있었지만[26] 이미 김호남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상적인 연애로 인한 결혼이 아닌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결혼이었기에 박정희는 김호남에 대한 애정이 전무했고, 집안에서 김호남을 볼때마다 늘 이혼을 요구했다.
본인이 이현란에게 기혼상태라는 사실을 숨기고 연애를 이어가고 있던 박정희는 결국 김호남에게 끈질기게 이혼을 요구하여 받아내었고 이후 이현란과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했으나, 그러던 와중에 남로당 포섭 사실이 발각된다. 이후 같은 남로당 프락치로 서로 군내 소통이 있었던 15연대장 최남근이 먼저 체포되고 사형을 선고받자, 박정희는 본인이 남로당에 포섭된 것을 발각되어 체포될 신세라는 것을 사실상 짐작했는데 도주하지 않았다. 1988년 조갑제가 이현란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는 체포되기 직전 이현란에게 "참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숙군수사팀에 구속된 박정희는 그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양해를 구해 이현란에게 편지를 써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갈 수 가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여덟 살 아래인 이현란에 대한 박정희의 집착은 대단했다.
이후 박정희는 협조적인 자세로 전향을 인정하고 남로당 숙군 작업에 협조했고, 백선엽을 비롯한 같은 만주군 인사들의 구명운동으로 살아났다. 당시 군법회의 재판관 김완룡은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하긴 했으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고 군내에서도 인물이 아깝다는 여론이 일어나 그런 감형이 가능했을 것이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풀려나자 곧바로 이현란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으나, 약혼 예정이던 남자가 실상은 11살 딸이 있었던 기혼남에 남로당 출신으로 숙군 작업의 대상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현란은 배신감으로 정이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다시 집에 돌아왔으나 결국 잦아진 부부싸움으로 1950년 2월 6일, 이현란은 술에 취해 잠든 박정희 몰래 나와 "그동안 고마웠고, 맘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 말고, 날 찾으면 투신자살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 하나만 남겨놓은 채 잠적했고, 이후 박정희는 이현란을 찾는 것을 멈췄다.[27] 또한 1949년 8월 12일,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충격으로 사망한 이래로 옥중에 있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 실력을 인정받았던 군대에서도 쫓겨나 금전적으로도 가난했으며, 지극히 사랑하던 약혼녀마저 가출한 이 무렵은 사실상 박정희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28]
감옥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백선엽[29]의 편의로 공식적인 직함이 아닌 정보국 전투정보과 상황실장이라는 비정규 직책으로 약 1년간 복무하게 되며 이 당시 정보과에서 형성한 김종필, 이후락 등의 대 여섯살 연하의 후배의 육사 8기생 군내 인맥은 이전 만주군관학교 인맥, 육사 중대장 시절의 생도 인맥(특히 5기생)과 함께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친위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다가온 6.25 전쟁은 앞서 말했듯이 박정희의 인생에 있어 다시 재도약의 길을 열어주는 큰 전환점으로 자리한다.
박정희가 약 1년간 6.25 전쟁 발발 직전까지 근무하게 되는 전투정보과는 국군의 대북 안테나 역할을 맡은 업무의 성격상 다가오는 전쟁의 숨결을 가장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박정희와 정보과는 1949년 12월부터 이미 남침 징후를 포착했고,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비공식 상황실장 역할을 하던 박정희의 주재하에 북한반의 자신과 남한반의 이영근 중위가 중심이되어 남침 가능성을 경고하는 판단서를 작성했다. 전투정보과에서 1949년 말에 작성한 '이 연말 적정판단서'는 의정부-서울을 주공으로 삼고 개성-서울과 화천-춘천-서울남쪽 우회 노선을 조공으로 삼아 남침할 것과 주문진과 옹진에서 견제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반년뒤 북한의 남침경로를 사실상 정확히 예상했다.
1949년 12월 17일에 상부에 이 판단서는 올려졌고 총론 부분은 박정희가 직접 집필하였는데, 박정희는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전기능을 동원하여 전쟁준비를 갖추고 나면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라며 사실상 북한의 남침을 예견했다.#
이 판단서는 국방부, UN한국위원단, 미군사고문단, 우리군의 사단급 부대에 배포되었으며 당시 유양수 정보과과장을 위시로한 전투정보과는 이 판단서를 기초로 하여 군수뇌부에 대해서 설명회도 자주 가졌다고 한다. 군 수뇌부에서는 미군사고문단측에 대해서 남침위협을 강조하고 군사지원, 특히 대전차무기의 제공을 여러번 요청했지만, 미군측에서는 '스탈린이 도발한다면 유럽에서 할 것이다. 전차는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대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거절했고, 미국은 오히려 당시 강경한 북진 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멋대로 북진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으니 군사 지원을 해줄 리가 없었다.
또한 우리 군수뇌부는 미군의 이런 냉담한 태도에 직면하여 무력증을 느끼고 있는데 정보과에서는 계속해서 '남침 임박'이란 정보 보고가 올라오니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도 났을 것이라며 김종필은 회고했다.
남침 열흘 전인 6월 15일까지 정보과는 남침 임박 보고서를 상부에 보고했지만, 결국 주의 깊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6월 23일 24시를 기해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인민군의 대규모 훈련(사실은 훈련으로 위장한 개전준비)에 대비하여 78일간 유지해온 대북경계령을 해제하고 예하부대는 휴가를 실시해도 좋다고 지시한 와중 한국은 무방비 상태에서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 작전정보실장으로 불리던 육본의 비공식 문관 박정희는 어머니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구미로 내려가 있었다. 떠나기 앞서 박정희는 함께 남침 동향 보고서 작성을 주도하였던 김종필, 이영근 중위를 불러 놓고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 경찰서를 통해서 연락해 달라"고 당부했다.
구미에 있던 박정희는 6월 25일 낮 12시경 일찍이 구미읍 순경을 통해 북한의 공침이 시작되었다는 김종필의 급전을 받았고, 곧바로 서울로 복귀하기 위해 오후 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해, 25일 야간 북행 열차를 탔으나 군병력 전송관계로 도중 도중이나 역에서 몇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고, 결국 27일 오전 7시경 서울 용산역에 도착하여 서울 육군본부로 복귀한다.
하지만 박정희가 서울에 도착했을 당시는 이미 이승만 대통령이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고, 박정희가 육군본부에 도착한 아침 신성모 국방장관은 군수뇌부 회의에서 서울포기를 선언했다. 박정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시 상황에 복귀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 오자마자 다시 위험을 무릅쓰는 철수를 해야했다.
하지만 이후 채병덕의 삽질로 대표되는 26~28일간 서울의 전선과 철수 국면에 대해 서울로의 복귀를 건의했던 미군과 국군내의 소통 불일치는 인민군이 서울 깊숙이 침투하는 와중, 육군본부 지휘부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어 결국 28일 새벽부터 서로 앞다투어 도망가는 상황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알려주고 할 겨를이 없었던 사실상 지휘체제의 작동 없이 이루어진 집단 탈출이 이루어졌다. 사실상 명령체제가 와해됨으로써 군중이나 다를바 없는 육본의 무질서한 철수가 시작되었고, 박정희도 이 행렬에 끼였다. 그 아수라장을 거친 박정희는 25년 뒤에 1975년 6월 25일 본인의 일기장에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우리는 남침징후를 6개월 전에 예측했었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판단서는 전쟁이 발발한 후 너무나 정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가 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할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4백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 시대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1975. 6. 25 일기장에 박정희가 써놓은 감상
1975. 6. 25 일기장에 박정희가 써놓은 감상
1950년 6월 서울에서, 이후 1951년 12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9사단 참모장으로서 박정희는 6·25 남침과 중공군 개입에 대한 미국측의 정보 판단 실패가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가까이에서 두 번씩이나 지켜볼 수 있었다. 두 번 다 미군측은 국군측에서 제기한 인민군 남침 가능성과 중공군 출현 정보를 묵살했고, 그 정보오판의 참담한 결과를 떠안아야 한 것은 국군과 국민들이었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미국에도 민족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과 월남의 분단은 패전과 내란의 산물이었지만 한반도 분단은 순수하게 미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에 시달렸고, 또 임정이 연합국 편에 서서 투쟁한 교전국가가 아니었던가'. 또한 미국이 6.25 전쟁에 참전한 것도 '단순히 한국의 방위만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평화와 태평양지구방위정책에 직결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한국동란에서 남한이 유린되었다면 당장 일본이 위태로워졌을 것이고, 소련 잠수함은 오키나와를 위협하고, 미국의 서부 방위선은 샌프란시스코 연안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미양국간의 관계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결과된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의 역할을 내세워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논리를 확대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사고는 향후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하여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독재로서 발현된다.
실제로 5.16 군사정변 이후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리스크와 더불어, 당시 정당한 선출 대통령이 아닌 임시군정 세력이었기에 취약했던 정통성으로 비교적 저자세로 나갔던 케네디 시기와 베트남 파병으로 상호간 한미관계가 최고조였던 존슨 시기 이후 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의 안보문제로 역대 대한민국 정부를 포함하여 및 당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일 정도로 사사건건 미국과 마찰했고, 미국의 적극적인 만류와 압박에 불구하고도 핵무장을 추진했다.
그리고 조갑제는 당시 박정희의 현장에서의 경험이 미국을 유독 불신하여 자주 국방에 열을 올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당시 박정희의 행적은 박정희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으로서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사상적 리스크를 씻어내는 가장 큰 계기가 되는데, 박정희는 육본의 철수 과정에서 김종필 등 정보과 일행에서 모두 떨어졌고 장도영 일행은 28일 아침 육본 임시 거처인 시흥 보병학교에 박정희를 비롯한 전투정보과 장교들은 보이지 않아, 특히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요원들 가운데 남로당 좌익 전력자인 비정규직 박정희는 남행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북한에 귀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행 과정에서 박정희와 만났다는 정보국 5과장 차호성 소령의 증언에[30] 따르면 박정희는 이미 혼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탈출을 감행한 시점이었다.
육본 일행은 박정희가 북에 귀순했다고 생각했고, 김종필 중위를 비롯한 정보과 일행은 시흥을 거쳐 이후 새로 정보국이 들어섰다는 수원에 도착했지만, 이들의 예상과 다르게 박정희는 먼저 일찍이 도착하여 새로이 정보국이 들어선 수원 청년훈련소에 자리하며 맞아주고 있었고, 이는 박정희에게 있어서 남로당 좌익 출신이라는 사상적 의구심을 해소하는 계기를 선물했다.
이후 사상의 전향을 인정받아 박정희는 수원에서 육군 소령으로 복직했고, 김홍일 장군이 한강방어선 공방전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수원의 한 국민학교에 들어간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비로소 비정규직이 아닌 육군 소령으로서 김종필, 이영근 등 육사 8기 정보과 장교들의 상관으로서 인민군의 서울 입성 당시 편제를 분석하는 상황판을 제작하는 임무을 맡는다.
