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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20:16:01

서북청년회

(창당) 서북청년회

파일:대한청년단 글자.png

(합당)
양호단
(정치 단체)
대한혁신청년회
(정치 단체)
함북청년회
(정치 단체)
황해회청년부
(정치 단체)
북선청년회
(정치 단체)
평남동지회
(정치 단체)
평안청년회
(정치 단체)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
]]
(개별 합류)

1. 개요2. 설명3. 악행
3.1. 암살, 테러, 민간인 학살
3.1.1. 정부의 하청인
3.2. 활동 이후 숙청
4. 평가
4.1. 극우 세력의 왜곡
5. 영향6.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7. 관련 외부 링크8. 관련 문서
8.1. 주요 관련 사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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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1]

서북청년회(西, Northwest Youth Association)는 과거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극우 성향의 청년단체로, 이승만 정부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준군사조직이자 자유당의 편에서 백색테러를 무수히 자행하던 정치깡패였다. 줄여서 서청(西靑)이라고 부른다.

정부의 비호 아래에서 보도연맹 학살 사건, 제주 4.3 사건 등의 민간인 학살고문 등의 범죄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잔인한 범죄 행위들로 인해 대중들의 인식은 한국판돌격대, 무장친위대[2]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종교와 엮여 있다는 점에서는 우스타샤 민병대와도 비슷하다.

2. 설명

파일:KwG7bdQ.jpg
"국제 조약의 배신자 소비에트 연방은 당장 한국에서 꺼져라!"
초기 서북청년회의 강령
1.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2. 균등사회의 건설
3. 세계평화에의 공헌
마치 나치KKK를 합친 것 같다.
미 군정청#[3]
'서북청년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평안도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청년단체(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들이 모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에서 창단된 단체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우기성을 선출했고 중앙집행위원장 외에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가 설치되었다.정종식,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

이들은 주로 북측 지역에 거주했던 몰락 지주 출신이나 개신교 신자[4],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의 탄압을 피해서 도망온 젊은이들이었지만 실제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지주나 친일파 출신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였다.[5][6][7] 당시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주로 하였고 만인평등사상을 내세워 가난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으며 이들은 김일성소련군정으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박해를 받고 살인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심각한 박해를 받고 나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내던지고 서북청년회를 결성하였다.[8]

해방 후 6.25 전쟁 전까지 소련군정개신교 박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단순히 개신교인이라는 이유로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거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살인도 당했다. 대표적인 개신교인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6.25 전쟁 전에 고려호텔에 연금됐던 것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탓에 6.25 전쟁 직후 북한에서는 지주, 자본가, 개신교도,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죄다 월남해 버려 숙청하려야 숙청할 사람이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1949년 백범 김구암살안두희도 젊은 시절 이곳 정회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면모만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 서북청년회의 구성원에 대부분이 당시 가난했던 개신교도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종교적인 측면에만 국한에서 보면 "서북청년회가 어떻게 이런 악행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나온다. 실제 대다수 소속원은 공산주의에 이가 갈린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의 북한 진주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정권은 자산가, 종교인 위주로 수많은 탄압 행위들을 감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이 전부 살해당하고 재산을 전부 잃고 혼자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최악의 경우는 북쪽에서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월남한 범죄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공산당에 의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빈털터리로 월남한 신세였으니 이들은 뼛속까지 공산당에 대한 증오로 가득할 수 밖에 없었다. 상술했듯 그저 종교이념으로만 서북청년회를 바라보면 지금껏 이들이 자행한 끔찍한 만행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복수귀가 되어 저지른 모든 일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어쨌든 상황이 이러하니 당시 반공 정권의 눈에는 이들보다 써먹기 좋은 도구는 없었는데 빨갱이 프레임 하나만 잘 씌워 주면 이들은 정치권이 직접 할 수 없는 더러운 짓을 알아서 도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일이 좀 지나치거나 무언가 어긋나서 잡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냥 버려버리면 그만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승만은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군대와 경찰에 대규모로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군대에 6500명의 단원들이, 국립경찰에 1700명의 단원들이 들어갔다.#

2.1.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과의 통합

사건 순서 대한청년단의 창단 과정
1 1947년 9월 21일 대동청년단 창단 서북청년회 청년조선총동맹[9] 조선민족청년단
2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창단
3 1949년 1월 20일 대한청년단조선민족청년단을 흡수함.
1947년 4월 지청천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기존의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면서 서북청년회를 해체하고 대동청년단에 합류시킬 것을 요구하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조병옥 또한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했다.

