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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맨스필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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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주일미국대사 | |
미합중국 제83-94대 연방 상원의원 마이클 조셉 맨스필드 Michael Joseph Mansfield | |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03년 3월 16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1] | |
사망 | 2001년 10월 5일 (향년 98세) |
미국 워싱턴 D.C. | |
재임기간 | 제22대 주일미국대사 |
1977년 6월 10일 ~ 1988년 12월 22일 | |
묘소 | 미국 워싱턴 D.C. 알링턴 국립묘지 |
배우자 | 모린 헤이스 맨스필드 (1932년 결혼, 2000년 사별) |
자녀 | 슬하 1명 |
학력 | 몬태나 대학교 (B.A.) 몬태나 대학교 (국제관계학 / M.A.)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수료)[2] |
의원 선수 | 5 (하원) 4 (상원) |
의원 대수 | 78, 79, 80, 81, 82 (하원)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상원) |
지역구 | 몬태나 제1구 (하원) 몬태나 클래스 3 (상원) |
소속 정당 | |
약력 | 연방 하원의원 (1943~1953 / 몬태나 1구) 연방 상원의원 (1953~1977 / 몬태나 클래스 3)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1957~1961)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1961~1977) 주일미국대사 (1977~1988) |
상원 원내대표 공식 초상화 |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다수당 원내대표[3]와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인물이자, 린든 B. 존슨의 수제자이기도 하다.2. 생애
2.1. 청년기
1903년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맨스필드의 아버지는 뉴욕에서 막노동을 전전하던 일용직 노동자였는데 일하다 걸린 폐렴 때문에 맨스필드가 3살일 때 세상을 떠났고, 양육비를 부담할 수 없었던 맨스필드의 어머니는 그를 몬태나주의 친척집에 보냈다. 친척 집도 부유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친척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일했지만 상습적으로 가출도 하고 주립 고아원에서 반년간 숨어 지내기도 하며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제1차 세계대전에 불과 14살의 나이로 참전했고, 21살에 일등병 계급으로 제대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광산 노동자가 되려고 전문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젊은 교사인 모린 헤이스와 연인 관계가 되었고 헤이스는 맨스필드가 제대로 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했다. 뒤늦은 학업에 매진한 맨스필드는 20대에 고등학교 과정을 순식간에 마치고 몬태나 대학교에 진학해 문학 학사 학위를 받고, 파트타임 조교수로 일하면서까지 대학원에 다니며 악착같이 공부하였다. 맨스필드는 극동 아시아와 미국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는데, 1934년 <조선과 미국의 외교 관계: 1866년~1910년>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따고 1942년까지 극동아시아 외교와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 직위를 얻어냈다.
2.2. 정치가로서
몬태나 주 정계에서 맨스필드는 동아시아 외교 전문가로 알려졌으며, 그는 1940년 민주당에 입당하고 몬태나 1구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출마하기도 했으나 경선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1944년 다시 도전해 당선되었고 5선 하원의원으로서 외교위원회에서 활약했다. 맨스필드는 1944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대중 특사로 파견되었고, 트루먼 독트린을 지지했다.1952년 몬태나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현직 의원 제일스 액턴(Zales Ecton)을 근소하게 꺾고 당선되었다. 상원 원내대표 린든 B. 존슨은 마이크 맨스필드를 눈여겨보았고, 그에게 직접 정치적 협상과 압박의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존슨의 총애 속에서 1957년 맨스필드는 상원의원 임기 시작 후 불과 4년만에 원내 조직 2인자인 원내총무의 자리로 올라갔고, 1961년 존슨이 부통령이 되자 맨스필드는 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상원 원내대표 직위에 취임했으니, 이것이 불과 재선 상원의원이었을 때였다.
원내대표로서 맨스필드는 린든 B. 존슨과 같은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하지는 않았으나 민주당이 추진하는 여러 입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이 이 사람이 원내대표였을 때 통과된 대표적인 법이다. 존 F. 케네디이 암살되었을 때 장례식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해 주목받기도 했다. 한편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62년 응오딘지엠의 남베트남을 방문하고 베트남 지원에 대한 회의론자로 변했다. 비록 J. 윌리엄 풀브라이트와 조지 맥거번이 이끄는 원내 반전좌파 세력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상원에서 청문회의 형식으로 베트남 전쟁 주전파를 압박하는데에는 일정부분 도움을 줬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기에는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며 닉슨 독트린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닉슨의 베트남 전쟁 접근 방식이 옳다고 여겼고,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 철군 정책을 지원했다.
2.3. 외교관으로
첫번째 선거를 제외하고 몬태나 주에서 60%가 넘는 압도적 득표율로 계속 당선되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종신 상원의원도 가능했겠지만, 11년이나 상원 원내대표를 지내 피로감을 느꼈던 맨스필드는 1976년 은퇴를 선언했다. 같은 해 당선된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극동아시아 외교 전문가인 맨스필드의 경력을 고려해 그를 주일대사 자리에 임명하면서 맨스필드는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그의 능력을 높게 사 그를 계속 주일대사로 유임시켰고, 1988년까지 주일대사로 재직하면서 맨스필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주일대사로 근무한 사람이 되었다.주일대사로서 신사적인 태도로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미일 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양자 외교 관계이다"(most important bilateral relationship in the world, bar non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욱일대수장과 대통령 자유의 메달 등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1988년 은퇴해 고향 몬태나로 돌아갔다.
2.4. 말년과 죽음
고향으로 돌아간 맨스필드는 모교 몬태나 대학교에 "모린 앤 마이크 맨스필드 센터"(Maureen and Mike Mansfield Center)를 설립해 대학생과 학자들이 동아시아 외교 문제에 더욱 심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학술적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150만권 가량의 장서가 보관된 "모린 앤 마이크 맨스필드 도서관"(Maureen and Mike Mansfield Library)도 몬태나 대학교에 문을 열었다.말년에는 비교적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2001년 워싱턴 D.C.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여담
- 동아시아 외교 전문가답게 한국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가 바로 한국과 미국의 조선시대 시절 외교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