결국 박정희는 한강을 남쪽으로 건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11년 뒤에는 그 한강을 반대방향으로 건너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인민군의 남진이 지속되자 7월 3일과 4일 박정희 정보과 일행은 육본과 함께 수원을 떠나 평택을 거쳐 대전으로 향했고, 7월 11일 대전을 철수하는 육본을 따라서 김천에 가서 3일간 머물다가 14일 대구에 도착하여, 경북도립병원 앞에 있는 건물에 입주했다. 당시 인구 30만 명의 대구는 피란민이 몰려들어 70만 명으로 불었으며, 8월에 접어들면 대구 북쪽으로 10km까지 남하한 전선에서 대포소리가 들려오고 밤에는 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하는 전시상태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소령 박정희가 이끄는 전투정보과의 주임무는 낙동강 교두보를 압박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들에 대한 전력조성표를 만드는 것으로 국군이 상대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의 역사, 지휘관들의 성격, 장비, 편성, 사기 등에 관한 정보를 항상 최신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당시 낙동강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국군은 육본의 참모장교들까지 뽑아가서 일선에 투입하곤 했지만 박정희는 이런 조치에 맞서서 본인의 전투정보과 소속 장교들을 잘 보호하여 한 사람도 일선으로 뽑혀 가지 않도록 하여 인망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8월 하순 부산 피난처에서 대구 육본 정보과에서 복무하던 대구사범학교 후배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아 육영수와 인연을 맺었고 9월 23일부터 육본의 대구 이동 수송책임자로 부산진역에서 체제의 편성을 지휘했으며, 9~10월 동안 국군의 북진하는 와중 박정희는 육본 정보과에서 근무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0월 서울 시내에서 창설된 9사단 참모장에 부임한다. 이후 11월, 기존의 아내 김호남과 협의 이혼으로 마침내 갈라섰으며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허억 시장(당시 대구시장)의 주례로 육영수 여사와 재혼한다.[31]
1950년 12월, 계산성당에서 진행된 박정희-육영수의 결혼사진. |
한편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피죽지세로 북진하는 와중 청천강 북쪽 운산에서 압록강을 향해서 북진중이던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처음으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던 10월 25일, 9사단이 서울시내 청계국민학교에서 창설식을 가졌고, 초대 사단장으로는 장도영 정보국장, 초대 참모장에는 정보과에서 박정희 연이 있었던 장도영의 추천으로 중령 박정희가 임명되어 창설작업을 지휘했다. 당시 국군의 대다수 병력이 북진 대열에 있었기에 텅 비게 된 서울이나 후방을 방어하고 아직 3.8선 이남에 잔존하였던 인민군을 소탕할 목적으로 신설된 것이 제 9사단이었다. 창설 초기 후방 배치된 부대인 만큼 인력도 형편없었는데, 부산에 세워졌던 장교 단기양성소인 종합학교를 갓 졸업한 1백여 명의 소위들이 소대장으로 충원되었고. 기간 하사관과 장교들은 병원에서 퇴원한 부상자들을 끌어모았다. 일반 병사들은 부산과 대구의 신병훈련소에서 M-1소총 사격술과 수류탄 투척교육만 10일간 받고 배치되었다. 약 4분의 1은 문맹.무기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전투력도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9사단에서 참모장으로서 복무한 1950.10~1951.4 약 반년 동안만 사단장이 총 6명이 거칠만큼 수시로 교체되었고, 자연스럽게 부대의 사령부는 부대의 2인자인 참모장이자 원년맴버인 박정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심지어 이 기간동안 가장 오랜 기간인 3달 동안 사단장을 지냈던 김종갑 사단장조차도 훈시할 기회도 없었기에 대대장 얼굴도 몰랐고,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참모장에게 맡겼다고 증언했을 정도였다.[32]
9사단은 두 달 뒤인 1950년 12월이 돼서야 3개의 포병 연대(28, 29, 30)를 창설하여 전투 능력을 갖추는 와중 급한 명령이 떨어져 후방 산중에 남아 낙오된 인민군 9사단의 패잔병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북상하고 있는 대전으로 이동하였고,이후 9사단은 남진해 오는 중공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거처를 강원도 동부로 옮겼고, 박정희는 신혼 닷새째 날부터 떨어져 강원도 전선으로 향했으며 이후 현리전투 직전 최석과의 불화로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전출되는 1951년 5월 초까지 약 5개월 가량이 사실상 앞서 전투 부대와 비전투 부대 사이 종군 논란이 있는 만주군 복무 시기를 제외한다면 박정희가 군인으로서 야전에서 활동한 것이 확인되는 유일한 기간이다.
당시 9사단이 맡은 방어정면은 강원도 인제-양양선으로 약 40km로 보통 같으면 3개 사단이 맡아야 할 넓은 전선으로, 이후 동부 강원 전선에서 박정희의 9사단은 인민군 2군단과 교전에 들어갔으며 1951년 1월 1일 중공군을 주력으로 하는 40만 공산군은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다는 목표를 정하고 38선 전역에 걸쳐서 총공세를 개시했다.
북한의 첫 6·25 남침 때처럼 서울을 둘러싼 서부전선 의정부-서울 축선에 주공을 놓고, 중부(화천-춘천 축선) 및 동부전선을 주공으로 삼아 침범했고, 9사단은 이미 그 열흘 전부터 인민군 2군단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10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인민군 2군단은 공산군 주력이 서부-중부전선에서 공세를 펴기 열흘 전에 9사단 지키는 동부전선을 먼저 돌파하여 서쪽으로 진출, 중부 지방에 배치된 아군의 배후를 교란시켰다. 공세 이전에 공수부대를 먼저 후방에 투하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게 하는 전략개념이었다. 인민군 10사단이 먼저 공수부대의 성격으로 거점 방어를 하던 9사단의 방어선을 통과하여 뒤로 빠졌다. 인민군 2군단의 후속부대는 10사단을 따라가다가 9사단과 교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점점 충돌이 거세지자 12월 29일 9사단 29연대(연대장 고백규)의 후방지휘소가 침투 인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포위되었다. 28-29연대의 보급로마저 끊어져 긴급한 물자는 공중 투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월1일 인민군 2군단이 대대적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강원도 평창군 속사리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9사단은, 결국 눈덮인 산길을 걸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1월 26일 비로소 제30 포병대대가 9사단에 배속되어 최전선에 있어 제대로 된 전투사단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참모장 박정희는 사단의 보급관리를 책임졌고, 탄약과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는 주로 육영수의 본가인 대구에서 실어져오고 있었다. 후방으로 진출한 인민군 10사단이 이 보급선을 차단하려고 정규군에 의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박정희의 보급관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1월 김종갑 사단장이 신병으로 한 열흘간 후송되자 사단장을 대리하기도 했다. 9사단은 서울에서 창설준비를 시작한 이래 넉 달 동안 인민군에 밀려 1월 동안 영월, 상동, 정선, 경북 봉화군 춘양, 정선 등 열번 이상 사령부를 옮겨다녀야 했다. 박정희도 1950.12~1951.4 넉달 동안 산맥을 따라 쫓고 쫓기는 생활을 하였고, 중공군의 총공세에 따라 전선이 남북한을 오르내리는데 맞추어야 했으므로 차분하게 진지를 구축할 시간도 부대를 정비할 시간도 없었으므로 사단장도 수시로 교체 된 것이다.
결국 인민군 2군단의 공세에 밀려 9사단 사령부는 1951년 2월 2일 강원도 정선의 국민학교로 후퇴하여 참모장 박정희와 다른 참모들은 국민 학교부근의 텅빈 민가를 숙소로 쓰게 되었다. 중공군은 2월 16일부터 중동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시작했고, 인민군 2, 3군단 또한 9사단을 총 공격하기 시작하여 결국 9사단은 정선 사령부를 포기하고 후퇴의 길에 올랐다. 이후 서로 밀고 밀리는 소강 상태 지속되는 와중 1951년 3월 14일 박정희와 제 9사단은 정선 송계리에서 매복하여, 그뒤 열흘간의 산속에서 게릴라전 끝에, 당시 미리 방어선을 통과하여 후방에서 교란작업을 벌이며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로서 악명이 높았던 2,000명 가량의 인민군 10사단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워낙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치러진 게릴라전이던 만큼, 연대장도 직접 현장을 뛰어다닐 정도였으며 박정희도 산속에서 총탄과 식량을 보급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이 9사단에 직접 순시하여 표창했고, 4월 15일 박정희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창설 이후 처음으로 큰 공을 세우게 된 9사단이었지만 1951년 4월 말에 새로 발령 온 최석 사단장과 기존 9사단을 이끌어오던 박정희를 위시로 한 참모부는 부대의 지휘과정에서 큰 트러블이 생기게 된다.
1951년 4월 25일 9사단은 1군단에서 3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면서 강원도 강릉에서 오대산 북쪽 용포리로 이동, 10㎞ 전방을 맡았으며, 4월 27일 이성가 사단장이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나가고 최석 준장이 사단장으로 부임된다. 그리고 어느 날 최석 사단장은 일선을 시찰하다가 연대의 배치가 자신의 명령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박정희의 측근인 작전참모 박춘식 중령에게 오후 참모회의에서 이를 해명하라고 지시했다. 박춘식은 박정희와 함께 작전 명령이 잘못되었나 조사를 했으나 부대배치는 작전명령대로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참모회의에서 박춘식은 사단장이 결재한 작전명령서를 가지고와서 해명했다. 최석 사단장은 "내가 이걸 보고 사인했나, 보지 않고 했지?"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작전참모를 모욕적으로 질책했고, 박정희계 참모진과 사단장 사이에 큰 금이 가버려 이후 참모들은 사단장파와 참모장파로 갈리기 시작했다.[33]
결국 참모장 박정희 대령을 포함한 작전 참모 박춘식 중령[34] 인사 참모 이춘식 등, 반여년간 9사단을 리드한 박정희 참모부는 모두 전선을 떠났으며, 박정희는 대구의 육군정보학교 교장이란 한직으로 좌천된다.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9사단은 6.25 전쟁 당시 최악의 패배로 손꼽히는 현리전투로 궤멸되었다. 박정희는 자식같은 9사단이 붕괴될 때 같이 있지 못했다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많이 미안해 했다고. 하지만 옆에 있던 중정부장 김재춘은 만약 박정희가 전출을 안갔으면 하마터면 후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1951년 5월 25일 유엔군이 현리대패를 극복하고 중공군에 대한 반격작전을 마무리짓고 있을 때, 박정희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벗어나 대구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정보요원을 교육하는 학교였기에 정보과 경력을 살린 박정희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신혼 생활을 보내게 된다. 사실 박정희는 많은 나이와 남로당 좌익 경력으로 최전선에서 지휘관들이 굴리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었고, 이후부터는 대부분 주로 후방에서 수송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1951년 12월 10일 박정희는 다시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으로 전보되었다. 이는 1949년 숙군작업으로 국군에서 축출된 이후 정보과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할 때 한번 연을 맺었던 이용문 준장이 끌어준 것이었고, 호방한 성격의 이용문은 박정희가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가장 힘들었을 당시 1949년 정보과 비정규직으로 복무할 때 박정희의 편의를 봐주며, 챙겨주었기에 박정희는 한살 연상의 이용문을 형으로서 잘 따르며 보스 기질의 박정희가 사실상 진정으로 상급자로서 인정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후 반이승만적 행보와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게 되는 박정희의 반골기질은 이용문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때 육군참모차장은 유재흥으로 육본은 총창, 차장, 작전국장이 모두 일본육사 출신들이었다. 전임 정일권 총참모장-강문봉 작전국장이 만주군관 출신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박정희는 만군 출신으로 분류되지만 만주군관학교 예비과정을 수석졸업, 일본육사에 유학하여 3등으로 졸업함으로써(57기) 엘리트 의식이 강한 일본육사 출신들도 한 수접고 대했다.