대동청년단 합류를 둘러싸고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었는데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를 위원장으로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고 초기 서북청년회가 김구 노선을 지지한 것에 비해 이들은 이승만 노선을 따라 이승만 친위대 역할을 했으며,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 같은 기존 단체들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시킨데에는 다른 정치가들의 세력 기반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이승만의 의도도 한 몫 했다. 대한청년단은 총재를 이승만으로 단장은 신성모로 했다. 일부는 내분에 염증을 느껴 탈퇴하거나 군이나 경찰, 특무대 등으로 들어가는 등 제3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3. 악행

3.1. 암살, 테러, 민간인 학살

1947년 삼일절 기념식을 따로 가진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숭례문에서 충돌한 사건을 비롯하여 부산 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 점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 등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고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도왔다. 제주 4.3 사건에서 언급되는 토벌대로 불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대나 경찰이 아니라 이 서청이다.[10] 가장 큰 문제는 빨치산을 색출하고 처벌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 때로는 군경의 가족에게조차 적법하지 않은 사적제재를 가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빨치산은 지역 주민의 호응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던 숙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11] 1949년에 이루어진 제네바 협약에 의거하여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증오 범죄는 금지되며 이에 따라 서북청년단의 행동은 위법이다. 6.25 전쟁 당시에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서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는데 해당 사건을 다룬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예 그냥 공무원들 각자 인원 할당량을 만들어서 쌀을 지급해준다는 명목으로 유인해 가입된 무고한 민간인들도 수없이 희생되었기에 이는 단지 이념만의 문제가 아니며 매우 중대한 묻지마식 대량학살 범죄라고 볼 수 있다. 4.3 사태당시 제9연대장과 무장대끼리 한 평화협상을 마을에 불을 질러 파토내서 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한 것도 서청을 포함한 우익청년단원들이다. 또한, 하술하였듯 군경 가족이나 행정 관료 등 아군 측 인사들도 그저 사소한 불만 따위로 무분별하게 학살하고 다니는 등, 아군에게 도움은 커녕 피해만 극심하게 가중시킨 범죄조직이다. 심지어 6.25 전쟁 당시에는 군경이 전방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안전한 후방에나 숨어다니면서 저딴 짓을 반복하고 다녔다. 특히 이들은 좀 여유있어 보이는 집을 공산당으로 몰아서 모두 죽이거나 혹은 처녀 한 명만 살려두고 강제로 아내로 삼으며 재산을 강탈한 경우도 있었다.
서청 중앙본부의 문봉제 단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해명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北韓硏究所, 北韓 1989년 4월호, 127쪽, 제주 4.3 사건진상보고서, 271쪽에서 재인용
이승만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 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 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71쪽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12]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1~272쪽

더욱 엽기적인 일은 이들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 주민들을 상대로 온갖 폭력과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피해를 당한 집안의 여성들을 협박하여 억지로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래 단원들이 빈털터리 신세로 내려오다 보니 그런 식으로 처갓집의 재산을 손에 넣어 제주도에 정착을 시도했거나 개중에는 일부러 제주도 주민들 중에서 부유한 집안의 딸을 노리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13] 문제는 그렇게 억지 결혼을 하는 제주도 여성들 중의 상당수가 바로 단원들한테 가족이 죽임을 당한 피해자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가족을 죽인 원수와 억지로 한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사는 꼴이라서 제주 4.3 사건이 끝나고 나서 제주도에는 평생 가도 부부동반 외출을 안 할 만큼 남편과 냉랭하게 사는 부부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핑계로 댄 '좌익 게릴라를 토벌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전방에서 북한군과 마주하는 건 무섭고 이북에서 빈털터리 신세로 쫒겨났으니 안전한 후방인 제주도에서 화풀이도 하고 범죄 수익도 한 탕 당기려고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심지어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아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었다. 제주도 도민들을 학살했던 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연금을 받고 억울하게 죽었던 제주도 도민들은 수십년간 4.3을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살았다.# 다만 이는 6.25 전쟁에 참전했던 서북청년회 단원들에 한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북청년회 창립멤버였던 손진(孫瑱, 1920~2017)[14]은 2014년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건국공로훈장'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15])

3.1.1. 정부의 하청인

이 범죄는 정부가 조장한 부분도 크다.

