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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1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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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대구와 경북의 동향2.2. 민심의 이반
2.2.1. 미군정의 무능과 전국적인 기아 사태2.2.2. 콜레라의 발병2.2.3. 친일 경찰
2.3. 9월 총파업
3. 전개
3.1. 대구에서의 봉기3.2. 경북으로 파급된 사태3.3. 타 지역에서의 봉기와 진압
4. 결과5. 당시 정치권 반응6. 폭동인가 항쟁인가7. 문화에서의 대구 10.1 사건8. 기타9. 자료10. 관련 문서

1. 개요

大邱十一事件

1946년 10월 1일, 대구 지역에서 발발한 민중봉기. 영남 지역 한 가운데 위치한 대구의 지리적 특성상 인근 지역으로 파급력이 어마어마해 사실상 전국으로 번졌다.

미군정의 행정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여 식량난과 전염병(콜레라)이 겹치자 당시 미군정은 쌀 강제 수집과 제한 배급 정책을 펼쳤고 대구에서는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가 수시로 벌어졌다. 5월 말부터는 쌀 배급과 인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고 9월에는 부산에서 25만 명이 총파업[1]에 참가했으며, 급기야 10월 1일 저녁 대구역 앞에서 수천 명의 시위 노동자와 100명의 무장 경찰들이 대치하다가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음 날 분노한 시민들은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메고 대구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했고, 대구역 앞에서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부잣집 혹은 친일파의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미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기관총 부대를 앞세운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지만, 시위는 영창과 인근 지역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대구/경북 일대에서만 전체 인구의 1/4인 77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전국적으로는 230만 명이 참여하였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에서만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170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지만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를 꺼리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10월 사건을 좌익 폭동으로 규정하는 시각이 있지만 후술할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혔듯이 순전히 좌익 세력들만으로 구성된 정치적 액션은 아니었다.[2] 실제로 급진 좌파들의 영향이 없진 않았으나 대규모 폭동으로 번진 원인은 미군정 하 식량난과 토지개혁 지연, 단순히 미군정측의 편의를 위한 친일 관리 중용 등 모순이 지속되자 성난 민심이 폭발한 사건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결국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의 현지 원주민들에 대한 전통의 곱창난 민사작전반지성주의적 측면에 있다.

사태 발생 후 친일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들의 좌익 토벌은 정부 수립 이후까지도 지속됐고, 법관이 주최하는 재판 없이 사상죄 혐의만으로 민간인을 즉결 처형하는 사적 보복까지 흔히 벌어졌다. 또한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하였고, 명단에 적힌 사람들 대부분은 6.25 전쟁 발발 직후에 학살당했다.

이후 몇십년 동안 사건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7년 6월 항쟁 전후로 재평가 논의가 활발히 시작되어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 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식량 공출 정책의 강압적 시행 등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은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서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이 있다고 인정해 유족들에게 사죄와 위령 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대구 10월사건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 배경

2.1. 대구와 경북의 동향

우선 10월 사건의 도화선 중 하나인 총파업이 수시로 일어났는지를 알아보려면 대구/경북 지역의 동향을 알아야 한다. 현재는 보수 강세 지역이지만, 당시 대구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공산주의, 사회주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이었다.[3] 일제강점기 당시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 숫자를 보면 경상도함경도 출신이 많고, 특히 경북 출신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다. 사실 경술국치 이후 충청도전라도 지역은 일제의 수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무장단체들이 많긴 했으나,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그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거나 지하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그나마 탄압이 덜한 영남 지방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남 지방은 좌우익을 떠나 독립운동가의 비중이 타지에 비해 높은 편이다.

또한 일본 수출의 1번지인 부산을 끼고있는 경상도의 특성상 일본인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곳이 많았고, 일본에서 전파된 사회주의[4]문물을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환경적으로도 2차 생산직, 그것도 경공업 중심의 산업 기반 도시가 많았다는 점도 사회주의가 확산하는 데 한몫했다. 1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호남 지역과 다르게 부산항을 기점으로 많은 경공업 공단들이 있던 영남에서, 노동자를 기반으로 둔 사회주의 사상은 당연히 유행할 수밖에 없었다.

2.2. 민심의 이반

2.2.1. 미군정의 무능과 전국적인 기아 사태

파일:vykeufM.jpg
1946년 7월 2일자, 경북 지역신문인 영남일보. 기사 가운데 배곱파 못살겟소가 보인다.
당시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사이다.

한편 이 시기 민중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식량 문제였다.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남한 민중들은 배를 곯았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은 1945년 9월 '미곡 자유화 정책'을 발표한다. 이전까지는 일제강점기의 쌀 공출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쌀을 자유롭게 사고팔지 못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시장이 개방되면서 쌀을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의 식량시장은 만성적인 물류문제[5]와 공급부족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공급이 모자른 상태에서 갑자기 자유시장이 되었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매점매석하여 쌀 가격이 폭등하였다. 이로 인해 쌀값이 30배 넘게 오르게 된다. 요즘으로 치면, 쌀 10kg에 약 3만원 하던 것이 갑자기 쌀 10kg에 90만원이 된 셈. 어마어마한 물가 상승이다. 특히 한국인은 밥심으로 일한다 할만큼 쌀 소비량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나라임을 생각한다면, 당시 소비자들이 실질적으로 느끼는 물가상승률은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미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5개월 만인 1946년 1월 다시 일제강점기 때의 공출과 똑같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한다. 심지어 일제도 하지 않은 여름 보리 공출[6]까지 한다. 변덕스런 정책 변경에 사람들은 공출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미군정은 공출 목표량 550만 석 중 불과 12.4%만 수집하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청송 지역에서는 200명이 집단으로 굶어 죽었다.

