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4-10 22:37:17

린든 B. 존슨

린든 존슨에서 넘어옴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 #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K.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A.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제46대 제47대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도널드 트럼프
}}}}}}}}}}}}

<colcolor=#0d163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에런 버 조지 클린턴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엘브리지 게리 대니얼 D. 톰킨스 존 C. 칼훈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리처드 멘터 존슨 존 타일러 조지 M. 댈러스 밀러드 필모어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윌리엄 R. 킹 존 C. 브레킨리지 해니벌 햄린 앤드루 존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스카일러 콜팩스 헨리 윌슨 윌리엄 A. 휠러 체스터 A. 아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토머스 A. 헨드릭스 리바이 P. 모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개릿 A. 호바트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찰스 W. 페어뱅크스 제임스 S. 셔먼 토머스 R. 마셜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캘빈 쿨리지 찰스 G. 도스 찰스 커티스 존 낸스 가너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헨리 A. 월리스 해리 S. 트루먼 앨번 W. 바클리 리처드 닉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넬슨 록펠러 월터 먼데일 조지 H. W. 부시 댄 퀘일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앨 고어 딕 체니 조 바이든 마이크 펜스
제49대 제50대
카멀라 해리스 J. D. 밴스
}}}}}}}}}}}}
미합중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파일:린든 B. 존슨.png
1964년 3월 10일 사진[1]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본명 린든 베인스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출생 1908년 8월 27일
텍사스 주 길레스피 카운티 스톤웰
사망 1973년 1월 22일 (향년 64세)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시 샌안토니오 국제공항[2]
묘소 텍사스 주 린든 B. 존슨 국립 역사 공원
재임기간 제37대 부통령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제36대 대통령
1963년 11월 22일 ~ 1969년 1월 20일
서명 파일:린든 B. 존슨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 주니어[3]
어머니 리베카 베인스 존슨[4]
형제자매 여동생 레베카[5]
여동생 요제파[6]
남동생 샘 휴스턴 존슨[7]
여동생 루시아[8]
배우자 레이디 버드 존슨[9]
자녀 린다 존슨[10]
루시 존슨[11]
학력 존슨 시티 고등학교[12] (졸업)[13]
사우스웨스트 텍사스 교육대학교 (B.A.)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대학원
병역 미합중국 해군 중령 전역[14]
종교 개신교 (그리스도의 교회)
신체 192cm / 체중 91kg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상원)
6 (하원)
의원 대수 75, 76, 77, 78, 79, 80 (하원)
81, 84, 87 (상원)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Lyndon_B._Johnson.png
약칭 LBJ }}}}}}}}}
파일:800px-Ljohnson.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
3.1. 대통령이 되기 전3.2.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대통령 취임3.3. 린든 B. 존슨 행정부3.4. 재선과 베트남 전쟁3.5. 내치와 경제의 다양한 평가3.6. 퇴임 이후
4. 평가5. 어록6. 선거 이력7. 기타
7.1. 인종차별 논란
8. 한국과의 관계9. 매체에서10. 둘러보기

1. 개요

제36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15]
All the Way with LBJ!
LBJ와 함께 끝까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슬로건
미국의 제36대 대통령.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상원 원내총무, 원내대표, 부통령을 역임했다. 저명한 하원의장 샘 레이번과 상원의원 리처드 러셀 주니어의 수제자로, 젊은 시절부터 노련한 정치 감각으로 1948년 상원의원으로 당선된지 불과 4년만에 원내총무를 거쳐 원내대표로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16]

상원 원내대표 시절 그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상원의원들의 개인적인 치부와 약점, 지역구의 특성, 개인사 등을 바탕으로한 협박과 회유로 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그 어떤 상원의원도 존슨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이러한 권력을 토대로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고 비록 존 F. 케네디에 밀려 근소하게 낙마하긴 했지만, 그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케네디 행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그는 에어포스원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제3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의 임기는 내치는 FDR의 뉴딜과 트루먼의 페어딜을 계승, 확대한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로, 외치는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된다.

그는 재임 기간 중 3번의 민권법(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 1968년 공정주거법)을 통과시켜 남북 전쟁 이래 핍박받던 흑인의 인권을 처음으로 국가적으로 보장하였다.

또 확장적인 재정지출 정책으로 복지를 확대하고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해 빈곤률을 떨어트리고자했으며 공공주택을 확충해 국민이 저렴한 값에 집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196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호황을 맞았으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슨은 공화당 후보 골드워터를 꺾고 미국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재선 이후 초선 임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을 확전시켰다. 베트남 전쟁은 민주당 내의 반전파[17]를 소외시켰을 뿐 아니라, 전쟁의 장기화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지도 떨어지면서 존슨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탔다.

또한, 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 시대의 지속된 경기호황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사회분위기가 계속되면서 이에 대한 청년세대와 유색인종의 반발이 반문화에 대한 지지로 확산되었으나, 여기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며 1967년~1968년 사이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대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68년 대선에서 3선 도전을 선언했으나, 3월 뉴햄프셔 경선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후보인 유진 매카시가 돌풍을 일으키자 스스로 3선을 포기했다. 그해 11월 대선에서는 린든 존슨의 베트남 전쟁 정책과 위대한 사회를 비판하던 보수파 후보 리처드 닉슨이 승리하였다.

존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나, 그의 리더십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무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존슨의 뜻에 따르던 속칭 "위대한 사회 민주당원"[18]이 민주당 내에서 당권을 잡고 있었기에 존슨의 유산은 오래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린든 B. 존슨은 그의 후임자인 리처드 닉슨과 더불어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평가하기 어려운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뉴딜 정책 이후 가장 야심찬 복지 정책이었던 "위대한 사회"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남부에서의 반발을 무릅쓴 흑인 민권 정책으로 널리 고평가받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무리하게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진보 성향 사학자들에게 크게 비판받으며, 보수성향 사학자들에게는 그의 재정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1970년 단기공황과 1970년대 후반 경기 침체에 부분적인 영향을 주었고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에도 일조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역사학자들은 그를 평균 이상의 대통령으로 평가하며 대통령 순위에서는 8~9위 혹은 10위권대 초반에 주로 위치해있다.

2. 약력

3. 생애

3.1. 대통령이 되기 전

파일:린든 B.존슨 리즈시절.jpg
청년 시절.

텍사스 주 스톤웰에서 태어났다. 그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기념하여 린든 B. 존슨 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린든 B. 존슨의 텍사스 저택 근처의 존슨 시티라는 도시는 그의 집안의 이름을 딴 것이다.[19] 외가는 유명한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저명한 침례교 목사이자 교수로 베일러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외조부인 조지프 윌슨 베인스는 텍사스 주무부 장관과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그의 미들네임 베인스는 외가의 성씨를 따온 것.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도 주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고, 샘 레이번 하원의장 등 텍사스 출신 유명 정치인과도 줄이 닿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젊은 학교 교사였던 린든 B. 존슨은 민주당에 입당하고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승승장구하며 대표적인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린든 B. 존슨의 졸업년도와 생년월일 자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당시 반에서 제일 어렸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가량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여 친척들의 비즈니스를 도왔다. 그리고 텍사스 주로 돌아와 샌마르코스에 있는 사우스웨스트 텍사스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텍사스의 도시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었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특이하게 정계 입문 전 직업이 교사였던 이색적인 경력이다. 이때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교육 시스템에 더욱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길지 않았던 교사 생활을 뒤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민주당에 들어가 1930년 하원의원 출마자의 선거운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정치를 익히기 시작했다.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며 텍사스 민주당 청년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텍사스 출신인 존 낸스 가너 부통령을 도왔고, 당시 전국구급으로 떠오른 텍사스 출신 하원의원 샘 레이번도 도왔다. 1936년 선거에서 루스벨트와 가너는 재선에 성공했고, 샘 레이번은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되어 집권 여당 대표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7년, 텍사스 연방하원의원 10번 선거구 의원이 사망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린든 B. 존슨이 공천되었다. 주도 오스틴이 포함된 비중있는 선거구였다. 린든 B. 존슨은 만 30세도 되기 전인 젊은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 문제로 크고 작은 갈등이 있던 텍사스 출신의 가너 부통령을 견제하는데 텍사스 출신의 젊은 의원인 린든 B. 존슨을 적합한 인물로 보아 린든 B. 존슨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1940년, 그의 정치적 스승인 샘 레이번이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 자리에 오르면서 린든 B. 존슨은 레이번의 측근으로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미합중국 해군 장교로 복무, 중령으로 전역했다.