단순히 사설 민간단체였던 서북청년회를 돌격대와 같은 테러단체완성시킨 이들은 이승만과 이승만 행정부의 간부들이다. 거기다가 급여를 주지도 않고 제대로 된 배급체계도 갖추어주지 않아 사실상 학살을 조장하게 만들었다. 서청 경찰관 출신 박형요는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승만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 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라면서 이 사람들도 이승만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일 가능성을 주장했다.[16] 자세한 건 이승만/부정적 평가 문서의 제주 4.3 사건 때의 민간인 학살 문단 참고. 나치 독일의 말단 병사들이나 부역자들이 하는 말과 많이 비슷하다.

3.2. 활동 이후 숙청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서청의 활동상이 나와 있다.

서북청년단은 정부수립 이전에 계림공작대라는 조직을 두고 독자적으로 대북공작을 벌이기도 했으며 이 조직은 정부수립 이후에 국방부와의 협력으로 호림부대라는 특수부대로 재편되어 북파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결국 한국 전쟁 중에 북한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그나마 운 좋은 경우에는 약간의 훈련을 거친 후에 예비역 장교 신분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에 배정되기도 했는데 이들조차도 후에 군인들을 굶겨죽인 죄로 처형당했다. 이후 지향점을 잃어버린 이들은 민병대로 편입되었다. 이후 서청단 출신 인물들은 군에 들어갔는데,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평지전에서 일반 전투원으로 투입되었고,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숙청당했다. 그중 일부는 살아남아 남한에 정착하거나 미국으로 도피했는데, 이들의 후손들은 서북청년단의 악명때문에 사죄하기 바빴으며, 자신의 계보때문에 범죄조직의 후손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많았다. 물론 서북청년단 후손 중 제주 4.3사건에 대해 사죄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 대물림 버릇 못고치고 제주 4.3 사건에 대해 왜곡하거나 문화의 일부로 간주는 경우가 많아, 아직도 제주도인들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서청의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당연하게도 서북청년단 출신자들은 특별한 보상도 없이 버림받았다. 남한군 예비역 육군 대령이자 언론인, 작가의 길을 걸었던 선우휘는 출신에도 불구하고 서청과는 거리를 두었다.[17] 하지만 그의 말년 작품은 대부분 서청 출신으로 쓸쓸히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그가 진정으로 동인문학상을 주어야 할 작품이라 평한 "테로리스트"나 자신이 대령으로 등장하는 "오리와 계급장"이 대표적이다.

서청 간부이고 유엔군의 북한 통치시기 이승만이 임명한 평안도 지사 대신 미군정에 임명돼서 벼슬을 한 김성주[18]는 이렇게 버려진 대표적 케이스, 그는 후일 반 이승만 음모혐의로 사형당한다.[19][20] 정확하게는 고문치사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21] 시체를 헌병 사령관 집에 유기해버리고 사형 판결과 집행을 이전에 한 것처럼 날짜조작을 해버렸다. 4.19 이후에나 진상이 공개되고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김성주의 억울함을 증명한 건 당시 온건 보수 세력이었던 민주당이었다.

제3보병사단이 '백골부대'로 불리게 된 연유를 제공한 것도 서청 단원들. 정확히는 수도사단 제18연대에 자원입대한 서북청년단원들이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고향을 되찾겠다'는 의미로 방탄헬멧에 백골을 그려넣자 이내 18연대의 유행이 되어 급기야 연대 자체가 백골부대로 불리었고, 이후 흥남철수 과정에서 3사단 26연대와 배를 바꿔타는 바람에 소속이 바뀌었다. 그 후 휴전이 되어 여력이 생기자 사단명칭을 보다 전투적으로 바꾸겠다는 사단장의 의지에 18연대 명칭이 사단에도 적용돼 사자 부대에서 백골 부대로, 18연대 역시 자신들이 원조 백골이라는 의미로 진백골로 바꾸었다. 게다가 1대대는 자신들이 그 중에서도 진~진짜 원조라며 명칭을 진진백골대대로 바꾸었다.