이런 과정은 미군정 당국의 행정 능력이 매우 무능했다는 걸 보여준다. 실제로 한 미군정 관료는 식량 정책이 실패했음에도 쌀이 없으면 '채소나 과실(과일)'을 구해 먹으면 되지 않냐망언을 했다.#[7]

2.2.2. 콜레라의 발병

식량난은 특히 경북/대구 지역에서 매우 심각했는데, 설상가상으로 1946년 초에는 콜레라가 창궐하였다.[8]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2,500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으며, 그 중에서 1,7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이에 미군정은 질병이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구로 출입하는 것을 통제했다.[9]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전염병이 창궐한 곳에 대한 기본 조치였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의약품이나 생필품을 보급하여 전염병을 치료했어야 했는데 미군정은 이 점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대구 지역의 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돈이 있다 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 굶주림은 극에 달해 당시 노동자치고 사정이 좋다는 전매청 담배공장 노동자들조차 궐련을 붙이라고 풀을 주면 너무 배가 고파 그 풀을 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10]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배가 고픈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기아시위'를 벌이기도 했다.[11]

2.2.3. 친일 경찰

여기에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로 활동했던 세력들이 미군정 경찰로 다시 고용되어서 민중들을 아주 못살게 굴었다. 미군정이 식량정책에 실패해서 사람들이 아사할 지경임에도, 경찰은 쌀을 내놓을 때까지 폭력을 행사하며 애꿏은 농민들에게서 쌀을 공출했다. 당시 미군정에 고용된 고위직 경찰 중 82%가 조선총독부 출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자신을 괴롭히던 순사가 나라가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기세등등하게 와서 강제로 사람들의 쌀을 뺏는 경우가 다반사로 벌어졌다. 이 정도만 해도 당시 사람들이 경찰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농민들은 친일 경찰에 의해 공출량을 내든지 감옥에 가든지 택하여야 했으며, 감옥에서는 항상 심한 매질을 당했고 재판신청은 거부되었다."
리처드 로빈슨, 1947
일부 친일 경찰들은 수집한 쌀을 빼돌려서 암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경찰들이 가지고 있던 쌀의 양이 평균 3말(24kg) 정도 였다. 시장에 쌀이 없어서 가격이 오르고 있는데 3말의 쌀이란 대단히 많은 수준이다.

당시 경찰 중에는 독립운동가, 광복군 출신도 있었지만 주류가 아니었고 대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경찰들이었다.

1945년 9월 11일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를 두고 신문 1면에 "일본인 관료 유임 정책에 한국인들이 집회를 열다"라고 알렸으며, '한국의 해방'이라는 소제목에서는 "한국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모든 한국인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이들(친일 경찰)로 어떻게 제대로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식민쓰레기(colonial riffraff)들에게는 무르고 우리가 해방시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억압적이어야 하는가" 라며 미군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연히 민중들의 불만은 날로 쌓여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경북 지역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2.3. 9월 총파업

미군정은 일제 패망 시 조선총독부가 불법적으로 찍어낸 화폐의 효력을 인정하여 인플레이션과 위폐 범람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에 민중의 불만이 심해지자 미군정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책임을 돌렸다. 당시 미군정의 통화발행고가 백억 정도였고 총 통화액은 그보다 많았으며 조선총독부가 찍은 품질 나쁜 화폐가 수십억 돌아다니던 상황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의 공판 기일을 너무 이르게 잡음으로써 변론 준비 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분노하여 7월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해서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1946년 9월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영향을 받던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매우 큰 파업을 벌였으니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졌다.
1946년 9월 30일자 민주중보[12]에 실린 대구 민중봉기가 일어날 조짐을 다룬 기사. 이 기사가 실린 지 이틀 후 민주중보는 1달 반 동안 휴간하였다.[13](11월 15일이 돼서야 복간되었다)

총파업선언서의 첫 항목에는 '쌀을 달라. 노동,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는 요구가 들어갔다. 물가등귀에 따른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 절대 반대, 반동테러 배격,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 즉각 석방 등도 요구했다.#

미군정이 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을 과격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나왔고 특히 대구 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시위군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3. 전개

3.1. 대구에서의 봉기

대구 지역 10월 사건 전개도
파일:대구지역 10월 사건 시위대.jpg
파일:대구지역 10월 사건 경찰.jpg
10월 2일, 집결한 시위대 발포 이후 시위대를 추적하는 경찰
몇 시간 동안 대구는 폭도들이 지배하였다. 배회하는 폭도 무리들은 경찰본서 앞에서의 대규모 소요에서 힘입어 외곽의 경찰지서들을 공격하였다. 경찰은 그들의 집에서 공격을 받았고 살해되었다. 군정관리들과 경찰관리들의 집은 폭도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대구에 있는 병원들은, 일찍 부상당한 일부 경찰들이 폭도들에 의해서 끌려나가 살해당한 이후, 부상 경찰의 수용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격심한 공포가 경찰을 사로잡아, 그들은 어떠한 규율도 곧 잊어버렸다. 다수가 사퇴하기를 원하였고 경찰제복과 무기를 버리고 사라졌다.
미군 제24군 G-2보고서(주한미군 정보보고서) 中
"점심시간쯤 됐는가 몰라요. 중앙통[14]이 인산인해라요.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구역 쪽으로 쭉 갔는데 거기에 마루보시 노동자들이 나와 고함지르고 시민들도 북적거리고 있고, 경찰들도 총을 들고 설치샀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대구공회당[15] 쪽으로 돌아서 경상북도 대구경찰서(現 중부경찰서)로 가려고 하는데 뻥, 뻥, 빠빠빠빠빵 총소리가 마구잽이로 납디다. 그러자 바로 우리 앞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총상을 입은 거예요. 놀란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우리도 어린 마음에 겁이 안 납니까? 나는 그 길로 학교로 돌아가 가방 챙겨서 쎄가 빠지도록 집으로 도망쳤지요."
당시 대륜중학교 학생이었던 배일천 씨의 증언. 2013년 7월 20일, 진실화해위원회
10월 1일 오전 10시경 여성과 어린이로 구성된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대구부청(현재의 대구광역시청 동인청사) 앞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라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이들을 막아서다가 공포탄을 발사하자 분노한 군중은 그 경찰을 구타했다. 시위대는 경북도청(現 경상감영공원[16])을 거쳐 대구경찰서(現중부경찰서)까지 행진했다. 한편 1,000~1,500여 명의 노동자들도 시위를 시작하여 대구역 광장에서 집회를 시작했고, '대구부 투쟁위원회'의 주도로 시간이 갈수록 시위대의 규모는 불어났다.[17]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했고, 그러는 와중에 경찰이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이 발포로 인해 2명이 목숨을 잃었다.[18]