린든 B. 존슨은 194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전 주지사인 코크 R. 스티븐슨을 상대로 치열한 경선을 거쳐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다. 이때 경선에서 고작 87표 차이로 존슨이 승리해 후보가 된다. 단순히 표차만 적었던 게 아니라 각종 논란이 연이어 일어나 여러모로 번잡한 선거였다.[20] 이렇게 어렵게 후보로 선출된 존슨은 넉넉한 표차로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그러나 상대 후보도 당시만해도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텍사스의 공화당 후보로서는 많은 득표를 했고, 존슨의 반대자들은 그를 'Landslide'(원래 산사태라는 뜻이지만 선거에서의 압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린든이라고 부르며 비꼬았는데, 훗날 존슨이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본의아니게 예언이 되어버렸다.

이후 민주당 현직 원내대표 어니스트 맥팔랜드낙선으로[21] 1953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되어, 야당 대표 자격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윌리엄 노랜드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와 협력했다.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로서 린든 B. 존슨이 보여준 리더십과 정치기술, 협상력과 타협술은 미국 의회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여서 린든 B. 존슨은 "나는 내 아내만큼 의회를 잘 알고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정교분리를 명확히 한 수정헌법의 발의 및 통과를 주도했다.[22] 존슨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반발한 딕시크랫들의 남부 선언문[23]에도 서명하지 않았지만 1957년 민권법[24]을 무의미할 수준으로 뭉개버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민주당 후보로 떠올랐다. 경선에서 존 F. 케네디이전투구를 벌였다. 케네디는 린든 B. 존슨에 비해 정치 경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의 젊은 이미지는 돌풍을 일으켰고 마침내 케네디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자신의 지지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남부 지역의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린든 B.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고,[25] 린든 B. 존슨은 케네디를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선거운동을 해 남부 지역에서 도움을 준다. 이들은 11월 8일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에게 신승하며 그 다음해 초 대통령-부통령에 취임한다. 린든 B. 존슨은 텍사스 출신으로는 존 낸스 가너에 이어 2번째로 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정적이었던 존슨에게 실권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케네디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인 로버트 F. 케네디에게 견제당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존슨의 옛 측근이었던 바비 베이커(Bobby Baker)가 뇌물 수수로 상원에서 조사받자 1964년 대선에서는 케네디가 존슨을 부통령 후보에서 제외하고 플로리다 주지사 조지 스매더스(George Smathers)나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테리 샌포드를 대신 세울것이라는 소문도 돌던 중...[26]

3.2.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대통령 취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3px-Lyndon_B._Johnson_taking_the_oath_of_office%2C_November_1963.jpg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진 린든 B. 존슨의 대통령 취임선서[27]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될 때 린든 B. 존슨도 자리에 있었다. 당시 린든 B. 존슨의 측근이기도 한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랄프 야버러 상원의원 간의 불화를 해소하고 텍사스 민주당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대통령과 부통령은 텍사스 주를 방문했다. 이들은 텍사스 주요 도시를 순회하고, 마지막에 린든 B. 존슨의 텍사스 지역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댈러스의 거리에서 차량 행진을 할 때, 케네디 대통령은 코널리와, 린든 B. 존슨 부통령은 야버러와 함께 차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탄 차량에 저격이 가해지면서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여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하였다.

모든 일정이 중단되고 케네디 대통령의 시신을 실은 미합중국 공군에어 포스 원워싱턴 D.C.로 향하는 가운데, 린든 B. 존슨은 이 비행기 안에서 케네디의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제36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미국 대통령 취임선서는 신임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하는 관습[28]이 있는데 존슨은 특이하게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아닌 가톨릭 미사경본(Roman Missal)에 손을 얹고 했다. 당시 케네디의 시신을 실은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황망하게 취임선서를 해야 하는데 비행기 안에 성경이 없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대통령[29]이 사용하던 미사경본만 있었기에 그것으로 성경을 대신했던 것. 그래도 미사경본이 성경 구절로 쓰여진 것이어서 큰 논란은 없었으며, 선서시 성경에 손대고 해야 한다고 법적으로 명문화된 건 없어서 법적인 문제도 없었다.

3.3. 린든 B. 존슨 행정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린든 B. 존슨 행정부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린든 B. 존슨 행정부#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린든 B. 존슨 행정부#|]][[린든 B. 존슨 행정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4. 재선과 베트남 전쟁

린든 B. 존슨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 확전을 결정하였다. 이는 전임 대통령 존 F. 케네디 시절부터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베트남 개입 노선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슨 자신의 외교·안보 전략에 따른 독자적 결정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케네디는 경제 지원과 안보 협력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개입 없이도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군사 개입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존슨은 초기에는 베트남 개입을 억제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나, 남베트남 정국이 워낙 불안정했던 탓에 결과적으로 전면전으로 끌려들어갔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시 남베트남은 군부 독재 하에서 빈번한 쿠데타와 극심한 부정부패로 인해 자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고, 심할 경우 한 해에 수차례 쿠데타가 벌어질 정도로 안보 체계가 붕괴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보다 강경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편, 존슨은 이러한 대외 정책 결정과 병행하여 국내에서는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기치로 한 복지·교육·인권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상대로 61.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 승리는 20세기 미국 대선사에서 가장 큰 격차 중 하나로, 당시 국민이 존슨의 내치와 지도력에 상당한 신뢰를 보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64년 린든 B. 존슨이 재선에 도전할 당시 방영된 데이지 걸 TV 광고.
1964년 미국 대선에서 린든 B. 존슨은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상대로 강렬한 정치 광고를 선보였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일명 “데이지 걸(Daisy Girl)” 광고였다. 한 소녀가 들판에서 데이지 꽃잎을 세는 평화로운 장면이, 갑작스러운 핵폭탄 카운트다운으로 전환되며 핵전쟁의 위협을 암시하는 이 광고는, 골드워터가 당선될 경우 세계가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단 한 번 방송되었지만 충격은 컸고, 지금까지도 정치사에서 가장 강렬한 선거 광고로 꼽힌다. 실제로 이 광고는 골드워터의 지지율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당시 골드워터는 흑인민권운동의 여파로 제정이 추진되던 연방 민권법에 반대했다. 개인적으로 인종차별에는 반대한다고 했지만, 연방정부가 주정부의 권한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이유로 ‘주의 권리(States' Rights)’를 앞세웠다. 이 입장은 결과적으로 남부 백인들의 보수 정서를 자극했지만, 린든 존슨은 이를 역이용해 골드워터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길 꺼리는 인종차별주의자”로 규정했다. 이는 중도와 진보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결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거 결과, 린든 존슨은 선거인단 486명 대 52명, 득표율 61.1%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골드워터는 인종차별 철폐에 강하게 반대한 남부 다섯 개 주—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와 자신의 고향인 애리조나에서만 승리했고, 나머지 전역에서는 패배했다. 존슨은 고향 텍사스를 포함해 와이오밍, 유타, 아이다호, 네브래스카, 캔자스 등 기존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존슨의 61.1% 득표율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대선사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 중 하나로, 이후 어떤 정당 후보도 이 기록을 넘지 못했다. 참고로 민주당의 상징적 인물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조차 1936년 대선에서 기록한 최고 득표율은 60.8%였으며, 이때 얻은 선거인단은 523명으로 1984년 로널드 레이건의 525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다. 한편, 상대 골드워터의 최종 득표율은 38.5%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선에서의 대승 이후 존슨이 마주한 현실은 말 그대로 헬게이트였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고, 대외적 위기 대응만으로도 벅찬 와중에 내부에선 차기 대권을 노리던 정적 로버트 F. 케네디가 끊임없이 자신을 견제하며, 재임 기간 내내 심각한 정치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원칙적으로 존슨은 케네디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1기 시점에서 남은 임기가 2년 미만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1968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전 장기화로 인한 여론 악화, 갈수록 심해지는 건강 악화와 스트레스, 그리고 당내 분열 조짐까지 겹치면서 결국 재선 출마를 포기하게 된다.