헌데 서북청년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백골부대라는 호칭의 유래가 된 단체'로만 알고 있어서, 이들을 건전한 청년단체로 아는 경우도 있단다(...). 충공깽. 사실 같은 단체 소속이었다고 해도 떼로 몰려다니며 사적 린치로 민간인이나 죽이는 위험분자들에 비하자면,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혼란시국에 고향을 되찾겠다고 제대로 된 군대조직에 몸담은 이들이 훨씬 제대로 된 사람인 것은 맞다.

이 밖에 월남한 이북 청년과 학생들의 생계를 돕는 지원사업을 했고,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 군정청 고위관리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기도 했고, 각 지방단의 유지로부터 염출하거나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를 유출하여 자금화했다. 사실상 조직폭력배와 비슷한 셈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돈을 받아서 정치 깡패이고, 각 지방단 유지에게서 염출했다"라고 하는데 이건 당시 서청의 위치로 보면 거절할 사람이 없었을 것으로 사실상 강제로 삥 뜯은 것이고, 원조물자 유출은 당시 조직폭력의 역사를 다루면 빠지지 않는 유형이다. 이승만 정권 때 개털이 됐고 이 때 살아남았어도 아마 몇년 뒤 박정희가 정권 잡고 나서 더 철저하게 숙청당했을 것이다.[22] 정치깡패들조차 또 다른 독재자의 눈에 들지 못하면 쉽게 숙청되기 때문이다.

4. 평가

대한민국의 가장 악명높은 백색테러 조직으로, 제주 4.3 사건의 주동자임과 더불어 여러 학살을 저질렀다. 저지른 악행의 규모와 잔혹성이 한국사에 남을 정도로 극악하기에 남한에서 존재했던 정치 세력 중 가히 최악의 평가를 받는다.

서청 출신자들은 "남한마저 사회주의 세상이 되면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존 차원에서 투쟁했다"고 주장한다.[23] 즉, 고향에서도 살해 위협을 받으며, 재산마저 빼앗기고 쫓겨났기 때문에 살아남으려고 과격한 투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잔인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수 없이 많은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반공주의'라는 핑계로 빼앗았고, 공산권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아군에게 도움은 커녕 온갖 범죄 행각들을 일삼아 극심한 피해만 끼쳤으며, 이는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는다'며 주장하던 것은 그저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한 밑천 챙기기 위한 도적떼의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또한, 이들의 변명을 역으로 뒤집어, 빨치산들 역시 남한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는다면 살 곳이 없어지기에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였다고 역지사지로 물어보지 못 할 것 없다.

이승만에게는 서북청년회뿐만 아니라, 삼우회도 있었다. 하는 일은 같다. 해방 이후 좌익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에게 삼우회가 있으면, 김구에게는 백의사[24]가 있다"고 소문이 났다. 여기에 양자 모두를 따른 것[25]김두한이 이끌었던 대한민주청년동맹, 약칭 대한민청이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홍위병이나 재특회, 그리스의 황금새벽당과 공통점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과는 다른 점 역시 상당하다. 가장 큰 특징은 명분은 크고 폼나게 내거는데, 정작 진짜로 사고친 것은 후방에서 한참 약자들 상대로 했다는 것이다. 보도연맹도 그렇고, 정치깡패짓도 그렇고, 제주도에서도 그렇다. 그 결과 오히려 공산주의와 거리를 둘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몽땅 친공세력으로 만들어버려 빨치산 토벌이 더 어려워지게 되었으며, 결국 토벌하긴 했지만 서청 방식의 무차별 학살이 아니라 민간인들과 빨치산을 분리하고 투항하는 자들은 받아주는, 정상적인 토벌방식을 채택했기에 가능했다.[26]