다음날 아침, 노동자 2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중들은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합세했다. 전날 죽은 노동자의 시신이라며 시위대가 시체를 끌고 왔기에 군중의 분노는 매우 컸다. 곧 대구경찰서는 수만여 군중에 포위되었다. 경찰서 내로 시위대에서 보낸 대표들이 들어가 경찰서장과 담판을 벌였고, 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대구지부에서 활동하는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는데, 바로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도 사격으로 대응하여 순식간에 17명의 시위대를 사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폭발해 버렸고,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처음에 평화시위로 시작하다가 폭동으로 돌변하자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시위의 선봉에 섰으나 고참 당원들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총성과 화염이 뒤덮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폭동 군중은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등을 약탈했다.[19] 반대로 일반 상점이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경찰관을 집단 폭행[20]하거나 죽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조선인들을 괴롭혀 온 질 나쁜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에 폭도로 변한 군중들 앞에서 살아남을 수 없던 것이었다.[21]

한편 기층민중 외에도 공무원의사 등의 중간계층의 호응도 있었다. 이미 경북도청에서는 최고 간부들이 2일에 총사직을 결의했고, 과장들은 「시민에게 사과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0월 3일에는 도청 일반직원들이 파업에 참여하여서 간부들의 무능력함을 비판하며 행정권을 미국인으로부터 조선인으로 이양 등을 주장하였다. 대구부 의사회에서는 경고문을 발표하여서 시민에 대한 경찰의 발포를 규탄하였고, 심지어는 시민에게 발포를 자행한 경찰들의 치료조차 거부하기도 하였다.[22] 의사, 간호사, 의과대학 교수들은 자신들의 지갑을 털어 파업을 지원하고자 모금을 내는 등 파업과 시위에 나름대로 참여하였다. 물론 고위직이나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태에 대해 미온적이었으나 하급직으로 내려갈수록 파업에 대한 호응은 큰 편이었다.

한편, 미군정은 10월 1일 군중이 모일 때부터 탱크장갑차를 시내로 진입시켜 무력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 폭동이 일어나자 미군 탱크와 장갑차는 그대로 시민들을 밀어붙여 거리를 봉쇄했다. 또 대구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던 경상도 지역 출신 경찰들[23]을 철수시키고 수도권에서 경찰간부인력을 차출하고 경남 지역에서 진압 경찰관들을 투입시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해 많은 군중들의 피해는 상당했다.[24] 오후 5시 미군정은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비조직적으로 터져 일어났던 민중봉기는 이내 가라앉았다. 시위 참여자들과 주동자들은 검거되었고, 휴업과 파업은 10월 3일까지 이어지다 10월 8일 대구의 파업 노동자들이(공식적으로)직장에 복귀하며 완전히 종료됐다.

3.2. 경북으로 파급된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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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출된 쌀을 지키고 있는 경찰응원대
그해 10월 2일인가 3일인가 잘 기억되지 않습니다만... 집 앞길에 약 50명의 남자 부락민들이 모두 삽, 곡괭이, 막대기 등을 들고 떠들썩하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가자 면소(面所)로 가자" 큰 난리가 난 것 같았습니다... 양복차림 청년 두어 사람의 연설내용은 "대구는 인민위원회를 점령했다", "경찰은 무장을 해제당했다", "일본놈들의 앞잡이들을 쳐부수자", "공출이 없는 세상이 와야 한다" 등의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 연설을 한 청년들은 대구에서 각 밤에 이웃마을에 도착했답니다... 그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날로 뛰는 물가고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이 물러나고 우리 세상이 됐다는 건 말뿐이요, 일본인 밑에서 면서기를 한 자가 그대로 면소에서 으시대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면사무소로 간다는 것은 바로 악독한 공출에 대한 원한을 풀 수 있는 기회라 여겼을 겁니다.
그리하여 면소로 밀려간 사람들은 거기서 사무소를 때려부수고 서류를 꺼내 불태워 버렸습니다... 경찰관도 도망가고, 면서기도 도망가고... 원한의 대상인 그 악독했던 면서기, 친일파인 그 사람의 마을로 간 것입니다. 가옥과 재산을 마구 때려부셔 불태워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저녁에서 밤에 이르기까지 온통 잔치 바람이었습니다... 밀주(密酒)에 벌겋게 된 그들은 완전보복과 승리감에 취해 금방이라도 공출도 없는 아주 잘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구 10.1 폭동사건>, 이목우, 「세대」 1965년 10월호, p230~231
이렇게 대구에서의 폭력 시위는 쉽게 진압되었지만, 봉기는 경상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대구 지역으로부터 온 선동자들이 타지로 뻗어나가 대구에서의 일을 알리면서 봉기를 촉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수의 중소도시가 이러한 일련의 폭력사태에 말려들었다. 민중들의 원한을 사온 경찰관서와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 청년단체 건물들은 불살라지거나 파괴되었다. 친일 경찰관이나 한민당 간부, 우익 청년단원들은 걸리는 대로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경북 지역에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달성군[25]은 관내 9개 지서 중 8개 지서, 5개 파출소 중 3개 파출소가 군중의 습격을 받아 점거되었다. 이 일로 경찰관 6명이 죽고 17명이 다쳤으며, 107호의 주택이 파괴되어 1,500만 원 상당의 피해를 냈다. 고령군에서는 10월 2일부터 5일 사이에 4개 지서가 습격당하는 일이 터지자 고령경찰서에서 직접 나서 시위 군중과의 타협을 시도하여 시간을 끌었다. 시민들은 여기에 넘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진정되었다. 성주군에서는 10월 3일 수천여 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포위하여 경찰서장과의 담판을 요구하며 조건을 내걸었다. 경찰서를 군중에게 넘기라는 등의 요구 조건을 경찰서장이 거부하자, 분노한 군중은 경찰들에게 린치를 가하고 이들을 감금하였다. 일부 과격한 시위대는 경찰들이 감금된 곳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려 했으나 마침 응원경찰이 도착하는 바람에 저지당했다. 10월 4일에서는 성주군의 모든 지서가 습격을 당해 경찰 10명 부상의 피해를 냈다.

