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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출생 | 1922년 9월 21일[1] | ||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시 (現 중국 상하이시) | |||
사망 | 2016년 5월 19일 (향년 93세) |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377번 | ||
본적 |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2] | ||
본관 | 선 안동 김씨[3] | ||
호 | 서언(瑞言) | ||
재임기간 | 제6대 공군참모총장 | ||
1960년 8월 1일 ~ 1962년 8월 1일 | |||
제21대 교통부장관 | |||
1971년 11월 24일 ~ 1974년 9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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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누나 안동 김씨, 김화경, 김은경[4] 형 김인 | ||
배우자 | 임윤연 | ||
자녀 | 아들 김진[5], 김양[6], 김휘, 김윤 딸 김미[7] | ||
학력 | 서남연합대학교 (철학과 / 수학)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감리회)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9 | ||
약력 | 제6대 주 중화민국 대사 제21대 교통부 장관 제9대 국회의원 (전국구/유신정우회) |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
군사 경력 | |||
임관 |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특2기) 공군사관학교 (특2기) | ||
복무 | 대한민국 공군 | ||
1948년 ~ 1962년 (14년)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공군) | ||
최종 보직 |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 ||
주요 보직 | 공군참모총장 직무대리 제6대 공군참모총장 | ||
참전 | 6.25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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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독립운동가.[8]2. 일생
2.1. 젊은 시절
백범 김구와 최준례 사이에서 태어난 2남 3녀 중 차남이자 막내아들. 형제들 중에서 누나들은 김신이 태어나기 전에 급사했고, 형인 김인은 1945년에 향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젊은 시절 가족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인, 김구, 김신.[9]
맨 우측 인물이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백범 김구를 수행하던 김신의 모습이다. 38선 경계에서 찍은 사진이다. 백범 좌측의 인물은 김구의 비서 선우진이다.
김구가 매우 아낀 아들로, 일찍 죽은 형 김인을 대신해 아버지를 도와 여러 일을 수행했다. 해방 후에 위 사진과 같이 아버지를 따라 북한을 방문했다.[10]
2.2. 군인으로서의 삶
2.2.1. 중국 공군 장교 그리고 도미유학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우선이다"라는 부친의 방침으로 그는 중국 공군 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도미 유학하여 미국 비행학교 정규과정을 이수하였다.[11]미국에서 비행 교육을 받은 탓에 미군이 작성한 대한민국 공군 주요 인물 출신 성분 보고서에는 그가 미군 출신으로 기재되었다.[12]
2.2.2. 귀국 그리고 대한민국 공군 장교
아버지 김구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한 그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20대 후반의 나이에 우익으로 진로를 확정짓고[13]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가 된다. 군번 50010.[14]비록 조모 곽낙원의 유골 송환 등으로 인해 시기가 맞지 않아 공군 창설의 7인에는 들지 못했으나 귀국과 동시에 입대하여 군사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공군 창설 7인이 주도한 모임에는 계속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공군에서 최연장자인 최용덕, 항공사령관 이영무, 김홍일 장군의 조카인 김영재 등과 함께 중국 공군 출신으로 대한민국 공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대한민국 공군 홈페이지 역대 참모총장 페이지에 등록된 초상
2.2.3. 6.25 전쟁
1950년 조선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의해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머스탱 인수 10인의 요원[15]으로 선발된다. 사실 그는 이미 중국군-미군 유학 과정에서 머스탱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 공군내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 직후 도일하여 머스탱을 인수하러 갔을 때 머스탱 메뉴얼을 지참해가서 그가 자료제공함과 동시에 통역도 겸했다 한다.6.25 전쟁 당시, 북한군과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제1공화국(드라마)에선 유인촌이 그의 배역을 맡은 바 있다. 전방에 나서지 않고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것을 소외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16] 백범의 아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다가 생포될 경우 벌어질 정치적인 문제를 본다면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게 나은 일이다.[17] 그런데 실제로는 공군 전투조종사로 공중전에 참가했다. 빨간 마후라도 사실 김신의 공군 시절 이야기가 바탕이다.# 게다가 이는 본인도 원하던 역할이었다. 정치관도 이승만 정권 입장에서 볼 때 확고하며 흠잡을 구석이 없는 반공주의자이고 확실한 기술관료로서의 자질 역시 충분했기 때문에 김구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승만이 주도한 제1공화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특히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시절에는 유엔 공군이 5백 회 넘게 출격하고도 실패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전장의 흐름을 바꾸었다.