냉전 시기에 서북청년회 같은 극우 조직들이 기승을 부린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남미아프리카에서도 극우 준군사조직들이 준동하여 빨갱이 사냥을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학살했다. 대표적으로 콜롬비아의 "콜롬비아 연합자위군"이라는 우익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본래 FARC, ELN, M-19 등 공산주의 게릴라들에게 가족을 잃은 유족 출신들이 만든 자경단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갈수록 공산주의 게릴라들 뿐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본거지 근처에 거주했을 뿐 공산당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메데인 카르텔과 손을 잡고 '납치범들에게 죽음을'이라는 단체를 추가로 만들어 다른 유족들을 회원으로 받아 폭탄 테러를 일으키고, 테러리스트를 그만두고 합법 정치가로 전환한 인사들[27]을 복수하겠답시고 암살하는 통에 원래 이들을 지원하던 미국까지 기겁하여 이들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할 정도였다. 결국 메데인 카르텔, 칼리 카르텔을 비롯한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들과도 손을 잡은 끝에 이들은 클란 델 골포 등의 마약 카르텔인신매매범, 테러리스트 연합체로 완전히 타락하고 만다. 또한 과테말라엘살바도르에서도 극우 성향의 군부가 가혹한 착취 및 수탈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을 소련, 쿠바와 결탁한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역사가 있었다. 이러한 만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주 과테말라 영국 대사가 이들의 잔악함에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28]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아예 극우 성향의 군인들이 정권까지 잡았던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4.1. 극우 세력의 왜곡

극우 세력에선 이 정치깡패 집단을 "대(對)테러집단" 이라고 왜곡하기도 한다. 관련은 조우석 문서 참고하자.
지금 돌이켜 보면,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련군북한을 빨리 공산화시키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해 미군과의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29][30]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반대가 너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운다는 허망한 목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우익 세력은 좌익과 남북협상파들의 친일파 숙청과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의 명분 앞에 주눅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유부단한 보수우익 세력을 반공과 정부수립의 방향으로 강하게 이끌고 간 세력의 하나가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유지도, 정부수립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이주영[31]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권. 그간 금기시되어왔던 '서북청년회'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낸 책이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직후 좌익들과 싸워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했던 우익 청년단체의 하나인 서북청년회와 서북청년들의 건국, 호국 활동을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하고 있다.

5. 영향

비록 존속기간은 짧았으나 서북청년단은 한국 현대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빨갱이, 좌파는 모두 절대악인 사탄이니 용서없이 절멸시켜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였다.[32]

애초에 서북청년단 자체가 이북에서 개신교 신자였었고, 월남한 이후에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듯이 단원들의 약 80~90%가 개신교도일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북청년단 자체가 해체된 이후에 대부분 개신교 목사나 집사 같은 성직자가 되어[33] 개신교계로 들어가 활동을 했는데, 신자들한테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가르쳤고 자연히 그들한테서 교육을 받은 신자들은 강경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34]

아울러 해방 직후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600만명 이상 이북 주민들이 남한으로 도망쳐 왔는데,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과 정치적 성향이 맞고 같은 고향인 서북청년단 출신 목사들이 운영하는 교회로 가서 그들이 가르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35] 그리고 이들은 대한독립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지 출신들과 함께 1963년 '청년우인회'를 결성해 현재의 거대 우익단체 대한민국통일건국회의 토대를 만들었고, 대북강경책과 강성 반공주의를 외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의 열렬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이 극단적인 반공주의는 현재 극우층의 주요 이념이 되었으며, 이 안에는 그러한 반공주의를 외치는 기독교 우파들도 상당수 포진해 있다. 일부는 전광훈사랑제일교회가 정신적인 면에서 서북청년단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라고 주장한다.[36]

또한 4.3 사건 당시 저지른 학살로 반기독교 정서가 강해진 제주도는 기독교세가 약하다. 그런데 이건 신축민란이나 단순히 선교사 수가 적었던 등의 원인도 봐야 된다.

6.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

파일:서북청년회 문장.jpg
서북청년회 재건위 문장[37]


2014년 9월, 갑자기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가 등장해 이 단체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하여 서북청년회가 어떤 단체였는지가 재조명 받았다. 2000년대부터 박사모 활동을 하던 정함철 씨가 재건했으며, 제주 4.3 학살을 자행한 범죄조직을 추앙한다는 진보진영의 비판을 받았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민주화의 수혜자들로, 제1공화국을 제외한 독재 시절이었으면 오히려 이들 정치깡패남산에 끌려갔을 것이다. 이후 서북청년단 재건위는 2014년 11월 28일에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했다. # 이 과정에서 수련관의 대관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진입해 강행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2일에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회 대표가 서북청년단 재건위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에서 김구김일성꼭두각시였고 암살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김구는 독립 이후 공산주의 단체들과 좌익 단체들을 향해서 백의사같은 백색테러 단체를 통해 테러를 가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재건위 관계자들은 항변하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관계를 따지자면, 서청은 당시 국민방위군과 연관된 신성모의 세력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기붕을 띄우기 위한 이승만에 의해 공중분해 당했다. 또한 한국에는 우파는 있지만 극우가 없다며 네오나치 같은 극우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며 사실상 본인들과 네오나치를 동류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재건총회(2014.11.28) 이후 재건노선 갈등으로 전국조직 결성은 무산되었으나, 이후 대변인 겸 구국결사대장으로 임명된 정함철씨가 실질적으로 재건 서북청년단의 명맥을 이어가며 조직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에 미디어워치에서 정함철 구국결사대장이 변희재 대표와 투개표부정선거(민경욱 등이 선동하는 투개표절차상 가짜투표지 논란 등) 거짓선동 실체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다.