군위군에서는 10월 2일부터 4일까지 군중들이 인원이 얼마 없던 경찰서를 점거하고[26] 경찰서장과 군수를 유치장 안에 가두었다. 시위대는 4일 응원경찰이 몰려오자 무기와 가재도구 등을 탈취하여 도주 및 해산했고, 인명피해는 부상자 몇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의성군에서는 10월 3일 시위대 5,000여 명이 몰려와 경찰서장 및 군수와의 타협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점거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응원경찰에 의해 해산되었고, 별다른 피해는 없이 봉기는 평화롭게 종료되었다. 김천군(현 김천시)에서는 10월 3일에 경찰서를 점거하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다음 날 응원경찰에 의해 봉기는 진압당했다. 영일군(현 포항시)에서는 포항읍, 기계면, 구룡포읍 등에서 봉기가 발생하여 여러 명이 목숨을 잃고 경찰서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불에 탔다. 영덕군에서는 달산면 한 곳에서만 대대적인 봉기가 발생하여 면장이 피살당하고 문서와 가옥이 불에 타거나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가장 사태가 심각했던 곳은 칠곡군영천군(현 영천시)였다. 먼저 칠곡에서는 군중들이 봉기하여 경찰서를 공격하고 낫과 도끼 등의 농기구를 이용해 경찰 여러 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특히 칠곡경찰서장 장석한[27]은 1946년 10월 4일 피살된 뒤 말 그대로 반으로 쪼개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고, 다른 경찰들도 이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0월 2일부터 3일까지 칠곡 내 대부분의 지서들이 습격당하고, 도로와 교량이 파괴되었다. 격렬한 시위는 10월 3일 응원경찰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영천에서는 대구 다음으로 가장 대대적이고 폭력적인 봉기가 발생하였다. 10월 3일 수만여 명의 시위대가 출몰하여 읍내를 공격했고, 이 일로 우편국, 경찰서, 군청 등이 박살났다. 거기에 더불어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 출장소, 부호와 친일파들의 저택, 면사무소 등도 파괴와 방화를 당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에까지 군중들이 난입하였다. 봉기 와중에 군수, 관리, 경찰, 지주, 우익인사 등이 성난 군중들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당시 영천군수였던 이태수(李泰洙)는 자택 앞에서 린치를 당한 후 불타는 군청 건물 안에 내팽개쳐져 산 채로 타죽었다.[28] 시위대는 응원경찰까지 몰아낼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으나, 10월 5일부터 응원경찰과 미군의 투입으로 진압되었다. 영천에서만 수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0여 채가 넘는 가옥이 불에 타 10억 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났다.

한편 선산군(현 구미시)에서는 조직적인 봉기가 이루어졌다. 10월 3일 2,000여 명의 군중을 이끈 좌익 성향의 인사들은 경찰서장으로부터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에 이양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선산의 인민위원회가 치안을 포함한 대부분의 행정 사무를 도맡게 되었고, 경찰과 우익 인사들은 유치장에 갇혔다. 군중들은 공권력의 무력화를 기점으로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친일파, 경찰, 지역 유지들의 가산을 탈취했다. 그러다 한 경찰이 탈출하여 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응원경찰과 미군이 봉기를 진압하고자 출동했다. 그 사이에 인민위원회는 보다 타협적인 자세로 변해 감금한 사람들을 석방하기도 했지만 결국 10월 6일 진압당했다. 진압 이후 일부는 도주하다가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대부분은 검거되었다.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의 형이자 박근혜의 큰아버지인 박상희 역시 이 사건에 적극 참여했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박상희는 남로당 간부였고, 지역 유지였다. 진압 당시 박상희는 우익 인사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경찰 병력이 추격하자 도망치다가 총에 맞은 것. 박상희는 지역에서 명망이 꽤 높아서 우익 인사들도 '우리가 잘 말해 줄텐데 왜 도망가느냐'라며 소리를 쳤다고.

경주군(현 경주시)에서는 10월 3일과 4일에 봉기가 발생하여 지서 4개가 습격당했고, 면장들의 집과 군청이 불에 타는 일이 발생했다. 경주경찰서도 군중에 의해 점거되어서 결국 10월 6일 대구 지역의 계엄령이 경주 인근의 지역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이 봉기로 56명의 사상자와 4,847만 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예천군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전투 끝에 경찰서를 점거했고, 응원경찰까지 물리치며 10월 6일까지 버티었다. 한편 상주군, 경산군, 문경군, 영주군, 청도군에서도 기록으로 10월 초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봉기가 발생했음이 확인되었으며, 청송군, 영양군, 안동군에서는 봉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 경북 지역에서의 봉기 강도 : 펼치기 / 접기
||① 미발생 : 청송군, 영양군, 안동군
② 저강도(일부 면에서만 봉기 발생) : 영덕군, 상주군, 문경군
③ 중강도(분산적인 봉기/경찰서 소재지에서만 봉기) : 영일군, 김천군
④ 고강도(다수 면에서 봉기했으나 경찰서 접수 실패) : 봉화군, 영주군, 예천군, 청도군, 경산군, 고령군
⑤ 최고강도(경찰서 접수) : 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의성군, 영천군, 경주군 ||

※ 경북 봉기 참여자 수 : 펼치기 / 접기
|| 지역 || 파업 투쟁 || 군중 투쟁 || 계 || 당시 인구 ||
대구부/달성군 30,000 280,000 310,000 404,583
상주군 2,000 20,000 22,000 121,703
의성군 110,000 110,000 179,653
군위군 50,000 50,000 71,588
영천군 1,200 60,000 61,200 155,129
기타 14개 지역 20,000 200,000 220,000 2,246,094
합계 53,000 720,000 773,200 3,178,750

경북 지역에서의 대대적인 봉기는 대체적으로 대구에서 발생한 봉기에서의 조직성과 폭력성을 비슷하게 따라갔다. 하지만 조직성은 일개 군 단위를 넘지 못하고 해당 지역 내에서만 국한되었고, 폭력성도 미군정이나 친일 경찰, 지역 유지 등에 대한 분노에서 유발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일련의 봉기는 그 시작에서 끝까지 일정한 지도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지역 주민들의 주도성이 두드러졌다. 후술하겠지만, 타 지역에서의 봉기도 이와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이런 식으로 터진 봉기는 대다수가 폭력적이었고, 이에 대응하는 경찰 역시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다. 영천에서는 경찰이 체포한 시위대를 생매장시키는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경로당 같은 곳에 모이라"고 해놓고 수류탄을 던져 집단으로 폭사시키는 사건도 벌어졌다. 여기에 우익깡패 조직과 경찰은 복수심에 불타 과거 일제강점기에 경찰관들이 한국인에게 그러했듯이 피검자들에게 물고문과 린치를 가했다. 심지어 '독촉'(독립촉성국민회), 서북청년단 등의 단체는 사건 관련자를 체포하는 데 협력한다는 명목으로 '좌익'으로 의심받는 사람들을 직접 체포, 구타하는 등 사사로운 형벌을 감행했다. 또한 봉기에서 군중들이 경찰, 우익인사, 유지들의 가옥을 공격하고 재산을 약탈한 것처럼, 봉기 이후에는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하여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가옥과 재산이 파괴되고 탈취되었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폭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처벌받았다.

