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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백범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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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김구의 평가를 담은 문서.2. 긍정적 평가
2.1.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오늘날 김구가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부터 한국까지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킨 그의 행적이다.1919년 3.1 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나라가 독립되면 독립된 나라의 문지기를 하고 싶었다"는 이유로 임시정부 경무국장 직을 맡을 정도로 임정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김구는 1920년대에 일어났던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창조파 vs 개조파 논쟁에서도 임시정부의 현상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해 창조파와 개조파가 모두 탈퇴해 해체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를 지켰으며 1930년대 침체되었던 임시정부를 훙커우 공원 의거 등 한인애국단 활동을 통해 장제스의 지원을 이끌어내면서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임정의 실질적 리더로서 활약했고, 1940년부터는 주석 직에 올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홀로 고군분투해 가며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김구가 주도한 훙커우 공원 의거 및 중국 국민당과의 외교적 노력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김구는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 일제강점기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다.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언급이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통성과 상징성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 리더이고 임시정부의 행적이 곧 김구의 독립운동 일대기 이기에 김구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확고하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임시정부 청사들에도 김구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김구의 집무실이 따로 복원되어 있을 정도다.
3. 부정적 평가
3.1. 백색테러
대중들이 김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인 평화주의자, 중도적 정치성향, 통일지상주의자, 반(反) 이승만 등은 후대에 덧붙여진 창작에 가까운 미화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 평화주의/중도/통일 지상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지도자 후보는 여운형 밖에 없다.[1] 그래도 김규식은 해방 초기에는 김구, 이승만과 함께하다 이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그리고 좌우 양쪽에서 회색분자 취급 받는 중도파의 숙명인지, 여운형은 극우 세력 백의사에게, 김규식은 납북되어 죽었다.[2] 무장투쟁, 대한민청, 백의사, 서북청년회[3]를 통한 백색테러 주도 및 옹호를 비롯한 극단적인 반공주의 성향, 김일성 암살 시도, 친이승만 스탠스는 김구가 몇 십년 간 고수해 온 반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인상은 김구가 말년에 짧게 취한 입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백색테러 조직인 백의사를 협력 혹은 지휘[4], 김두한을 주축으로 해 백색테러를 일으키고 다닌 대한민청의 명예회장을 맡은 김구는 강경한 반공 극우 민족주의자로 테러를 통해 거물급 정적들을 제거했다. 상당수는 연구의 진척이 없거나 사료 부족으로 그냥 의혹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김립 피살 사건 같이 본인이 직접 범행 사실을 밝혀 김구의 책임소재가 명백한 사례도 존재한다. 김구가 배후로 의심을 받는 암살들에 희생된 거물급 정적들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이 있으며 심지어 여운형도 김구가 죽였단 의혹이 존재한다.[5] 백색테러라고는 하지만 사실 우익인 장덕수, 안공근 등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암살했기 때문에 좌파 뿐만 아니라 뉴라이트 계열 우파에서도 인간백정이라고 비난한다.
김일성과 강량욱, 김책, 최용건 등에 대한 암살 역시 시도했고 암살미수범으로 백의사 단원이 체포됐는데, 이 때문에 평양에서 김구가 김일성과 만날 때 좀 껄끄러웠다고 한다.[6]
김구를 좌파로 보는 시각은 훗날 일부 이승만 지지자들이 말년에 이승만과 부딪쳤던 김구의 행동을 그의 일생에 걸친 것마냥 과장하여 후대에 꾸준히 덧씌운 결과이며, 오늘날 시각에서 보자면 이승만과 부딪쳤으니 좌파라고 생각하는 단순한 측면도 있다. 김구가 좌우합작운동 이전까진 우파였음에도 김구를 중도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좌우합작운동에 참가해 이승만의 남한 지역 단독정부 주장에 반대해 북한과의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한 말년의 행적만을 부각한 것이며, 해방전후사의 인식등의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80년대를 전후로한 운동권(특히 NL계)이 김구를 이승만의 안티테제로 내세우며 재해석하면서 증폭된것에 가깝다.
비망록에 의하면 이른바 <4金회담>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1.1.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한 테러 사주
- 안공근 암살 의혹
김구의 최측근이었던 안공근은 상해사변으로 상하이가 일본군에 함락되었을 때 자신의 가족보다도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먼저 모시고 나왔다. 그 뒤에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나온다. 그러나 형수(안중근의 부인)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에게 심한 질책을 당한다.[7] 백범일지에는 안공근이 자신의 가족보다 김구의 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나왔다는 내용은 없다.
김구에게 호된 질책을 당한 후 김구와 결별한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려고 중국 국민당에 자금지원도 요청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준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에게 넘겼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상하이의 한 부두에서 사라졌었다.
안공근은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이후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8]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다.
안공근 암살 의혹을 반박하는 근거로 엉뚱하게 "일제 밀정 이운한이 암살공작을 가해 독립운동가들이 죽고 중상을 입었었다"는 내용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가 발표했던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에는 "이운한", "이운환"이라는 이름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했다는 일제가 꾸민 퍼포먼스를 놓고, 안준생이 변절자라며 죽이라고 백범일지에 대놓고 기술했는데 이것도 이 사건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명망높은 안중근 가문의 영향력을 꺾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다는 가정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 근거는 별로 없다.
- 김립 암살 사주
김구는 저서 백범일지에 김립이 코민테른으로부터 지급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기 때문에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서술하면서 자신의 암살 지시를 정당화한다. 자세한 배경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김립 피살 사건 문서 참고. 그러나 역사학자 박노자는 이러한 김구의 주장을 근거가 없다며 정면으로 반박한다. 박노자는 "1922년 초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9]" 라고 말한다.
소련 해체 이후 코민테른 보고서가 문건의 기밀해제가 이뤄지면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김립의 횡령 사실에 대해 그런 거 없다고 한다. 김구의 잘못된 판단으로 애궃은 독립운동가가 사살됐던 것. 아울러 김립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준 200만 루블 중 60만 루블만 가져왔는데, 김립의 암살로 임정계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독립운동 세력에 돌아갔을 나머지 140만 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된다.[10] 백범일지의 주장대로 김립이 향락을 했다거나 중국 여자와 집을 샀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립은 여태 독립운동 표창을 받지 못하고 있다.
- 옥관빈 암살 사주
김구 세력이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송병조 세력과 갈등하다가 벌인 테러사건이다. 자세한 사항은 옥관빈 피살사건 문서 참고. 위에서 서술한 김립은 공산당이었는데 옥관빈의 경우는 중국국민당에서 중요한 당직을 맡았고 장제스의 추종자였다. 이렇게 볼 때 김구의 테러 대상은 딱히 좌우를 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상술된 박노자가 "김구와 그 계통의 극우파들이 저지른 각종의 암살행각"을 이야기할 때 김립 암살과 같이 언급한 테러가 옥관빈 암살이다.#
- 안준생 암살 사주귀국 길에 중국 경찰을 찾아가 그곳에 거주하는 안준생을 죽여달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스스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찾아가 사죄한 것을 이유로 그를 암살해달라고 중국, 현 중화민국(대만) 경찰에 부탁했다고 스스로 백범일지에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김립 피살사건과 옥관빈 피살사건 정도를 제외하면, 여기 적힌 내용들은 의혹 수준이거나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중국국민당 측에 안준생의 처형을 요청한 것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테러라고 볼 수 없는데, 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김구의 요청이 지나치게 대의명분론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안준생은 도저히 독립운동가라고 볼 수 없는 인물이다.