2023년 4월 제주 4.3 추모제에 서북청년단 깃발 및 조끼를 입고 와서 언론에 큰 화제가 됐다. 서북청년단을 이끄는 정 모 씨는 추모제가 있기 전부터 자신 또한 참여할 것이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겠다는 식의 글을 SNS를 통해 올렸다. 이후 진입을 하려다가 유족들의 거센 항의로 물러나게 됐다.

7. 관련 외부 링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북청년회
(시사상식사전-방문각)서북청년단
(디지털제주문화대전)서북청년회 제주도지부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제주4·3항쟁에 대한 인식

8. 관련 문서

8.1. 주요 관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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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공청년운동 기념비 비문[2] 특히 민간인 학살을 전문으로 하던 아인자츠그루펜.[3] 그런데 링크한 기사에 실린 1947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서북청년단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미군정 장교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서북청년단원들 중에서 중학 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며 대부분은 단지 소학교를 다녔던 것에 불과하고 부잣집의 아들이거나 성공한 집안의 자손은 없었고 북한에서 고작 머슴 일을 했을 뿐이며 정치적 이익보다는 경제적 이유를 위해 남한에 온 것이 명백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주도 출신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서북청년단원들은 제주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엿장수 같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천한 일이나 전전했으며 한자 오얏 리(李) 자를 두 이(二) 자로 잘못 쓸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4] 이 때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국가 무신론을 채택해 모든 종교를 탄압했고 북한 정권도 당연히 그러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에 있던 모든 한족 출신 지주들과 부자들을 가족까지 잔인하게 모두 죽인 것처럼 당시 한반도 북쪽에서도 지주와 부자들을 지속적으로 숙청하였다. 한국의 개신교 교인들, 특히 보수 성향 신자와 목사들이 현재진행형으로 공산주의북한에 대해서 듣기만 해도 분개하는 이유는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이 개신교도들을 국가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이다.[5] 8.15 광복 직후 평안남도를 비롯한 서북지역은 조선에서 가장 개신교 신자 비율이 높았는데 해방 직후뿐 아니라 20세기 초부터 개신교 신자 비율이 매우 높아서 한때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이들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6] 이들은 대부분 영락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사이비 계열도 아니었으며 이들의 악행이 개신교 교리나 전도를 목적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기에 광신자도 아니다. 서북청년단이 해체된 후 다양한 정통 개신교 교단으로 흩어져서 목사가 되었지만 악행을 이어가진 않았다.[7] 아이런히 하게도 당시 대구는 동방의 모스크바라 불리며 공산주의자가 가장많은지역으로 불렸다.[8] 출처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교수[9]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후신으로 비밀결사인 백의사의 대외조직.[10]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회는 대동청년단이나 대한청년단에 흡수된 상태였지만 서청 출신 단원들은 계속 서북청년회의 이름을 걸고 활동했다.[11] 피아를 구별하지 않는 무자비한 학살은 오히려 정말 무고한 양민들마저 진압군을 적대시하고 게릴라에 협조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정말 게릴라의 준동을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라면 꼭 피해야 할 행동이 민간인 학살이고 그래서 현대 미군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민간인들의 부수적 피해마저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4.3 사태가 장기화 된 것엔 대다수 외지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민심을 잃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12] 이 자는 당시 제주도 주민들로부터 서북청년단원들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하다고 하여 포악한(暴惡漢)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데 4.3 사건이 끝난 이후에 김재능은 제주도를 떠났고 자신이 한 짓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13] 우익 성향으로 탄압을 받아서 온 월남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해방 전후로 폭력조직으로 먹고살던 범죄자들도 처벌을 피해서 월남하여 서북청년회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14] 서북청년회 경남본부 선전부장 겸 중앙집행위원이었으며, 말년에 재건 서북청년회 총재와 대한민국 건국회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참고로 4.3 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말에 따르면 외증조부가 구한말 의병 대장이었다고 한다.