다만 경찰 측의 피해 규모는 당시 지역 주민들의 경찰에 대한 신뢰도나 관할 경찰서장의 임기응변에 따라 크게 줄어드는(동시에 경찰의 보복도 가벼운) 경우가 많았다는 지적이 있다. 고령군에서의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10월 3일 저녁에 고령군 민청본부에 모인 고령군내 민청원 수백 명이 군청을 습격, 접수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당시 고령경찰서장 최이준(崔二俊)은 선수를 치는 대신 서장 자신이 직접 민청 간부와 만나 협상을 시도했다! 이 협상 결과에 불만을 품은 일부 민청원과 군중들이 새벽에 다시 괭이와 낫을 들고 경찰서로 쳐들어온 것을 최이준 서장이 대담하게도[29] 다시 그들과 담판에 나섰다. 그러는 가운데 군중들은 자신들끼리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알력을 벌이다 대구에서 지원경찰이 온다는 소식에 해산, 덕분에 별다른 피해는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왕조 시대 이래로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만큼 우익 및 경찰 세력도 좌익 못지 않게 강했던 안동에서는 10월 3일에 농림학교 교사 8명을 비롯, 공산주의 지도자로 지목된 30명(《대구시보》에는 82명)이 안동 및 영주 경찰에 사전 체포되면서 불상사는 예방되었다고 평가되었다. 문경에서는 지역 유지들이 나서서 경찰 편에서 진압을 돕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문경경찰서장이었던 조준영 경감도 문경 군민들한테는 비교적 "청렴하고 참신한 인물"로 평가를 받아온 사람이라 군내 좌익들의 동태를 파악해 예방조치를 강구한 덕분에 피해가 다소 적었고, 10월 4일에 50여 명의 군중이 군내 산양지서를 습격해 파괴하자 용의자 30명을 검거한 것 외에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다.[30]

3.3. 타 지역에서의 봉기와 진압

파일:대구 10.1 사건 관련 봉기 발생지역.png
대구 10.1 사건 관련 봉기 발생지역 지도

그러나 잔혹한 유혈진압의 결과는 억눌린 민심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대구 지역에서 시작된 무장봉기는 11월 중순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들을 흔들어 놓았다. 시위가 확산되자 군과 경찰은 전국적으로 유혈진압을 벌였으며, 그 결과 민간인 1,000여 명과 경찰 200여 명이 사망했다.

4. 결과

파일:external/www.imaeil.com/201005_img05.jpg
※ 대구 지역 피살자 명단 : 펼치기 / 접기
||<-8> 대구 지역 피살자 명단[31] ||
# 성명 나이 직업 # 성명 나이 직업
1 우만두 35 형사 18 김용태 27 노동
2 정순이 71 무직 19 ○태석 24 노동
3 이구준 30 순경 20 신일봉 26 목공업
4 김학도 55 상업 21 박영호 24 조해(朝海) 직원
5 홍명수 47 기자 22 배정현 25 순경
6 이상익 46 노동 23 박돈생 24 운수 서기
7 윤상탕 35 경감 24 문석출 23 조해(朝海) 인부
8 심낙원 45 무직 25 석남도 33 형사
9 박종우 26 형사 26 김득성 63 무직
10 김용준 42 식량배급소 27 박도문 23 부서기
11 추홍엽 40 노동 28 이영대 46 형사
12 박성호 22 ○회 간사 29 남효군 39 경위
13 장용현 38 노동 30 이철연 20 행상업
14 변익진 37 기재 착오 31 황팔봉 19 양복업
15 권인택 32 철공 32 서철군 17 역기관구원
16 이성윤 29 철공 33 조청덕 ? 관리
17 정종식 23 순경 이상익과 김용태는 10월 1일에 사망

※ 대구경북 지역 경찰 사망자 명단 : 펼치기 / 접기
||<-12> 대구경북 지역 경찰 사망자 명단[32][33] ||
# 직책 이름 나이 # 직책 이름 나이 # 직책 이름 나이
1 감찰관 장석한 52 16 경사 권상봉 23 31 경사 박대업 30
2 경감 이지동 35 17 김정출 33 32 박종우 26
3 김경원 35 18 김상수 25 33 유영곤 25
4 박용식 52 19 김상무 25 34 권태옥 28
5 남효근 41 20 이만수 27 35 ○광수 23
6 경위 최인○ 44 21 최석태 25 36 최영석 26
7 송완철 42 22 석남도 27 37 손광헌 25
8 김명수 32 23 배정현 25 38 박현진 26
9 김보삼 32 24 정종식 23 39 장수용 25
10 김운목 42 25 이구준 30 40 박을술 31
11 이○우 27 26 우만두 34 41 김덕우 26
12 ○팽조 36 27 오갑술 23 42 장수현 29
13 최중수 32 28 구완 27 43 장상덕 24
14 ○○대 43 29 조청덕 26 44 ○종덕 27
15 김중하 34 30 고중욱 25 45 권영화 28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사망자가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으로 발표되었고, 부상자는 공무원 133명에 민간인 129명으로 전체 262명으로 집계되었다.[34] 재산피해로는 경북에서만 관청 4채와 일반건물 6채가 전소되었고, 관청 240채와 일반건물 526채가 파괴 및 파손되었다. 게다가 이 일과 관련하여 체포된 사람은 경북에서만 7,400여 명에 달했다. 한편,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은 민간 측 피해액이 2억 2,000만 원, 경찰측 피해액이 1억 2,000만 원, 기타 피해액이 1,600만 원이라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결성된 10.1 사건 대책위원회에서는 가장 격렬한 폭동이 발생한 영천군에서만 피해액이 10억이 넘는다고 발표하였다.

