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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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 김창룡 | 송요찬 | 최덕신 | 탁성록 |
진상조사보고서 사진 파일에 나와있는 탁성록의 모습 | 음악가 활동을 하던 시절의 탁성록 |
1. 개요
卓聖綠 / 卓星錄[1]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음악가.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대 쪽 사람 중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악명 높던 사람이다.
2. 상세
1916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래 작사 및 작곡[2]을 하는 등 본업은 음악가였다. 고향 후배였던 유명 가수 남인수의 데뷔를 주선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다만 별다른 히트곡은 없던 2류 작곡가였으며 이에 상실감을 느끼고 아편에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에는 재활에 접어들어 다시 소규모 악단을 꾸리고 음악 활동을 했으며 조선해안경비대의 군악대를 새로 조직해서 이끌어 달라는 주변의 요구로 조선해안경비대 군악대 창설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덕에 특채로 국방경비대 장교가 되었고 군악대장을 했다가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가 되었다. 계급은 대위. 출처 그냥 해안경비대에 계속 남아 군사적 권한 없이 군악 관련 업무만 했다면 본인이 마약 중독자라는 것 빼곤 남을 죽이거나 하진 못했을 터이니[3] 아쉬운 부분이다.
4.3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9연대 정보참모는 핵심 중의 핵심 자리였다. 그런 핵심 중의 핵심을 맡던 그는 중증 마약 중독자로, 증언들에 따르면 팔에 주사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악행도 서슴지 않아서 양민들을 재판도 없이 마구 살해했으며 여자들을 여럿 겁탈하였다. 그러다가 제주도를 떠날 땐 동거하던 여자마저 살해하고 떠났다.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을 한 이북 출신 대한민국 육군 장교도 그가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든다'면서 분노를 드러낸 적이 있다. 서북청년회 등 사설 우익단체 소속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 자는 나중에 국방부 조사본부(CIC) 진주특무대(파견대)장에 임명되고 육군 소령까지 진급해 진주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4]했다. 출처: 113페이지 이후에 육군 헌병대의 조사를 받고 불명예 전역 처분되어 파면되었다.
육군에서 방출된 후에는 남아 있는 행적이 없지만 아편 중독 때문에 그리 오래 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은 그와 제주비상계엄령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申仁澈) 대위와 서북청년단 제주도위원장 김재능(金在能 1916~?)[5]을 삼대 폭한(暴漢)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가 작곡한 노래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면 좋다. 그 작곡가는 어떻게 살인마가 됐나-탁성록(卓星祿) 이야기
3. 탁성록에 대한 증언들
윤태준(尹太準): 연대 정보참모가 탁성록인데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다 죽었습니다. 그 때 헌병에게 잡혀가면 살고,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었습니다. 또 서북청년 이 놈들이 고얀 놈들입니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 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진압을 하라고 했으면 진압만 하지…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겁니다.[6]
최길두(崔吉斗): 탁성록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7]
하두용(河斗瑢): 탁성록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 소위 아편주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라 약재과장을 불러와 결재를 받고 주사를 놔 주었습니다. 그는 팔에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아편쟁이였어요. 안정숙 간호원이 팔뚝에 주사하려 해도 주사 바늘이 들어가지 않자 겨드랑이 밑에 꽂으라고 하더군요. 그는 재임기간 내내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찾았습니다.[8]