[15] 뉴데일리 기사로, 서북청년회의 활동을 터무니없이 미화하고 있다.[16] 하지만 서북청년회와 이승만의 관계에서 서북청년회가 일방적인 피해자이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북청년회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면서 이승만에 맞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고 이에 배신감과 불안감을 느낀 이승만이 먼저 선수를 치는 의미에서 서북청년회를 숙청해 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김성주는 아예 미국과 UN을 등에 업고 평안남도 지사에 임명되어 이승만에 노골적으로 맞서다가 결국 이승만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17] 이쪽은 오히려 같은 서북출신 장준하가 창간하고 서북출신 엘리트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잡지 사상계쪽 인사들과 가깝던 편이었다. 하지만 같은 서북 출신이라는 굴레때문인지 이들도 대체로 서북청년단에 대해 반감보다는 오히려 공산주의를 상대로 열심히 싸운 같은 고향출신 투사들이라는 식으로 바라보는 지역적 한계를 띄기도 한다. 사실 서청처럼 대놓고 폭력을 지향하지만 않았을 뿐, 이들도 대체적으로 반공 성향에다가 서청출신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공산당에 의해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인지라 오늘날에 비해 다소 옹호하는 시선을 띄는 건 어째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18]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과는 동명이인이다. 서북청년단 내에서 서열 2위인 부단장을 한 인물인데, 서북청년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아 그 이력이 불투명하다. 다만 평안북도 출신이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19] 다만 김성주가 완전히 억울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승만한테 버림을 받은 이후로는 복수를 하기 위해 UN군에 줄을 대어 UN군에 의해 평안남도 지사로 임명되어서 이승만이 평안남도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보낸 사람들을 모두 쫓아냈으며 심지어 이승만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아서 이승만이 크게 분노했다. 일설에 의하면 김성주가 UN군의 힘을 빌려 이승만을 쫓아내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음모를 꾸몄으며, 그래서 이승만이 김성주를 더욱 미워했다고도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 지역으로 쳐들어오자 김성주는 얼른 남한으로 피신했으나, 이미 이승만으로부터 미움을 샀던 터라 처신이 무척 어려웠는데, 마침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의 선거 캠프로 들어갔다. 평화주의자인 조봉암 본인은 서북청년단 간부로 있으면서 온갖 폭력을 휘두른 김성주가 못마땅했으나, 자신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이승만 진영의 공격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삼기 위해서 김성주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김성주는 조봉암 선거 캠프에 있으면서 술만 마시면 "내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를 다 알고 있다! 여차하면 다 불어버리겠다!"라고 소리쳤고, 백범 김구 암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승만은 이렇게 자신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김성주를 끝내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정작 아이러니한 사실은 김성주 본인은 원래 백범 김구를 죽인 암살범 안두희가 애국자이니 석방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사람이었던 것(...).[20] 사실 백범 김구와 서북청년단의 관계는 1948년 장덕수가 암살되면서 김구가 우익진영에서 고립되자 정치적 노선을 바꾸어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굉장히 돈독했었다. 김구 본인도 이들을 신탁통치와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애국청년들이라고 치켜세워줬을 정도. 이때문에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을 때 당대의 몇몇 사람들은 김구 본인이 부추기고 키워준 서청 출신에게 발등을 찍혔다고 반응을 하기도 했다.[21] 다만 재판부는 애초에 죽일 생각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살인죄로 규정했다.[22] 박정희가 국시를 반공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반공을 내걸고 깡패짓을 하는 자들을 옹호하진 않았다. 이승만 시절의 반공이 반대세력들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패도 무죄가 되는 상황이었다면, 박정희와 그 이후 반공은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일단은 검경이 나서서 처리하는, 법과 질서에 의해 집행되는 반공이었기에 아무리 반공성향 깡패집단이라고 해도 관료들에게 뇌물 주고 음지에서 이득 챙기는 정도라면 모를까, 정치깡패를 자처하며 대놓고 나댈 수는 없었다.[23] 이런 소리는 한국의 우익 지식인들도 하는데, 그래서 진중권이 자신의 책인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그런 지식인들을 비꼬는 내용을 넣었다.[24] 대동단이 후신이라고 한다.