이용문은 1952년 박정희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고 당시 명망이 있었던 야권 인사인 장면을 내각제 총리로 추대할 반란을 계획했다.[35] 박정희는 그 최측근으로서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1951년 말 국회 내 간선으로는 더 이상 연임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은 발췌 개헌의 사전작업을 하며 점차 국내 반발이 거세졌고 미국도 당시 북한과 일말의 협상여지도 남겨놓지 않으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1952년 협의되지 않은 평화선까지 선포한 막무가내인 이승만보다 미국의 국익에 있어 비교적 더 유순하고 미국과 말이 통하였던 장면의 당선을 우선시로 여겼기에[36] 미8군 밴 플리트 사령관도 이용문의 반란 계획을 알고도 묵인하여 사실상 지지하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의 행보에 반발을 가진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도 참여했다. 이종찬 총장 - 이용문 작전국장 - 박정희 차장 계열이 '반이승만 쿠데타'를 계획한 것을 확실하나 다만 어느 정도로 진지하게 추진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쟁점으로 남는다.
다만 이용문은 이승만을 거세하는 거사계획에 적극적이었으나 이종찬은 소극적이었고, 그는 문민우위의 원칙을 깨뜨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도 군의 개입을 말리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육본 작전국장 정래혁의 증언
당시 육본 작전국장 정래혁의 증언
이종찬 총장이 이용문 국장과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 후방에 있는 대대 규모의 국군을 부산으로 보내 계엄령을 무효화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총장은 박정희 대령이 파병부대를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며칠뒤 이용문 국장이 보고하기를, '박 대령이 목숨만 보장해주신다면 지휘를 맡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 작전계획의 암호명을 '반정'이라 붙였습니다. 인조반정에서 딴 것이지요.
당시 육본 작전국 과장 유원식의 증언
당시 육본 작전국 과장 유원식의 증언
향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재정위원장이 되는 육본 작전국 과장 유원식은 "나는 이용문, 박정희와 함께 2개 대대를 부산에 보내 정권 을 뒤엎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밴 플리트는 이승만에 대한 미국측의 거부감을 내비치면서 쿠데타 가능성도 타진한 것으로 보이며, 이종찬은 "밴 플리트의 진심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서 관망하는 태도였지만 이용문과 그 보좌관격인 박정희는 사실상 '미군이 이승만 제거를 원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미국이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사실상 철회한 지금 2개 대대 정도의 병력만 있으면 간단하게 이승만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국회에서 장면을 차기대통령으로 뽑도록 도울 수 있다'는 강경적인 판단을 보였다.
1952년 6월 초는 미군이 곧 계엄령을 선포하여 야당을 이승만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란 소문이 부산 정가에 나돌아 숨어 다니던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했다. 야당의원들의 신변을 미군이 보호하여 다면 국회에서 새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고 이승만 정권은 끝나는 것이었다.[37]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5월 25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6월 1일 박정희의 소집으로 육본에서 심야참모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계엄령에 저항하여 육본이 2개 대대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이승만의 계엄군' 헌병2개 중대를 장악하자, 즉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반응은 미적근했고, 이날 회의에 이종찬, 이용문은 참석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의제만 상정해놓고 회의에서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입장을 취했다. 파병이 결의되려면 이종찬 총장의 적극적인 의사표시가 있어야 했는데 이종찬은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렇다면 이용문 국장이라도 총대를 메야 하는데 그는 자리를 피했다. 박정희가 총대를 매고 의제를 상정시켜 참모회의의 분위기를 떠보려 했을 것이다.
결국 파병은 불발되었고, 결국 발췌 개헌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어져 정권은 연장되었다. 조갑제는 그때 육본이 2개 대대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이승만의 계엄군' 헌병2개 중대를 접수하여, 야당을 탄압하던 물리력이 사라지면 국회가 정상화되어 간선으로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뽑았을 것이며, 미국측도 이해관계에 맞는 군사개입이 신속하게 충돌없이 성공하면 그 결과를 기정사실로 추인해버려 거의 틀림없이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파병이 불발 된 육본심야회의 며칠 뒤인 6월 4일 미국정부는 이승만에 대한 입장을 바꾸어, 사실상 이승만 정부와 타협을 시작했고, 이승만측이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야당이 제안한 내각제 개헌안 중 직선제와 국회의 통제강화 부분을 발췌하여 만든 제3의 개헌안을 미국은 승인했다. 본질이 사실상 직선제 개헌안이라는 것은 다름 없었다.
미국 측이 직접 이승만 제거에 나서는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은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갖고 있고 우선은 미국 대사관과 미군이 '객관적 중재자'의 입장에서 이승만과 야당 사이의 타협을 모색했고 이 타협이란 이승만의 재집권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태도 변화에 따라, 쿠데타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고 야당과 이용문-박정희 계열의 반이승만 군부 세력과 미국에 희망을 걸고 있던 야당 세력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직선제 개헌에 성공하자 7월 23일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해임되었고 3군단장 백선엽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용문도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된다.
하지만 이용문과 같이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박정희는 유임되었는데, 박정희는 당시 치밀하지만 조용한 성격과 이용문의 존재로 아직 가려서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당시 육군의 명령계통을 장악하고 있을 때 스쳐간 결정적인 쿠데타의 기회와 쿠데타 때 미국의 태도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당시 박정희 경험은 10여년 뒤 5.16 군사정변의 사전 연습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는 이용문이 작전국장에서 수도사단장으로 나간 석달뒤인 1952년 10월에 포병으로 전과했다. 당시 육군 포병감 신응균(육군중장 예편)은 포병을 증강하면서 군단 포병단장 요원으로 고참대령 10여명을 뽑아 교육시켰는데 그 가운데 박정희가 들어 있었다.
박정희는 광주 포병학교에서 넉달간 교육을 받았다. 박정희는 1953년 2월에 포병학교를 졸업한 뒤 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광주에 머물면서 신설작업을 지휘했다. 이후 5월 9일엔 3군단 포병단장으로 전보되어 또 다시 조직과 인원편성을 수행했다.
이후 1953년 6월 24일 전출되었던 이용문이 남원에서 대구로 올일이 생겼고, 박정희는 당시 이용문과 함께 서로서로 막연한 사이였던 시인 구상과 이용문을 기다려 한잔 하기로 했지만, 그날 밤 대구로 오던 비행기를 타던 이용문은 추락사로 사망한다.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이용문의 죽음은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38]
이후 박정희는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광주에서 창설한 3군단 포병단 요원들을 데리고 강원도 양구로 이동했는데, 당시 군단 내 미군 고문단과의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11월 강원도 양구에 있는 3군단 포병사령부에서 박정희는 휴전을 맞게 되었고 1953년 11월 25일에 준장으로 진급하며 이후 미국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처음 외국으로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4년 6월 27일 박정희는 여섯달간의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으며, 1955년 7월 14일에는 제5사단 사단장이 되어 1년 반 동안 재직했고 이후 1957년 3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했으나 군단장인 백인엽과의 불화로 박정희는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제7사단 사단장으로 전보된다.[39]
1954년, 제2군단 포병사령관 시절의 박정희 준장 |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 준장 |
1959년 3월에는 소장 진급자 명단에 올랐을 때 과거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은 진급 담당자들[40]이 백선엽에게 항의하였지만, 그는 "박 장군에 대해선 내가 보장한다."며 박정희가 진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41] 이 덕분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백선엽을 "백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42]
소장 계급으로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군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며 군내 요직을 거쳤다. 4.19 혁명으로 같은 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했고 이종찬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면서 출세가도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장면 총리가 이 문제를 미 육군 제8군사령관 겸 UN군총사령관 육군대장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와 논의하면서, 박정희의 신원을 육본을 통해 조회했고 김형일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라고 답변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이 알려지면서 매그루터는 장면 총리를 찾아가 항의했다. 결국 1960년 12월 15일 박정희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43] 이 일로 당시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44]은 박정희와 원수 사이가 됐고, 이후 5.16 군정에도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됐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박정희는 이전 상관이었던 이용문처럼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4.19 혁명 1주년을 기념으로 학생들이 대규모 집회를 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때 혼란을 틈타 집회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탈취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3.3. 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 당시의 박정희 |
오전 3시경 한강대교에서 박정희가 이끄는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 총격전이 벌여지며 40분간 대치했으나 결국 진압군은 후퇴하였고 부상자는 발생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박정희는 차에서 내려 헌병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을 무시한 채 다리 위를 앞장서 걸었고, 그 장면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침착한 솔선수범이었다고# 회고했으나 당시 김종필은 한강대교에서 박정희를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후에 전해들은 이야기라 전하기에,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회고에는 긍정적인 과장과 허구가 섞였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반란에 참여했던 박치옥 공수단장에 따르면, 이미 한강다리를 건널때 박정희가 술냄새를 풍기는 만취 상태였다고 하며, 이전 박정희가 쿠테타가 실패했다고 여겨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정변 지휘부들은 집결 장소에 박정희가 안 보인다며 당황해하다가 술에 취한 듯한 박정희를 부하들이 지휘 현장에 찾아서 데려와 이후 박정희는 술에 취한채로 반란을 지휘했다고 한다.#다만 박치옥은 원충연 반혁명 사건으로 박정희에게 숙청된 인물이었기에 박치옥의 주장도 전부 수용하기도 무리가 있으며 둘의 주장을 모두 반영한다면 오히려 만취상태였기에 술기운에 겁없이 총알이 날아오는 한강다리를 솔선수범해서 건넜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KBS라디오방송국, 육군본부, 국방부, 제6군관구사령부(제 1지휘소로 사용), 서울지방경찰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정부 수반이 머물렀던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서울)[45]에는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이 가해졌다. 그러나 장면 총리가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를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46]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오전 9시 경, 장면 총리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당한 현석호 국방장관과 연금당한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해군중장 이성호 제독,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공군중장 김신 장군, 해병대사령관 해병중장 김성은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향해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계엄령 추인 및 혁명 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대통령 또한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사퇴 의사를 밝혔고, 오전 10시경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을 알리자 곧 북한군이 휴전선에 결집, 10시 18분경에는 매그루더와 주한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이 장면 내각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국민들이 군사봉기를 딱히 반겨주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47]
이에 정권이 군부에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하기 위해 그날 장도영 등을 앞세워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48],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할 것임을 밝히며, 국무위원, 정무위원을 모조리 체포하고, 대의원 헌법기관을 정지시키는 한편, 오후 7시부터 장면 정권의 모든 권력을 군사혁명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인수함에 따라 국가 기구의 전권을 행사할 것이고, 오후 8시를 기해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의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후 오후 10시 30분에 윤보선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원들의 신병을 전부 보장한다는 대가를 주고 대국민 특별담화 방송을 하게 하여 장면과 각료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고 17일 내부 불만을 잠재우면서 장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다가 그날 저녁부터 18일 아침까지 매그루더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야전사령본부청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육군 제1군사령관 이한림의 체포를 단행한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인 전두환 대위가 가담했는데 전두환은 졸업선배 신분으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불러다가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이 막았고 전두환은 이를 박정희에게 일러바쳤는데, 박정희는 강영훈을 구속 수감시키고 전두환이 하려고 했던 퍼레이드를 진행시켰다.
5월 18일 아침, 매그루터 사령관이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 서울에 진입한 쿠데타 군은 2,700 명 가량인데, 박정희 소장이 영도하고 있소.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공산주의자요! 현재로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쿠데타의 성격과 장래를 의심하고 있소.(중략)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소. 따라서 우리는 공산주의가 싹트기 전에 미리부터 잘라 나간다는 견지에서 불행한 일이지만 쿠데타군을 무력 진압하기로 결정하였소!"
