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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마삿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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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학살 이후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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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0월 6일태국의 탐마삿 대학교에서 군부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군인들과 우익단체가 폭력으로 진압한 사건. 동남아시아판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1]

태국에서는 10.6 사건(เหตุการณ์ 6 ตุลา)으로 불린다.

2. 전개

내가 본 것 중 최악의 총격전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취재한 서방 언론인의 증언 출처
파일:backgroundthai.jpg
1973년 10월 14일혁명[2]으로 군부 세력이 물러나고 민주화된 태국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1976년푸미폰 야둔야뎃 국왕은 다시 군부 인사들과 연계를 취했고 1973년에 축출된 군부 독재자 타놈 끼티까촌(ถนอม กิตติขจร, 1911~2004)의 귀환을 격려했다. 이에 반발한 방콕의 탐마삿 대학교에서 진보 내지 좌파 학생들은 1976년 10월 4일에 나콘파톰(Nakhon Pathom)에서 모의 교수형을 특징으로 한 정치적 연극을 수행했는데 당시 연극을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이 연극을 '모욕적'으로 보지 않았지만 바로 다음날에 태국의 우익 언론들이 이 공연 사진을 왜곡해 마치 학생들이 와치랄롱꼰 왕세자[3]를 모의 교수형에 처한 것처럼 왜곡하여 이 연극을 '군주제를 전복하고 태국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적 시도'로 보이게 했다. 이에 자극받은 우익 단체들은 바로 다음날 밤에 이 연극을 주도한 학생들에 린치를 가했다.

1976년 10월 6일 새벽 5시 반 방콕 경찰서장 스리숙 마힌또른뗍(ศรีสุข มหินทรเทพ, 1917~1993)의 발포 명령을 하달받은 태국왕립경찰(ตำรวจแห่งชาติ)과 우익 성향 민병대인 농촌수색대(태국명 룩스아짜오반(ลูกเสือชาวบ้าน)) 단원들은 덤프트럭으로 대학교 정문을 부순 후 공수부대와 국경 순찰대의 협조를 받아 무지비한 진압을 시작했다. 진압측은 비무장 시위대를 몽둥이와 발길질로 폭행하고 M16 소총과 기관총, 무반동 소총, 유탄발사기 등을 발포한 것은 기본에 M79 수류탄을 던지거나 학교 캠퍼스에 박격포나 대전차포로 포격하기도 했으며 남녀 학생 1천여명을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주고 그 과정에서 발길질을 가했다. 그리고 진압측은 시위대를 나무에 매달아 린치를 가해 죽이고 시체를 잔혹하게 훼손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여학생들을 강간하거나 사람에게 휘발유를 붓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가진 물품들은 진압측에게 약탈되었으며 애꿎은 민간인들이 진압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침에 일어난 이 학살은 오전 11시 반에야 종결되었다.

이렇게 단 반나절 동안 현장에서 공식 수치로만 45명(진압측 5명 포함)이 사망했고[4] 16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094명이 구금되었다. 그리고 구금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경찰에게 구타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1명이 옥사하기도 했다. 다만 수감된 이들은 중대한 혐의가 적용된 18명을 제외하면 1주일 뒤 모두 석방되었고 이 18명도 국제적인 압력에 2년 만에 전부 사면되었다.

3. 학살 이후

게다가 시위를 진압한 바로 당일 오후 6시에 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극우 반공 인사인 타닌 끄라이위치안(ธานินทร์ กรัยวิเชียร, 1927~)를 총리에 앉히고 '국왕모독죄'인 형법 112조를 신설하고 정치 활동과 5인 이상의 모든 모임을 금지하면서 태국의 짧은 민주화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5] 그리고 이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처벌은커녕 오히려 '국가, 종교, 왕의 수호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반대로 피해자들은 언론을 통해 '반란군', '잘못 이끌어진 사람들', '폭도', '공산주의자' 등의 모욕을 당했으며 심지어 군부 세력들은 1978년 9월 16일에 제정된 사면법에 따라 사면받았다. 다만 1987년 기준으로 여론은 학생들을 더 동정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덤으로 탐마삿 학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당시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고 심지어 2019년에 프라차타이(Prachatai) 신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태국의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 23권 중 17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한편 AP통신 소속의 미국인 사진작가 닐 울레비치(Neal Ulevich, 1946~)는 이 날의 참상을 촬영한 사진으로 1977년에 퓰리처상을 수여받았고 1999년에 이 사진은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뉴스 사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후에도 태국에서 군부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1992년/2010년에도 군부의 정권 연장에 항의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군인, 경찰들이 발포하여 최소 52명/91명이 목숨을 잃은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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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군부 독재자의 부활에 반발하여 학생 중심으로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는 것, 베트남 전쟁을 취재한 기자마저 경악할 정도로 진압이 잔혹했다는 것, 희생자들이 장기간 동안 폭도라는 누명을 썼다는 것이 비슷하다.[2] 이 사건도 군대의 발포로 77명이 죽고 857명이 다쳤다.[3] 이후 라마 10세로 등극했으며 2016년부터 태국의 국왕이다.[4] 광주민주화운동 사망자 추정치가 적게 추산된다는 얘기가 있듯이, 당시 시신을 처리한 사람들은 사망자 수가 100명이 넘는다고 밝혔으며 심지어 일각에서는 500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5] 실제로 쿠데타 직후부터 1977년 6월까지 정치적 이유로 체포된 사람만 최소 8천 명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