1920년대 중반에 국민대표회의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옹호파라 할 수 있는 김구 세력과 개조파라 할 수 있는 안창호 세력 사이에 분명 대립이 있었다. 또한, 위에서 소개하고 있는 옥관빈 피살사건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30년대 전반기에도 김구 세력과 송병조 등 안창호 세력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적인 양상에만 집중하여 김구가 안창호를 의도적으로 일제에 체포되도록 만들었다는 의혹까지 제기하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다. 김구 세력과 안창호 세력은 나름 협력적인 관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두 세력은 힘을 합쳐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핵심세력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기도 했으며, 안창호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차리석과 송병조 등은 끝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남아 김구 세력과 활동을 같이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안창호 세력은 김구 세력이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이에 김구 주석이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선생에게 그 유명한 '김구 서명문 태극기'를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안창호를 둘러싸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에서 대립이 있기도 했다. 이른바 '항주 판공처 피습사건'이라고도 불리는 항주사건이다. 김철의 조카 김석과 조소앙 등이 <시사신보>에 "안창호는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투고했다가 안창호 세력인 이유필 등과 김구 세력인 안공근 등에게서 거센 항의를 받았고, 심지어 구타와 폭행으로까지 번진 사건이었다. 물론, 항주사건의 배경은 더 복잡하지만, 안창호 세력과 김구 세력이 꼭 대립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분명히 김구는 임정법통론을 지나치게 고집했고, 임정법통론에 반대한다고 여겨지는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테러를 한 바 있기에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백범일지>에만 근거하여 김구를 긍정 일변도로 평가하거나 우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는 상징성에 있어서, 또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거론하는 데 역할이 있었기에 독립운동의 공로가 매우 크지만, 치하포 사건이나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다른 독립운동가에 대한 테러, 해방 이후 극단적인 반탁운동과 백색테러 의혹[11] 등은 비판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의혹 수준이거나 충분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사례를 인용하여 김구를 부정 일변도로 평가하거나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특히, 오직 김구 세력과 안창호 세력의 대립 양상에만 주목한 나머지 윤봉길 의거 이후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된 것이 김구가 의도한 바였다는 의혹, 학계에서 논의한 바도 없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3.1.2. 해방 정국에서의 백색테러 연루 의혹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수많은 백색테러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12] 평화통일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의 상호 존중과 공존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김구의 해방 정국 당시 행보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김구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폭력의 사용에 거리낌이 없었다. 평화통일의 상징으로 미화된 김구와 실제의 김구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이는 독립운동가였던 일부 피해자에 대해 '죽어서 기쁘다'는 취지로 발언했다는 의혹, 1946년 3월 당시에는 북한의 분리를 준비하기 위해 활동한 조직도 아니었던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간부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 사실, 그 간부의 가족들이 피살당한 사실 등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극우적인 입장에서 공산주의자 살해 시도를 정당화한다고 할지라도 주변인까지 희생될 개연성이 높은 방법으로 공격하여 무고한 가족을 죽게 만든 것은 용인하기 어려운 행동임이 틀림없다. 가족까지 몰살될 가능성이 높은 방식으로 공격한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인 '자기책임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3.1.2.1. 남한 지역 백색테러
신탁통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백의사라는 테러단체에서 송진우, 여운형을 암살했고 한국독립당에서도 장덕수를 암살했는데, 여기에 김구가 관여되었다는 의혹이 짙게 제기된다.만약 김구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중 적어도 한 명에 대한 암살을 지시한 것이 사실이라면, 김구를 존경하는 사람 대부분이 김구에 대한 존경을 철회할 것이 확실시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다. 김구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니냐고 당시에도 강력히 의심은 되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미 군정은 김구를 용의자로 의심, 반탁 데모 경고 이후 소환해서 경고를 준다.[13] 브루스 커밍스, 리처드 로빈슨 등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송진우 암살건 같은 경우에는 미군정이 의심했던 사항이기는 하나, 김구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송진우는 임정 봉대론을 주장했으며 김구가 후술하기를 "자신들에게 돈을 대주는 사람을 죽일리가 있냐"고 말한 점을 들어 반론한다. 송진우가 경교장에 정치자금 900만원을 전달한 점과 한민당과 임정을 합당시켜려고 했던 점을 필두로 본다면 김구의 배후설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민당 내 임정봉대론과 합당론이 이미 약화되고 있었던 점,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정국의 태풍의 눈이자 우파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하는 결정적 계기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송진우는 찬탁이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반론만으로 모든 의심을 해소할 수는 없다. 당장 합당론이 여전히 논의되던 1947년 미군정이 사실상 김구를 배후로 지목한(그리고 실제 한독당원이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장덕수의 암살이 벌어졌고, 그 결과 한독당과 한민당의 합당 논의가 완전히 무산되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김구의 배후론을 주장했던 장택상의 발언의 신빙성의 의문점은 장택상 같은 경우는 임정에 원한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송진우, 여운형 암살사건의 배후에 1공화국은 항상 김구배후론을 견지했다는 사실이다(실제로 1955년 경찰 요시찰요람의 1순위가 한독당이고 2순위가 민전이었다).[14]
조병옥도 김구를 의심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의 소행이라고 확신하였다. 조병옥은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린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15] 언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송진우 암살 배후로 미군정이나 학자 브루스 커밍스, 리처드 로빈슨도 김구를 의심했고 국내에서도 조병옥과 장택상은 그를 의심했다. 한현우의 진술 중에는 김구, 이승만이 자신을 의사라고 칭찬해주었다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해 김구의 송진우 저격이 확실하다면 1공화국이 김구를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김구와 이승만"이 칭찬해주었다는 한현우의 진술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당시 반탁을 통해 연대관계에 있던 김구와 이승만이 공히 배후인 셈이 된다. 당연히 1공화국에서는 나서서 캐낼 이유가 없다. 실제로 소군정 문서에 의하면 김구와 이승만은 함께 백색테러 조직 결성과 운영에 관여했다.
더구나 미군정의 손에 체범된 한현우가 15년형을 언도받은 것과는 달리 1951년 8월에 국회에서 이미 시내를 활보중인 것이 확인되었고[16], 이에 법무차관이 체포에 노력중이라고 답변하였다. 하지만 한현우는 이후 일본에서 건너가서 천수를 누렸다. 더구나 1994년 다큐에서 한현우는 안두희도 1949년에 방첩대에서 서로 알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김구의 혐의가 더욱 짙은 것은 장덕수 암살이다. 여기서는 백의사가 아닌 한독당원, 그 가운데서도 김구의 최측근이 유죄판결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1947년 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현실화되면서 이승만-김구와 미군정의 관계가 악화되자 한민당이 미군정의 파트너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장덕수와 이승만, 김구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다. 공공연하게 암살설이 돌 정도였다. 분위기가 심상찮아지자 수도 경찰청장이자 한민당 당원이던 장택상은 장덕수에게 경호원 배치를 제안했으나, 장덕수는 사양한다.
12월 2일 장덕수가 한민당 간부들과 제헌 국회 공천 문제를 의논하고 있을 때 각각 경찰 제복과 검정 외투를 입은 두 청년이 찾아온다. 동대문 경찰서에서 왔다며 의심을 무마한 이들은 M1 카빈으로 장덕수를 두 차례 저격한다. 장덕수는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절명한다.