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매그루더 회담 주선 289p~294p의 일부 (원문)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일생/진위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지금 서울에 진입한 쿠데타 군은 2,700 명 가량인데, 박정희 소장이 영도하고 있소.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공산주의자요! 현재로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쿠데타의 성격과 장래를 의심하고 있소.(중략)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소. 따라서 우리는 공산주의가 싹트기 전에 미리부터 잘라 나간다는 견지에서 불행한 일이지만 쿠데타군을 무력 진압하기로 결정하였소!"
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매그루더 회담 주선 289p~294p의 일부 (원문)
한편, 장면 총리는 16일 외부에서의 접촉을 차단하고선 유엔군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 대사관에 보냈다. 17일 오후에는 가까운 사이였던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18일 오전 총리 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며 동향을 파악하였다. 이후 18일 장도영이 찾아와 설득한 끝에 대동하여 18일 12시 30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소집한 69차 임시 국무회의에 참여하게 되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가 아니라 투항식에 참여한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장면 총리는 퇴장하며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남미의 여러 나라처럼 군부 변란이 상습적으로 되어버린다면 이 나라의 앞날이 무척 염려스럽소"하고 윤보선 대통령과 생전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이로써 박정희는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고, 총리 및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승인을 얻어 1시간 뒤 윤보선 대통령이 이를 추인하도록 함으로써, 봉기 60여 시간 만에 마침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왔다.
3.4.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11월 11일 미국 초정으로 백악관을 방문하여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민정이양, 경제발전을 위한 원조,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원조 제공 등에 관한 회담을 나누었다. 당시 박정희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경제개발 계획을 설명하고 이를 위한 차관 지원을 요청했으나, 케네디는 원조를 받는 나라에 차관을 해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혁명재판을 통해 3 제2공화국에서 미온적으로 처벌 중이던 3.15 부정선거 관련 책임자와 4.19 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였던 곽영주, 최인규를 사형하는 등 급진적으로 사법처리를 단행하고,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을 일거에 체포 후 조리돌림하며 국민과 지식인들에게도 지지를 얻었다. 다만 이 시기 조용수로 대표되는 억울한 희생에 대해서는 이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더불어 사법살인을 자행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
1961년 6월 3일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넘겨야 하며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 것을 동아일보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라는 제목으로 1면에 보도한 적이 있는데, 검열을 안 받고 이게 신문에 실려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 차장, 기사를 쓴 이만섭 기자를 비롯한 정치부 기자 등이 연행되고, 이만섭이 구속되었으며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 유동준까지 최고회의에 끌려갔다고 한다.
한편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치학, 법학, 경제학, 교육학 등 학자들과 중앙정보부 간부를 포함한 21명으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여기서 1961년 10월에 1963년 8월 15일 양심적인 민간 정치인들에게 민정을 이양한다는 전제 하에 군인들이 예편해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서 민정에서도 정권을 잡아야 하며, 선거 승리를 위해 군인이 참여할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계획서를 작성한다.
이에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이 총괄해 1962년 1월 말부터 비밀리에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 52명으로 재건동지회를 결성, 1962년 4월 훈련원을 설치하고 1962년 말까지 1,000여 명의 요원을 교육했으며,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 6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 총 6,600만 달러를 받아왔고, 대내적으로는 1962년 겨울 김상돈, 조중서 등 민주당 41인을 반혁명으로 몰아 체포하기도 한다. 이후 민정이양이 다가오자,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뼈대로 하는 제5차 개헌을 공포하고, 증권파동을 통한 정치자금, 일본 재벌의 로비 자금 등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세를 불린다. 이를 위해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일으킨 4대 의혹 사건이 알려지자 구악일소를 내세운 군사정부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 신악보다 구악이 더 심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또 다른 군부의 실책으로는 1962년 6월 10일에는 중공업화를 통한 내포적 공업화 재원을 확보하기위해 미국은 물론 한국은행과의 협의도 없이[50] 일부 수뇌부의 주도로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잇따라 동결 조치를 발표하여 장롱 속에 있는 돈들을 끌어내고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부 출연기관 주식을 강매하게 하며 삼화제철 등을 동원하려 한 것이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지하경제가 없었고 사업 자금 동결에 따라 중소기업 가동률이 50% 밑으로 떨어지는 등 역효과만 나타나자 뒤늦게 이를 안 미국의 요구대로 실패를 인정, 이후 차츰 미국의 주장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중공업화 계획 연기, 재정 안정화, 금리 현실화, 환율 정상화, 한일수교 등 미국의 여러 요구에 대한 승낙을 발판으로 원조, 차관 등의 인센티브를 더 따내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
다만 군정의 성과 그에 따른 지지도 있었는데,부패와 구악을 일소한다는 공약에 따라 폭력배 4,200명을 포함해 범죄자 27,000여 명을 단속하였다. 부패한 공무원 약 40,000명을 공직에서 추방하였으며, 축첩을 사회악으로 규정해 민법에 일부일처제의 기초를 두었다. 화폐개혁의 경우 자금 동원에 있어서는 실패로 끝났지만,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등으로 인해 현금 위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던 국내 화교 상권을 크게 타격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시아 경제를 주름잡던 화교들이 한국에서만큼은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기도 했고, 동시에 민생 안정책으로 농가 부채 탕감 해주는 농어촌고리채법 등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을 실시해 농민들의 호응을 얻고자 했으며, 미온책에 끝났다는 비판도 있으나 이러한 결과는 향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영호남 농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나타나면서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62년 12월 17일이 되자, 박정희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고[51] 26일 단원제 국회와 대통령 중심제를 핵심으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1963년 3월 16일 이전의 약속과 달리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거부하며, 군정의 4년 연장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하자 군정연장반대운동이 일어나며 반대가 극심했고, 이전 남로당 경력에 따른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하던 미국까지 강하게 개입하자 이에 결국 승복해 민정이양을 발표했다 결국 8월 30일 전역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그후 이튿날 민주공화당 입당 및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어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기에 이른다. 전역식 당시 박정희가 연설에서 남긴 마지막 발언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군인 박정희를 상징하는 말로서 남아있다.
오늘 병영을 물러가는 이 군인을 키워주신 선배, 전우 여러분, 그리고 군사혁명의 2년 동안 ‘革命下(혁명하)’라는 불편 속에서도 참고 편달 협조해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다음의 한 구절로써 전역의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박정희 대장 1963년 8월 30일 전역식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박정희 대장 1963년 8월 30일 전역식
그리고 혁명공약에 따라 민간인 신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정변 당시 자신이 끌어내렸던 윤보선과 국민 선거로 맞붙는다.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윤보선 측은 박정희의 '여순사건 관련됨(남로당 군책임자)', '간첩 황태성(黃泰成)', 「국가와 혁명과 나」의 저서에서 '서구의 민주주의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 나세르를 찬양하고 히틀러를 쓸만한 사람이라고 추켜올린 것' 등의 내용을 근거로 박의장(박정희)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더욱 의심스럽다고 '사상 논란'을 제기했다. 이에 박정희는 1963년 10월 5일 동아일보 1면 반단 광고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면서 매카시즘으로 모욕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1963년 10월13일 윤보선이, 박정희가 과거에 남로당에 가입해 "김학림, 조병건, 배명종"과 같이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폭로하며, 1949년 2월 18일자 서울신문을 기사를 증거 제출했다는 것이 호외에 실렸다.동아일보 원문 |
<1963년 당시 동아일보 1면 광고문에서 발췌> 우리들은 이제 이 나라 사회의 근대화작업을 끈덕지게 방해하고 있는 일체의 매카시즘을 타도 청소해야 할 공동의 전선에 섰읍니다. 무슨 일이 있던지 우리는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의 신봉자를 우리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과감히 투쟁합시다. |
4. 제3공화국
4.1. 5대 대통령
제5대 대통령 취임식 |
정부의 시책을 이해하고 또한 협조하는 건실한 태도와 함께 근면한 생활인의 자세를 살려나가는 한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의 노력과 분발은 반드시 그리고 하루 속히 결실될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해 마지않습니다.
- 1964년 신년 연설 中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는 윤보선보다 0.97% 많은 표를 받음으로써, 5대 대선에서 승리했다.[52]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운 야권 세력은 허정과 송요찬의 사퇴로 표 결집을 시도했으나, 결국 박정희에게 15만 투표 차로 패배했다.- 1964년 신년 연설 中
박정희가 내세운 젊고 과단성 있는 이미지로 혁신계 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군정 시기에 거둔 적극적인 중농정책의 성과를 내세워 농민층으로부터 많은 표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시절 일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종북몰이를 시도했는데 이에 당시 상대적으로 이념관계로 인하여 피해를 많이 본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역풍이 불어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영남 지방은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보니 이념 공세에 시달리던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2월 12일 박정희는 김현철의 후임으로 최두선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김유택을 부총리, 정일권을 외무부장관으로 하는 제3공화국 초대내각을 구성하여, 12월 17일 5대 대통령에 취임함과 동시에 이를 출범시킨다.[53] 12월 20일에는 5.16에 참여했었던 제1해병여단[54]을 김성은 국방장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등과 함께 방문해 시찰하고 21일 서민 필수품을 중심으로 하는 물가안정을 지시, 24일에는 점차적인 물가통제의 해제, 안정을 기조로 하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합리적 추진, 내핍생활 장려, 수출 진흥을 골자로 하는 경제시책 4원칙을 발표하는 한편, 정일권 외무장관과 함께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논의를 검토한다.
12월 30일에는 김현철을 대통령 전권특사로서 2개월간 우방 40여 개국에 친선 방문 시키고 이듬해 1월 6일 한일협상과 관련하여 김용식을 수석대표로 하는 전권교섭단을 일본에 파견, 한미일 상호협력 등을 어젠다로 미국과의 수뇌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공화당 총재로서 대선에서 승리한 뒤, 총선에서도 크게 승리하여 공화당이 의석의 62% 이상을 확보하였으나, 비(非) 공화당 인사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함에 따라 내적으로 개각 논란 등 잡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외적으로는 겨울 쌀을 비롯한 생필품의 가격이 무섭게 올라 민심이 술렁이는 한편, 1964년 3월 9일 유진오, 윤보선, 장준하, 장택상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의 야권 인사들을 주축으로 불리한 한일회담 백지화를 요구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정위원회 결성 및 3월 24일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을 필두로한 1차 6.3 운동을 분수령으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최두선이 사퇴, 5월 11일 새 국무총리로 임명한 정일권이 제청한 내각으로 교체되고, 공화당은 내분에 빠지면서 6월 5일에는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퇴, 6월 3일부터 56일간 서울에 비상계엄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기부터 진행되던 한일국교정상화에 참여하였다. 이승만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대통령 이승만 그 자신이 그래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던 지라 일본에 대한 반감이 어마어마했던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재산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문제가 있어 합의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정권을 인정받아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미국 대사관의 긴밀한 협력 아래 요청된 대일정상회담, 방미 등을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며 세력 기반으로 다지는 데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CIA의 비밀스러운 관여 속 1962년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보내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와 비밀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독립 축하금(대일 청구권 자금) 형식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 차관 1억 달러 제공이 결정되자 반대 여론이 들끓었는데, 일본 측의 확실한 사과가 없었고 회담 상황을 상세히 알리지 않은 밀실회담이었다는 것, 그리고 우월한 기술과 많은 자본을 지닌 상대국에 지배당한다는 종속이론에 입각한 공포가 주된 요인이었다. 한일수교를 위한 회담이 한창인 1964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6.3 항쟁)가 일어났으며,[55] 야당과 학계, 언론, 종교계는 물론 김홍일, 손원일, 송요찬 등 예비역 원로들 또한 반대 투쟁에 참여했다. 이에 박정희는 서울 일대에 비상계엄과 휴교령을 선포해 학생 운동을 진압하고 극심한 반대속에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다.