2.2.4.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 지점의 대동강 지류에 설치된 것으로 전쟁 기간 중 조선인민군이 중동부 전선으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데 요충지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유엔 공군의 항공 목표가 되었으며 이를 폭파하려고 500회 이상 출격했으나 위장 은폐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 작전 수행 임무가 한국 공군에 넘겨졌으며 당시 한국 공군으로서는 이 철교를 파괴할만한 전투 역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손으로 폭파시키겠다는 신념에서 작전 수행에 나서게 되었다.1952년 1월 12일 김두만 소령을 편대장으로 한 P-51 전폭기 5대가 첫 출격을 하고 같은날 오후 윤응렬(尹應烈) 대위가 이끄는 3대가 출격하였다. 그러나 두번의 출격에서 모두 폭탄을 투하했으나 실패하였다.
작전책임자인 제1전투비행단의 김신은 이 실패가 미공군 전술교리에 따른 고공투하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초저공침투공격법을 쓰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에 따라 1월 15일 2개 편대 6대의 전폭기가 출격하여 철교중앙의 경간(徑間) 2개를 폭파시킴으로써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 출격에는 제1편대장 옥만호 대위, 2번기 유치곤(劉致坤) 대위, 3번기 박재호(朴在浩) 대위 그리고 제2편대장 윤응렬 대위, 2번기 정주량(鄭周良) 대위, 3번기 장성태(張星太) 대위가 참가하였으며 이로써 한국 공군의 독자적인 작전 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철교의 폭파로 북한군은 보급로가 차단되어 물자 수송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2.2.5. 전후
이후 공군본부 작전국장,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 등을 역임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대한민국 공군참모차장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37세에 공군 중장으로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다.[18]회고록에서 당시 공군은 전투기를 몰아보지 않은 인사들이 공군본부의 주류로 있었는데 그가 취임하면서 모두 일소시켰다고 서술했다. 전투기를 몰아본 사람만이 공군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데 전투기를 몰아보지 않은 사람이 요직을 차지했으며 일본군 출신이 많았다고. 일본군 출신들은 전투기도 조종하지 않았으면서 요직을 차지했다는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한시 바삐 군에서 내쳐야 하는 건 맞으니 김신에게 비난이 돌아갈 수는 없다.[19]
2.3. 5.16 군사정변 및 정계 진출
5.16은 육군 및 해병대 주도로 이루어졌고, 해군과 공군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지지해 계속 공군참모총장 직위를 유지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도 참여하였다. 박정희는 1962년 남산에 백범 광장을 조성하고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하면서 김구를 극진히 예우했다.전역 후에는 주 중화민국 대사를 거쳐[20]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힘든 길을 걸어온 아버지와는 달리 군과 정/관계의 원로로서 순탄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백범일지 간행 등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고,[21] 오늘날 김구가 가장 대표적인 민족지도자겸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원만에 밀려 낙선한 바 있다.
2.4. 말년
전두환 정권 말기에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22]1987년 김만철 일가 탈북 때, 이들의 한국행 중간 기착지로 대만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당시 대만 총통 장징궈를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23] 장징궈가 장제스의 아들이고 김신이 대만 대사로 부임했을 때 장제스가 김신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하면, 김신이야말로 장징궈를 설득하는 임무에 최적의 인물인 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1992년, 노태우 정부는 한대단교 이후 대만을 달래기 위해 김신을 대표단장으로 대만에 보내려했지만 대표적인 친대만파로 한중수교에 반대했던 김신은 크게 화를 내면서 한중수교 관련해서는 개무시를 하더니 이제와서 궂은 심부름을 맡기려 하냐고 단칼에 거절했다.
2013년 3차 FX에서 F-35를 사도록 건의하는 역대 공군참모총장 연판장을 대통령에 전달하는데 참가하여 한국 공군에 F-35가 도입되는데 기여하였다.
2.5. 사망
2016년 5월 19일, 향년 93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 멤버이자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이므로, 장례식은 21일 공군장으로 엄수되었고,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사후 공군교육사령부에서 훈련중이던 후보생과 훈련병들에게 자서전이 배부되었다.[24]
3. 대중매체에서
부친 백범을 다룬 극화물에서는 선우진과 함께 1948년 남북협상 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1960년작 영화 <아아 백범 김구선생>에선 황해남이 연기했다.