사건의 주된 피해자는 봉기에 참여했거나 그러한 혐의를 받는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은 경찰의 진압작전과 보복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항쟁의 강도가 격렬할수록 죽거나 다친 사람들 또한 많았다. 죽은 사람들은 다양한 출신성분과 나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노동자가 많았다.[35] 한편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게 탄압을 받은 사람들은 향후 교도소에서 형을 살거나, 입산을 하기도 했다.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석방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6.25 전쟁 당시 좌익수로 몰려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서 살해되었고, 입산자들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사로잡히거나 토벌당했다.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는 경찰이었다. 경찰은 대구경북에서만 4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사건이 진행되는 내내 폭력사태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고 살해되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사건 이후인 1946년 11월 30일에는 대구에서 순직경찰 60명을 추모하는 '남조선순직경찰관합동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경찰과 가까운 경찰 가족, 우익 인사, 지역 유지들도 사태에 연루되어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는 경찰들의 보복과 연결되어 숱한 민간인 피해로 연결되었다.

5. 당시 정치권 반응

이 사건이 터졌을 때 당시 정치권에서도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10월 인민항쟁'으로 부르며 "동학농민운동,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우익 세력 위주의 한민당은 '이 사건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이는 한민당의 주도 세력 중에 지주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익 세력에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이영이나 정백 등 반(反) 박헌영 세력 공산주의자들은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김규식여운형좌우합작 세력에서는 '미군정의 정책이 옳지 못한 데 인민항쟁의 주요 원인'이라면서 군정청 사령관을 격렬하게 규탄했지만, 동시에 '폭력으로 혼란을 일으킨 원흉은 조선공산당'이라면서 역시 조선공산당을 대차게 비난했다. 김규식은 '이러한 행동들은 국제적으로 조선 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며 자제를 촉구했다.

수도경찰청에서 근무했던 최능진은 "이 사건이 조선공산당에 의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이러한 사태를 제공한 1차적 원인과 원흉은 우리 경찰에게도 1차적 책임이 있다!"며 조병옥을 겨냥해서 격렬하게 비난[36]하였고, 군정경찰로 재고용된 친일파 출신들을 질타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친일 간부들의 등쌀에 광탈하고 만다.

6. 폭동인가 항쟁인가

"나는 이튿날 아침까지 경찰이 민중들 손에 맞아 죽었다 어떻다 하는 거 몰랐어. 사실이여. 경찰에 뭔가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상황이 그래 되니까 달라 들어가 돌로 막 때리죽이고 했는데. 그 때 공산당 지령으로 그랬다 카는데 그런 지령은 없었어.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이지.
이종하[37]의 증언, 2003년 7월 4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보통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당시 활동했던 '좌익세력'의 급진성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을 '좌익이 사주한 폭동'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사건을 설명할 때, 당시 조선공산당의 급진성과 항쟁 과정에서 일어난 민중의 폭력성에 초점을 둔다. 이러한 관점은 사건이 일어난 사회,경제적 원인을 무시하고 좌익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에 맞서 사건을 항쟁, 민란, 추수봉기 등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사건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함께 민중의 자발성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사건을 설명할 때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등 급진적 노선이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10월 항쟁>, 김상숙, 돌베게 p15~16
이 사건을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직접 지휘한 폭동'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이 사건에 조선공산당이 개입한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의 지령은 9월 총파업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미군정과의 항쟁을 결의하면서도 아직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수단인 노동계급의 파업만 설정했을 뿐 무력투쟁은 상정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얘기다. 공산당 계열(정확히는 10.1사건 때는 조선공산당이었고 이후 4.3사건 때는 남로당)이 무력투쟁, 봉기를 일으키고 선동하기 시작한 것은 남한내 단독정부 수립이 거의 확실시 되었을 무렵부터다. 그 총파업을 지휘했던 박헌영은 '10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군정청의 체포령을 피해 영구차 관속에 들어가 비밀리에 북조선으로 월북을 하게 된다. 이것만 봐도 공산당이 10.1 사건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한다는건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설령, 공산당에서 주도한 좌익폭동이라 하더라도 당시 남한을 지배하던 미군정은 폭발할 대로 폭발한 민심을 뒷수습할 역할이나 역량이 되지 못했다. 애초에 초기부터 빠른 대처를 했다면 이런 봉기가 전국적으로 퍼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공산당의 선동과 좌익폭동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단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이 집약되고 폭발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공산당과 좌익세력이 일으킨 9월 총파업 및 선동이 기폭제가 되었을 순 있지만 이러한 폭발적인 봉기가 일어난 계기는 다른 곳에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군중집회가 그러하듯이 시민이 경찰에 살해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좌익 지도부의 의도적 지시와는 무관한 집단행동의 자체의 논리에 따라 움직였음은 틀림없는 부분이다. 파업 당시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우익세력에 대한 분노보단 자신들을 억압하는 경찰에 대한 분노로 크게 집결되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조선공산당원과 공산주의자들이 이 사건에서 참여하기도 했으나 그것이 조선공산당 중앙의 조직적 지령이나 지휘의 개입을 증거하는 것은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사례는 미군정기 조선만 그런것이 아니라, 세계사에 무수히 일어난 대부분의 민중봉기들은 자신들이 승리하여 정권을 탈취한다는 보장 같은 것 없이도 오직 생존권을 위해 혹은 비인간적인 현실에 저항해 생명을 걸고 일어난 것들이었다. 이 사건이 진짜로 터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지배층을 제대로 가려내지 않은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정책,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무차별적인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 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된 민중들의 분노이다. 특히 경찰의 희생을 불러온 친일파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 기록이나 영국 총영사의 보고서에서도 일제 경찰에 봉사했다가 미군정청의 사주를 받은 부류에 대한 한국인 일반의 분노가 대단했다고 내용이 적혀있다. 오죽했으면, 경상도 출신의 한 지식인은 앨버트 웨드마이어 특사에게 "친일 경찰을 제거해주면 한국인은 모두 공산주의를 반대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쓸 정도였다.[38]

다만 이해의 차원을 넘어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경찰학살까지 미화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당시의 경찰이 친일을 비롯한 여러가지 짓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더고 하던들, 경찰을 끔찍하게 학살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자위권 발동을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한 폭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감정적인 처사에 가깝다. 경찰들이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정당방위의 영역을 넘어선 무질서한 경찰학살까지 무작정 옹호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인명 피해의 시작은 경찰의 발포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후 일어난 인명 피해의 원인이란 책임을 벗기는 힘들다.