만약 존슨이 재출마해 당선되었다면, 그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임기를 이어가면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가장 장기 집권한 대통령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실제로는 건강 문제도 심각했기 때문에 임기를 완주하지 못하고 중도 퇴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1968년 실제 민주당 후보였던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것이다.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미국 역사상 8년 이상 재임한 대통령은 여전히 루스벨트 단 한 사람뿐이 되었다. 존슨이 재선에 성공했다면 거의 10년에 가까운 재임 기간을 기록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유진 매카시를 상대로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간신히 승리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경선을 포기한다. 이 장면은 훗날, 2024년 대선을 앞두고 경선 과정에서 후보직을 사퇴한 조 바이든의 사례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민주당은 당내 내분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로 선거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휴버트 험프리 후보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에게 석패하며 정권을 내주게 된다. 다만, 존슨의 베트남전 지지가 험프리의 패배로 직결되었다는 주장은 다소 일면적인 해석이다. 험프리의 패배는, 당시 민주당 내 딕시크랫이 반민권 성향을 앞세우며 독자 출마했고, 민주당 주류가 이를 통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이들은 사실상 인종주의 성향을 가진 극우 세력이었으며, 민주당이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하자 반발하여 이후 상당수가 공화당으로 이동하게 된다.

실제로 닉슨과 험프리의 득표율 차는 0.42%p에 불과했으며, 선거인단은 닉슨 301명, 험프리 191명, 조지 월리스 46명으로 나뉘었다. 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결과는, 딕시크랫의 지지 없이 이 정도 성과를 낸 것만으로도 험프리가 선전했다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만약 월리스가 출마하지 않았고, 그의 지지층이 온전히 민주당으로 향했다면 험프리가 압승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딕시크랫 대선 후보였던 조지 월리스는 민권운동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인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에도 언급된 바로 그 앨라배마 주지사였다. 그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월리스의 불출마 시 험프리를 지지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닉슨은 이를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으로 흡수하며, 이후 미국 정당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다. 선거 자금과 전략 면에서도 닉슨은 절치부심했던 반면, 험프리는 여러모로 열세였다는 평가가 따른다.[30]

그럼에도 존슨은 베트남전 개입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을 끝까지 유지했다. 퇴임 이후에도 그는 “우리는 베트남전을 계속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지만, 1973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전황은 점점 미군에 불리해졌고, 미국 내 반전 여론 역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주장이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한 채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재임기를 회고하며 “나는 훌륭한 아내(국내 정책)를 길거리 창녀(베트남전)에게 잃은 셈이다.” 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3.5. 내치와 경제의 다양한 평가

현대자유주의 및 진보 성향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존슨의 복지 및 시민권 확대 정책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보수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복지 지출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며 재정적 부담을 초래했고, 무제한적 달러 발행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균열과 이후의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주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다만 1970년대 세계 경제 위기와 미국의 국제 신뢰 약화는 존슨의 정책뿐 아니라 복합적 국제 요인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정부는 미국의 빈곤에 대해 무조건의 선전포고를 하겠습니다."
1965년 3월 15일 존슨의 연설. 연설영상, 연설문.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재임 중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국정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을 선포하며 미국 복지국가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정책은 교육, 환경, 의료, 빈곤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연방정부가 공립 초·중등학교에 대한 전례 없는 재정지원을 단행한 것은 교육 분야에서 연방의 역할이 본격화된 계기로 평가된다. 특수교육 부문 역시 이 시기에 대폭적인 예산 지원이 이루어졌다.

또한 존슨 행정부는 환경보호 정책의 기초를 다지며, 이후 미국의 연방 환경규제 체계 형성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복지정책 중 가장 상징적인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미국 의료보험 제도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고 있는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의 도입이다. 메디케어는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제공되는 건강보험 프로그램이며, 메디케이드는 소득 기준을 충족하는 극빈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의료 지원 제도이다. 이 두 프로그램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복지 확대 조치였고, 미국 사회의 의료 접근성을 크게 개선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프로그램은 미국 연방정부 재정의 핵심 부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는 현재 연방 예산 지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며, 고령화와 의료비 상승이 맞물리면서 적자 구조를 더욱 고착시키고 있다. 이러한 재정적 압박은 단지 복지 확대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독특한 의료 시스템 구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미국은 영리 병원과 민간 보험회사가 주도하는 고비용 시장 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의료서비스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편이다. 이 구조적 문제로 인해 정부와 국민 모두 의료비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사실 리처드 닉슨 행정부 당시에는 오늘 다수 선진국에서 운영하는 단일 지불자 의료보험(Single-payer healthcare) 형식으로 의료보험 국영화 가능성도 논의되었으나, 베트남전 재정 부담과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오늘날까지도 국영 건강보험체계를 갖추지 못한 유일한 주요 선진국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GDP 대비 의료비 지출은 약 15%로, 이는 OECD 평균인 9%, 한국의 7%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90년대에 대통령이 된 클린턴과 2000년대 후반에 대통령이 된 오바마 대통령은 모두 의료보험 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강력한 기득권 세력과 보수 진영의 저항에 가로막혀 개혁은 부분적이거나 제한된 수준에 머물렀다. 결국 존슨 행정부가 시작한 의료복지 제도는 오늘날까지도 미국 정치와 경제 구조를 규정하는 핵심 이슈로 남아 있으며, 그가 남긴 유산은 미국 복지국가 논쟁의 출발점이자 지속적인 논쟁거리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감세법(Tax Reduction Act of 1964)을 통해 개인소득세와 법인세를 인하함으로써 기업 투자와 소비를 자극했고, 이 조치는 실제로 경제 성장 촉진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같은 해 제정된 경제기회법(Economic Opportunity Act of 1964)은 '가난과의 전쟁'을 상징하는 대표 법안으로, 빈곤 퇴치와 직업 훈련,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법을 통해 직업훈련 프로그램, VISTA(국내 자원봉사단), 헤드스타트(유아교육 프로그램) 등의 주요 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

거이에 더해 존슨의 최대 업적 중 하나는 미국 사회에서 법적인 인종 평등을 보장한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의 통과였다. 이는 흑인 민권운동의 흐름을 입법화한 결정적 계기로, 고(故)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과제를 존슨이 남부 민주당 지지층의 이탈을 감수하면서까지 밀어붙인 것이었다.

실제로 민권법 통과 직후, 존슨은 측근에게 “잘한 일이야. 하지만 이로써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몇몇 지역은 공화당이 지배하게 되겠군.”이라며 씁쓸해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는 민권법 이후 남부 지역의 정치 지형 변화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것이지만, 실제 변화 양상은 단선적이지 않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1968년 이후 남부의 공화당 지지가 강화되었지만, 1970~80년대까지도 주지사, 상·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강세를 유지하며 '솔리드 사우스(Solid South)' 체제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따라서 "민권법 통과로 곧장 민주당이 남부에서 지지를 잃었다"는 주장은 과도한 단순화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아울러 1965년에는 이민 및 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을 개정하여, 그간 미국 이민정책에서 차별받아온 비유럽계 국가 출신 이민자들에게 보다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는 미국 사회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이후 아시아계·라틴계 이민자의 유입 증가로 이어졌다.

존 F. 케네디의 비전이었던 인간의 달 착륙이라는 목표를 실질적으로 정책화한 인물 역시 존슨이다. 케네디의 구상은 상징적 선언에 가까웠지만, 존슨은 NASA의 예산을 증액하고 의회 및 관료 체계를 통해 아폴로 계획을 일관되게 추진함으로써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했다. 제미니 계획을 비롯한 일련의 기술 실험과 투자가 그의 재임기에 집중되었으며, 이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 업적은 닉슨 대통령의 상징적 정치 자산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기반은 존슨 행정부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장점만 추려 보면 내치 입장에선 너무나 좋은 대통령으로 보이지만, 호평만 있는건 아니다. 미국의 본격적 복지 프로그램인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로 대변되는 방대한 복지 정책은 재정적 지속 가능성과 정책 집행의 효율성 면에서 논란을 불러왔다. 이에 따라 1970년대부터 정책학 분야가 부상하게 되었고, 복지의 실질적 효과와 비용-편익 분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재정 정책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는데, 존슨 행정부는 복지 확대, 베트남 전비 지출, 우주개발을 위한 예산을 감당하기 위해 재정 팽창과 통화발행 확대에 의존했다. 당시 미국은 금본위제도를 기반으로 기축통화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자국 내 인플레이션은 장기간 억제되었으나, 그 부담은 주로 유럽 등 교역국에 전가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미국의 일방적인 ‘달러 남용’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미국에 금을 요구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결국 이 흐름은 닉슨 행정부 초기에 금태환 중단 선언과 함께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로 이어졌고, 이는 세계 금융질서의 근본적인 전환점이 되었다.[31]

브레튼우즈의 해체 이후 달러 평가절하가 이어졌고, 이로 인한 손실을 감당해야 했던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 가격 인상을 통해 손실을 만회하려 했다. 그 결과가 1973년의 제1차 오일쇼크다. 표면적으로는 중동전쟁과 미국의 친이스라엘 노선이 명분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존슨-닉슨 시대의 통화정책과 달러에 대한 구조적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일쇼크는 미국과 서방 세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이는 카터 정부의 단임화와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때 일각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기축 통화로서 달러의 가치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1970년대 미국은 기축통화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중동의 독재자들과 검은 거래를 해야했고, 이러한 페트로 달러는 정의로운 국가 미국의 이미지마저 구기게 되었다.