-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신일룡이 연기했다.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0회에서 등장하는데, 유인촌이 연기했다.
- 1989년작 동 방송사 드라마 <제2공화국>에선 우상전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김은수가 어린 시절을, 이인근이 성인 역을 각각 맡았다.
4. 저서
- 조국의 하늘을 날다: 백범의 아들 김신 회고록 - 돌베개 (2013년)
5. 기타
-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김진은 동서통상, 글로볼씨스텍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1998년에 대한주택공사 감사, 2003년에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재직 중 광고회사 및 협력업체 등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하여 2004년에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2006년에 추가 혐의가 드러나서 다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노무현의 대통령 퇴임 직전인 2007년에 사회통합을 명분으로 특별사면되었다.
둘째 아들 김양은 기업인, 금융인으로 활동하다 프랑스 국영 우주항공방산의 한국지사 대표를 맡으며 무기 브로커로도 활동했다. 이후 2005년 참여정부에서 상하이 총영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에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해군 차세대 헬기 와일드캣 도입 과정에서 외국 방산업체로부터 고문료 명목으로 14억여원을 챙겨 2016년에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형제가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성에 제대로 먹칠을 한 셈.
셋째 아들 김휘는 광고인으로 활동하며 나라기획 이사, 매켄에릭슨 상무, 광고대행사 에이블리 대표 등을 역임했다.
- 김신 이후 김구의 후손들에게서 공군 장교가 계속 배출되는데 사위와 외손자가 2대에 걸쳐 공군 장교에 친손자도 공군 장교다. 공군 장교 입대가 거의 집안 전통이 된 모양새로, 공군의 로얄 패밀리라 할 수 있다.
- 하늘사랑 장학재단에 3억원 이상 후원한 공군참모총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 그의 집에는 김구와 장제스가 악수하는 사진도 걸려있다고 한다. 장제스 동상을 국내에 보존하자고 하는 등 의리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적 관계 뿐만 아니라 공적으로도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장제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회고에 따르면 김신이 대사로 부임했을 때 장제스는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반가워해서 복잡한 의전도 생략하고 허물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장제스가 화나있어도 김신이 오면 항일투쟁하던 옛날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대의 물주였고, 국민당 정부가 아니었다면 임시정부는 존속이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
- 한국에서 잘 알려진 장제스의 '부패한 며느리를 처형한 이야기'의 원 출처는 김신의 회고록에서 나왔다. 장제스의 며느리(장웨이궈의 아내) 스징이는 실제로 사치와 부패가 심해서 장제스가 매우 싫어했는데, 스징이가 1953년 영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하자 대만 내에서도 장제스의 암살설이 상당히 유력하게 거론됐다. 이를 김신이 회고록을 통해 언급한 것이다.
- 장우룡의 그대에게/BOUT-1에서 군기 반장 역할을 하는 염신현은 김신이 모델이다.
- 아버지와 함께 조국의 해방을 위해 분투했으며, 조국 해방 이후에도 계속 군인으로 복무하다 참모총장으로 예편하고 잠시 정계(그것도 우익 계열)에도 몸을 담았다는 점에서, 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의 아들인 프랑스 해군 감찰감 필리프 드골과 닮은 점이 많다. 우선 두 사람 모두 당대 사회에서 엄청난 장신이었다. 샤를 드골이 196cm이고 아들인 필리프는 아버지보단 작았지만 194cm이나 됐다. 김구와 김신도 마찬가지로, 김구는 180cm로 2022년 성인 남성 평균 신장 170cm를 놓고 보더라도 키가 큰 편이고, 아들인 김신 또한 아버지와 찍힌 투샷#을 보았을 때 아버지와 비슷할 정도의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상당히 장수했다.[26]
- 중화민국 외교관 류위완과 매우 친했다.
- 생전 해외 대학에 기부한 금액이 42억여 원인데, 증여세와 상속세 명목에서 나와 국세청으로부터 27억여 원의 세금을 부과받았다고 한다. 이후 조세심판원에 제기한 조세 불복 심판에서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져 약 13억으로 줄어들었고 이후 나머지 14억원에 대해서도 소송을 고려했지만 소송에 들어가는 기간과 비용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이쪽에 대한 소송은 포기했다.