박광옥, 배희범 등 범인과 그 일당은 이틀 만에 체포됐다. 이들이 속한 대한 학생 총연맹은 김구가 총재로 있는 단체였다. 이로 인해 김구, 조소앙,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세력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됐고, 그 중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해방정국까지 김구의 측근으로 맹활약한 김석황은 한 달 반 가까이 도피하다 마지막으로 검거됐다. 이전부터 합당 무산, 친일 문제, 미소 공동 위원회 참여 문제를 두고 한민당과 한독당은 갈등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특히 한민당-한독당 합당 반대파 중 최고 거물이었던 장덕수와 합당을 밀어붙이던 김구의 갈등은 잘 알려져 있었다.
결국 김구 역시 공판에 증인으로 소환됐는데, 김석황이 "김구의 지시로 살해했다"고 증언하고 공범 손정수, 조상항, 신일준의 증언도 대체로 일치하는 바람에 법적 위기에 놓였지만 그런 사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박광옥, 배희범 등 실행범은 사형을, 김석황 등은 종신형을 언도받고 그대로 집행되었다.
또한 서중석 교수에 따르면 김구는 김성수 암살을 사주했다는 의혹도 있다.[17]
3.1.2.2. 북한 지역 백색테러
백의사가 1946년 초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간부들을 상대로 암살을 시도했을 때 김구가 이를 승인했다는 의혹이 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원산에 침투해 북한 실상을 파악해 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백의사 공작원 10명은 출발에 앞서 1946년 2월 25일 김구 선생을 예방하여 윤봉길 의사처럼 총과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김구 선생과 기념촬영을 했다"[18]는 증언에서 보이듯 김구는 백의사의 북파공작 수행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깊게 연관되어있다는 주장이다. 북파됐다가 김일성, 강양욱, 김책, 최용건 등에 대한 테러 혐의로 체포돼 소련군에 끌려간 백의사 결사대원 김정의는 심문에서 임정 내무부의 정보국장 박문(朴文)이 증명서를 작성해 주었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김구는 이러한 계획을 비준했지만, 자신이 직접 만나지 않아 자신의 북행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19] 김구가 백의사에 몸 담으며 이러한 계획을 승인한 이상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행동은 당시의 시각에서건 현재의 시각에서건 테러리즘이다.1946년, 북한의 3.1절 기념 행사에서 맞춰 백의사는 요원들을 평양에 침투시켰다. 요원들은 임정 내무부장 명의의 신임장 및, 고당 조만식에게 보내는 서한을 소지하고 있었다. 요원들의 목표는 김일성, 김책과 김일성의 외증조부인 목사 강량욱이었다. 이들은 먼저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던졌으나 강량욱은 제거하지 못한 채 그 가족과 심방 온 목사, 그리고 경비병만 폭사했다. 김책을 노린 테러는 실패했으며, 최종적으로 김일성을 겨냥한 폭탄 투척 역시 실패로 끝났다. 요원들이 던진 폭탄을 소련군 장교 야코프 노비첸코 소위가 되집어 던지는 중에 폭발하여, 노비첸코 소위는 한 쪽 팔을 잃는 중상을 입었다.
만약 김일성, 김책, 강량욱만 피해를 입고 다른 민간인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장에선 38선 이북을 불법점거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반역세력을 공격한 것이고, 정당하지 못한 살인이 되더라도 민간인은 아니니까 테러가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20] 그런데, 김책에 대한 공격과 강량욱에 대한 공격은 성공했다면 죄 없는 가족도 다칠 위험이 높았고, 실제로도 강량욱의 아들, 며느리, 딸과 강양욱의 지인인 목사가 사망했다.
김구가 계획을 승인한 이상, 민간인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승인한 것이니 테러리즘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김구 옹호세력에서는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 김책, 강량욱은 못잡았지만 빨갱이 놈들 가족이라도 때려잡았으니 참 고소하단 식의 생각을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김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들도 김구의 북폭 승인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연좌제가 잘못된 것이니, 어떤 사람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도 가족을 해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진 현재 김구의 행동은 큰 논란이 될 소지를 안고 있다. 김구 옹호 세력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있다.
3.2. 친일 인사 등용
김구 본인은 친일 행위를 한 바가 없으나, 해방 후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규합하고 정치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친일 인사들을 받아들인 사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백범일지를 윤문한 이광수,[21] 경교장을 제공한 최창학, 한독당과 김구의 자금원이었던 조선일보의 방응모 등이 있다.먼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광수가 1947년에 발행된 국사원본 백범일지의 문장을 윤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김구 연구자인 도진순에 의하면 <나의 소원>의 작성에 이광수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 퍼졌던 '아름다운 나라'라는 개념을 차용한 흔적이 존재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왕'으로 불렸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일본광업(주)에 시가 800만 원(현재 가치로 약 9600억 원)이라는 가격을 받고 금광을 팔아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었고 이후 경성(서울)에서 대지 1700평과 건물 290평에 달하는 2층 양옥 저택인 죽첨정을 건설했다. 그리고 일본 육군에 전투기 8대를 헌납했으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상무이사와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의 이사를 역임했다. 해방 직후 최창학은 미군정의 강압으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자신의 저택인 죽첨정을 바쳤으며 그 이름도 경교장으로 바뀐 뒤 정치적인 사안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인사들이 집결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마지막으로 방응모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조선일보가 복간된 1945년 11월 25일 이후부터 꾸준하게 김구에 대한 일관적인 찬사를 보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잠시 한국독립당(1930년)의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제기된 남한 지역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김구가 반대하자 강력한 비난을 쏟아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 보충하자면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지지 세력들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다양한 항일투쟁 조직을 결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대중들로 하여금 커다란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김구 세력의 대일관은 명확한 반일이었으나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친일파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김구 세력의 이러한 태도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친일파 청산을 주장한 박헌영 계열의 좌익 세력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대중의 지지도 줄어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김구 세력의 전체가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닌데 김원봉, 김성숙, 김주식 등 좌익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친일파 청산에 있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우파 인사들은 친일파 청산 문제에 소극적이었으며 먼저 민족통일을 이루고 난 뒤에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한 논리는 급속도로 김구 세력 전체의 입장으로 고착화되었다.
김구 세력이 해방 이전의 입장에서 상당히 후퇴한 태도를 견지하게 된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거론되는데 첫 번째로, 대중적 인지도는 높았으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은 취약했기 때문에 더 많은 활동을 위하여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의 지지가 절실했기 때문이 꼽힌다. 두 번째로, 앞에서 언급한 한민당 세력의 막대한 자금 지원으로 국내에서의 숙소, 활동비, 정치 후원금 등이 충당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최창학으로부터 죽첨정을 헌납받아서 경교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 외에도 송진우와 장택상으로부터 9백만 원을 지원받았고, 공개적으로 애국금헌성회라는 단체를 통해서도 자금을 지원받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지원이 대부분 일제와의 협력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형성한 친일 자본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반일이라는 대외적인 정치 노선과 모순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구 세력이 상대적으로 빈곤한 재정 상황을 벗어나고자 타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친일파 청산이라는 대의와 재정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이 충돌하게 되자 김구 세력은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친일파 청산에 있어서 점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2] 물론 이것은 김구 세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임정 우파 계열, 이승만, 조병옥 등 수많은 우파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 청산보다는 반공, 통일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23][24]
물론, 위 내용과 같이, 김구는 해방과 귀국 직후 친일파 처단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긴 했다. 하지만 서중석 등의 연구에 따르면, 김구의 친일파 처단 문제에 대한 입장은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당초의 소극적인 태도도 이승만, 한국민주당과는 달리 볼 여지가 있다. 처음에 김구는 친일파 처단을 해방 직후가 아니라 정부 수립 직후에 하자면서, 당시 우익세력, 특히 이승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는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기자): 통일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에 대한 문제는?
