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재수사 당시 단성사 저격 사건에 대해 증언하는 김동진. 뒤에는 이정재가 앉아 있다.
1. 개요
1955년 1월 29일 서울에 있는 극장인 단성사에서 동대문파의 이석재가 같은 조직이었으나 정치 암살 명단을 폭로한 김동진을 백주대낮에 총으로 저격한 사건.2. 설명
당시 동대문파는 두목인 이정재가 자유당의 감찰차장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시장에서 보호세나 걷던 일개 조폭이 아닌 자유당이란 든든한 뒷배를 갖춘 정치깡패 집단이었다. 이 상황에서 동대문파는 비밀리에 이기붕에게 지령을 받게 되는데 바로 신익희, 조봉암을 비롯해 야당의 주요 인사들의 암살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계획들이 하나씩 진행되던 시기[1]였기에 이승만 그리고 자유당에 반대하던 재야 인사들을 제거함으로서 야당의 구심점을 제거하는게 목표였던 것이다.당시 암살 대상이던 인물은 무려 40명이나 되었으며 이정재는 이 목록을 부하였던 김동진에게 전달하며 암살을 맡겼다. 그러나 김동진은 도리어 이정재를 배신하고 이 살생부를 언론에 폭로해버린다. 이후 김동진은 동대문파의 보복을 피해 잠적했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기위해 1월 29일 종로구에 있던 단성사란 영화관을 찾아간다.[2]
그러나 김동진이 영화를 즐겨본다는 것을 잘 알고있던 동대문파에선 서울 전 지역의 영화관을 샅샅이 뒤져 김동진을 찾아낸다. 이는 동대문파의 2인자가 당대 영화 업계의 거물이던 임화수였던 점이 정보를 모으기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영화가 끝난 후 단성사를 나온 김동진은 극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석재에게 권총으로 저격당해 중상을 입는다.
백주대낮에 이 정신나간 암살을 시도한 이석재는 곧바로 구속되었고 검찰은 이 사건의 배후에 있던 이정재도 살인교사죄로 구속하려 했지만 동대문파의 뒷배였던 경무대경찰서장인 곽영주와 자유당의 방해로 인해 새로운 검사로 교체되면서 이정재는 다시 석방되었으며 이석재만 구속기소되었다. 또한 이석재도 얼마 안가 석방되면서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게 되었다.
한편, 피해자였던 김동진은 저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후 조직폭력배를 그만 두면서 떠났고 개인 사업을 운영하면서 살게 된다. 그 덕분에 김동진은 훗날 5.16 군사정변 이후 일어난 혁명재판 때 이정재, 임화수 등 자유당과 유착했던 정치깡패들이 처형되거나 몰락했을 때 목숨을 건지게 된다.
3. 대중매체에서
3.1. 무풍지대
김동진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하면서 이석재는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 자리에서 쏴죽였다고 법정에서 진술한다. 즉 죽이려고 급소를 쐈는데 빗나가서 치명상에 그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일부러 급소를 빗겨가게 겨눴다는 주장이다. 판사가 뭘 그리 자신하느냐는 질문에 이석재는 그만큼 나는 총을 잘 쏜다며 시범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이 보는 앞에서 담배 3개비를 세워두고 멀리서 총을 3발 쏴서 죄다 맞추지만 그래도 일급 살인죄 미수로 징역형을 산다고 나온다.3.2. 야인시대
야인시대의 작중 사건 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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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란을 일으킨 김동진이 거의 진압되어 잠적하기는 했으나 이정재는 배신자인 김동진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고 휘하 간부들을 시켜 김동진을 찾아내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김기홍은 앞일을 예견해 지금 상황이 좋지 않고 세간이 주목하고 있으니 나중으로 미뤄야한다고 조언했으나 조열승과 임화수, 이석재 등이 지금 김동진을 감싸는 거냐며 따지고 들어 김기홍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김동진을 노리게 된다.
그러나 김동진은 너무나 철저하게 잠적해 버려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임화수는 김동진이 영화, 그것도 서부극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단성사에서 멀쩡히 상영 중인 다른 영화들을 죄다 내려 버리고 서부극 "OK 목장의 결투"[5]와 "형제는 용감하였다."의 상영을 지시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1955년에 발생했기 때문에 1957년에 첫 개봉한 OK 목장의 결투가 나올 수 없다. 단성사 저격 사건 당시 실제로 개봉한 서부극은 타이론 파워, 수잔 헤이워드 주연의 '황야의 역마차'다.