- 한강 인도교 아래로 비행한 경력이 있다. 탑건 수준의 조종사로 명성을 떨쳤다. 이로 인해 김정렬 참모총장에게 비행 정지 1개월 처분을 받았고, 본인도 회고록에서 인도교 아래로 비행한 것은 위험했으며 공군기의 도입으로 인한 공군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행했다고 언급했다.[27]
-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손자 김용만이 하남시 을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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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835B38> 김유택 → 장기영 → 박충훈 → 김학렬 → 태완선 | |||
국토통일원장관 | 신태환 → 김영선 | |||
외무부장관 | 정일권 → 이동원 → 정일권 → 최규하 → 김용식 | |||
내무부장관 | 엄민영 → 양찬우 → 엄민영 → 이호 → 박경원 → 오치성 → 김현옥 | |||
재무부장관 | 박동규 → 이정환 → 홍승희 → 서봉균 → 김정렴 → 김학렬 → 서봉균 → 황종률 → 남덕우 | |||
법무부장관 | 민복기 → 권오병 → 이호 → 배영호 → 신직수 | |||
국방부장관 | 김성은 → 최영희 → 임충식 → 정래혁 → 유재흥 | |||
문교부장관 | 고광만 → 윤천주 → 권오병 → 문홍주 → 권오병 → 홍종철 → 민관식 | |||
농림부장관 | 원용석 → 차균희 → 박동묘 → 김영준 → 이계순 → 조시형 → 김보현 | |||
상공부장관 | 이병호 → 박충훈 → 김정렴 → 이낙선 | |||
건설부장관 | 정낙은 → 전예용 → 김윤기 → 주원 → 이한림 → 태완선 → 장예준 | |||
보건사회부장관 | 박주병 → 오원선 → 정희섭 → 김태동 → 이경호 | |||
교통부장관 | 김윤기 → 안경모 → 박경원 → 강서룡 → 백선엽 → 장성환 → 김신 | |||
체신부장관 | 홍헌표 → 김홍식 → 김병삼 → 박경원 → 황종률 → 김태동 → 김보현 → 신상철 | |||
공보부장관 → 문화공보부장관 | 김동성 → 이수영 → 홍종철 홍종철 → 신범식 → 윤주영 | |||
총무처장관 | 이석제 → 서일교 | |||
과학기술처장관 | 김기형 → 최형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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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처장관 | 서일교 → 심흥선 → 심의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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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제9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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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우회 2기 73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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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놀랍게도 이희호여사와 생년월일이 같다.[2] 이북5도 기준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3] 익원공파 26세손 태(泰) 항렬.(족보)[4] 누나들은 김신이 태어나기 15년, 12년 전에 전부 요절했다.[5] 전 한국주택공사 사장[6] 전 국가보훈처장[7] 빙그레 회장 김호연과 결혼, 現 백범기념관장[8] 그 본인도 아버지와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9] 당시 김신은 임시정부 내무부 민정과에서 활동했다.[10] 당시 북한에서는 김구, 이승만을 격렬히 혐오하여, 곳곳에 두 사람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벽보가 나붙어있었다. 남북연석회의 개최가 확정되자 부랴부랴 벽보를 수거했는데, 채 떼지지 않는 벽보는 급하게 먹칠을 해서 가렸다고 한다. 그런데 애초 세초가 가능한 먹물의 특성상, 먹칠을 했음에도 마르면서 가려진 비방 문구가 희미하게 드러나보였다고 한다(...). 자신을 맹비난하는 벽보를 가리키며 백범이 말없이 웃자, 북한측 수행원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뻘게졌다고 한다.[11] 임시정부시절 광복군 참모처장으로 중국 공군 상교(대령, 육군 중장 대우)인 최용덕 장군을 등용하였고 최용덕으로부터 항공력 강화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12] 다만, 해당 보고서에는 일본 항공사에서 민항기를 몰았던 사람을 일본군 수송기 조종사(...)로 기재하기도 했다.[13] 애당초 백범도 김일성의 암살 미수에 개입한 적이 있고, 그전부터 자유시 참변 등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했다. 임시정부에 좌익 계열이 사실상 없던 것도 초기 임정의 진로를 둘러싸고 김구 등이 주축이던 현상유지파와 갈등을 겪던 창조파와 개조파가 후에 임시정부에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신채호다. 