답(김구):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있을 줄 안다. 위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문(기자): 그러나 악질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통일 후의 배제는 혼란하지 않은가?[25]
답(김구): 여하간 정세를 모르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 문제인 만큼 경솔히 말할 수는 없겠다. 전 민족에게 관한 것인 만큼 신중히 해야만 하겠다.
답(김구):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있을 줄 안다. 위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문(기자): 그러나 악질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통일 후의 배제는 혼란하지 않은가?[25]
답(김구): 여하간 정세를 모르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 문제인 만큼 경솔히 말할 수는 없겠다. 전 민족에게 관한 것인 만큼 신중히 해야만 하겠다.
하지만 김구는 여전히 친일파들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만, 우익세력의 강화와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친일파 처단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소의 친일파 민족 반도를 제한 외에 무릇 한국 동포는 마치 한 사람 같이 굳게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단결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구는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협잡 정객과 또 친일 분자 민족 반역자들을 숙청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대의명분상으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사실이 다대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라도 죄악이 만만하여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입니다."
해방정국 당시 우익세력 내에서도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친일파까지 포함한 단결을 지향했던 반면, 김구는 친일파를 숙청한 민족적 단결을 추구했기에 이런 입장 차이를 보였다.이때 김구를 따르는 한국독립당 등 우익의 일부와 훗날 한국독립당과 합당하게 되는 조선국민당, 신한민족당 등 중도우파는 친일파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전자는 한국독립당의 감찰위원장 김승학의 <참고건제일>, <친일파군상> 등 구체적인 친일파 명부 작성과 조경한 등 '신한정의사'의 활동을 들 수 있고, 후자는 '친일파민족반역자실정조사회'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반민특위 연구>의 저자이기도 한 이강수의 연구 논문에 잘 나와 있다.
1948년 1월 들어 그동안 이승만 세력, 한국민주당과 정치 행보를 함께하던 김구 세력은 이들과 결별했다. 그리고 중도파라 할 수 있는, 엄밀히 말하자면 중도우파가 중심이 된 김규식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남한과 북한 양쪽 모두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이승만 세력, 한국민주당 등 우익의 일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한 반면, 김구 세력 등 우익의 일부는 김규식 세력 등 중도파와 힘을 합쳐 '우익 남북협상파'를 이루었던 것이다.
김구는 이때부터 친일파 처단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48년 3월 21일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대담이다. 여기서 김구는 자신이 해방과 귀국 직후에 어째서 친일파들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친일파 처단 문제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는지, 왜 지금에 와서는 이를 후회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구 연구의 권위자 도진순이 엮은 <백범어록>에서 한 대목을 옮겨본다.
문(신영철): 선생께서는 지난번 성명 중에서 모 당[26]을 가리켜서 일진회와 같은 매국 매족적 반역자 집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 충칭 임시정부는 환국 이후 왜 저들과 합작하였으며, 선생이 환국하신 지 2년여 세월이 지나도록 일찍이 그러한 의사 표시를 하신 일이 없었는데, 오늘에 와서야 그런 말씀을 하시니 석연하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답(김구): 나는 모 당만을 지적하여 일진회와 같은 매국노 집단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정당을 막론하고 그 실제 행동에 있어서 민족을 팔고 국가를 망하게 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곧 일진회인 것입니다. (...) 그리고 반역자들과 합작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 관찰인 것입니다. 충칭 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로 말하면 오직 감격과 흥분 속에 있었으니까 무엇을 따지고 캐고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 무엇보다도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누가 반역자이고 누가 애국자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극단의 악질이 아니면 그들을 포섭하여 건국 사업에 조력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당시의 실정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규정하고 처단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재판소가 없고 법률도 제정되지 않은 것을 입으로만 친일파·반역자 운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혁명 세력[27]이란 탁류라도 정화시킬 수 있느 것이고 또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불순한 세력[28]이라고 해서 강제로 꺾을 것을 기도하는 것은 위험한 처사일 것입니다.
불행히도 외국 세력[29]이 저들의 세력[30]을 조장시키고 세태가 근본적으로 삐뚤어져서 우리의 당초의 기도가 성공되지 못한 채, 도리어 저들로 인하여 국가에 큰 화를 초래하게 되었으니 결과에 있어서 범의 새끼를 기른 것이 되었지마는,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 함도 아니요, 다만 개탄만을 일삼을 것도 아닙니다. 저들의 과거의 죄상이 명백하고 금일의 과오가 삼천만 앞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니 여기에 있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불문가지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자칭 '우익'이라고 하는 말부터 재검토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말하는 이 땅의 소위 우익 중에는 왕왕 친일파 반역자 집단까지 포함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것들은 우익을 더럽히는 '군더더기' 집단입니다. '군더더기'들이 정당이니 단체니 하고 혁명 세력에 붙어서 거불거린 것입니다. 혁명 세력과 반역 세력이 합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반성하는 것은 이 점입니다.
답(김구): 나는 모 당만을 지적하여 일진회와 같은 매국노 집단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정당을 막론하고 그 실제 행동에 있어서 민족을 팔고 국가를 망하게 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곧 일진회인 것입니다. (...) 그리고 반역자들과 합작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 관찰인 것입니다. 충칭 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로 말하면 오직 감격과 흥분 속에 있었으니까 무엇을 따지고 캐고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 무엇보다도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누가 반역자이고 누가 애국자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극단의 악질이 아니면 그들을 포섭하여 건국 사업에 조력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당시의 실정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규정하고 처단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재판소가 없고 법률도 제정되지 않은 것을 입으로만 친일파·반역자 운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혁명 세력[27]이란 탁류라도 정화시킬 수 있느 것이고 또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불순한 세력[28]이라고 해서 강제로 꺾을 것을 기도하는 것은 위험한 처사일 것입니다.
불행히도 외국 세력[29]이 저들의 세력[30]을 조장시키고 세태가 근본적으로 삐뚤어져서 우리의 당초의 기도가 성공되지 못한 채, 도리어 저들로 인하여 국가에 큰 화를 초래하게 되었으니 결과에 있어서 범의 새끼를 기른 것이 되었지마는,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 함도 아니요, 다만 개탄만을 일삼을 것도 아닙니다. 저들의 과거의 죄상이 명백하고 금일의 과오가 삼천만 앞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니 여기에 있어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불문가지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자칭 '우익'이라고 하는 말부터 재검토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말하는 이 땅의 소위 우익 중에는 왕왕 친일파 반역자 집단까지 포함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것들은 우익을 더럽히는 '군더더기' 집단입니다. '군더더기'들이 정당이니 단체니 하고 혁명 세력에 붙어서 거불거린 것입니다. 혁명 세력과 반역 세력이 합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반성하는 것은 이 점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가 1948년 9월에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근거한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10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만들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김구는 반민특위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애초에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반민특위 활동을 주도했던 소장파 의원들이 김구, 김규식 계열로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나 <인물현대사> 등 다큐멘터리에 나온 제헌의원이나 반민특위 활동을 하셨던 분들은 이들을 한국독립당 계열이라고도 분류하지만, 엄밀하게는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이라 볼 수 있는 '동인회'와 중도파인 김규식 계열이라 볼 수 있는 '성인회'로 분류할 수 있었다.[31] 김구는 이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반민특위 활동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했다.