7. 문화에서의 대구 10.1 사건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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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결성된 이 단체는 이 사건과 관련된 유일한 단체로 회장은 독립운동가 채충식의 손녀 채영희이다.[45]

9. 자료

10. 관련 문서



[1] 9월 총파업이라고 부른다. 1946년 9월 23일, 부산부에서 8천여 명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주요 산업의 노동자 약 25만 명이 파업에 합세했던 사건이다. 이 총파업에는 조선공산당이 '신전술' 차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2] 이 사건에 조선공산당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좌익들이 사주한 무장 폭동' 등으로 인식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긴 세월 동안 언급이 금기시되었고, 또한 박정희는 대구 10.1 사건 당시 자신의 친형 박상희가 경찰에게 살해당하여 스스로 남로당에 가담했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한동안 이 사건에 대해 재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3] 웃긴 건 평양은 정반대였다는 점이다. 해방과 분단 이후에는 한반도 사회주의의 총본산이 된 곳이지만 일제강점기 당시만 해도 평양은 한반도에서 제일 기독교 및 선교 활동이 적극적으로 벌어졌던 곳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기독교 신자가 가장 많았던 지역 역시 평안도였다.[4] 일본도 1920년대 당시 사회주의 열풍이 불었던 곳들 중 하나로, 대공황으로 인해 군부가 폭주하기 전까지 한반도 좌익계열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5] 특히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그나마 일제가 만들어놓은 물류시스템마저 대부분 마비됐다는 것이다.[6] 보리 공출이 뭐 그렇게 대수냐 할 수 있는데, 이 초여름 보리로 사람들은 가을 추수 전까지 버텨야 한다. 즉 이 보리마저 없으면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다. 흔히들 아는 보릿고개 역시도 전년도 가을에 수확한 쌀이 떨어져서 보리를 수확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의미한다. 즉 보릿고개는 사실상 보리 수확을 바라보며 견디는 건데 그 보리마저 없으면 가을 수확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 기간만 몇 달인지라 보리까지 거둬간다는 건 그냥 굶어죽으란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7] 이 모든 원인은 미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의 무능에 있다. 거기다가 하지 자신도 조금 운이 없어서 앉혀진 사람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하지의 무능이 워낙 상상 이상이라 국내의 우익 인사들조차 하지를 영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능하지만 좋은 사람이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한국인들 입장에선 어그로가 끌릴 소리나 잔뜩 했다.[8] 이 콜레라의 피해는 제주 역시 심각했는데, 이는 4.3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9] 콜레라는 전염성이 매우 높은 질병이다. 그러니 광복 직후 한국이나 아프리카 빈국처럼 기반시설이 빈약한 나라는 콜레라 같은 고전염성 질병에 취약했다. 물론 기반시설이 탄탄한 선진국이라고 다르지 않은 편이다. 미국에서도 1993년, 남서부 지역에서 한타바이러스가 출몰하자 발병 중심지로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였다. 중국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창궐 했을 때 우한을 봉쇄한 것이랑 비슷하다.[10] 이를 눈치챈 회사에서 풀에 섬유를 발랐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은 풀을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11] 하지만 이런 시위에 대한 행정당국의 대응은 한심한 수준이었다.[12] 당시 부산의 지역신문[13] 9월 총파업은 부산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구 10월 사건은 단순히 대구 지역에만 한정된 게 아닌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된 엄청난 유혈사태였다.[14] 중구 중앙로 일대를 지칭하던 옛 지명[15] 現 대구콘서트하우스[16] 경북도청은 1601년 경상감영이 현재의 경상감영공원자리에 위치하게 된 이래로 1966년 산격동(現 시청 산격청사)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한 자리에 있었다.[17] 당시 시위 참여자 최석채의 회고에 따르면, 오후 5시 즈음, '전매국 노조 지원 시민궐기대회'가 열려서 2시간 후인 7시 즈음 경찰이 무허가 집회라며 해산시키며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대치 상태가 발생했다고 한다.[18] 이 때 죽은 두 사람의 신원이 김용태와 대팔연탄 노동자 '황말용'이라고 알려져 왔다. 허나 김용태는 실제 사망자 명단에 있지만 황말용은 사망자 명단에 없고, 황말용과 이름이 비슷한 사람으로 '황팔봉'이라는 자가 있긴 하나 그의 직업은 양복업이라고 한다. 황말용에 대한 정보는 대구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가였던 이일재의 증언에서 처음 나온 것인데 아마 기억에 혼선이 있었던 것 같다.[19] 일부 인사들은 당시 군중들은 탈취한 재물을 나눠가졌고 이는 민중봉기의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이는 미덕이라고 포장되었을 뿐 다른 이의 물건을 약탈해 나눈 것뿐이라고 사람에 따라 비판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단순히 미덕이라고 보기엔 약탈당한 입장에서는 너무 참혹했다. 참고로,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진주했을때 조금이라도 땅이 있던 집안들이 이런 식으로 풍비박산이 났다.[20] 당시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들을 휘뚜루마뚜루 살해할 정도로 매우 살벌했다고 한다. 이들은 경찰의 얼굴과 몸뚱이를 도끼로 난자하였으며 손을 등 뒤로 묶어 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날카로운 돌을 던졌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경찰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이다가 폭발한 군중들은 죽창, , 곤봉으로 무장하여 경찰을 살해하였으며, 심지어 '확인 타살'을 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더욱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앞장 선 깡패양아치 등 부랑자들의 무분별한 폭력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21] 앞서 언급했듯이, 군정경찰은 애꿏은 농민들 상대로 '공출'을 명목으로 사실상 강탈에 가까운 날강도 짓을 너무 많이 저질러 왔다.[22] 이 일 때문에 사건 이후 몇몇 의사들은 겨우 살아난 경찰관들에 의해서 모진 핍박을 당했다고 한다.