존슨의 정책은 복지국가 모델의 상징이었으나, 동시에 “비대한 정부”에 대한 회의와 재정 부담 문제를 부각시키며, 이후 신자유주의적 조정과 시장주의 담론의 토대를 제공했다. 흥미롭게도 이는 공화당 레이건 정부뿐 아니라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에서도 수용되었다.[32]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존슨의 유산은 미국 정치의 좌우를 넘나드는 구조적 변화를 유도한 출발점이었다. 다만 이는 역설적으로 존슨의 정책들이 미국 복지국가 역사에서 정점이자 전환점이었다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한편, 존슨은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거물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정경유착 논란에도 휘말렸다. 특히 존슨의 핵심 후원 기업인 브라운 앤 루트(Brown & Root)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군사 인프라의 대부분을 수주하면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이 회사는 훗날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논란이 된 할리버튼(Halliburton)의 자회사가 되었으며, 당시에도 반전 시위자들과 참전 군인들 사이에서 ‘번 앤 루트(Burn & Loot, 불 지르고 약탈하라)’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이익 중심적 군산복합체의 전형으로 지적되었다.

3.6. 퇴임 이후

존슨은 실질적으론 5년 약간 넘게 집권하다 1969년 1월 20일 닉슨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하고 출신 지역으로 돌아와서 생애를 보냈다.

파일:nixon-yndon-johnson.jpg
1971년 5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서관을 개관했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회동한 모습.

존슨은 젊은 시절부터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골초였고, 이로 인하여 이미 여러 차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건강을 위해 한때 금연하고, 백악관까지 처음으로 금연구역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대통령 재임 중 많은 스트레스로 담배를 다시 찾았고,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존슨은 퇴임 후 텍사스의 저택에서 조용히 지냈으나, 그의 몸은 더욱 비대해지면서 동시에 쇠약해졌다. 1972년 12월 28일,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고, 이것이 존슨의 거의 마지막 대외 활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달도 채 못된 후였던 1973년 1월 22일, 농장에 있던 중 신체의 이상을 느꼈는지 경비업체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마이크를 당장 보내!"
Send Mike Immediately!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헬리콥터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샌안토니오의 병원으로 옮길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경비업체 직원이 그의 집에 가니 존슨은 수화기를 붙잡은 채로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손을 쓸 시간도 없었던 것.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공항에서 이미 사망 판정을 받아 소생하지 못했고 사인은 동맥경화로 인한 심장마비. 그가 퇴임한 지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향년 64세.[33][34] 시신은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에 옮겨져 조문객을 받았고, 미국은 트루먼 전 대통령 추모 열기가 식기도 전[35]에 다시 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36] 국장이 치러진 후[37], 시신은 텍사스 저택으로 다시 옮겨져 묻혔다.

4. 평가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들며, 다른 업적들이 빛을 잃은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전임자 존 F. 케네디의 카리스마와 상징성에 가려져, 국제적인 인지도 역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21세기 들어 존슨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점차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해지는 흐름이다.

많은 미국 역사학자들은 그를 "가장 복잡한 미국 대통령"이라 부른다.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기치로 내건 내치 분야에서는 흑인 민권법, 복지 확대, 교육·보건 개혁 등 미국 현대사에서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진보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베트남 전쟁 개입과 통킹만 사건 이후의 확전, 그에 따른 국민적 분열이 겹치며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성격 면에서도 다면적이다. 노련하고 유쾌한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함께, 직설적이고 짓궂은 언행, 때로는 무례하게까지 비칠 수 있는 리더십 방식 때문에 인물상을 일관되게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로 여겨진다. 존슨 대통령의 공보담당 비서관을 지낸 조지 리디는 1982년 출간된 회고록에서 “그는 개자식(son of a bitch)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훌륭한 개자식이다.”라고 평했는데, 이런 평가는 존슨의 모순적이지만 인상적인 리더십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도 존슨은 점차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있다. 2014년 전문가 집단의 순위에서 12위를 기록했고, 2018년 미국 정치학회 회원들 조사에서는 10위, 2024년에는 9위로 상승했다. 다만 보수 진영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보수성향 싱크탱크인 해리티지 재단은 존슨을 상대적으로 낮은 순위인 다섯 번째 그룹에 배치했다. 이는 인종화합과 복지 확대를 중시한 그의 정책들이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지미 카터 대통령 역시 남부 출신으로 인종 문제에 있어 진전을 보였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진영과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갈린다.

5. 어록

"Until justice is blind to color, until education is unaware of race, until opportunity is unconcerned with the color of men's skins, emancipation will be a proclamation but not a fact."
"정의가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을 때까지, 교육이 인종을 상관하지 않을 때까지, 기회가 인간의 피부색을 고려하지 않을 때까지는, 노예 해방은 단지 선언일 뿐 사실이 되지 못한다."

6.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37 미국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 텍사스 10구

8,280 (27.65%) 당선 (1위) 초선
193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4,476 (100.00%) 재선
194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47,442 (100.00%) 3선
1941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텍사스 174,279 (30.26%) 낙선 (2위)
194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텍사스 10구 12,799 (100.00%) 당선 (1위) 4선
194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44,602 (92.87%) 5선
194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6,947 (100.00%) 6선
194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텍사스 702,985 (66.22%) 초선
195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538,417 (84.59%) 재선
196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06,625 (57.98%) 3선[38]
미국 부통령 선거[A] 미합중국 34,220,984 (49.72%, 303명) 초선[40]
1964 미국 대통령 선거 43,127,041 (61.05%, 486명) 재선

7. 기타

파일:external/1ab49ef82609bf5dfd22c2debde4f36aaefbb9cee3985f95cb7ab980eea439fe.jpg

애견 '유키(Yuki)'와 함께. 그는 이렇게 개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장난을 많이 쳤다고 한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에이브러햄 링컨의 뒤를 이어 2번째의 장신(192cm)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공동 2등이다.

이니셜 LBJ를 자칭, 타칭으로 많이 쓴 대통령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JFK(존 F. 케네디), FDR(프랭클린 D. 루스벨트), TR(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이 있다. 부인 클로디아 앨타 테일러는 원래 애칭이 레이디 버드(Lady Bird)인데, 아예 이 애칭을 정식 이름처럼 내세웠고, 이니셜까지 LBJ가 되었다. 그리고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딸의 이름도 린다 버드, 루시 베인스로 지어 딸들의 이니셜까지 LBJ로 맞췄다.

파일:ZBZ9Egz.jpg

일명 The Johnson treatment로 유명했다. 존슨 자신이 원하는 법을 빨리 통과시키기 위해서 상원의원들을 설득시키는 방식으로 상원 원내 대표이던 시절부터 자주 써먹었다. 쉽게 말해 권모술수의 달인. 존슨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현직 상원의원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한 다음, 좋은 풍채와 직위에서 나오는 위엄, 언변과 융합시켜 공갈, 호소, 협박, 읍소 등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상원의원들이 그의 제안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위 사진은 Johnson Treatment를 당하고 있는 시어도어 그린 상원의원. 두 사람 모두 표정과 몸짓이 압권이다.