물론 신채호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좌익 독립운동가들과 친했을 뿐 본격적인 좌익이라거나 공산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14] 대한민국 공군장교 임관 10번째라고 보면 된다.[15] 이근석 대령, 장성환 중령, 김영환 중령, 김신 중령, 강호륜 대위, 박희동 대위, 김성룡 중위, 정영진 대위, 이상수 중위, 장동출 중위[16] 6.25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 공군은 전투기가 1대도 없었다가 갑작스럽게 10대의 머스탱을 인수받았다. 이들은 한국 공군에서 가장 능력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인 만큼 이들은 소중한 모종이였다. 그러나 비행한지 며칠만에 최고참 이근석의 전사로 단독 비행이 금지되었고, 유엔 공군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닦아 둔 활주로에서 쫓겨났다. 부족한 사천 비행활주로에서 이착륙의 어려움은 차제로하고서도 마산일대까지 북한군이 공격해들어오면서 위태로웠다. 기록에 따르면 이시기 이륙하다가 사고간 난 것을 숨어있던 공비들의 공격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1.4후퇴 이후에서야 백구부대 창설로 조종사 대량 육성 이후에 가서야 머스탱 조종사들 숫자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공군의 단독 작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공비 토벌을 통하여서 작전 능력 향상과 인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동안 오랜 시간이 있어야 했고, 그동안 김신이 고참이 되면서 직접적인 비행을 통한 단독 작전으로의 전투 참여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였다. 김신은 해방 전 머스탱 전투기 조종 및 미 공군 훈련을 받은 유일한 군인이며, 머스탱 인수 당시에도 통역 및 기술 전수를 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김신이 전방에 직접 나서는 것은 당시 대한민국 공군으로써는 최후의 수단이다. 김신은 당시 제10전투비행전대 등 머스탱 전투기로 이루어진 전투비행단을 지휘하는 역할을 함으로서 승호리 철교 폭파를 완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17] 김신은 자신이 백범의 아들로서보다는 전투기 조종 실력이나 전투 공적을 세워 유능한 군인으로 평가받는걸 더 선호했다.[18] 김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차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는 더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 그래도 대한민국 공군참모차장과 대한민국 해군참모차장도 충분히 요직이다.[19] 이후 임명된 공군참모총장들은 전원이 조종 특기다.[20] 신생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 다음 가는 우방국이었다. 당시 총통이 장제스인 점을 생각하면 김구의 아들 김신으로선 더 각별한 인연이기도 하다. 참고로 장제스와는 1949년 진해회담 당시 이승만의 주선으로 이미 만난 바가 있는데 당시 장제스는 김구의 아들을 만났는데 신체적, 육체적으로 헌헌장부인 것이 그 장래가 몹시 기대된다고 호평하는 일기를 남겼다.[21] 김구와 해방정국에서 주도권 다툼을 한 정적이던 이승만은 당연히 재임 내내 김구를 공격했다. 반대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나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을 깎아내려고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구를 높일 필요성이 있었는데 김구의 아들이 쿠데타에 동참해줬으니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신생 국가의 정치인으로서는 부정적 부분이 적지 않은 김구가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추앙받는 데 공헌했다. 또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박정희 정부에게 독립운동가 중 극렬 반공 성향의 김구는 입맛에 딱 맞는 인물이기도 했다.[22] 초대 독립기념관장은 안중근의 조카이자 독립운동가 안춘생이다. 이후 김삼웅과 김주현을 제외하면, 역대 관장들은 독립운동가 또는 그 후손들이 임명되었다.[23] 당연히 그때는 모든 게 비밀이었고 나중에 공개했다.[24] 병763기,765기에 해당한다,[25] 빙그레 회장, 전 국회의원.[26] 김신은 2016년 5월 19일에 93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필리프 드골은 2024년 3월 13일 향년 102세로 사망했다.[27] 훗날 도쿄 레인보우 브릿지 아래를 비행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전일본공수 61편 납치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만약 실행했다면 보잉 747 특성상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다리와 충돌하며 다리가 붕괴하거나 주변의 다른 건물에 충돌하는 등의 대형 사고가 일어날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