"친일 반역 분자들에게 악형을 당하고 생명까지 빼앗긴 수많은 선열들의 영령과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아 있는 독립운동자들은 반민자들을 단호 처단하려는 특위의 활동을 지지할 것이며, 인민들도 이것을 찬양할 것이니 무릇 일을 방해하려는 행위는 청산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9년 2월 19일
<조선일보> 1949년 2월 19일
종합하자면, 해방과 귀국 직후 김구의 친일파 처단 문제에 대한 입장은 시기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며, 친일파 처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을 때 보인 입장도 당시 우익세력 내에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보다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중도우파인 김규식 세력과 손을 잡고 이승만 세력, 한국민주당과 완전히 갈라선 이후에는 친일파 처단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반민특위 활동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래도 김구는 친일파 처단을 해방 직후가 아니라 정부 수립 직후에 하자는 당초의 입장을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도 해방과 귀국 직후에 같은 주장을 했지만, 정작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가 반민특위를 조직하여 악질적 친일파를 처단하려고 하자, 반민특위의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상술되었듯이 해방공간에서 김구, 신익희 등 임시정부 인사들이나 이승만, 조병옥 등 수많은 우익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 청산보다는 반공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있었던건 사실이고 통념과 달리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친일파의 급진적 청산에는 소극적 태도를 견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시 우익 중에서도 한국민주당은 스스로가 친일파들의 세력이 상당한 집단이었으니 당연히 친일파 청산에 부정적이었고, 이승만 등은 그 스스로는 독립운동가 출신이나 점점 현실화되는 38선 이북 지역에서의 소련 및 공산당의 권력 공고화와 이남 지역에서 남로당 등 좌익 세력의 공세가 강화되는 국면에서 친일파 청산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데 중점을 두면서 한국민주당과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반면 김규식, 김상덕, 원세훈, 정이형, 김병로, 김약수 등 김규식 세력 등은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좌익과 대화하고 합작을 시도할지언정, 악질적 친일파는 반드시 처벌 받아야 한다고 봤다. 한편, 김구, 조소앙, 조완구, 김창숙, 조경한 등 김구 세력은 처음에는 임정봉대론, 신탁통치 반대운동 때문에 이승만 등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며 친일파 청산에도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다 추후에 이승만 세력, 한국민주당등과의 갈등 끝에 결별, 김규식 세력과 손을 잡은 이후에는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한편, 친일파 처단 문제에 있어서도 전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김구가 친일파 청산에 통념보다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했던것도 사실이고 이 점에서는 이승만 등 해방정국의 다른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시기별로 입장에 변동이 있었으며, 그 스스로 친일파였던 한민당 세력이나 현실정치적 이익때문에 친일파 청산에 회의적으로 선회한 이승만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이었던 것 역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2]
4. 해방정국 이후 활동과 반탁운동에 대한 평가
해방 이전의 행보와는 달리 해방 이후의 김구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데 그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던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남북협상 두가지 모두 좌우 진영의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김구는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가장 격렬하게 반탁운동을 주도할 정도로 반탁운동에 열성을 보였는데 이에 대해 찬성측에서는 신탁통치는 민족자존심상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반탁운동을 한 것이 옳았다고 주장하고 반대측에서는 민족감정에만 치우쳐 5년 정도의 신탁통치(또는 후견제)를 감수하더라도 남북한의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한다.[33]
다만 김구의 정치적 수완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룬다. 김구의 반탁운동은 반공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한 이승만의 반탁운동과는 달리 임시정부가 법통을 인정받아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를 세우는 데에 목적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한 수준의 목적이었다는 것이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군정을 부정하는 임시정부 법통론을 지지해 줄 이유가 없었고 소련군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당시 독립운동 단체 중 한개로서의 인지도나 지지는 있었지만, 정부로서 전 민족의 지지를 모을 수 있을 만한 상징성을 갖고 있거나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의 완고한 임정법통론 및 반탁운동은 결국 그가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크게 보면 좌우의 극심한 분열과 남북의 분단으로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구는 공산주의자들과는 타협할 수 없다며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는 달리 남북의 분단에는 결사코 반대했다. 그리고 1948년, 이승만과 결별하고 대신 김규식과 합작해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의 협상을 통해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협상을 시도[34]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오늘날에는 김구의 남북협상이 자신들의 정권의 명분을 세우고 선전하려는 북한 및 김일성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식의 평가가 많다. 실제로 남북협상은 남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막아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김구가 분단에 반대하며 가장 우려했던 것이 남북 간의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김구가 암살된지 1년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음을 생각하면 김구가 단순히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만을 이유로 남북협상에 나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48년은 이미 좌우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남북한의 단독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김구가 나선 시점이 '너무 늦었다'는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의 정치인들이 대화를 시도했다는 의의와 분단을 막지 못하면 남북간에 전쟁이 나서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예측한 혜안만은 높게 평가할만 하다.
다만 윗 문단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김구·유어만(劉馭萬) 대화 비망록에 따르면 김구가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 방문시 김일성은 인민군의 전력을 김구일행에게 보여줬으며,이를 본 김구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이 남침해 남한을 무너뜨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남한으로서는 북한의 공격을 막을수 없다는 취지로 유엔한국위원회 중국대표로 서울에 있던 류위완 공사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정말 전쟁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러한 소련과 북한의 이러한 의도를 미국 및 남한 인사들에게도 알리고 전쟁 대비에 협조하여야 하지만 오히려 4.30 성명서등에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한 시실이 확인 된다.