쉬지 않고 하루에 18~20시간씩이나 일하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lbj_tm.jpg

1967년 6월 13일 백악관에서. 좌측 인물은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이 되는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이다.[41]

존슨 대통령은 마셜에게 법무부 차관직을 제의했는데[42] 이상하게도 마셜은 존슨의 제안에 선뜻 답을 않고 차일피일 미루며 묵묵부답이었다. 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흑인이었기 때문. 뒤늦게 마셜의 의중을 눈치 챈 존슨은 그를 집무실로 불러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법무차관 자리에 검둥이(Nigger)가 앉아있는 걸 사람들이 보면 뭔 낯짝을 하게 될지 궁금하단 말이오!"라고 질러 버렸다. 즉, 흑백 차별 철폐의 일환으로 법무차관에 흑인인 마셜을 앉혀서 인종 차별주의 성향을 지닌 백인들의 속을 뒤집어버리려는 의도였던 것. 그렇게 존슨 대통령의 뜻대로 서굿 마셜은 1965년 8월부터 1967년 8월까지 법무부 차관으로 일하다가 연방 대법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심지어 존슨이 마셜을 대법관으로 임명하기 위해서 한 일이 걸작인데, 당시 대법관으로 있던 탐 클라크의 아들인 램지 클라크를 법무장관에 앉혀 버렸다. 즉 법무부와 대법원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부자(父子)가 동시에 양쪽에서 재임할 수는 없는 노릇인걸 존슨이 노린건데, 결국 탐 클라크 대법관이 이해 관계를 이유로 은퇴하자 바로 마셜이 대법관으로 지명되었다.

사실 마셜과 존슨은 동갑내기에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였고, 마셜 이 양반도 존슨 못지 않게 한 성격해서 둘이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불타는 뒷담화가 오갔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만날 때마다 평소 자기네들이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 X새끼, X해버릴 새끼." 뭐 이런 식의 수다를 떨었다고.

워렌 하딩이나 존 F. 케네디, 빌 클린턴에 밀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존슨은 이들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도 더한 엄청난 바람둥이였다.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고 이를 넘어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성범죄라 볼 수도 있는 짓도 자주 했던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존슨은 친분이 있던 에드거 후버 FBI 국장과 결탁하고, 스트롬 서먼드, 제이콥 재비츠, 에스테스 키포버 등 수많은 상원의원들의 여성 관계의 추문을 먼저 캐내는 등의 철두철미한 공작으로 본인의 이 여성 편력을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감출 수 있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지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중 최고의 욕쟁이로 뽑은 인물이기도 하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1964년 그리스 왕국키프로스 침공 때 주미 그리스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렀는데, 그리스 대사가 앉자마자 "당신네 나라(그리스)는 벼룩이야. 미국은 코끼리고. 코끼리가 벼룩 한 마리 밟아뭉개는 건 식은 죽 먹기라구."라는 폭언을 내뱉었다. 그리스 대사가 헌법을 거론하며 그리스의 침공을 변명하려 하자 존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네 의회랑 헌법 따위 좆까라 그러지. 미국은 코끼리예요. 키프로스는 벼룩이지요. (근데,) 그리스도 벼룩이지요. 만약 벼룩 둘이 계속 코끼리를 가렵게 한다면, 한 방 제대로 쳐맞을 거요."
Fuck your parliament and your constitution. America is an elephant. Cyprus is a flea. Greece is a flea. If these two fleas continue itching the elephant, they may just get whacked good.
이 폭언에 뒤이은 경고도 걸작이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 많은 달러를 제공하고 있어, 대사님. 만약 당신네 총리가 나한테 민주주의, 의회하고 헌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당신네 총리, 의회와 헌법은 아마 오래가지 못할거요."
We pay a lot of good American dollars to the Greeks, Mr. Ambassador. If your Prime Minister gives me talk about democracy, parliament and constitution, he, his parliament and his constitution may not last long.
이 살벌한 경고에 식은 땀만 실컷 빼고 온 그리스 대사는 본국에 급전을 쳤고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알아챈 그리스 정부는 키프로스에서 철군 명령을 내렸다.

흔히 텍사스 부자(富者) 대통령으로 조지 부시 부자 (父子) 와 함께 린든 B. 존슨은 최고의 부유한 대통령 중 한명이다. 린든 B. 존슨은 부시 부자보다 재산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재산 순위 상위권에 든다. 현재 물가 기준으로 7번째로 재산이 많았던 미국 대통령이라고 한다. # 인플레이션을 반영할 경우 부시 부자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은 것. 그의 집안은 텍사스 곳곳에 여러 사업에 투자하며 한때 복잡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그도 젊은 시절 학비를 생각하면서 대학교에 다닌 적도 있기는 하나, 이후 다시 사업이 번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고, 부인도 사업에 재능을 보였다. 린든 B. 존슨의 텍사스 저택에는 그의 묘지가 있으며, 가족들은 국가에 토지를 일부분 기증하여 국립 역사 유적지로 등록되어 있다.

린든 B. 존슨 재임기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사망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했는데, 당시 영국 주재 미국 대사에게 사절 역할을 맡겨 상대적으로 급이 낮다며 눈칫밥을 먹기도 했다. 이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장례식에 참석을 했기에 린든 B. 존슨 본인이 정 가기 싫었으면 그냥 처음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대리인 및 미국 대표를 맡기거나 당시 부통령이었던 허버트 험프리를 조문 사절 대표로 보내면 아무 문제 없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지만[43] 굳이 그렇게 안해 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쯤 되는 사람이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왜 린든 B. 존슨이 굳이 이런 악수를 뒀는지는 정확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린든 B. 존슨은 아이젠하워 이래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사실 여기엔 린든 B. 존슨도 케네디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을 수습하느라 바쁘고,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임신 문제로 인해 순방이 곤란했던 측면도 있었다.

여행 시에 수십병의 커티 삭 위스키와 함께 특수 샤워기 노즐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샤워기에 집착하기도 했다. 부통령 시절에 머무른 저택의 샤워실이 훨씬 나았다고 타박을 해대서 백악관 담당자가 신경쇠약에 걸려서 휴직을 했을 정도라고. 소방차 호스 정도의 수압에다가 한번 스위치를 누르면 물 온도가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확 바뀌기를 원하는 바람에 결국 수만 달러를 들여 백악관에 추가 배관과 펌프를 설치해야 했고, 6개의 샤워기 노즐에서 분 당 수백 갤런의 물이 쏟아지게 해서 몸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벽으로 밀릴 정도인걸 앞에 전기 엔지니어를 세워놓고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만족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즐 중 하나는 LBJ의 '점보'로 직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고생하면서 설치한 샤워기는 그가 퇴임한 후에 철거되었다. 닉슨이 싫어했다는 모양이다.

미국을 방문한 독일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가 "대통령께서는 통나무집에서 태어나셨다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존슨은 "저랑 에이브러햄 링컨을 혼동하셨군요. 저는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대통령 퇴임 후 교통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 적발된 적이 있었는데, 경찰이 전직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을 알아보고 놀라서 "Oh, my god!"이라고 외치자 린든 B. 존슨은 바로, "내가 신인 걸 잊지 마시오."라고 받아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꿈은 이루어졌는지, 원시부족의 섬에서 신격화되고 왕 노릇을 해달라고 요청받기도 했다. 사실 진지한 신앙은 아니고 정치 운동에 가까웠다. 자세한 것은 화물 신앙 문서 참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임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 배후에 린든 B. 존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케네디의 암살로 제일 이익을 본 인물이고 당내 경선에서 케네디에게 패해 이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것, 텍사스의 다양하고 부유한 재벌 가문들의 협력으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었으며 그 당시 케네디와 린든 B. 존슨이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허나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기 때문에 그냥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다. 린든 B. 존슨 본인은 케네디의 암살 배후를 쿠바피델 카스트로로 지목했다. 또 리처드 닉슨 항목에서 보듯 닉슨 배후설도 만만찮다.

줌왈트급 구축함 3번함의 이름으로 린든 B.존슨이 쓰였다. 다만 해외 반응은 월남전의 여파인지 반응은 좋지 않은 편.

텍사스 주 휴스턴의 NASA 본부는 린든 B. 존슨 우주센터로 이름지어졌다. 발사장은 플로리다 주 케이프 커내버럴존 F. 케네디 우주센터. 댈러스 지역을 반쯤 순환하는 I-635 또한 LBJ Freeway라고 명명되어 있다.