[25] 회장 유진산, 고문 신익희, 명예회장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다. 당시 대표적인 우익지도자는 거의 다 보인다. 김두한은 감찰부장이었다.[26] 모든 게릴라전이 어려운 것은 민간인 중에 부역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불특정 다수를 보호하면서 게릴라를 토벌해야 하는데, 소극적 동조자인 민간인들 사이에 섞여있는 게릴라들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조차 팔루자의 저항세력을 1차 때는 토벌하지 못하고 2차 때 토벌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팔루자 지역 저항세력들 중에 알카에다류의 지하디스트들이 섞여들어가 민간인 참수를 일삼으면서 저항세력이 주민들의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27] 대표적으로 M-19가 있다. 이들은 대법원 점거 사건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와의 협상 끝에 무장을 해제하고 합법 정당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무장을 해제한 이들은 연합자위군과 메데인 카르텔의 쉬운 표적이 되고 말았다.[28] 출처: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 로널드 라이트 지음/ 안병국 번역/ 이론과실천[29] 당시 소련이 동유럽에 정신이 팔려 동아시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제 패망 후 한반도에 진주할 때 소련은 미국이 분할 점령선으로 39도나 심지어 40도선을 제안하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위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서술되었지만, 유럽에 비해 덜할지라도 자신들이 차지한 지역에 대해서는 공산 국가 설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게 통일정부의 실패를 떠넘길수 없기에 사실이 아나다 보다는 논쟁 중인 주장에 가깝다.[30] 이외에도 아래에는 독단적인 주장이 많다. 이주영 교수는 서북청년단을 항일투쟁을 계승한 집단으로 왜곡해서 주장하기 까지 한다. 참고로 이주영 교수 전공분야도 원래 한국현대사가 아니라 미국사다.[31]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미국사 전공으로 대중들에겐 대한교과서에서 출판된 세계 각국사 시리즈 중 미국사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이 미국사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다루면서도 알기 쉽고 중립적으로 쓴 양질의 입문서인데 전공도 아닌 근현대사에 손을 대더니...[32] 한국 현대사에서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람들은 보도연맹 학살자들만 계산해도 무려 30만 명이 넘는다. 게다가 제주 4.3 사건이나 보도연맹 학살사건5.18 민주화운동 같은 반공주의로 인한 학살 사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학살 같은 폭력을 비판하는 것이지 반공주의 그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좀처럼 보기 드물다. 이는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반공주의 테러로 인해 한국 사회 전반에 빨갱이로 몰리면 죽는다는 공포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33]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서북청년단 출신인 시라소니가 서북청년단의 해체 이후에 개신교 교회의 집사가 되어 주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34] 사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던 당시 시대상, 그리고 북한의 종교(특히 개신교) 탄압을 생각하면 당시 개신교인들이 반공주의자가 되는 비율이 높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35] 그런 이유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진짜 숨은 권력층은 월남한 이북민 출신 개신교도들이라고도 말한다.[36] 당장 전광훈의 스승격인 김홍도 목사가 서북 출신이다.[37] 재건총회 당시 대변인 겸 구국결사대장으로 임명된 정함철씨가 복원한 문양이다.(초기 재건위 문양은 해골이었음)[38] 본디 서청은 김구 휘하 단체이나 1946년 전후로 이승만 휘하 단체로 변모.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백색테러 단체 백의사도 완전히 김구의 색체가 짙은 단체로 변모. 그래도 이승만과 김구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는 백의사와 서청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단원들이 있는 등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서청 소속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그래서 김구가 암살되었을 때 미군정에서는 본인의 극단적인 지지자한테 암살당한 게 아니냐고 단정을 짓기도 했다.[39] 서북청년단이 해체되자 미군의 지원을 받는 켈로부대에 들어갔는데, 한국전쟁이 끝나자 켈로부대가 해체되는 바람에 한동안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 이후에는 야당인 민주당 정치인들의 경호원 역할을 하다가 개신교를 믿고 교회 집사로 살았다.[40]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온 것과 같이 실제로 서북청년회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제주 4.3학살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41] 한경직 목사가 만든 교회로 이 교회의 청년들이 결성한 서북청년회가 서북청년단의 시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