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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4 06:31:24

9월 총파업

파일:동아일보 1946년 9월 25일자.png
식량, 대우문제로 전종업원농성 / 해사국에서 긴급대책회의를 개최
남조선철도총파업단행(南朝鮮鐵道總罷業斷行)
"파업은 불법이다. 요구조건에 여유 줌이 타당" - 군정장관
1. 개요2. 배경3. 전개 과정4. 영향5. 둘러보기

1. 개요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선공산당 등 좌익 성향의 노동단체 및 사회주의 성향 단체들이 미군정의 탄압에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벌인 미군정기 최대의 총파업.

2. 배경

전평의 신전술 채택은 8월 23일 "현하에 있어서의 스트라이크 전략의 문제-조선 노동 운동 당면의 제 문제, 특히 2, 3의 우익적 편향에 대하여"라는 노선 전환의 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장문의 문서는 앞의 파업과 태업 전술을 우익적 편향으로 비판하고, "태업, 파업, 시위운동 이외에 어떠한 투쟁 형태가 있단 말이냐! 그리고 또한 그와 같은 운동을 직장 내에서 하지 않고 어데서 해야 되느냐!"라고 반문하였다. 이 문서는 파업을 회피하는 것은 무장 해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노동자는 투쟁을 통해서 투쟁의 과정에서 교육되고 훈련되고 성장하는 것이며, 이상적인 상당한 준비가 없었다 할지라도 투쟁을 전개할 때에는 소여의 조건 하에서는 전력을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서는 판가리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아가, "실로 스트라이크는 그 전부가 '판가리 싸움'이며 조건 여하에 의해서는 '결정적 승리를 전취'할 수도 있으며…승리냐, 패배냐 하는 판가리 싸움은 '타협'을 전제로 하지 않고 적을 '굴복'시킬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하였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447~448p, 서중석, 역사비평사, 1991
미군정 초에 조선공산당은 합법정당으로 미군정에 협조하는 전략을 취했다.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미군정은 점차 좌익에 대한 탄압과 검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은 압수 수색을 받은 뒤 입주해 있던 건물에서 쫓겨났다. 공산당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좌익 성향의 신문들은 정간되거나 폐간되었으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의 좌익 단체들이 조사를 받았고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매우 어려워졌다. 미군정의 이러한 행태에 좌익은 위험을 느꼈다.

그 대응으로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들어서 신전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정했다. 이것은 '정당방위(正當防衛)의 역공세'라는 미군정에 대한 적극적인 대중투쟁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대대적인 파업을 준비하였다.[1] 10월에 예정된 파업은 9월 달 들어 조선공산당 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9월로 당겨졌다.

대중이 느끼는 미군정에 대한 불만도 팽배했다. 일단 경제 문제가 심각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으나 그에 대비한 임금 인상률은 턱없이 부족했다. 미군정의 미곡수집 정책은 여기에 일조하여 전국적인 식량 부족을 야기시켰다. 노동자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 대한노총[2]의 개입, 회사의 방해 등에 불만을 가졌다. 이런 불만들은 노동자와 대중이 미군정을 향한 좌익의 투쟁에 참가하는 동인이 되었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본래 우익과 갈등했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불거진 신탁통치 논쟁으로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다.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한 반면 우익은 신탁통치 결사반대라고 외쳤다.