그 유명한 SR-71 블랙버드 정찰기의 이름을 지금처럼 SR-71로 만든 대통령이기도 하다.
원래 제식 명칭은 SR이 아닌 RS-71이었으며 "정찰 및 타격(Recon & Strike)"의 약자였지만 RS-71이라는 명칭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이 실수로 SR-71로 읽은 바람에 대통령이 실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공군이 관련 서류에 있던 기종 명칭을 모두 SR-71로 뜯어고치는 삽질을 해서 결국 제식명칭이 SR-71이 되었다. 나중에 전략정찰기(Strategic Reconnaissance)라는 말이 나와서 나름 그럴듯해 보이긴 했다. 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최근까지 알려져 있던 내용인데,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게 100% LBJ의 삽질인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이 린든 B. 존슨 대통령 몰래 백악관 보좌관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이 원하는 전략정찰기(Strategic Reconnaissance)라는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 대통령이 읽을 원고에서 RS를 SR로 바꾸게 했다고 한다.[44]

LBJ의 성씨인 존슨은 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과 겹치지만, 서로 혈육 관계인 것은 아니다. 완전한 생판 남으로서 겹친 사례.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에서 정 반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앤드루 존슨은 남부 재건을 방해해 궁극적으로 노예 해방 이후 흑인 민권의 신장을 가로막은 인물로 평가받지만, 반대로 린든 B. 존슨은 당 내의 반발을 무시하고 연방 민권법을 통과시켜 흑인 인권 신장의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민주당, 그것도 남부 출신.[45]

우드로 윌슨 이후 50년만에 나온 전임자보다 연장자인 대통령이다.[46] 참고로 29대 워런 G. 하딩부터 34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까지는 순서대로 태어났다.[47]

7.1. 인종차별 논란

"나는 그 깜둥이들이 200년 동안 민주당에 투표하도록 할 것이다."
"I'll have those niggers voting Democratic for 200 years."
- 린든 B. 존슨
존슨이 본인과 두명의 주지사들이 제안한 민권법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던 중 했다고 알려진 발언이다. 존슨이 실제로 위와 같은 발언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이는 존슨이 평소 사석에서 니거라는 흑인 비하성 단어를 자주 사용한 점, 흑인들이 뱀을 무서워한다는 고정관념으로 트렁크에 뱀을 싣고 주유소로 차를 몰고 가서 흑인 승무원을 속여 열어보게 한 일화가 있는 것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있다. 또한 친민주당 성향으로 알려진 MSNBC에서조차 그에 대해 의회에서 20년 동안 그는 민권법 제정을 막는 데 도움을 주면서 남부 블록의 신뢰할 수 있는 의원[48]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걸 보면 존슨 스스로 신념의 변화가 있었거나 신념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정략적으로 이용하였거나 둘중 하나일것이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위 발언이 나왔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존슨의 지지자들도 존슨이 개인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임은 부정하지 못한다. 위의 발언이야 사실관계가 부정확하다고 해도 그 외에도 존슨은 일상적으로 인종차별적 용어를 사용했다.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흑인 운전기사에게 '가구', '니그로' 등의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슨의 정책이 모두 정략적 행동이라고 보는 것 역시 옳지는 않다. 존슨은 (발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민권법 법안으로 민주당이 흑인의 지지를 얻을 것을 아마 알고 있었겠지만 또한 민주당이 남부의 지지를 잃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민권법이 통과된 뒤 사석에서 "나는 우리가 오랫동안 남부를 공화당에 넘겨주었다고 생각한다.(I think we just delivered the South to the Republican party for a long time to come)"고 말했다. 또 상원의원으로서 존슨이 남부 백인들의 눈치를 본 건 맞지만 그는 민권운동가들의 눈치(?)도 보았고, 오히려 이쪽을 더 많이봤다. 그는 1957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반발한 남부 민주당원들이 이른바 "남부 선언문"이라고 불리는 인종차별적 선언을 발표할때 이에 서명하지 않은 세명 뿐인 (구)남부연합 출신 상원의원이었고[49] 같은 해 공화당이 주도한 민권법이 통과하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이와같은 린든 존슨의 이중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 흑인이자 과거 존슨의 운전기사였던 로버트 파크의 증언이다.(바로 존슨에게 '가구', '니그로' 등의 폭언을 들은 장본인이다.) 그는 자기에게 폭언을 하는 '그 존슨'이 싫었지만 한편으론 자신에게 잘해주고 인종평등정책을 추진한 '그 존슨'을 사랑한다며 애증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음은 모두 로버트 파크의 증언.
"I loved that Lyndon Johnson"
"나는 (흑인 인권의 옹호자인) 그 린든 존슨을 사랑했다."
"I hated that Lyndon Johnson"
"나는 (자신에게 폭언을 일삼는) 그 린든 존슨을 증오했다."
"존슨은 나에게 잘해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없이는 이 일을 해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50] (...) 그리고 그가 시민권을 위해 한 일은 매우 귀중했습니다. 흑인들은 이 사람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Lyndon Johnson was good to me. I couldn't have made it without him . . . And what he did for civil rights was priceless. Black people are terribly indebted to this man."
"나는 린든 존슨이 편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가 사용해야 하는 모든 전술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는 남부 정치인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는 나에게 매우 잘해줬고, 저는 그가 두 얼굴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지 정치인일 뿐입니다."
"I never thought Lyndon Johnson was a bigot. He would just use whatever tactics he had to use to get what he wanted. He played to the southern politicians. He was very good to me, and I don't believe he was two-faced -- he was just a politician."

이런 일화들을 통해 린든 B. 존슨이 흑인에게 잘해줘야겠단 생각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흑인을 자기와 대등한 존재로 고려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린든 B. 존슨이 지내던 미국의 시대적인 특성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 인종차별주의자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위의 서굿 마셜과의 일화를 보더라도, 이 시기의 미국흑인이 공직에 있는 것조차도 논란을 낳을 정도로 인종차별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했고, 그런 상황에서 흑인을 법무부 차관을 거쳐서 대법관에 임명하거나, 민권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켰다는 점을 보면, 현대의 인종평등주의자들보다는 못해도 인종차별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볼 여지는 많다.

8. 한국과의 관계

파일:art_16054903690064_79ebaa.jpg

린든 B. 존슨 집권기 당시 한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이였는데, 베트남 전쟁 참전 결정을 내려줘서 그런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1965년 박정희 방미때는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빌려주기도 했었다.[51] 사실 월남전 당시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부한 캐나다 피어슨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났을 때 화를 내며 멱살까지 잡았다고 알려진 걸 보면[52] 월남전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알지 못한 이때까지만 해도 파병국은 다 이뻐보였을 것이다.

1966년 린든 B. 존슨이 방한했을 당시엔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가뜩이나 베트남전과 반핵 운동 때문에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반미시위와 양키 고 홈 구호에 난타당하고 있던 린든 B. 존슨은 이때 한국 시민들의 환대를 받고 감동의 도가니탕이 되었단 후문이 있다. 물론 동원된 시민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관용차가 지나가는 길에도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모든 시민들이 꽃다발을 들고 열렬히 환영했다. 참고로 이 때 정부에서도 엄청나게 신경을 썼는데, 급하게 거리를 단장하느라 운행을 중지한 서울 전차 궤도는 철거되지 않고 그냥 파묻혀버렸으며(이 선로는 2023년 3월 6일 월대 복원 중에 발굴되었다), 남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하꼬방)이 린든 B. 존슨 방한 때 TV로 미국에 생중계되면서 "이건 나라 망신이다"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서울 중심가는 정부와 서울시에 의해 대대적인 재개발에 들어가게 되었다.[53] 이것이 나중에 일어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물론 이것이 존슨의 잘못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궁극적인 잘못은 정부와 서울시장 김현옥, 서울시 당국, 해당 아파트를 건설한 무면허 건설업자들의 잘못일 뿐이다.