한일수교와 동시에 일어난 경제국면에 있어 큰 변화는 수출제일주의 전략에 따라 경제에 있어 수출 진흥이 국정의 제 1목표로서 제시되었고,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한 수출주도경제가 구축된 것에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60대 초 당시 경제는 10:1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었고, 1960년 대한민국은 71.7%를 미국과 국제사회의 원조에 의존하는 기생적인 체제로서 사실상 자생적으로 국가의 경제 기능을 못하는 나라로, 일개 민간기업이 해외에 자금을 빌리면 중앙은행이 보증한다는 엄청난 약속을 했어도 당시 해외신용도가 극악인지라 기대에 밑도는 돈만 얻었다.
이전 군부 시절 경제개발 자금 동원을 위해 1962년 대한민국 환에서 대한민국 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의 실패 이후, 1963 ~ 1965년까지 미국의 재정안정화 정책을 수용하는 한편 민간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경제를 구축한 일본의 빈 자리로 면방직 공산품 수출이 급증하자 이에 활로를 찾아 장기영 경제기획원장의 주도로 수입자유화, 고정환율제 폐지 및 변동환율제 변경 및 수출입링크제 도입과 수출 위주의 경공업 설비를 일본으로 부터 대거 도입하며, 이전 이승만 정부부터 장면 내각까지 이어진 주류 전략이던 내수 소비재 증산을 목적으로한 수입대체산업화 위주의 내수 전략에서 오로지 수출의 진흥인 목적인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한 수출주도경제을 구축한다. 이에 1964년 11월 30일 수출 1억불을 달성하며 성과를 거두자 수출의 날의 지정하여 기념하고, 1965년 연두교서 박정희는 경제에 있어 수출과 무역진흥을 제 1의 목표이자 생명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며 수출제일주의를 공식적으로 경제의 제 1목표로서 설정한다.
이후 1965년부터 월간경제동향보고와 수출진흥확대회의라는 두 회의가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들은 대통령의 주재하에 공무원.기업인과 업계 관련자,학자들이 참여해 물가와 경상수지 등 거시경제와 국내외 시장의 동향과 수출정책을 다루었다. 15년이나 매월 두 개의 대규모 경제 회의를 개최한 나라는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고, 매번 두 회의를 주관한 박정희는 거듭된 회의 과정에서 최고 수준의 경제전문가로 훈련되어 갔다.
이 무렵 제국주의를 야기한 선진국들을 제외한 나라들은 이념과 관계없이 무역을 통제하고 자원부터 생산까지 자립공업을 일으키는동시에 국영기업을 육성하는 처음부터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했다. 박정희도 초기에 이 정책을 실행했지만 신통치가 않아 상공부장관 박충훈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둘을 절충한 중용의 정책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수출지향(export-driven development) 전략이었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절충하여, 약한 산업은 정부의 금융지원과 높은 관세로 경쟁력을 키우고, 이 단계가 달성되면, 최신기술과 경영능력으로 무장한 선진기업이 판치는 해외 시장으로 내모는 전략이었다
1964년 7월 10일 정부는 베트콩에게 고통받고 있는 베트남 공화국에 파병하기로 제안하고, 21일 국무회의를 거쳐 30일 만장일치로 국회 동의를 얻음으로써 양국 간의 유대와 경제적 협력을 강화했다.[56]
1964년 12월 6일부터 서독을 공식 방문하여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 및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의 유대 증진 및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하였다. 8일간 독일에서 머물며 지멘스, 제철, 철강 등 서독의 공업단지들을 시찰했고, 파독 근로자 및 유학생들과 접견하고 15일 귀국하였다. 서독 방문의 결실로 1억 5천 9백만 마르크(약 4천만 달러)의 상업·재정 차관을 서독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후 1964년 12월 29일 일본에서 미일경제회담을 마치고 방한하여 청와대로 온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 일행과 만나 한미, 한일 전반을 협의하였다.
1965년 1월 26일에는 정부 내 논의 끝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한민국 비전투부대 2,000여 명을 추가적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29일 말레이시아와 정삼회담을 가졌다.
1965년 5월 19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여,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자유진영의 결속을 다지고 통해 베트남 수호 재천명과 한국에 대한 미국 차관 1억 5천만 달러 추가 등의 공동성명을 내고 5월 26일 귀국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에 조인함으로써 한일국교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1965년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베트남에 전투부대 1개사단 파병을 결의, 8월 2일 대규모 군사 파병 계획을 공식화하였다.
제 5대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60년대 초중반은 5개년 계획 시리즈의 첫 계획인 제1차 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기간으로, 원래 1962년 발표된 제1차 계획은 이승만-장면정부의 계획을 참고로 성장률만 높인 것으로 국가차원의 시멘트 공장, 비료공장을 꾸준히 세우며 수입대체산업화를 이어가며 농수산개발 및 소비재 생산 장려 또한 이어갔으나나 1964년 제 1차 보완계획안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수출주도산업화로 선회하여 외자 도입에 유치와 수출 진흥에 부단히 힘쓴 시대였다. 이 당시 수출액은 일종의 스포츠처럼 언론에 보도되며, 수출 진흥이 곧 애국이자 산업역군이라는 분위기도 이때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등을 파견해서 나온 수익금과 경제원조와 투자단 유치,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맺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 등으로 경제 개발 자금을 충당했으며 또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 파병을 받아들여 1964년엔 태권도 교관단과 같은 비전투인력이, 1965년부터는 전투병 파병이 본격화되었다. 이 당시 박정희는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방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국회 내에 파병 반대 세력을 계획적으로 조직하여 미국의 지원을 늘릴 수 있게 하는 영리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실제로 브라운 각서에서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베트남 현지 건설 사업 참여권 등을 보장받았는데, 이로 인해 벌어들인 외화획득은 베트남 특수라 불리며 경제자금으로 쓰였다. 그러나 이중배상금지법을 도입하여 문제가 된다.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이 훈련이나 전투 시 상해를 입을 경우 다른 법률을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국가배상 청구권을 제한하는 법률이다. 군인에 대한 배상액이 부담이 되어 제정했으나 대법원에 의해 위헌판결을 받자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헌법규정' 으로 도입한다.
이게 현행 헌법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악법으로 꼽힌다. 헌법 조항에 대한 위헌시비가 나오는 이례적인 경우의 조항이다.
4.2. 6대 대통령
제6대 대통령 취임식 |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경제발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어, 또 다시 구태의연한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운 신민당을 큰 득표 차로 따돌리며 재선에 성공했다.
한편 이어서 한달 뒤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공화당이 개헌선을 넉넉히 차지하며 대승했으나, 6.8 부정선거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막걸리와 고무신 살포로 얼룩진 금권 선거였다. 이에 6월 12일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규탄 데모 시위가 벌어졌고, 신민당도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반년이나 국회 불출석하며 11월 29일에 마침내 등원했다. 이후 박정희는 부정선거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용공조작 사건을 일으키는데, 7월 8일부터 3차에 걸쳐 작곡가 윤이상이 포함된 유학생 간첩사건인 동백림 사건을 조작해 발표한다. 다만 이는 당시에도 말이 많은 사건이었기에 1970년 광복절 특사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까지 모조리 사면된다.
이렇듯 이 시점부터 무죄 판결로 뒤집힌 공안사건들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훗날까지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한편 1968년은 전쟁 이후 안보상황은 위태롭고 불안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 해에는 1.21 사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실제 간첩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이 일어나고 1969년에는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이 발생하며, 이외에 무장간첩에 의한 민간인 살상 등이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본격적인 공안과 반공 분위기가 조성되며 이러한 배경속에서 향토예비군과 주민등록증이 나왔으며 또한 학원교육에서는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군사교육인 교련이 강제된다.
동시에 남북관계의 긴장 속 박정희의 권력 행사 역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위기일발의 안보상황을 근거로 국가 안보 강화와 경제 발전을 이유로 들어 3선 개헌을 단행, 야당인 신민당은 이전 이승만의 사례와 같이 장기집권하여 결국 독재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격렬한 반대 투쟁이 일어나며 당시 투쟁의 선봉에 서던 김영삼 원내대표를 향해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경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하는 야당 의원들을 따돌리고, 3기에 한해 대통령이 재임할 수 있는 3선 개헌을 국민 투표에 부치는 법안을 날치기로 불법적으로 통과되어 제2차 국민투표에서 65%의 지지를 받아 연임을 하게 되었다.
경제 부문에 있어서는 제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이 추진된 기간으로, 2차 계획은 중간에 수정된 1차 계획과 달리 미국과 서독측 고문단의 자문과 함께 지침작성부터 수출주도산업화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계획으로 박정희 정부가 완전히 설계하고 실행한 첫 5개년 계획이였다.[57]
이전과 해외 차관, 기술 협력을 통해 국가 차원의 시멘트 공장, 비료공장을 꾸준히 세우며 수입대체산업화 또한 이어가며 철도, 발전소 및 송전 시절 건설, 댐 건설, 소비재 생산 장려도 이어갔으나 산업구조의 근대화가 새롭게 강조되며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등의 본격적인 도로망 건설과 종합제철소 및 석유화학 등의 기간산업과 노동집약 중화학공업의 건설이 새롭게 중점과제로서 추진되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수출산업이 아니라 수입대체산업으로 육성으로 계획되었으나, 향후 70년대 동안 3,4 차 계획 기간 동안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며 수출주도산업으로 변모한다.
2차 계획이 종료된 70년대 초에는 전국이 도로망으로 연결되었고, 철강과 에틸렌(C2), 프로필렌(C3) 등 기초화학제품의 수입대체를 이루었다. 이외에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도농간의 격차가 벌어지자 농촌의 진흥과 박정희 정권의 전통적인 지지층이였던 영호남의 농민들을 유지하기 위해 1970년부터는 농촌생활 진흥운동인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 당시 공식실업률만 30%에 하루를 떼우는데 급급한 극빈층이 가득한 나라에서 달당 국민소득이 2배 이상 늘어나고 사실상 완전고용을 달성하여 북한의 1인당 GNP를 역전하였다. 10월 유신 이전 박정희에 대한 호평은 이 당시 미국 등 해외 고문단과 국내 야당의 반대에도 이루어낸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소 등 오늘날 산업화 시대의 이미지로서 상징되는 경제 개발의 성과에서 근거하는 바가 크다.
4.3. 7대 대통령
제7대 대통령 취임식 |
7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돈을 투입해 국력이 소모되어 닉슨 독트린이 발표한데 이어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6.25 전쟁이래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미중관계는 해빙기를 맞았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데탕트로 불린다. 그러나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3선 개헌을 단행한 뒤 2년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박정희는 이전 구태의연한 윤보선 후보와 달리 40대 기수론을 등에 업고 대중경제론을 들고나온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53.2%의 득표율로 따돌리며 3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전의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막걸리, 고무신 선거라 불리는 부정선거 의혹과 지역감정 유포 때문에 야당의 비판이 일었다. 김종필이 이미 "이 선거에 당시 국가예산의 15%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었고, 김대중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또한 박정희도 예상보다 신승을 거둔것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당연히 박정희는 정권의 위기감을 느꼈고, 대선 직후 치러진 8대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을 획득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는 했어도 28명의 의원이 무더기로 낙선하고 대도시 지역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여 개헌선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한 데 그친 반면, 야당인 신민당이 진산 파동과 중앙정보부의 은밀한 공작에도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획득하고 득표율에서도 공화당과 고작 4.4%의 차이밖에 나지 않음으로써 이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1971년 12월 6일 평시임에도 불구하고 안보상의 위기를 이유로 대통령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출판, 언론, 방송에 대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정치활동, 집회의 자유를 불법화했다.