5. vs 이승만
라이벌로 비추어지는 이승만을 호평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자료와 실증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대중적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에 마냥 객관적이라고 보긴 어렵다.[35] 또한 이승만의 대통령 재임기가 4.19 혁명이라는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에 의한 하야로 끝났기에 이승만처럼 제대로 정권 잡을 틈도 없이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사태를 당해 일찍 서거한 김구가 상대적으로 더 높이 평가되는 측면도 있다.이승만은 외교론에 의존한 독립운동을 주장하여 자주성이 없다는 평을 듣는 데 반해[36] 김구는 자주적이다 소리를 많이 듣는데 김구가 줄을 대었던 인물은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과 그의 처남인 쑹즈원 등이다.[37] 때문에 이승만이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없고 김구가 중화민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자주성이 있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의문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승만도 국내진공작전에서 OSS의 협조를 얻어 한인 무장세력을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일을 추진하는 등 무장독립운동도 지원했으며, 항일단파방송 사건 때 광복군의 활약상을 선전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사실 김구가 임시정부 말엽에 창설한 한국광복군 역시 마냥 자주적인 군대는 아니었다. 한국광복군은 장제스의 입김이 강해 독자적인 교전권이 없었으며 그의 허가 없이는 교전은커녕 병력을 늘릴 수도 없었다. 남의 땅에서 지원받는 입장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 그래서 서방 연합국은 장제스가 김구를 지원하는 것을 중일전쟁 종전 이후 장제스가 한국을 괴뢰국화하려는 술책의 일환으로 보았기 때문에[38] 장제스가 광복군을 키우지 못하게 압박했고 이에 장제스는 광복군을 강하게 통제하며 규모를 제한했다. 또 장제스는 임정이 한국 독립세력의 대표라고 여기지 않아 오랜기간 정식국가로 승인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오늘날 한국에서 외교 관련해선 상대적으로 호평받는 이유는 의도야 어쨌든 결과적으론 마오쩌둥의 손에 의해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어 해방 후 한국 입장에선 퍼주기만 한 인물이란 점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독립 지원만 거나하게 해주고 그걸로 얻어내려던 건 대만으로 쫓겨나며 실현도 못하고 모두 날린 셈.[39]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단체를 두고 박용만과 권력싸움을 했다는 지적도 있으나, 박용만을 공격한 건 김구도 마찬가지다. 임정 해체론을 주장한 창조파에 적을 두고 임정 불신임을 앞장서서 주장한 박용만에게 김구는 이를 갈았고 내무부 포고령 제5호에 의해 강제 해산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박용만이 암살된 후 그를 총독부에 투항한 밀정으로 몰아갔다. 박용만 외에도 여러 백색테러하며, 안창호를 일본경찰에 팔아넘겼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한국의 지도자급 독립운동가 중에 내부 권력다툼 안해본 사람 없고 이는 한국의 특수성이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이다. 타국 독립운동사를 봐도 항상 있는 현상인데 독재정권을 거치며 형성된 독립운동에 대한 무분별한 신격화는 이런 객관적인 시선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다. 김구와 한독당 계열이 임시정부 주도권을 잡은 이후에도 미국 지역에서 이승만 세력과 반 이승만 세력의 알력이 있었고, 반 이승만 세력은 임정에 손을 내밀었지만, 김구와 임정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의 경우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으로 해석되어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특히 강경파인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았다."고 분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은, 당시의 국제 정세와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떨어지는 것이라 오해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연세대 연구 등에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가 비판받을 점이라곤 지분이 별로 없음에도 본인이 주도한 것처럼 선전한 것이랄까. 현재야 국제연맹이 공기 취급을 받지만 이승만이 인식한 당시 국제연맹의 위상은 지금과 달랐으며 김규식도 같은 내용을 파리에서 청원한 바가 있다. 자세한 것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 문서 참조.
이외에도 김구에 비해 이승만에 대한 대중적 평가가 박한 이유는 김구는 대통령직에 오르지 못한 채 서거하였고,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의 부정적인 면들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백범 김구 VS 우남 이승만” 하지만, 김구와 이승만이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운 시기는 1947년 12월 이후에서나 나타났으며 그 이전까지는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김구와 이승만은 상당히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국민대표자회의 당시 김구는 이승만 중심의 임시정부 유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창조파 세력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임정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는 물론 해방 후 건국 운동 시기에도 이승만의 정치 노선에 협력하였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취한 노선들 자체는 모두 독립하자고 한 행위였으니 어느 한쪽 노선만이 옳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40] 애초에 두 사람만 저런 노선을 이끈 것도 아닐 뿐더러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 등 다양한 노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조화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두 인물이 상당기간 같은 노선에서 활동하였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6. 좌우 진영의 평가
나는 김구 선생은 그리 높게 평가 안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어쨌든 나라를 건국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구는 단독정부는 안된다, 남북이 하나의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김구에게 정치적 감각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 때 만약 대한민국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국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때는 미국이 한국을, 소련이 이북을 붙들고 있던 때입니다. 처음부터 이북은 소련이 김일성을 정해놓고 접수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우리 민족끼리만 해서 통일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김구는 도저히 안되는 일을 상상했어요. 정치적 판단도 김구는 이승만을 못 따라간다고 봐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2007년 인터뷰 中
김영삼 전 대통령의 2007년 인터뷰 中
"김구 선생은 독립투사였고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신탁통치를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시한부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60쪽[41]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60쪽[41]
좌우에서 고루 평가받고 있지만 온도차는 있으며, 사실 각 진영 내부에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생각보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편이다.
진보 진영 중에서도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는 NLPDR이나 민주당계 정당 상당수 지지층에서는 일평생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고평가하고 있다. (행적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그가 세월이 흐르면서 남긴 어록들 역시 평화주의자의 면모가 돋보이니 진보적 가치와 통하는 점이 있다.[43]
한편, 진보 진영 쪽에서도 좀 더 탈민족주의적 시각을 가지는 박노자를 비롯한 진보신당 및 PD 계열이나 기타 강정구 같은 인물들은 임시정부 법통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 적이 있으며, 김구에 대해서도 과격민족주의 등 오점을 거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44] 심지어 일부에선 백색테러범이라거나 <김구 청문회>라는 책까지 내놓으면서 김구를 "친일파가 만든 민족 영웅"이라는 식으로 매우 강하게 비판한 적도 있었다.[45] 사학자들 사이, 즉 학계에서도 김구의 임정 시절이나 해방 이후의 과격한 행동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중들의 기대만큼 우호적이진 않다. 해외에서도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같은 경우 대놓고 첩과 총잡이를 거느리며 반대파들을 암살했다고 깠다.
보수 쪽에서도 김구에 대한 평가는 갈라져서, 민족주의, 반일을 내세우는 쪽은 김구를 매우 고평가하며, 박정희 시절에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싫어했던 것도 있어서 대대적인 푸쉬를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일부 보수 세력이 이승만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들에게 김구는 평가가 깎이는 모습도 제법 보이게 되었다. 자유경제원 등을 비롯한 뉴라이트 계열의 이승만 옹호파는 김구의 단일선거운동이 김일성 등의 정치선전에 이용당했다며 비난하고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은 과로 보며 최근까지도 김구를 폄하하고 상대적으로 이승만을 추켜올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만원 역시 과거 진중권과의 토론에서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깐 바 있다. 더 나아가 이승만빠인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선 이승만의 안티테제라는 이유로 숫제 빨갱이 취급을 받기도 한다. 좌익 세력에 대한 백색테러에 대한 사주 의혹을 받기도 하는 김구 입장에선 그야말로 황당한 일. 애당초 김구의 성향은 독립운동가들의 성향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극우적이라고 평가받는 인물이다.[46]
결국 이래저래 다양한 모습을 보인 인물이라 김구의 사상적 성향에 대해 딱 이거다하고 단정짓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구는 강경 우파라 평가받던 임시정부 시절에도 광복의 기미가 보이자 약산 김원봉을 위시한 사회주의 세력들을 임시정부에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여줬고,[47] 말년에는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을 내세운 김규식과 함께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거나 동참했던 다른 우익인사들과도 노선을 달리하였다.[48]
사실 한국은 좌우 대립이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로 이어지며 정치 스펙트럼이 다소 특이하게 형성된 감도 있다. 덕분에 서구권에서 대체로 우파는 보수 민족주의, 좌파는 사회민주주의 또는 리버럴 계열을 띄는 반면,[49] 한국에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좌우 각 진영의 가치로 나뉜데다 양측 모두 민주적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잔재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복잡한 상황이다[50]. 때문에 같은 좌파 진영이라 해도, 같은 우파 진영이라 해도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 현대사에서 활약한 인물들에 대한 평이 상당히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김구가 실제 행동은 과격했을지 몰라도 표현은 상술되어 있듯 꽤나 평화주의자적인 모습도 많이 비춘지라 그야말로 보기에 따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평이 갈릴 수밖에 없다.