여튼 방한한 존슨 대통령은 한국에서 마치 팝스타와 같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54] 이런 이유로 기분에 취했는지 존슨은 갓을 쓴 노인장을 헬기에 태우고 수원 상공을 도는 서비스를 해 주었으며, 방문지 마을에 TV를 한 대 놔주고 갔다. 이에 노인들은 존슨에게 새신랑이 입는 사모관대를 입히고 마침 방문 중인 마을 촌장과 사진 촬영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사하였다. 덩치 큰 존슨[55]이 새신랑마냥 관모 쓰고 얌전히 있는 모습이 볼 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성 이벤트에만 그치지 않고 존슨은 마침 설립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던 KIST 설립에 협조해주었다.[56] 이 덕분에 서울 홍릉에 있는 KIST 본원에는 연구시설 가장 한가운데에 존슨 강당이 있다.[57]

이 시절 개발된 부대찌개의 일종인 존슨탕이 이 양반의 이름을 붙여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방한 당시 청와대에서 배달시켜 먹은 음식이 부대찌개라 존슨탕이 되었다는 말도 있고, 주한미군 부대 시찰 당시 부대에서 먹어보고 맛있다고 칭찬을 해 존슨탕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다 설들 중 하나로 확실하진 않다. 자세한건 문서 참고. 방한 당시 국내엔 흔하지 않았던 위스키커티 삭을 찾는 바람에 전국을 뒤져 공수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존슨이 외무장관 이동원을 칭찬하자, 박정희는 (음담패설식으로) 이동원이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받았다. 이에 존슨의 눈이 둥그래지자 박정희는 "난 마누라한테 잡혀 사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 결국 이야기는 기생파티로 빠졌다. 붙임성 좋은 이동원이 기생파티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존슨은 그거 좋다고 찬성했다.

그래서 방한 마지막 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별채에서 기생파티를 존슨 대통령에게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날 밤 눈치를 챈 영부인 버드 여사가 존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바람에 영 여의치 않았다. 몸이 단 존슨이 이동원 핑계를 대고 잠깐 나가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버드는 자신이 옆방에 가있을 테니 여기서 이야기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존슨의 기생파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 1992, 155~156쪽[58]

9. 매체에서

10.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044C9> 파일:린든 투명.svg린든 B. 존슨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생애<colbgcolor=#fff,#1f2023>생애
가족 아버지 새뮤얼 일리 존슨 주니어 · 어머니 리베카 베인스 존슨 · 아내 레이디 버드 존슨 · 딸 린다 존슨 · 딸 루시 존슨
역대 선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휴버트 험프리 · 에드먼드 머스키 · 존 코널리 · 로이드 벤슨
기타 데이지 걸 ·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LBJ 행정부
사상 자유주의 · 현대자유주의
정책 아폴로 계획(A_004)
사건사고 오일 쇼크 · 키티 제노비스 사건 · 실비아 리킨스 살인 사건 · 텍사스 대학교 시계탑 총기난사 사건 · 알래스카 지진 · 야머스 캐슬호 화재 사고 · USS 포레스탈 화재 사건 · 팔로마레스 B-52 추락사고 · 펜타곤 페이퍼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필리핀해 핵폭탄 분실사고 · 조디악 킬러
전쟁 베트남 전쟁(통킹만 사건)
기타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제10대
톰 대슐
제12대
척 슈머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9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80018; font-size: .9em"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제15대
로버트 버드
제19대
딕 더빈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9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80018; font-size: .9em"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tablebordercolor=#e90606>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올해의 인물 (1960년대)
Time Person of the Year 1960's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파일:attachment/Time1960.jpg파일:attachment/time_1961.jpg파일:attachment/time_1962.jpg파일:attachment/time_1963.jpg파일:attachment/time_1964.jpg
<rowcolor=#fff> 1960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1961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1962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1963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1964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파일:Person Of The Year 1965.jpg파일:Person Of The Year 1966.jpg파일:attachment/time_1967.jpg파일:attachment/time_1968.jpg파일:attachment/time_1969.jpg
1965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1966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1967년
1968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1969년
{{{#!wiki style="letter-spacing: -1.0px; font-size: 0.9em;"
파일:Time_Inc_white.png
}}}}}}}}}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44C9; border-right: 10px solid #0044C9;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직위 명단
부통령 <colbgcolor=#fff,#1f2024> 린든 B. 존슨
국무장관 딘 러스크
재무장관 C. 더글라스 딜런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법무장관 로버트 F. 케네디
체신장관 J. 에드워드 데이존 A. 그로누스키
내무장관 스튜어트 우달
농무장관 오빌 프리먼
상무장관 루터 H. 호지스
노동장관 아서 골드버그W. 윌라드 위르츠
보건교육복지장관 에이브러햄 리피코프앤서니 J. 셀레브레제
주유엔대사 애들레이 E. 스티븐슨 }}}
}}}}}}}}}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현대자유주의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1934년 이전 미국의 자유주의
주요 이념 사회자유주의 · 진보주의
연관 이념 기독교 민주주의* · 미국 좌파(민주사회주의) · 사회민주주의 · 온건주의(제3의 길) · 좌익대중주의 · 좌파 자유지상주의
연관 개념 경제적 진보주의 · 국제주의 · 뉴 내셔널리즘 · 뉴딜 정책(뉴딜 자유주의) · 뉴 프리덤 · 리무진 자유주의자 · 문화적 자유주의 · 민권 운동(미국 흑인 민권 운동) · 복지국가 · 사회 정의(표현의 자유 · 총기규제 · 의료 권리 확대) · 소수자 권리(성소수자 권리 · 여성 인권 · 장애인 권리) · 스퀘어 딜 · 신민주당 · 성해방 · 자유주의적 매파 · 정의민주당 · 중앙 집권 · 페어딜 정책 · 평등주의
정당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 · 미국연대당* · 민주당 · 진보당(1912년 · 1924년 · 1948년)
인물 정치인 낸시 펠로시 · 린든 B. 존슨 · 마틴 루터 킹 · 버니 샌더스 · 버락 오바마 · 빌 클린턴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엘리자베스 워런 · 에디스 에보트 · 우드로 윌슨 · 웬델 윌키 · 윌리엄 J. 브라이언 · 제시 잭슨 · 조 바이든 · 조지 맥거번 · 존 F. 케네디 · 척 슈머 · 카멀라 해리스 · 테드 케네디 · 피트 부티지지 · 피오렐로 라과디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하워드 딘 · 해리 S. 트루먼 · 헨리 A. 월리스 · 휴버트 험프리 · 힐러리 클린턴
학자 · 법조인 로버트 라이시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마사 누스바움 · 소니아 소토마요르 · 얼 워런 · 존 롤스 · 폴 크루그먼
활동가 W. E. B. 듀보이스 · 마이클 무어 · 마틴 루터 킹 · 배티 프리댄
언론 CNN · 뉴욕 타임스 · 더 뉴요커 · 워싱턴 포스트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 MSNBC · 뉴 리퍼블릭 · 더 내이션 · 롤링 스톤 · 허프포스트
미국 정치 관련 문서 (사회주의 · 현대자유주의(←1934년 이전) · 자유지상주의 · 보수주의(대안 우파))
* 중도좌파적 경제관(경제적 진보주의) 한정. 중도우파인 사회적 의제(온건 사회보수주의)는 현대자유주의에 포함되지 않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미국의 보수주의와도 구별된다.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분파
}}}}}}}}}