은신처에 숨어 있던 김동진은 신문을 보며 "OK목장의 결투와 형제는 용감하였다라... OK목장의 결투는 왠지 뻔한 결말이 나올 것 같고... 그래! 형제는 용감하였다가 좋을 것 같군."이라는 대사를 한다. 독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동진은 자신만만하게 단성사로 영화를 보러 간다. 당시 영화를 보러 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영숙은 화를 냈다. 처음엔 권상사가 단성사에 나타난 김동진을 쏘려고 했지만 사람을 쏴 본 적이 없어서 못 하고[6] 대신 이석재가 와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김동진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쏴버린다.
그러나 김기홍의 예견대로[7]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 매스컴을 탄다. 담당검사 김윤도(이지형 扮)[8]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집요하게 수사하고 이석재는 살인미수죄, 이정재는 살인 교사죄로 구속된다.
하지만 곽영주는 내무부장관을 압박해 김동진이 넘긴 정치 암살의 증거물을 빼돌리는 동시에 좀 두고 보자며 관련되길 꺼리는 이기붕에게 이승만이 이기붕의 건강 문제를 염려하고 있고[9]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시는데 아무 말 안할테니 혼자 알아서 잘해 보시라며 은연 중에 압력을 가한다. 이기붕 입장에서는 이승만의 의중도 고려해야 하는데다, 이정재가 없으면 당장 자신이 써먹을 해결사가 없어지는 탓에 결국 곽영주 말대로 전화를 주긴 한다. 곽영주는 권력을 한껏 이용한 압박으로 김윤도를 좌천시키고 담당검사를 교체해 이정재를 풀려나게 한다. 한편 현행범인 이석재는 무풍지대에서처럼 담배 3개비를 3발로 모두 맞추며 맘 먹고 죽이려면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 동안 구속 기소되었다가 곽영주 덕에 병보석을 이유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검사인 김윤도는 윗선의 권위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검사를 사직한다. 사직서를 던지기 이전에 검사장으로부터 자네는 너무 젊고 이 세상의 이치를 모른다는 말을 듣자 "충성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개처럼 사십시오. 주인을 위해서 평생 짖다가 결국엔 잡혀먹고 마는 개 말입니다. 수고하십시오." 라고 독설을 날리고. 퇴장하기 직전에 "좋다..! 이 더러운 개장을 벗어나니까 좋다, 정말 좋아! 하하하하! 들어라 이 똥개들아!! 열심히 충성하고 계속 짖다가 허망하게 죽을 똥개들아! 권불십년이라고 했다. 그걸 왜 몰라!!" 라고 정면을 향해 일갈하며 퇴장한다. 그 말을 들은 고검장은 괴로운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정면의 카메라를 보고 소리치는 장면인지라 고검장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위정자들에게 내뱉는 일갈로 보인다.[10]
김동진은 백병원에 실려가 수술 끝에 목숨을 건지고 유지광의 제안에 따라 패배를 인정하고 주먹계를 떠난다. 그렇게 이정재와 김동진의 대결에서 이정재가 승리했지만 단성사 저격 사건은 나중에 혁명재판에서 재수사되어 이정재의 발목을 잡은 반면 김동진은 엄연히 이정재의 행동대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음에도 이 사건 덕분에 체포 자체가 되지 않는다. 야인시대에서는 김동진이 주먹계를 떠난 이후의 생애를 나레이션으로 설명한다.
[1]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이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약 두달 전 일(11월 29일)이었다.[2] 현재는 단성골드주얼리센터라는 귀금속 매장이 되었으며 후술하겠지만 이때 방영된 영화는 '황야의 역마차'라는 서부극이었다.[3] 그리고 96~98회까지 시라소니 린치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4] 109화에서 시라소니와 이석재가 만났을 때 시라소니가 한 대사[5] 무법자가 이길 것 같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 약간의 웃음 포인트[6] 이정재나 임화수는 겁쟁이라고 질책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여럿 쏴 죽여 본 적이 있는 이석재는 처음은 다 그런거라며 자신도 그랬다고 두둔해 준다.[7] 실제로 김기홍은 이 이전에 이정재와 결별하였는데 경향신문 1955년 2월 2일자 2면에 따르면 이정재가 김동진 등에게 암살을 사주한 제3세력 명단에 김기홍이 있었다. 그 외에도 조병옥, 신익희, 장택상 등의 정치인부터 안두희 같은 암살범, 김두한, 조희창(상하이 조), 이화룡 등의 조폭들까지 그 대상이 다양했다.[8] 다큐멘터리에서 증언하길, 이정재가 배후라 자백한 조직원을 폭행한 뒤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식으로 몰아서 사건을 무마했고, 혁명재판에서 이정재가 사형을 선고받을 때 이정재가 자신에게 차라리 그때 징역을 살았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9] 이 말을 할때 이기붕은 약 먹고 있었다.[10] 실제로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십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승만은 하야하며 이기붕은 실각 후 자살하고, 그 밑에서 권세를 누리던 곽영주, 최인규와 그들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던 이정재, 임화수는 혁명재판으로 남김없이 광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