그리고 데탕트로 인해 공산권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평화 무드가 흐르자, 이러한 국제정세에 발맞춰 1971년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시작했고 전두환 정권 때 이산가족 상봉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72년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파견해 김일성과 만나게 한 뒤, 이에 대한 답례로 북한에서 보낸 박성철을 만나 비밀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 남북은 평화통일의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고 남북한 공식 대화기구로 남북 조절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이는 1년뒤 이는 통일을 빌미로한 정당화한 10월 유신의 사전작업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경제정책 중 하나는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긴급명령 15호' 8.3 사채 동결 조치는 경제악순환의 근절과 기업이 고리사채에 허덕이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업사채를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하도록 한 것이다. 1969년을 정점으로 경제성장률 또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1969년에는 14.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에는 10%, 71년에는 10.5%, 72년에는 7.2%로 성장률이 떨어지는 추세를 이어갔고, 부실기업 문제가 불거졌으며, 10여년 전보다 생활수준이 확연히 나아졌지만 여전히 많이 가난한 이들이 많아 저축할 여유가 없어 은행에 돈이 없는 금융 인프라가 대단히 열악한 형편으로, 급성장중인 기업들이 대출받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러한 원인은 다만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동안 북한의 노골적인 도발 행위가 일어나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안보위기가 증폭되는 동시에,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달러 약세를 노려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 태환 정책 포기를 선언, 전후 세계 통화질서였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어 원·달러 환율은 급등했고 전 세계적 불황이 닥치면서 아직 산업화 진행 중이며 양적을 거듭하던 한국 경제 또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특히 2차 계획 기간 동안 급속한 외자 도입에 따른 기업의 폭발적 성장과 과잉 투자가 뒤따르던 시점의 한국 경제 성장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는 한국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당시 개발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임금 상승으로 인해 묵혀두는 돈은 사실상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기에 저축된 돈이 미미하였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암시장의 사채들을 썼으며, 재계 1위의 현대그룹조차도 부도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니 고리사채를 마구 쓰던 대부분의 기업들은 파산 직전이었다.
결국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해 극단적인 대마불사 조치인 8.3 사채 동결 조치를 단행했고 이와 동시에 회사를 설립하거나 투자하면 각종 혜택을 부여해 1973년 들어 설비투자가 급증하여 전무후무한 14.8% 성장을 하였고, 1970년대 동안에도 연 10%에 달하는 고도 성장을 이어갔으나 이로 인해 각종 부작용과 함께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 정부/평가/논란이 있는 평가/경제 문서 참고
5. 제4공화국(유신정권)
5.1. 8대 대통령
제8대 대통령 취임식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모든 출판, 언론활동을 검열하고, 국회해산 및 정당 및 정치단체의 활동을 제한하여 일부 헌법조항을 정지하여 비상국무회의가 주재해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작업을 착수한다는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이 상황 속에서 박정희는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은 특별한 때에 독자적인 판단아래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포함된 개헌안이 제3차 국민투표에서 91.5% 지지로 통과된다. 체육관 선거를 통해 8대 임기를 시작한다. 이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변경되었으며, 국회의원의 3분 1을 대통령 임명하는 특권과 함께 유신정우회라는 위성정당이 생겨나며, 본격적으로 박정희는 독재자의 길에 들어선다.
이후 1973년 3월 절대권력을 위해 군부 내부에서는 윤필용 사건을 일으켜 군을 절대복종시켰고, 국외인 일본 도쿄에서는 지난 대선 당시 상대 후보였던 김대중을 납치하는 김대중 납치 사건 일으키며, 논란이 되자 반유신 투쟁에 더욱 불을 지폈다. 1974년에는 반유신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했고, 민청학련 사건 등 용공조작 또한 이어간다. 8월 15일 북한의 지시를 받은 테러리스트가 쏜 총에 영부인이 타살된 장면이 생중계 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는 큰 악영향이 되었다.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릴만큼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육영수가 사망하여 견제와 비판 기능이 크게 약화되어 2인자가 지나치게 부상하는 것을 방지하고 심복들간에 상호견제를 하는 방법으로 정권을 지탱하던 박정희의 통치력이 약화되는데 큰 영향력이 끼쳤다는 분석이 많다.
1975년 4월 8일 민청학련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용공조작으로 8명이 사형이 확정된 후 불과 18시간도 안되어서 사형을 집행버리는 사법살인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난다. 이전 동백림 사건과 같이 용공조작 사건은 사형이나 무기징역 확정되어도, 실제 집행하면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비판과 반발이 뒤 따르기에 몇년 지나고나면 사면되며 정부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프로간파다가 지속된 것이 관례였기에 민주화 운동가 사이에서는 사형이나 무기징역 판결이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지기도 했을 정도로, 이전까지는 독재자라도 없는 없는 죄를 뒤집어써서 사형을 시킬수는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이러한 믿음을 단박에 깨버린 충격적인 사건으로 정상적 재판 과정과 절차가 생략된 채 판결 뒤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며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Dark day for the history of jurisdictions)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한편 간첩에 의한 저격으로 영부인이 사망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에, 안보 위기가 1968년 이래로 다시금 증폭되는 동시에 박정희와 정부에 대한 동정론도 커져갔기에 야당인 신민당도 이전과 같은 강경한 대여 투쟁을 지속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랐다. 1975년 5월 12일 박정희는 야당 대표 김영삼과의 영수회담을 가졌고, 신민당의 강경노선이 약해지면서, 박정희의 하야 요구와 개헌운동이 중지된다. 이후 9월 새로 신민당의 당수가 된 이철승은 이전 유진산과 마찬가지로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박정희와 타협하며 김영삼이 다시 대표로 집권하여 선명야당론이 다시 떠오르는 1979년 초까지는 한동안 국회안에서는 대여 투쟁이 잦아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등 정계 안밖으로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은 계속되었다.
7.4 성명 이후 남북관계는 평온기를 맞이했으나 애초에 북한은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고 속으로는 적화통일을 그대로 추진하였고, 1주년이 되는 1973년 여름, 남한에 대한 공격을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하고, 특히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한 남한에 대해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1974년 육영수 피살 사건부터 79년까지 전면전이 당장 발생해도 될 만큼 대남도발은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외에도 휴전선을 포함한 육상, 해상에서 무수한 총격전이 벌어진 "비상전시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의 붕괴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안보상의 위기는 유신의 정당성을 유지하며 강압적인 독재를 지속하는 근거로 주장되었다. 결국 1975년 5월 13일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개헌청원을 하면 영장없는 체포 및 구속이 가능한 긴급조치 9호를 시행했고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제약하는 본격적인 겨울공화국의 막을 알리게 된다.
한편 경제에 있어 이 시기는 제 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2~1977)이 추진된 기간으로 3차 계획은 이전 1,2 차 계획과 달리 외국 경제고문단의 자문없이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수립한 첫 5개년 계획이였다. 이 기간부터 박정희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안에 역행하며 거의 전시동원체제에 가까운 수출주도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고, 1970년대 동안 본격적으로 산업과 수출구조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서 기술집약적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었다.
1972년 들어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한 경공업 수출만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옷, 합판, 신발,가발 등의 품목들이었는데 이 같은 수익이 별로 남지 않는 품목들로서는 성장 동력의 전망이 분명치 않았다. 이 해 박정희는 5월 청와대 집무실에서 오원철 당시 경제담당 수석 비서관에게 100억 달러 수출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오원철은 1950년대 일본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덕분에,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루었다고 판단했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아, 대통령 제2 비서실과 KDI를 주축으로 중화학공업화에 중점을 둔 3차 계획이 수립되어 실행된다.
또한 1960년대 동안 미국식 비교 생산비설을 입각해 각종 수출입 정책을 주도하며, 경제에 있어 절대적인 실권을 가지던 기존 경제기획원은 전폭적인 중화학공업화의 투자에 회의적 입장을 보였기에 일선에서 차츰 밀려나 경제관료 집단에 있어 경제기획원의 영향력 축소와 함께 일정 부분의 교체가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대 동안 경제 국면은 김정렴, 오원철 등 대통령의 일부 최측근들과 새롭게 중용된 서강학파 관료집단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중화학공업 중심의 새로운 수출주도형 경제 모델을 마련하며 1970년대 한국의 경제 개발을 주도했다.
1973년 6월에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을 6대 전략 업종에 선정하여 이들 분야에 10년간 90억 달러를 투자함으로서 1981년까지 전체 공업비중에서 중공업비중을 51%로 늘리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한다는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하였으며 1974년 3월 산업단지개발 지정 구역과 개발 계획을 발표했고 일시적으로 60년대 동안 대규모 토목공사로 기술과 노하우를 쌓은한국수자원공사를 일시적으로 산업기지개발공사로 확장하여 본격적인 대규모 중화학 단지 건설을 추진한다.
이에 1970년대 동안 산업단지는 포항(철강), 울산(조선, 석유화학), 여수(석유화학), 거제(조선), 창원(기계), 온산(비금속), 구미(전자)에 업종별로 입지하여 개발되어 남동 영일만에서 광양만에 이르는 남동임해공업 지역이 라인을 갖추며 형성되었고, 현재까지 국내 최대의 제조업 단지로서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다만 임해단지는 대부분이 PK와 TK 지역에 집중되어 경상도에 비해 전라도는 그 수혜를 비교적 받지 못했기에, 향후 정계에서 꾸준하게 제기되는 호남홀대론에 맞물려 보수 정권은 전라도의 홀대했다는 원인이되어 지역 감정이 증폭되기도 했으며 이는 박정희가 패배했다면 정치생명뿐만 아니라 내란 혐의로 처벌될 가능성 다분했기에 명운을 걸었던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례적인 호남의 상당한 지시세가 박정희 정부 출범의 1등 공신이였기에 이런 측면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58]
주철, 강철, 기계, 조선업, 화학은 산업혁명이래 선진열강이 독점해온 산업들로서 막대한 자본 투입과 수많은 기술인력 양성이 필요해[59] 스페인도 진출하지 못하던 분야이고 마오쩌둥이 무한정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다 파국을 초래한 분야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모험적인 투자로서 자칫하면 한국경제는 대대손손 빚더미에 오를 수 있는 위험천만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기어코 돌진해 유신 체제라는 보호막으로 추진하여 7년을 버티다 쓰러졌다.[60]
1974년 원유도입값이 3배 이상 폭등한 오일 쇼크가 발생해 물가상승률이 8배 이상 치솟고 막대한 무역적자가 발생해 부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출을 통해 이를 막은 뒤 노동집약 건설업을 통해 중동지역에 많은 노동인력을 건설투자에 투입함으로써 다량의 오일달러를 벌어옴으로써 1975년 3분기부터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고 수출도 예상외의 신장세를 보이며 농업생산도 풍작을 이뤄 국내 경제가 상향을 지속하여 다시 고도성장으로 복귀하였다. 중공업의 수출 증대 중동진출로 인한 건설 수익, 국내의 왕성한 설비투자와 소비의 폭발적 증가들이 합세해 그때까지 건국 이래 사상 최대의 호황 국면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은 1976년 세계 19위의 무역국에 올라서고, 1977년 1인당 GDP 1,000달러를 돌파함과 동시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며 소득 수준에 있어 중진국에 진입했으나, 여전히 중화학공업에 있어 기술, 제품 등의 해외 의존율이 높았다.