[1] 원본은 왼손을 의자에 기댄 사진이다.#[2] 샌안토니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심장 전문의이자 육군 대령인 조지 맥그래너한이 오후 4시 33분 사망선고를 내렸다.[3] 1877년 출생, 1937년 사망.[4] 1881년 출생, 1958년 사망.[5] 1910년 출생, 1978년 사망.[6] 1912년 출생, 1961년 사망.[7] 1914년 출생, 1978년 사망. 위키피디아[8] 1916년 출생, 1997년 사망.[9] 1912년 출생, 2007년 사망.[10] 1944년 출생.[11] 1947년 출생.[12] 현재는 린든 B. 존슨 고등학교로 개칭했다.[13] 졸업 후 2년 동안은 다양한 지역에서 친척과 함께 여러 비즈니스를 함께 하였다고 전해진다.[14]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해군에서 현역으로 복무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15] 재선 이후 2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선서. 부통령 시절 임기를 1년 남기고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보니 첫 취임 선서는 당시 케네디의 시신을 싣고 워싱턴 D.C로 돌아오던 대통령 전용기 내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당시 취임 선서[16] 1950년에는 트루먼의 낮은 인기 때문에 현직 원내총무가 낙선했고 2년 뒤에는 원내대표 어니스트 맥팔랜드가 낙선해서 어부지리로 직위를 얻은 면도 있었다. 또한 상원 원내총무 및 원내대표 도전 당시에 북부에서 비토를 받아 당직을 맡기 어려웠던 리처드 러셀이 존슨을 대타로 밀어줬다.[17] J. 윌리엄 풀브라이트, 로버트 F. 케네디, 유진 매카시, 조지 맥거번, 프랭크 처치[18] 휴버트 험프리, 마이크 맨스필드, 월터 먼데일, 로버트 버드[19] 성격은 검소하고 유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20] 존슨의 경선 과정 중 물어뜯기에 원한을 가진 스티븐슨은 탈당은 하지 않았지만 이후 리처드 닉슨,존 타워,배리 골드워터 같은 공화당 후보들을 지지한다.[21] 미국에서 현직 상원 원내대표의 낙선은 드문 일이다.[22] 실제 내용은 면세혜택을 받는 교회 등 비영리단체의 정치활동 참여 및 정치적 발언을 금하고, 만약 위반시 면세혜택을 박탈하는 것. 이는 교회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국가, 혹은 정치의 교회 개입을 막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23] 리처드 러셀 주니어,J. 윌리엄 풀브라이트등이 주도했다.[24]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주도했다.[25] 이는 가톨릭 신자로 표를 얻지 못할까 우려한 케네디가 린든 B. 존슨을 끌어들인 것이란 분석도 있다. 또는 케네디의 비서 이블린 링컨은 1993년 인터뷰에서 린든 B. 존슨이 후버로부터 얻은 케네디의 여성 편력 관련 증거물을 가지고 자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도록 협박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26] 케네디의 비서 이블린 링컨의 주장. 그의 라이벌이던 닉슨도 1963년 인터뷰에서 JFK가 차기 대선에서 존슨을 버릴 계획이라고 믿었다.#. 재클린 케네디도 JFK가 존슨이 대통령직을 맡는 것을 반대했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케네디는 정치 초짜가 아니었기에 존슨을 부통령 후보직에서 쫓아내는 것을 개인적인 증오와는 별개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선호하지 않았다는 설도 많다.[27] 린든 B. 존슨의 오른쪽에 위치한 망연자실한 표정의 여인은 다름아닌 피살당한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재클린의 옷에는 피격당한 남편의 핏자국이 묻어있는 상태였다.[28] 이는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청교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본인의 종교와 관계없이 그냥 관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라, 성경에 손을 얹지 않고 그냥 선서문을 읊어도 법적 문제는 없다.[29]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첫 가톨릭 신자였고, 60년 후 취임한 바이든 전 대통령이 두번째다.[30] 다만 초반 여론조사에 비하면 험프리는 놀라운 선전(10월 서프라이즈)을 했으며, 선거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닉슨이 1948년 대선토머스 듀이처럼 역대급 역전패를 당했을 수도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31] 물론 브레튼우즈 체제는 존슨의 통화 팽창 정책에 구조적으로 압박받았긴 했지만, 궁극적인 붕괴 원인은 닉슨 시기의 통화정책 변화와 국제 경쟁 심화라는 복합 요인이 작용한 결과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32] 민주당의 70~80년대 대선 참패와 1992년 이후 우클릭에는 이 영향이 매우 컸다.[33] 대통령 취임 때부터 사망까지의 과정 및 시간이 캘빈 쿨리지와 너무나도 비슷한데, 두 사람의 전임 대통령이 모두 0년대에 당선되었다가 3년 뒤 대통령 직무 수행 중 사망했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두 사람은 이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 그리고 둘 다 재선을 거쳐 6년 동안 대통령을 지내고 퇴임 후 4년 뒤에 사망하였다.[34] 그 외에도 이 사람 이후의 대통령들은 대다수 70세를 넘겼다. 버락 오바마는 이제 60대에 들어섰지만, 의료기술이 발달되고 있고, 그로 인해 평균수명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사고로 죽지 않는 이상 70은 넘길 가능성이 높다.[35] 트루먼은 1972년 12월 26일에 사망했으며 존슨은 1973년 1월 22일에 사망했는데 트루먼이 사망한 지 1개월도 채 안 되어 사망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이었던 김대중(2009년 8월 18일 사망), 노무현(2009년 5월 23일 사망)의 사망 시기 간격(약 3개월)보다 훨씬 짧다.[36] 이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도 1969년에 사망하여 당시 미국엔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 한명도 없게 되었다. 참고로 아이젠하워, 트루먼, 존슨 모두 닉슨 대통령 재임기에 죽었으며, 이후 닉슨은 빌 클린턴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37] 반대로 트루먼의 장례식은 가족들의 뜻에 따라 국장으로 거행되지 않았다.[38] 1961.1.3. 미국 부통령 취임을 위해 사임[A] 대통령 후보는 존 F. 케네디[40] 1963.11.22. 전임 존 F. 케네디 암살로 인해 대통령직 승계[41] 1908~1993. 이 사람은 첫번째 흑인 법학자이기도 하다. 1967년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법관이 되어 20년 넘게 재임했다.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볼티모어 워싱턴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은 Baltimore/Washington International Thurgood Marshall Airport, 즉 볼티모어-워싱턴 서굿 마샬 국제공항이다.[42] 당시 마셜은 미국 연방 항소 법원 판사.[43] 거기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처칠은 연합국의 지도자, 아이젠하워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으니, 참전 용사가 옛 전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상징성까지 있었다.[44] <월간 항공> 2009년 11월호 기사 참고 바람.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공개는 당시 극비였던 CIA가 운용하던 SR-71의 1인승 원형기인 A-12를 가리기 위한 일종의 연막이었다고 한다.[45] 다만 우파 성향인 앤드루 존슨과 달리 린든 B. 존슨은 좌파 성향이다.[46] 다만 이 사람은 전임자의 암살로 승계받았기 때문에 전임자가 만기퇴임하고 나서 연장자인 후임 대통령이 나온 경우는 지미 카터보다 13살 더 많은 로널드 레이건때 68년만에 나온 것이다.[47] 하딩 1865년, 쿨리지 1872년, 후버 1874년, FDR 1882년, 트루먼 1884년, 아이젠하워 1890년.[48] Lyndon Johnson was a civil rights hero. But also a racist.[49] 다른 두명은 에스테스 키포버앨 고어 시니어로 둘다 테네시 주의 상원의원이었다. 키포버는 1956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고 앨 고어 시니어는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아버지이다.[50] 파크는 상원 의회 식당의 첫 흑인 지배인이었다.[51] 1961년 11월 처음 박정희가 미국을 찾았을땐 미국 민항기를 이용했고, 케네디도 쿠데타군의 수장인 박정희를 그닥 호의적으로 보진 않았다. 사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경제 원조를 요구하며 파병 제안도 먼저 했으나, 케네디 정부는 공산권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고 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허나 케네디가 암살되고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뒤 월남전이 격화되자(케네디와 차별화된 노선도 필요했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4년 25개 우방국에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고, 한국은 이에 적극적으로 응한다.[52] 정확히는 파병도 파병이지만 1965년 피어슨 총리가 방미했을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만나기 전날 미국의 통킹 만 폭격을 비판하는 강연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53] 참고로 이 때 시가지 정비를 하며 소공동 차이나타운 중 절반이 밀려 사라졌고 현재의 서울프라자호텔이 들어섰다. 원래 이 자리는 화교회관을 지어주기로 약속했었으나 호텔이 들어서는 바람에 양택식 서울시장과 손정목 교수(당시 서울시 간부) 등 서울시 관계자들이 타이베이까지 가서 대만 화교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54] 참고로 북한이 이걸 보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평양 방문 때 똑같이 환영 행사를 했는데 이 쪽은 강제동원이라 영상을 보면 공산주의 체제 특유의 숨길 수 없는 위화감이 드러난다.[55] 192cm. 참고로 박정희 키는 164cm였다.[56] 물론 기분에 취해 해줬다기보단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협조해줬다는게 유력한 설이긴 하다.[57] 실제 표기가 존슨이 아니라 방한 당시 그대로 '죤슨'이다. 문자 그대로 큰 공연장같은 강당이 있고 구내식당이 있는 건물이다.[58] 현직 대통령이 기생 파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언론들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은 소재임을 고려하면 현실성이 있는 얘기인가 싶지만, 상술했듯이 존슨은 생전에 이 기생 파티는 우습게 보일 수준의 엄청난 여성 편력을 자랑하고도 이를 성공적으로 대중에게 숨긴 사람이었음을 고려하면 의외로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이야기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100%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59] LBJ는 텍사스, 언더우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60] LBJ는 상원 원내대표, 언더우드는 하원 원내총무(whip).[61] 네모바지 스폰지밥에서 집게사장의 원판 성우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