7. 미국의 평가
해방 이후 당시 38선 이남을 장악한 미군정에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었던 김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구를 무자비(ruthless)하고, 부도덕한(unscrupulous) 인물이며 이해하기 힘든 인물로 묘사하였다고.[51] 별명도 난폭하다는 의미의 "블랙 타이거(Black Tiger)"로 붙였을 정도. 여기에 더해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봤고,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 대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에 이러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 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미군정이 김구를 재판정에 증인으로 소환함으로써 사실상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자 이승만과 한민당 모두 김구와 관계를 단절하여 "1947년말에 이르러 김구는 남한 지역 우익진영에서 완벽하게 고립되었다."[52]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 명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
8. 박정희 정부 관련
김구에게 민족적 영웅이란 이미지를 만든 것은, 5.16 군사정변 때 적극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한 당시 공군참모총장 김신 공군 중장에 대한 포상으로 박정희 정부가 연출한 작품이란 주장이 있다. 김구의 차남 김신 장군은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박정희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백범 김구를 적극적으로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남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1962년에는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김신은 1962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로 부임해 무려 8년 동안 이례적으로 장기간 재임했다. 당시 중화민국은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겐 미국 다음 가는 맹방이었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한다. 하지만 그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거기에 이승만 정부의 잔재를 지워내고 북한과의 대립상황을 이용해 정통성 쌓기에 몰두하던 군사정권에게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자 (북한과의 대립상황에 한민족 한개의 정부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극렬한 민족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에 임정의 법통성도 갖춘 김구만큼 띄워주기에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것. 이렇게 보면 일견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민족영웅이 맞는 것 같기도 하겠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김구는 박정희 정부가 만들어낸 민족영웅이다"라는 주장 또한 기존의 김구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집권은 커녕 일개 군인에 불과했던 1940년대에 김구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민족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었고, 개중에는 국부로 여기는 이들도 존재했을 정도로 명망있는 인사였다. 박정희 집권 이전인 1960년에 상영된 아아 백범 김구 선생이라는 제목의 기념 영화,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대회 당시 사회자가 김구를 '국부'로 소개하자 김구 스스로 나서 "국부는 이승만 박사 한 분 뿐이다."라고 해명한 일화나, 장례 또한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조문객이 최소 200만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추산된다는 사실 등 김구가 1940년대에 이미 대중들에게 충분히 인기 높고 명망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여럿 남아있기 때문에 "그전에 희미했는데 군사정권이 띄워준" 영웅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과장이 섞인 표현이다. 물론 장덕수 암살 사건을 기점으로 '정치인' 김구가 완전히 몰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독립운동가' 김구는 여전히 대중들에게 명망있는 인사였고[53] 그렇기 때문에 훗날 박정희가 김구를 띄워줄 수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범 김구가 생전에도 동시기 한국인들에게 이미 민족 영웅으로 대접받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중들이 인식하는 백범 김구의 모습에 현실정치인으로서 면모는 다 사라지고 이상을 부르짖은 순수한 인물로 받아들여지게 된 데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참여한 박정희 정부의 과장과 미화가 작용했다. 또한 이승만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민족주의 좌파들까지 이승만의 안티테제로 김구를 내세우면서 실제 역사속의 인물로서 김구를 평가하는게 아니라 이러한 과장과 미화를 증폭시켰고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이미지가 고착되었다.
[1] 다만 여운형은 기계적 의미의 중도는 절대로 아니었으며 당대 기준으로나 지금 기준으로나 정치 스펙트럼상 중도 좌파-좌파 정도에 속하는 인물이다.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그 정반대에 있는 스탈린주의자 등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 구도 속에서 공존 가능성을 모색했기 때문에 상대적 위치가 중도에 가깝게 보여지는 것에 가깝다.[2] 지금 와서는 중도 취급받는 김구가 여운형 죽음의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아이러니지만.[3] 백의사와 서북청년회는 1946년까지만 해도 교류가 매우 활발해 사실상 한 단체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서청은 익히 잘 알듯이 현대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기독교 우파의 근본지이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인식 악화의 원인 중 하나인 종교를 정치에 쓰려는 풍습은 다름 아닌 김구와 이승만으로부터 유래된 것. 그렇다고 생애동안 김구가 개신교 신자는 살해하지 않았거나 암살 의혹이 없냐면 그것도 아니다. 거물급 인사들만 추리자면, 김구는 개신교 신자인 온건 좌파 여운형을 암살한 유력한 용의자다. 개신교 신자이며 반공주의자인 안창호도 임시정부 개조파라는 이유로 실수를 가장해 일제 경찰이 안창호를 잡도록 유도한 방식으로 그를 제거하려했다는 혐의를 갖고 있다. 대한민청 명예회장인 김규식도 개신교 신자인데 임시정부와 뜻을 달리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자마자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서청이 이승만 휘하로 가서 일어난 학살극은 제주 4.3 사건. 창설자들부터 이러니 근대건 현대건 기독교 극우파가 종교와 성향과 관련없이 꺼림칙한 존재인 것은 당연지사.[4] 소련 해체 이후 비밀해제된 러시아 국방성 문서들도 당시 김구를 백의사의 배후로 지목했다.[5] 유의해야할 점은 여운형 암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배후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구를 배후로 꾸준히 지목했던 장택상조차 한 때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배후로 지목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후 암살범 한지근이 백의사 단원이었다는 점과 김구와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의 협력적인 관계가 밝혀지면서 김구가 유력한 배후자로 꼽히고 있다.[6] 한편, 김일성은 1985년 8월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와의 회견에서 주장하길, 김구가 자신에게 지난날의 죄과를 털어놓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과수원을 차려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7] 오영섭,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 302페이지.[8] 오영섭,《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 302페이지. 이제와 명확히 사실을 확인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의혹제기에 머무르고 있다.[9] 관련 내용[10] 관련 내용[11] 다만, 해방 이후 백색테러에 있어서는 김구만이 아니라 이승만도 함께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물론, 이 역시나 어디까지나 의혹 수준이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참고로 이승만도 김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시기 미주 한인사회에서 보인 행적을 보면 다른 독립운동가에 대한 테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12] 해방정국 시기 암살된 주요 정치인으로는 현준혁,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가 있는데 각각의 항목의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들중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암살의 직접적인 배후 혹은 간접적인 관여를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13] 백범어록 (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개, 2007.11) 67페이지.[14] 정작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장택상이 이끌던 경찰을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지목했었다.[15]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77페이지.[16] 장택상의 대한민국의 건국과 나 참조.[17]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18] “제1부 KLO 참전동지회 최규봉 회장 회고담,” 이창건, 『KLO의 한국전 비사: KLO, 켈로 그들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서울: 지성사, 2005), pp.32-33.[19] “소련방 무력정비사령부 제7국 부국장 샤포쥐니코프가 소련방 중앙위원회 수슬로프 동지에게 보내는 전문,” 1946년 8월 22일;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79[20] 다만 이러한 시각 또한 반공적인 시각에서 본 것이고 이들에 대한 테러 역시 좌우대립을 심화시키는 극단적인 테러로 볼 수 있다. 