김정무(金貞武): 수감자 중에 얼굴이 하얀 사람이 눈에 띄는 게 아닙니까. 이상하다 싶어 물어 보았지요. 오창흔이라는 의사인데 그가 하는 말인 즉, '탁성록 연대 정보참모가 아편주사를 놓아달라기에 거절했더니 잡아넣었다'는 겁니다. 나도 이북에서 공산당이 싫어 월남해 군대에 들어온 사람이지만 이런 놈은 가만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총을 들고 탁성록을 찾아가 '야, 너 왜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드느냐. 이 따위로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석방시켰습니다. 오창흔 씨는 석방된 후에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나만 따라다니며 군의관이 될 수 있도록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서울 육군본부에 가서 의무관에게 부탁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그 후 오창흔 씨는 겁이 나 제주도로 가지 못하고 부산으로 가서 ‘오 소아과’를 차려 운영했습니다. 탁성록은 마흔이 다 된 사람인데 정보참모의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악대에서 나팔 불던 놈인데 특채됐는지 나보다도 먼저 대위를 달았어요. 이런 저런 구실을 달아 여자들 성폭행을 많이 했어요.[11]
4. 대중매체에서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에선 마약을 해대며 여자들을 겁탈하고 죽이는 김상사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그를 바탕으로 만든 캐릭터로 사실상 그와 판박이다. 실명으로 넣지 않은 이유는 당사자가 생사 불명이라지만 아마도 소송 문제가 우려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조[1]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의 '진주의 음악' 항목을 보면 1930년대 후반기에 가요작곡가로 활동한 탁성록이 언급된다. 여러 기록에서 진주 출신으로 원래 음악가 출신이었다고 언급되는 것을 보면 동일인물로 보인다. 참고[2] 한겨레음악대사전에 의하면 일본 컬럼비아레코드 사에서 '광야의 달밤', '낙동강의 애상곡', '내 갈길 어듸메냐', '네온의 파라다이스', '눈물의 항구', '제주도 아가씨'(?!) 등의 유행가 8곡을 작곡한 바 있고(출처 1) 임진왜란 때 의기(義妓) 논개를 기리는 '논개의 노래'라는 노래도 작사 및 작곡했다고 한다. 출처 2 진주시청에서 관리하는 '참진주 논개사이버박물관'에서도 논개를 소재로 한 노래로 '논개의 노래'를 소개하고 있다. 참조[3] 오히려 남인수를 데뷔시켜 준 인물로 좋게 기록되었을 것이다.[4] 탁성록과 더불어 이정용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시기 고등부 형사 출신으로 광복 후 경찰 간부로 채용되어 진주경찰서장으로 복무했으며 진주경찰서장 시기에 보도연맹 학살을 CIC 특무대 장교였던 탁성록과 함께 저질렀고 경남 지역에서 경찰 고위 간부로 승승장구하여 1960년 4.19 혁명 당시 부산 지역에서 시민들 대상으로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다.[5] 여자라면 젊고 늙고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겁탈하려 드는 호색한이었다. 특히 제주 4.3 사건에서 제주도 주민들을 가장 많이 죽이고 능욕하고 약탈하여 제주도 주민들로부터 포악한(暴惡漢)이라고 불리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을 하도 많이 죽여서 원한을 많이 샀기 때문에 제주 4.3사 건이 끝나자 제주도를 떠났는데 남들을 피해 숨어 살다가 1960년대에 병이 들어 죽었다고만 전해진다.[6] 1차 출처: 본인 증언, 73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당시 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2001. 5. 2 채록 증언. 2차 출처: 4.3 진상보고서 382쪽.[7] 1차 출처: 본인 증언, 당시 제주도립병원 총무과 직원. 2차 출처: 4.3 진상보고서 383쪽.[8] 1차 출처: 본인 증언, 75세, 제주시 삼도동, 당시 제주도립병원 경리주임, 2001. 6. 28 채록 증언. 2차 출처: 4.3 진상보고서 383쪽.[9] 1차 출처: 본인 증언, 81세, 제주시 일도2동, 당시 의사, 2002. 10. 19 채록 증언. 2차 출처: 4.3 진상보고서 383쪽.[10] 4.3 사건이 발발한 해인 1948년 3월 6일 제주경찰감찰청 제1구경찰서 조천지서(현 제주특별자치도경찰청 제주경찰서 조천파출소)에서 발생한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의 검시의로 참여해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밝혀낸 일화로 유명하다.[11] 1차 출처: 본인 증언, 7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당시 9연대 군수참모, 2002. 9. 25 채록 증언. 2차 출처: 4.3 진상보고서 3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