70년대 중공업화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제조업 성장률은 연간 20%에 달하여 1979년 전체 제조업 비중에서 중공업 비중은 54%가 되었고, 그해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 제품의 비중은 48%를 차지하여 이 같은 변화는 기존 선진 열강들이 50년~100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었다.[61]
7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농촌 개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 이래 농업정책은 줄곧 낮은 수매가를 유지하였다. 공업화를 위해 도시민과 노동자의 생활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농업을 희생시킨 면이 있는 것이다.
이에 새마을운동을 제창하여, 전국의 도에는 새마을협의회가 조직되었고 마을단위에는 개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각 마을에는 등급에 적합한 사업이 요구되고 이 기준에 따라 "자립마을" "자조마을" "기초마을"로 구분하였다. 이같이 마을마다 등급이 부여되고 기준이 제시되자 전국의 농촌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때 정부는 이러한 조건에 걸맞은 마을에 시멘트, 철근 등을 최우선적으로 보급하며, 이에 달성하지 못한 마을에는 보조를 중단하는 차별적 지원정책을 하였다. 이는 전국적으로 경쟁의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동시대의 경제성장에 못지않은 인상적인 결과를 낳았다. 1979년까지 전국 농촌마을 97% 마을이 자립마을이 되었고 나머지는 자조마을이었으며, 기초마을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새롭게 닦인 마을길에는 경운기들이 통행하였다.
1970년 무렵 여전히 독자적으로 소총을 제작할 수 없는 형편에 놓여있어 북한보다 현저한 군사력의 열세를 보였는데 주한미군의 전면철수가 가시화되자 중대한 안보위협으로 다가오자 율곡사업을 (전투력증강사업)을 세웠다. 1971년 계획 당시의 경제성장 속도로 계산해 보니, 1972년 ~ 79년, 8년 동안의 예측된 율곡예산은 15억 달러였다. 그런데 1972년부터는 박정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GNP가 마구 성장했다. 그래서 15억으로 예상했던 율곡예산은 무려 4배나 늘어난 60억 달러로 폭증해 1976년 북한의 국방비를 역전하고 2년뒤인 1978년, 세계 7번째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백곰을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1970년대 말부터는 서울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고 1977년 부가가치세를 도입했다. 1979년에는 1인당 GDP 1,700달러를 달성하였다. 이리하여 공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10여년 전만 해도 부자들이 경매로 구입하던 텔레비전은 전국 가정에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한 중진국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주택 부동산가와 물가 상승이 대폭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제 4차 계획부터(~1982년)는 외적에서는 중화학공업의 제조업 비율 증가(53% 달성)를, 내적으로는 소득분배와 생활환경 개선, 주택 공급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소득분배는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선방하였지만 부동산 폭등이 사회적 문제로 심각하게 등장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여러 번 내놓았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1970년대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왕성한 설비투자는 과잉투자로 돌변해 이는 부실기업 정리와 재고 처리를 단행해야 할 상황에 놓여 경제성장률이 하락해 불황에 접어드는 추세에 놓이게 되었다.[62] 70년대 후반의 호황은 79년 들어 경기과열로 이어져 각종 물자가 부족해 지는 현상이 표면화되면서 수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5.2. 9대 대통령
제9대 대통령 취임식 |
3차 계획이 종료된 1977년 사실상 10월 유신의 선전선동을 위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목표라 비판받았던[63] 국민소득과 수출액을 1980년까지 100억불 수출액, 1000불 달성한다는 목표를 조기 달성하면서 중화학공업화 또한 이어지며, 고도성장이 지속되는 듯 했으나 1978년 설비 투자율이 40%를 초과하는 과잉 중공업 중복투자의 부작용까지 이어지는 와중 1979년 제 2차 오일 쇼크를 맞게 된다. 이전 중동 건설로 위기를 곧바로 극복했던 1973년 제 1차 오일 쇼크때와는 달리, 총 수출의 비중에서 중화학공업 제품은 1970년 12.8%에서 1980년 41.5%로 급상승했고, 1979년 당시 중화학공업은 전체 산업 구조의 52.1%로 과반을 차지하며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가 구축된 상태에서 1차 오일 쇼크 당시 보다 석유 의존도가 훨씬 높아진 상태였기에 더욱 타격이 심대했으며, 이는 물가와 부동산 폭등과 설비 투자율의 급감과 함께 기업의 파산, 해고가 급속히 늘어 본격적인 경제 불황으로 접어들었다.
결국 경제 불황에 맞물려, 7년간 지속된 강압적인 유신 독재로 각종 사회적인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한편 정부는 1977년 난잡하던 각종 세금을 하나로 통합하는 목적으로 부가가치세를 도입하였는데[64] 이는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많은 불만을 사게 되어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부가세 철폐를 내세운 신민당(1967년)과 무소속을 포함한 야당에게 참패하며, 본격적으로 유신 정권의 종말을 알리게 된다. 이에 경악한 공화당은 경제팀에 책임을 돌려 부가세 도입을 주도한 이들을 대거 해임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 주요한 외교상의 화두 중 하나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관련한 핵개발을 두고 둘러싼 극심해진 미국과의 갈등을 들 수 있다. 1969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데탕트 등 동아시아에 화해분위기를 조성하여, 군사적으로 동아시아에 군사적인 개입을 줄이는 모습을 보였다. 1972년 중국[65]을 방문하고, 73년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여 1975년에 남베트남이 망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자[66] 박정희는 미국을 불신하기 시작하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하여, 충격 받은 적이 있는 미국은 당연히 이를 눈치 채고 끊임없는 압박과 위협을 한다. 결국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미국이 보여준 강력한 대북 응징의지와 확고한 안보공약 이행을 높이 사 핵개발을 중지한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전방위 로비를 벌이다 발각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이후 1977년, 인권을 외치며 주한미군의 완전한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다시 한미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 후 미국의 청와대 도청이 발각되는 등,[67]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변한다. 얼마나 최악이었냐면, 정부가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반미시위를 열었다. 어느 시점인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핵 개발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하고, 미군 철수에 대항하는 협상카드로 쓰였다. 결국 1979년 2월 주한미군 철수 보류결정이 발표되었고, 카터가 6월 방문해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였는데 이때 큰 실랑이가 있었으며,39년전 박정희-카터 주한미군 철수 설전 지미 카터는 향후 박정희와의 회담을 동맹국 지도자들중 가장 불쾌했다며 회고하기도 했다.#
5.2.1. 사망
자세한 내용은 10.26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박정희 대통령 공식 영정 |
1979년 YH 사건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이 터지자, 이에 대한 반발로 유신 정권에 대한 시위, 투쟁 또한 확대되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다. 이에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시위를 진압해 진정될 무렵,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석상에서 술자리 중에 10.26 사건으로 당시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장례는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졌다.
[1] 정9품. 현재의 소위 ~ 중위(부위는 위관급 장교 정도에 해당) 정도다.[2] 더구나 시집간 큰딸 귀희는 박정희가 태어나기 열흘 전 딸을 출산한 상태였다.[3] 사실 원래는 그렇게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고, 박성빈이 무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과거도 급제했으니 끗발이 없는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성빈이 동학 농민 혁명에 참여했다가 결국에 농민 운동 자체가 실패로 끝나면서 벼슬길은 사실상 쫑나게 되었고, 집안으로부터도 의절당하였으며 이후로도 조선이 일제에 병합 당하면서 세상에 나갈 기회가 더 없어졌기 때문에 겨우겨우 먹고 사는 신세가 되었다.[4] 박정희가 태어날 당시 부친 박성빈의 나이는 46세였다.[5] 사실 일제강점기 당시만 해도 일반 조선인들은 가정형편 때문에 자녀 전부를 학교에 내보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45년 문맹률 통계에서 문맹률이 78%로 나왔던 것이 그 증거.[6] 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 당시 초등교원양성기관은 고급보통학교(중고등학교) 급이었고 1940년대 중반에가서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대학교는 전국적으로 통폐합되면서 승격된 것이다.[7] 당시 박정희 집안은 가난해 학비를 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진학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부모를 설득해 응시하게 되었다.[8] 이 성적표는 박정희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였다.[9] 어른들의 뜻에 따라 억지로 결혼한 아내 김호남과 불화가 있었다.[10] 1938.11.02 동아일보 / <만주국군 육사군사과생 모집> <신경(新京) 31일발 동맹> "국경선 확보에 중대역할을 연출하고 잇는 만주국군은 금회 육군사관학교 '일계인 120명, 군사과생 30명'을 좌의 요령으로 모집하기로 되엇다. 지원자는 12월 20일까지 소정의 양식에 따라 치안부에 신입하리라 하엿다"는 내용의 기사.[11] 1936.7.25 동아일보 / <육군관제 개정골자> - "교육입퇴영 등을 관장하는 현제군무국의 징모과도 인사국에 옮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12] 만주신문과 동아일보 기사내용에도 알 수 있듯 17세 이상 20세 미만 미혼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입학 자격 대상자가 아니었고, 편지에서도 밝히듯 본인(박정희)도 알고 있었다.[13] 최고회의 의장 이낙선의 비방록, 이재기의 증언[14] 경례하고 있는 사람이 박정희로 추정된다.[15] 만주군 보병 제8단'은 사실상 일본군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소장이 만든 부대로 주로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또는 소련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16] 일제강점기(1910~1945) 조선인 소위의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자는 87명 중 임관자는 63명으로 연평균 조선인 소위 1.75명, 만주국(1932~1945) 장교 임관자는 67명으로 연평균 조선인 소위 4.8명으로 전국에 한해 6.55명이 배출될 정도로 조선인이 소위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17] 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재덕의 증언[18]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 신현준 대위, 방원철 중위의 증언[19] 다만 광복 이후에 편입되었기에 독립운동 여부와는 무관하다.[20] 박정희의 '한국 국민에게 고함', 조희연의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중에서[21]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을 정도로,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1946년 10월 황태성은 박상희와 함께 대구 10.1사건을 주동하다가 결국 월북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북한은 밀사(혹은 간첩)로서 '황태성'을 보내어 1961년 8월에 황태성은 다시 남하한다. 그러나 1961년 12월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박정희는 황태성을 살리고자 했지만, 박정희가 미국과 야당의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라 결국 1963년 12월 14일 황태성은 사형 선고를 받고 재심청구했지만, 인천 근교의 군부대에서 총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황태성 사건 참조.[22] '여순가담자 토벌'에 참여했던 송석하의 증언에 따르면 원용덕이 박정희를 붙잡아 '살려면 남로당 조직표 내놔라'라고 설득해서 서약을 받은 후 백선엽에게 구명요청을 했다고 한다.[23] 실제로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가 남로당 행적으로 사상이 의심된다며 공격했을 때, 박정희는 매카시즘적 행태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내가 진짜 공산주의자였다면 어떻게 6.25 때 목숨을 걸고 싸웠겠냐며, 단지 형에 대한 복수심으로 잠시 몸을 담군 것뿐이라며 이를 반박했다.[24] 다음의 내용은 조갑제 기자가 1997년부터 조선일보에 기고한 박정희의 생애#를 기반으로 하며 향후 조갑제가 이를 모두 엮고 수정작업을 거쳐 출판한 박정희 전기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된다. 