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물소개
이운환(李雲煥) | 이운한(李雲漢)이라고 부름 |
이명 | 이운산(李雲山), 장치문(張致文) |
생몰년도 | 미상 |
1938년 5월 7일,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 카이푸구(開福區) 난무팅 9호(楠木廳 9号)에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의 3당 합당에 대한 통합을 논하고 있던 먼저 현익철, 지청천, 유동열, 백범 김구에게 총격을 가한 인물이다.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 따르면 황푸군관학교 11기생으로 박기성과 동기이다.
2. 사건발생장소
남목청 사진3. 사건 경과
1937년 11월 20일, 상하이 전투, 난징에서 철수한 국민당 정부는 충칭(重慶)으로 천도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기관 대부분 11월 말까지 충칭으로 옮겼다. 그러나 일부분은 우한(武漢) 등지로 사무실을 옮겨서 집무하였다.이때 김구도 난징, 항저우 등지에 마물고 있던 임시정부 요원 및 각 당파 간부 100여 명을 이끌고 3척의 목선에 분승, 양쯔강을 따라 한커우(漢口)로 갔다. 한커우(漢口)에서 잠시 머무른 뒤, 다음해 3월 뚱팅후(洞庭湖)를 거쳐 후난성(湖南省)의 성도 창사(長沙)에 도착하였다.
김구 일행이 창사에 도착하자, 후난성 정부 주석 장찌쫑(張治中)의 열성적인 접대를 받았다. 또한 여러 방면의 보살핌으로 임시정부는 단시일 내에 안정되었다. 이에 앞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그리고 한국혁명당은 창사로 오는 도중 3당 합병문제가 시작되어, 창사 도착 후에는 그 문제가 커졌다.
1938년 5월 7일, 3당 영수들이 남목청(楠木廳)에서 3당 합당의 구체안을 토론하고 있었을 때 이운한(李雲漢)이 갑자기 회의장에 뛰어들어, 총을 난사하여 현익철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김구. 유동열은 중상을,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이로 인하여 회의는 중단되었다.
장제스는 이 소식을 들은 뒤, 장찌쫑에게 전문을 보내, 이 사건을 선처하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총상을 입은 김구에게 가능한 모든 치료를 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밖에도 그는 특히 김구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김구는 상처가 비교적 심했기 때문에 창사 상아의원(湘雅醫院)에 입원하였다. 3당 통합문제는 한 동안 덮어둘 수밖에 없었다.
중국정부는 이운한(李雲漢)이 김구 등을 암살하려 했던 동기에 대해 수사하면어 두 가지 가설은 세웠다.
1. 한독당 내분설 : 이운한이 한국독립당 박창선과 강창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두 사람은 김구가 3당 당원을 차별하고, 임시정부에서 독재를 한다고 비난했다.
2. 밀정설 : 일본 제국이 이운한(李雲漢)을 파견했다는 설이다. 이것은 창사 사건 뒤 이운한이 일본인의 통제가 매우 엄격한 상하이에서 마음대로 활보하면서 생활한 것을 볼 때 일리가 있다.
2. 밀정설 : 일본 제국이 이운한(李雲漢)을 파견했다는 설이다. 이것은 창사 사건 뒤 이운한이 일본인의 통제가 매우 엄격한 상하이에서 마음대로 활보하면서 생활한 것을 볼 때 일리가 있다.
사건 직후 이운한(李雲漢)을 비롯해 강창제·박창세·이창기(李昌基)·신기언(申基彦)·한성도(韓聖島)·송식(宋植) 등이 함께 중화민국 경찰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이운한(李雲漢) 외에 다른 이들은 곧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감옥에 갇힌 이운한(李雲漢)은 이미 탈옥해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이운한(李雲漢)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임무수행 중 목격했다는 보고는 있었다. 박기성 지사가 임무수행 중 담배를 피려는데, 곁에 서있던 남자가 다가와 (담뱃)불 좀 빌려달라는 말에 얼굴을 보니 이운한(李雲漢)이었다고 한다.
나는 후난성(湖南省) 창더(常德)에 있는 제 1 통신병 단의 보충대 소대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후난성 창사(長沙)에 가는 길에서였다.