김구는 임정 법통론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다.[21] 소설가 이광수가 맞다. 김구 차남 김신 씨가 신동아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춘원(이광수)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최일남이 만난 사람’ <신동아> 1986년 8월호).[22] 오상택, 「한국 정당체계의 기원과 형성: 해방기 사회균열구조와 정치적 동원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215~218쪽.[23] 예를 들면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있었던 평생 일본과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 입장과 정책을 보였으나 친일파 청산에는 미적지근했고, 조병옥 또한 평생 독립운동을 했지만 친일경찰을 적극 기용하였다.[24] 공적인 이유 이외에도, 백범일지를 보면 이 사람은 대체적으로 시대와 환경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 친일파가 되었다고 해도 한번 더 기회를 줘보자는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친일은 안되지만 상대가 진심으로 참회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주의.[25] 사실 이 기자의 지적이 현실이 되긴 했다.[26] 한국민주당을 말한다. 당시 한국민주당은 우파 독립운동가들도 합류하긴 했지만, 친일파 지주·자본가도 많이 합류했다.[27] 독립운동 세력을 말한다.[28] 악질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말한다.[29] 미군정을 말한다.[30] 악질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31] 이들이 결합하여 '동성회'를 결성한다. 당시 제헌국회는 3대 정치세력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승만 세력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이들 동성회를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 의원들이었다.[32] 물론 김구의 상술한 태도 변화 또한 현실정치적 이익과 관련된 문제였다는 비판도 가능하다[33]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기본적으로 동아일보의 오보 및 왜곡보도로 인해 제대로된 사실 전달이 되지 않았다. 오보에 따라 김구는 이승만과 더불어 반탁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분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책임은 왜곡보도를 한 언론에게 책임이 있지만, 삼상회의 보고가 이후 정정보도가 나왔음에도 계속해서 반탁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일각에서 주장하는 비판의 논지다.[34] KBS 역사스페셜[35] 그저 어릴적 배운 '이승만은 나쁘고 김구는 착하다'라는 식의 동화적 플롯이 성인까지 유지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두 사람의 평가가 반비례하는 것마냥 김구 평이 깎인다고 이승만 평이 딱히 크게 올라가는 것도 아니긴 하다만은...[36] 다만 안창호, 김규식 등도 외교론을 주장하고 위임통치 청원에 동의했음에도 이승만만 유독 이런식의 물타기를 당하고 있다. 애초에 외교론 자체가 마냥 잘못 됐다는 것도 아니고, 실효성이나 방법론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37] 김구가 줄을 대었던 것은 지금 대륙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국부천대 전의 중화민국이었다. 당시는 장제스가 이끌던 중화민국이 대륙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을 때였다.[38] 실제 장제스는 중공과 달리 몽골도 중화민국 땅이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이런 명목상의 주장은 국부천대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2012년에서야 끝났다.[39] 마오쩌둥과의 대조도 장제스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에 일조했다. 장제스의 흑심은 가정에 불과하지만, 마오는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통일을 목전에 둔 것을 중공군 개입으로 박살 내 70년 분단의 비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40] 인도 독립 운동의 양대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여부를 두고 갈라서서 네루가 인도 수상이 되었던 반면, 간디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비판과 인도 내 이슬람교도 차별 반대를 주장하다가 과격 힌두교도에게 피살당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이러한 차이를 이유로 간디, 네루 가운데 한 명의 공로만을 인정하고, 다른 한 쪽은 격하하는 일은 없다.[41] 1946년의 DJ는 선정부수립을 주장한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준에 동참하고 있었다. 참고로 여운형은 좌우 노선에 앞서 일단 정부부터 구성해 민족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고 외쳤는데,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김두한(김대중과 김두한이 원만한 관계가 되는 것은 이 때로부터 몇 십년 뒤의 일이다.)을 위시로 한 김구 계열의 백색 테러리스트들의 타겟이 되기도 하였다.[42] 2003년 6월 8일, 도쿄방송(TBS)이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서 여성 방청객의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 해 그 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 바꿨다."고 답변한 바 있다. 이후 야당인 한나라당로부터 "망언"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신) 측에서 서운한 감정을 표하기도 하였다. 이 발언은 좀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김구 선생 혹은 그가 대표하는 독립군 세력이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는 과거사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내용이지, 딱히 김구 선생을 비하하는 의도가 아니었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존경하는 지도자들 중 한 명으로 백범 선생과 DJ를 언급한 바 있다.[43]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료가 공개되고 발굴됨에 따라 NL은 남북협상 때의 행보를 제외하면 전반적인 활동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 즉 최후의 선택이 옳았기에 일단은 긍정적인 인물로 간주하는 거지 전체적인 평은 마냥 긍정 일변도도 아니라는 것.[44] 다만 진중권 같은 경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까는 지만원을 토론에서 디스하기도 했다. 후술되어있지만 김구 자체가 보기에 따라서 테러리스트부터 평화주의자까지 평이 극명히 갈릴 수 밖에 없는 언행들을 많이 한 사람이라 그런 듯.[45] 암살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친일파들이 김구를 우상시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과대해석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친일파"는 한민당 계열을 위시한 해방 직후의 친일 지주-자본가 계층이 아니라 5.16 쿠데타 이후 대두한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칭하는 것이다. 김구의 차남 김신이 공군 장성과 정치인으로 재직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적극 참여, 부친 김구의 위상 강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46] 이유는 당연히 백색테러단체와의 깊은 연관을 가졌기도 했거니와, 해방 당시의 정치적 기준은 지금보다 확연히 좌경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해방 당시 주요 정당 중 하나가 바로 조선공산당이었다.[47] 김원봉과 친분이 있었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압력 때문에 좌우합작을 취한 것이었다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으나, 김구가 대독한 연설을 보면 일단 내면이야 어찌됐든 그들을 환영했다. 심지어 김원봉의 재혼 때는 김구가 주례를 서기도 했다. 물론 김구 역시 김원봉을 완전히 믿진 않았기에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견제도 꾸준히 했으나, 같은 진영 사람에게도 맘에 안들면 테러를 자행한 김구를 생각해보면 이는 약과라고 볼 수도 있다. 어찌됐든 팩트는 둘 다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 내에서 같이 일했다는 것.[48] 기본적으로 사상에 매몰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종교도 몇 번이나 바꿨고, 동학 시절에도 대립 중이던 관부 쪽의 사람과[54] 부분적으로 협력관계 비슷한 걸 구축한 적이 있었다. 암살과 타협을 모두 사용하는 실리주의자.[49] 물론 이들 지역에서도 짬뽕된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50] 같은 우파라도 박근혜로 대표되는 군사정권 시절 정계에 입문한 정치인들은 권위주의•국가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민주화 세대의 우파인 김영삼 키즈들은 공화주의•경제적 자유주의를 중시하며, 젊은 보수들은 자유주의, 능력주의, 공정에 가치를 둔다. 좌파에서도 DJ로 대표되는 전통 민주당계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협치 리버럴을 중시했고, 80년대를 주름잡던 586운동권 좌파는 보다 더 민족주의•권위주의적이며 이념 지향적인 성향이 강하다. 젊은 좌파들은 그런 것들보다는 세대갈등•빈부격차•페미니즘 등의 보다 현실적이고 모던한 이슈들에 더 민감하다.[51]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1996).[52] 정병준, "미국 자료를 통해 본 백범 김구 암살의 배경과 미국의 평가", 역사와현실 제61호, 2006. p.318.[53] 김구의 장례식이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조문객이 백만단위로 추산되는 것을 생각하면 장덕수 암살 사건 이후로도 (정치적 행보와 별개로) 당대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한 민족영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저렇게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진 것에는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최후 또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그것도 기본적으로 범국민적으로 인기와 명망이 있는 인사였으니까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