이는 80년대부터 조갑제 특유의 기자정신으로서 당시 생존해 있던 박정희 관련 인물들의 직접적인 증언과 그들의 수기를 발로 뛰는 취재로서 모아 쓰여진 것이기에 조갑제 본인의 정치적 사상을 떠나, 내용 면에서는 박정희의 개인사와 사생활과 관련하여 가장 정확한 자료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좌우파 연구자를 막론하고 박정희 평전를 쓰는 저술자나 박정희 개인사의 연구자들의 저술도 박정희의 삶의 맥락에서 기본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간다.[25] 조갑제는 이현란이 없었다면 잡혀와 처형되었든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든지 월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형선고를 면하고 감옥살이를 했다면 6·25 동란이 터지고 정부가 후퇴할 때 다른 좌익수와 함께 '처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라 분석했다.[26] 아마 박정희가 10.26사태때와 같이 술자리에서 여대생을 선호했던 이유는 과거의 이런 경험이 작용했다고 보여진다.[27] 당시 우연히 한번 스쳐 지난간 것을 제외하면 이후 평생동안 만나는 일이 없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1988년 조갑제 기자가 생전 이현란씨를 인터뷰한 내용#과 이현란 문서 참고.[28] 당시 박정희와 매우 가깝게 지낸던 정보국 산하의 방첩부대(CIC)본부장 한웅진은 당시 "박정희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내 방에 기어 들어와서는 울기도 하고 잠을 못이루면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나한테 하소연을 하다가 흐느끼고, 그러다가 밤이 늦어 취한 몸으로 아무도 없는 관사를 향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생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외면하고, 장래의 희망은 사라지고...그 분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지요". 라며 증언했고, 이 무렵 박정희는 생활비가 모자라 육본 장교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꾸기도 했다고 한다.[29] 박정희에게 백선엽은 남로당 숙군작업에 따른 사형 구명부터 이후의 준장과 소장의 군 진급까지 편의를 봐준 사실상 인생의 은인이나 다름없었고, 이후 박정희는 본인이 3살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박정희는 백형이라 부르며 백선엽을 존대하며, 군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는 교통부 장관과 70년대 동안 한국종합화학의 사장을 지내게 해주는 등의 편의를 봐주었다.[30] 27일 밤에 저는 미아리 전선을 시찰하고 자정이 지나서 육본에 돌아왔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버리고 간 서류와 지도가 널려 있었어요. 부하 장교들을 데리고 한강다리쪽으로 가 보았더니 폭파된 뒤였어요. 다리 위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강에는 추락한 차량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헤엄쳐서 건넜습니다. 천호동쪽에 도착하니 동이 터 훤해지더군요.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니 '차형! 접니다'하고 불러요. 박정희였습니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의 이야기인 즉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함께 시흥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관악산 근방에서 적의 야크기가 격추되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박정희는 아직 폭탄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점심 때 누렇고 길죽한 오이를 따 가지고 오는 아주머니를 만나 갖고 있는 돈을 주고 한 광주리를 다 샀습니다. 저, 박정희, 부하 세 사람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오이를 다 먹었는데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박정희와 헤어졌어요. 그는 시흥으로 가고 저는 낙오병 수습을 위해서 강변에 남았습니다."[31] 허억은 당시 신랑, 신부를 만난 적이 없었기에, 주례사를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으로 시작하는 바람에 하객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32] 김종갑(육군중장 예편) 전 제 9사단 사단장은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참모장에게 맡기고 충원, 보급 등 행정적인 업무를 워낙 꼼꼼하게, 또 정직하게 처리해주어 저는 걱정할 일이 없었죠. 솔직히 말해서 작전에 대해서도 저보다도 더 많이 알더군요. 사단사령부가 자주 옮겨다니고 작전 지역은 넓고 험준하여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사단장이 대대장 얼굴도 모르고 장교들을 한데 모아 훈시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예비연대를 둘 처지도 못되어 훈련과 교육을 제대로 못하니 전투에서 신병들의 손실이 매우 많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33] 이후에도 최석과 박정희의 악연은 지속되었는데 최석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을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박정희는 1961년 8월 최석을 강제 예편한다.[34] 당시 작전 참모로서 박정희를 보좌하였고, 이후에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부의 교통부 장관직을 지내게 된다.[35] 아이러니하게 이러한 이용문의 계획에 참가했던 박정희는 약 10년뒤 이승만 정부가 물러나고 들어선 장면 내각을 본인이 전복하게 된다.[36] 무초 미국대사는 2월 15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에 대항할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는 이범석 신익희 장면 허정 가운데 "최선의 희망"은 장면이다'라고 했다. 3월3일 주한미국대사관은 '현행 헌법하에서 선거가 이루어지면 이승만이 재선될 가능성은 50%이하이다. 이승만, 신익희, 장면은 똑 같은 확률을 갖고 있다. 미국의 국익에서 판단할 때 장면의 당선이 가장 바람직스럽다. 그는 이승만에 비해서 합리적이고 유순하다'고 했으며, 이와깉은 내용은 미 국무성의 공식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37] 1952년 6월1일 라이트너 미국 대리대사가 국무부에 전문을 보낸다. '필요한때는 유엔군이 부산에 직접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승만을 예방적으로 구속하고 부산의 한국군과 경찰을 접수하는 계획을 수립해줄 것을 건의한다. 이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은 거의 없다. 질서는 단기간에 회복될 것이다. 이승만이 저항을 선동할 일정한 힘은 갖고 있지만 새 대통령이 선출 되면 교육을 받은 층에선 그를 받아들일 것이며 수동적인 대중도 별다른말썽을 부리지 않고 따라갈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은 한국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이승만을 축출할 계획을 세웠고, 이는 에버레디 계획으로 그 실재가 입증된다.[38] 이용문의 장남 이건개를 불러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한 뒤 31세에 서울시경국장으로 보내주며 뒤를 봐주었다.[39] 백인엽은 당시 박정희와의 극심한 악연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혁명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당했으나 형인 백선엽이 남로당 숙군사업 당시 박정희를 구명해준 은인이였기에 10개월만에 풀려났다.[40] 그중에는 곽영주 경무관도 있었다. 이승만에게 충성하고자 했던 곽영주가 박정희 대령의 과거 전력을 문제 삼았던 것. 이때 곽영주 경무관이 좀 더 유한 태도를 보였더라면 5.16 이후 열린 재판에서 구명될 여지도 있었을 것이라 보는 군 원로도 있다.[41] 1953년 대령에서 준장 진급 시에도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도움을 받았다.[42] 백선엽은 예편 후 대만(자유중국) 대사를 시작으로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거쳐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지휘하게 하였다.[43] 당시 2군 사령관이 장도영이었는데 박정희가 예편당할 처지에 놓이자 그를 부사령관으로 도운것이었다.[44] 여순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판사의 증언에 따르면 백선엽 국장과 마찬가지로 김형일, 송요찬은 박정희가 여순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 구명활동을 요청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었다. 당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판사는 "백선엽 국장 이외에도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았던 송요찬 장군과 김형일 장군 등도 그의 구명을 요청해 왔다"고 밝히면서 "당시 박정희는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난 것이 없었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데다 머리좋은 수재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회고했다.[45] 2공화국 당시 청와대에는 군 통수권자 윤보선 대통령이 기거하고 있었고 총리 공관은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46] 1963년 강북구 수유동으로 이전했다.[47] 정변 직후 미 육군 제24군단 소속 첩보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10명 중 4명은 우호적, 2명은 다소 우호적이나 시기상조, 4명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1961년 5월 31일 주한미국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서울대 학생들이 정변에 대해 찬성 50, 반대 50의 지지를 보이고 있다." 고 보고했다.[48] 김종필의 증언[49]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에 의해 국가 재건 과업 수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죄를 범한 자로 간주될 경우 이른바 반혁명죄[50] 1961년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으로 이미 화폐정책 권한을 한은에서 재무부로 이전했기에 가능한 처사였다.[51] 투표율 85%, 찬성 79%[52] 투표율 85%, 박정희 469만 2,644표 득표(46.6%), 윤보선 454만 6,614표 득표(45.1%), 무효표 95만 표, 1등과 2등 차이 15만 6,026표[53] 민복기 법무장관, 김성은 국방장관, 김윤기 교통부장관 등은 유임[54] 현 제2사단[55] 제17대 대통령 이명박도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56] 장교는 일일 6달러, 부사관은 일일 1달러를 미국에서 지급하기로 한다.[57] 프레이저 보고서 170 페이지에서는 all contributed to the optimism expressed by Korea's Second Five- Year Plan ( SFYP ) for 1967-71. This plan was the first one fully formulated and implemented by the Park Government. 모든 것(수출진흥, 베트남 특수 등)이 1967-71년 한국의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SFYP)이 목표한 낙관주의에 기여했으며 이 계획은 박정희 정부에 의해 완전히 수립되고 실행된 첫 계획이었다고 기술했다.#.[58] 1963년 당시 군부는 박정희 1인의 절대권력 체제라기 보다는 박정희를 대표로한 권력에 가까웠고, 이미 군정연장시도가 미국의 거센 개입과 국내의 거센 반발로 좌절되고 난 뒤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약속과 전역식까지 치르고 치러진 선거였기에 박정희가 패배하고도 이에 승복하지 않고 민간인 상태에서 군부를 지속했다면 대규모 파국 상태로 이어져 미군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할 가능성도 상당했으며, 극단적으로 이영훈은 박정희가 내란죄로 사형당했을 것이라 평하기도 했다.[59] 내수시장에서 품질을 테스트하는 절차가 필요해 인구는 최소한 7000만명이 넘어야 한다고 여겨졌다.[60] 유신당시 국내에 환멸을 느껴 1974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호주국립대학교 교편을 잡은 김형아는 세월이 흘러 유신 체제는 당시 급박한 남북한 정세와 주한미군 철수에 대응하는 동시에 중공업으로 올라타는 산업 고도화를 위해 치러야 했던 것이었다는 견해를 담은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유신과 중화학공업)」을 출간하였다.[61] 1980년도 주요 산업별 취업계수는 다음과 같다. 반도체54.65, IT 39.21, 음식숙박 39.44, 농림어업 30.04, 정밀기계 29.62, 전자부분품 21.92, 자동차 19.24, 일반기계 19.21, 도소매 15.86, 섬유의복 14.79, 자동차를 제외한 수송기계 14.02, 가전 13.71, 화학 12.41, 음식료품 9.7, 1차금속제품 7.08, 비금속광물 9.67, 건설 6.71, 광업 3.82, 금융서비스 2.09, 석유석탄 1.76. 한편 자본집약도가 그나마 올라간 2000년도의 경우 반도체는 0.86, IT 3.53, 농림어업은 8.96, 정밀기계는 4.22, 전자부분품은 1.74, 자동차는 2.55, 도소매 10.97, 석유석탄 0.48, 음식료품 3.76, 광업 0.85. 덧붙여 21세기 제조업은 조선업 등을 빼고 1 밑으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으며 취업계수가 낮을수록 자본집약도가 높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중공업은 일자리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하는 노동집약 중공업을 위주로 발달한 것이다. 이외에 #, ## 등 참고.[62] 다만 이곳에서 보여주듯이 1979년 당시 한국은 자본과 노동력을 최대한 발휘했을 때 달성 가능한 잠재성장률인 8.6%성장을 하였다. 국민적으로 체감하는 막심한 불황은 1980년 1분기에 찾아왔다.[63] 1972년 1인당 국민소득은 320불 수출액 18억불이였고, 당시 둔화되던 성장률은 감안한다면, 상당히 낙관적인 목표치를 제시한 셈이였다.[64] 현재의 시점에서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65] 그 당시 중국은 한국에게 북한처럼 적대국이나 마찬가지였다.[66] 1973년 파리조약으로 베트남전이 휴전이 되고 미국은 전쟁 재발시 공군을 투입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들어선 포드 정부는 의회와 여론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67] 이후 중요한 국무회의 청와대의 안뜰에서 진행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