(중략)
부임지에 도착한 나는 복무를 착실히 했다 후난성 창더(常德)에서였다. 나는 위안저우(沅州)로 가는 도중에서였다. 소대부(少隊副)가 항상 선발대로 인솔하고 갔었는데 그 날은 소대부가 고되다고 하여 하루만 나와 교대해 달라고 해서 소대장인 내가 선발대를 인솔하고 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담배가 피고 싶어서 성냥을 찾으려 하는데 성냥이 없어서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담배불을 빌리자고 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보니 그 사람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의 저격범인 이운한(李雲漢)이었다. 나는 그더러 어딜 가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한국사람 하나가 후난성 어디선가 군수를 지내고 있는데 거길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해가 서산에 졌고 주위는 어둑어둑해 오고 있을 때였다. 내 생각엔 그에겐 그날 밤 저녁을 먹고 잠잘 곳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중국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주며 거기서 오늘 하룻밤을 지내라고 하자 퍽 고마워하며 서로 헤어졌다. [1]
(중략)
부임지에 도착한 나는 복무를 착실히 했다 후난성 창더(常德)에서였다. 나는 위안저우(沅州)로 가는 도중에서였다. 소대부(少隊副)가 항상 선발대로 인솔하고 갔었는데 그 날은 소대부가 고되다고 하여 하루만 나와 교대해 달라고 해서 소대장인 내가 선발대를 인솔하고 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담배가 피고 싶어서 성냥을 찾으려 하는데 성냥이 없어서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담배불을 빌리자고 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보니 그 사람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의 저격범인 이운한(李雲漢)이었다. 나는 그더러 어딜 가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한국사람 하나가 후난성 어디선가 군수를 지내고 있는데 거길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해가 서산에 졌고 주위는 어둑어둑해 오고 있을 때였다. 내 생각엔 그에겐 그날 밤 저녁을 먹고 잠잘 곳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중국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주며 거기서 오늘 하룻밤을 지내라고 하자 퍽 고마워하며 서로 헤어졌다. [1]
4. 사건 이유
임시정부 철수 수행요원 중 한 명인 안병무 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운한이 속한 조선혁명당 내에 원로에 대한 불만표출로 인한 우발적 사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당 당원으로 젊은 사람이 불평이 많았었습니다. 늙은이들은 밤낮 옥신각신 각기 자기 편의 견해만 고집하고 일은 별 진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혁명당 청년들에게 주는 생활비가 가 다른 청년들 것에 비해 적어서 불평이 많았었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특별한 배후는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략)
그냥 위협사격을 한 것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그 사람 꽤 의협심이 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난징에서 한커우로 피난할 때 배를 함께 탔었는데 우후를 지나 루강이라는 중국 소년이 밥을 짓기 위해 양철 초롱으로 물을 깃다가 세찬 물살 때문에 그만 양쯔강 물에 떠내려 가면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배를 멈추고 야단이 났었는데 이 때 이 이운한(李雲漢)이란 사람이 용감하게도 매생이를 내려 타고 그것을 저어서 소년을 구하려고 했었지만, 빠르고 거센 물살에 흘러가서 모습을 볼 수 없게 돼서야 다시 우리가 탄 큰 배로 돌아왔던 그런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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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위협사격을 한 것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그 사람 꽤 의협심이 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난징에서 한커우로 피난할 때 배를 함께 탔었는데 우후를 지나 루강이라는 중국 소년이 밥을 짓기 위해 양철 초롱으로 물을 깃다가 세찬 물살 때문에 그만 양쯔강 물에 떠내려 가면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배를 멈추고 야단이 났었는데 이 때 이 이운한(李雲漢)이란 사람이 용감하게도 매생이를 내려 타고 그것을 저어서 소년을 구하려고 했었지만, 빠르고 거센 물살에 흘러가서 모습을 볼 수 없게 돼서야 다시 우리가 탄 큰 배로 돌아왔던 그런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2]
조선혁명당 1930년대 만주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 1929년 9월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 는 강령하에 국민부(國民府)의 정당적 성격을 갖춘 자매기관으로 길림성(吉林省)에서 결성되었다. 1927∼1929년 사이에 유일당촉성론(唯一黨促成論)이 논의되어 대집회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만주 일부만의 조직체를 결성했다. 조선혁명당은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었다.[3]
1931년 9월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벗어나 국내로 남하,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에 가담하였다.
그 뒤 1935년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합병되었다가 이탈, 1937년 4월 난징(南京)에서 재건되었다. 이때 중앙위원은 지청천(池靑天)[4]·최동오·유동열(柳東說)[5]·이광제(李光濟)·박창세(朴昌世)·양기탁(梁起鐸)·현익철[6]·김학규(金學奎)[7]·이운환(李雲煥)·강창제(姜昌濟) 등이었다.
그 해 8월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구성할 때 이 연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당은 비록 ‘연아용공(聯俄容共)’을 주장하고 한국국민당과 함께 단일 정당을 추구하였으나 시종 전통있는 이론을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당내에 청년이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 중년 간부로 구성되어 있어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뒤에는 재정이 궁핍하여 한국국민당으로부터 매월 수백 원씩 받아 유지한 점으로 미루어, 경제적으로는 이미 한국국민당에 부속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