3. 전개 과정

파일:총파업선언서.jpg
『전국노동자신문』(전평의 기관지) 1946년 11월 22일자에 실린 총파업선언서
우리 4만 철도종업원은 우리 철도가 또다시 어느 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와 침략의 무기가 되게 함이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독립과 부강의 무기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 참다 못하여 총파업에 들어갔다. 쌀 두 말 값의 월급과 강냉이죽으로 연명하여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 의존하여 국내 생산을 축멸시키고 종업원의 대량해고 감원까지 착착 진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20만의 가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단연 파업으로써 무성의한 당국자의 반성을 촉하기로 하였다. 파업은 파괴가 아니다. 우리들의 요구는 정당하고 건설적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철도 총파업 성명서
1.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1. 물가등귀에 따라서 임금을 인상하라.
1. 전재민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1. 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1.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1. 일체 반동 테러 배격.
1.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1. 민주주의 운동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1.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자를 즉각 석방하라.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1.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 중인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의 총파업 선언
파업 직전인 9월 중순 서울 철도국 경성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저임금 등에 반발하여 회사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이행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미군정 운수부장은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이다"라는 망언을 일삼았다. 분노한 철도 노동자들은 수습에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1946년 9월 23일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 날 부산철도공장에서 7천여 명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곧이어 서울의 철도 노동자들도 동조 파업에 들어갔고 전국적으로 4만여 명의 철도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았다. 남한의 철도는 곧장 마비 상태가 되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꽤 척박했기 때문에 이 파업에는 대한노총의 노동자들도 같이 참여하였다.[3] 9월 24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남조선 총파업회원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총파업선언서를 발표하여 식량 배급, 임금 인상, 노동자의 권리 보장, 백색테러 반대, 구속자 석방, 좌익 탄압 중지 등의 12개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9월 24일부터는 서울 지역의 회사와 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고 9월 25일 오후 4시에는 경성출판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가 신문 발행이 중단됐다.[4] 28일에는 중앙전신전화국이, 10월 1일에는 우체국과 경성전기주식회사가, 10월 3일에는 부산전신국이 각각 파업에 들어갔다. 대구에서도 총파업이 일어나 9월 24일 철도 노동자들이, 9월 26일 대구 우편국원 노동자들이 각각 파업했다. 여기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소속의 노동조합이 위치한 공장까지 전부 파업에 들어가면서 근 10일 동안 남한 산업의 많은 부문이 마비됐다. 서울에서만 공장 295개, 노동자 3만여 명, 사무원 6천여 명, 20개 학교, 학생 1만 6천여 명, 교수 3백여 명이 참여했고, 지방에서는 5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 총파업은 '신전술'에 의거하여 급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본래 거행되기로 했던 파업 순서도 뒤죽박죽이었고 철도노조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파업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파업에서 보여주었던 지도력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거대한 크기의 파업이나 조직적 대중운동이 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5] 여기에 미군정과 우익 세력의 극렬한 탄압에 가미되어 총파업은 결국 분쇄되고 말았다.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 청년단체들은 폭력을 휘두르며 "전쟁하듯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짓밟았다. 특히 김두한이 이끌던 대한민주청년동맹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경찰과 함께 서울에서 농성을 하던 노동자 1400여 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2명의 사망자를 냈다.[6] 결국 10월 초에 들어 파업의 동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어 파업은 끝내 와해되었다.

4. 영향

9월 총파업 와중에 대형사고가 터졌는데 그것이 바로 대구 10.1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총파업의 여파는 그 해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일은 결국 조선공산당과 좌익의 힘을 더욱 약화시키는 운동이 되었다. 미군정과 우익은 이 사건들을 계기로 좌익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속화하고 정당화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공산당이 약화되자 좌익 정당들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을 만들었는데 합당 과정에서 오히려 좌익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여운형이 이끌던 중도 좌익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좌우합작운동을 좌익 분열로 여겨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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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1946년 7월 이전만 하더라도 미군정의 노동정책에 대해서 수세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조선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조선공산당의 변경된 노선을 선뜻 따라갔다.[2]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기원이 되는 단체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대응하여 만들어졌다.[3] 물론 이들은 뒤에 이어진 탄압으로 광탈했지만.[4] 신문은 10월 2일에야 다시 발행된다.[5] 이는 9월 총파업 도중에 발생하여 1946년의 연말을 뒤흔든 대구 10.1 사건에서 재현되었다.[6] 김두한은 이 진압작전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자신의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에서 이 사건을 언급했다. 그는 농성을 진압하러 가면서 두려움을 줄이고자 스스로와 대한민주청년동맹원들에게 술을 먹인 후 농성을 진압했으며 2천여 명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소속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주동자가 나오지 않으면 개솔린을 뿌리고 기관총을 들이대어 쏴 죽이겠다며 위협했다. 여기에 두려움을 먹은 주동자 8명이 나오자 그는 부하들과 함께 그들을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하수구에 빠뜨려 시멘트로 공구리했다고 한다. 이 일로 미군정에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고... 나중에 장택상한테 "김두한 동지! 당신이 나라를 구했소."라고 칭찬까지 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대부분이 허풍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이 총파업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증언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