[23] 친일 전력경찰들이 미군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 친일경력 경찰들의 폭거가 대구 사건의 큰 이유였음에 비추어 봐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고 또한 그 당시 실제 경찰들은 발포를 하기도 했었다. 해당 기사를 보면 시위대의 주장에 따르면 "왜놈순사들이 어찌 우리를!!"이라는 구호까지 외쳤을 정도다.[24] 이는 천안문 6.4 항쟁 당시 베이징에 주둔하는 부대 대신 선양군구의 인민해방군이 투입된 것과 유사하다.[25] 지금의 달성군은 대구광역시에 포함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대구와는 별개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지역의 특성상 대구와 함께 다뤄지는 일이 많았고, 이 사건을 다룬 사료들조차도 대구와 달성군을 한 데 묶어 설명하곤 한다. 사실 달성군을 관할하는 경찰서인 '달성경찰서'가 '대구경찰서'에서 분리된 것은 대구 10.1 사건이 터지기 한 달 전이었다. 심지어 분리된 달성경찰서조차도 대구부 관할지역 내에 있었다.(...)[26]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들이 대구 지역의 시위를 진압하고자 응원경찰로 나갔기 때문에 경찰서 점령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27] 1946년 9월 1일 제4대 칠곡경찰서장에 취임했으나 1946년 10월 4일 피살되었다.[28] 이태수 군수 유가족의 사연이 83년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1000번째 상봉 가족으로 소개되었다. 5남매 중 막내 딸 이송자씨가 다른 집에 수양딸로 보내져서 헤어졌는데, 끌려가는 아버지와 자식들을 부여잡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서로가 자매임을 확신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해당 영상[29] 당시 고령경찰서에는 10월 1일의 대구에서의 소요 진압에 경관 15명이 투입되고 그 밖에 피신한 경관 몇몇을 제외하면 남은 경찰은 8명뿐이었다. 미곡수집령에 대한 저항이 매우 심했던 왜관(칠곡)에서 주민들이 당시 경찰서장 장석한의 얼굴을 난도질하고 머리부터 밑으로 갈라 죽였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대담하다는 말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30] 출처: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31] 1946년 11월 13일 대구부 후생과에서 발표한 자료로 33명의 명단이 14일자 「대구시보」에 실렸다.[32] 대구시보 1946년 11월 30일자[33] 다만 위에 나와 있는 경찰 사망자 신원을 아래 나와 있는 경찰 사망자 신원을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다.[34]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발표수치지 미신고한 사람이 많으므로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더 컸다.[35] 부상자들과 구속자들도 사망자들과 비슷한 빈도를 보였다.[36] 이때 조병옥이 최능진에게 '그들은 pro-jap(친일파)이 아닌 pro-job(전직)'이라고 맞대응했다. 이 장면은 훗날 드라마 반민특위에서 비중있게 재현되었다.[37] 이종하는 1946년 10월 1일 당시 시위대 대표단의 대표격으로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고, 대구경찰서에서 미군 장교들과 회담을 하기도 하였다.[38] 방선주 <한반도에 있어서의 미,소 군정의 비교>, 강인철 외 <미군정기 한국의 사회 변동과 사회사1, 한림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p49[39] 10월 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정권의 사면 약속을 믿고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당시 집단학살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지역이 경상도 지역이었을 정도로 그 피해가 매우 심각했다.[40] PK는 TK와는 다르게 부마항쟁 진상규명이 활발하다.[41] 이는 TK 지역의 보수화 때문이기도 하다. 대구지역은 이 사건과 인민혁명당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겪으면서 진보 트라우마를 겪게 되었고 이후 11명의 대통령 중 5명이 TK출신이 되면서 정치권력의 본산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전통적인 보수지역이 되어갔다.#[42] 이 둘은 이 사건 이후 발생한 제주 4.3 사건의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결국 경찰 병력은 물론이고 이북 출신 깡패들이 모여서 결성한 단체인 서북청년회까지 동원되었다.[43] 사실 이남의 미군정이나 이북의 소군정 둘 다 민간인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줬다. 소련군의 한반도 입성 당시 소련 군인들이 북한 주민들에게서 시계, 금반지 같은 귀금속을 강탈하고 부녀자강간하는 등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소련군 눈에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둘 다 똑같은 패전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정 책임자로 파견된 테렌티 시티코프 중장은 한반도의 사정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으나, 초기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별로 아는 바도 없었고 범죄를 저지르는 군인들에 대해서 즉결 처형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뒤늦은 조치일 뿐이었다. 게다가 소련은 주둔 초기 식량을 아예 공출에 의존했고 일부는 소련에 보내기까지 했으며 북한의 산업시설을 통째로 뜯어가기까지 한 터라 민생에 끼친 폐해가 미군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다.[44] 소련군 같은 약탈은 없었지만 하지를 위시한 미군정 역시 남한을 깔보긴 마찬가지였다. 전후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크게 경계하고 있던 미군정은 남한 각 지역에 생겼던 지방 인민위원회는 당연히 무시해 버렸고 부일 세력 등용을 자제하라는 국무부의 권고도 거부했다. 또 현지 문화나 사정에 신경을 쓰지 않아 사건을 크게 키우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미국놈을 믿지말고 소련놈에 속지말라."는 구호가 나돌기도 했다.[45] 채충식의 아들이자 채영희의 아버지인 채병기는 대구의 빈민촌에서 기아시위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이후 대구 10.1 사건에 관련되어 수배당했으며 6.25 발발 직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살해됐다.[46] 『시카고 선(Chicago Sun)의 기자인 마크 게인(Mark Gayn, 1902~1981)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쓴 <일본일기(Japan Diary)>라는 책에서 한국 관련 부분만 번역하여 나온 책이다. 마크 게인은 1946년 10얼 15일 한국을 방문하여 11월 8일까지 체류하며 존 하지, 김규식, 이승만, 김원봉 등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을 만났었다. 또한 서울, 개성, 대구 등을 다녀가며 10월 항쟁의 흔적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편 친일경찰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도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