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공보처장 (1948~1956) | ||||||||
<nopad> 이승만 정부 | |||||||||
초대 김동성 | 제2대 이철원 | 제3대 김활란 | |||||||
<nopad> 이승만 정부 | |||||||||
제4대 이철원 | 제5대 안연생 | 제6대 갈홍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공보실장 (1956~1961) | |||||
<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허정 내각 | <nopad> 장면 내각 | |||||||
제6대 갈홍기 | 제7대 오재경 | 제8대 전성천 | 제9대 최치환 | 제10대 서석순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공보부장관 (1961~19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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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김동성 | 제16대 이수영 | 제17대 홍종철 | |||||||
문화공보부장관 (1968~19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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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문화부·공보처 분리 | |||||||||
문화부장관 (1989~19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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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문화부·체육청소년부 통합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문화체육부장관 (1993~199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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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이창동 | 제41대 정동채 | 제42대 김명곤 | 제43대 김종민 | ||||||
2008년 문화관광부·국정홍보처 통합 | |||||||||
문화체육관광부장관 (2008~현재) | |||||||||
<nopad> 이명박 정부 | <nopad> 박근혜 정부 | ||||||||
제44대 유인촌 | 제45대 정병국 | 제46대 최광식 | 제47대 유진룡 | 제48대 김종덕 |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49대 조윤선 | 제50대 도종환 | 제51대 박양우 | 제52대 황희 | 제53대 박보균 |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54대 유인촌 | }}}}}}}}} |
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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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 1932년 9월 13일 ([age(1932-09-13)]세) |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 | |||
본관 | 고성 이씨[1] | ||
재임기간 | 제13대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 ||
1980년 7월 5일 ~ 1982년 6월 7일 | |||
제24대 문화공보부장관 | |||
1982년 5월 21일 ~ 1985년 2월 1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학력 | 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 |
가족 | 동생 이상희 | ||
종교 | 불교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9 | ||
경력 | 경향신문 기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서울신문 정치부 기자 서울신문 정치부 부장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서울신문 이사장 겸 객원주필위원 문화방송 사장 겸 경향신문 사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문화방송 사장 문화공보부장관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서울신문 사장 한국신문협회 회장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이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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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 종교는 불교이다. 과학기술처장관과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상희의 친형이다.2. 일생
1932년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남양리에서 아버지 이승룡(李承龍)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정묵(朴貞默)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래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1960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신입기자이자 견습기자 였던 이진희는 정치부였던 만큼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삼권을 휘아잡고 있을 때 1961년 6월 윤보선 대통령의 민정이양 촉구를 발표하는 내용을 군사정부 측에 안좋게 부풀려서 썼다는 이유로 주임기자 였던 이만섭을 비롯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심문을 받았었는데 이 때문에 제3공화국 시기인 1960년대에는 정부인사들과 접촉을 피하는등 반정부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한번 고문당한 경험 때문인지 대놓고 반정부적 기사를 쓰진 않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박정희정부가 쭉 장기화되자 현실을 깨닫고 태도에 순응하여 1971년 서울신문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한 뒤 정치부장을 거쳐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제1기 국회의원에 임명되었다. 1976년 유신정우회 제2기 국회의원에도 임명되었다.1979년부터 서울신문으로 복귀해 주필을 맡던 그는 5.18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7월, 전임 사장인 이환의가 사실상 경질되자 공석이 된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직에 임명되어 한국방송협회 부회장까지 맡았다. 취임 첫 날부터 "새 시대 정립을 위해서 언론인은 국가관이 투철해야 하며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며 "앞으로 이를 따르지 않은 언론인은 물러나야 한다"고 선언한 뒤 7월 15일에 간부급 임원 177명의 사표를 받아 그중 41명을 쫓아냈고, 나흘 뒤에는 차장 이하 전 직원의 사표를 받고 56명을 쫓아내 신군부의 '언론 자율정화'에 적극 나섰다. 이후 8월에는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대통령 될 준비를 할 때 TV 특집대담에 나왔고, 11월 언론통폐합 때 민간주식 70%를 KBS에 넘기고 이듬해엔 MBC를 경향신문과 분사시켰다.[2]
이후 전두환 정부에서 한국방송공사 사장이자 후임 문화공보부 장관인 이원홍과 더불어 악명이 높았다.[3][4] 전두환 정권 하에 했던 일에 대해 한편 한국 스포츠사에 있어도 상당한 영향을 발휘한 인물이기도 한데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MBC 청룡의 창단을 지시한데다가 프로야구 중계도 자주 편성하면서 프로야구의 인기를 높이는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5] 정작 MBC 청룡이 창단하고 얼마 뒤에 문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MBC를 떠났지만.무서운 사장으로 통했으며, 무능력자 배제, 리포트 호흡단축 등 부분적인 개혁노력도 했다고는 하지만, 정권 홍보에 앞장섰던 데다가 당시 한 간부가 서류 결재를 받으러 사장실에 들어가니 재떨이를 던지는 등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당황한 나머지 캐비넷 문을 출입문으로 잘못알고 열고 들어갔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당시 "정세를 파악하려면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을 보라"란 말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후 민심 수습 차원의 개각이 이루어지면서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어, 1985년 초까지 역임했다.[6] 1985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을 지냈고 1986년 서울신문 사장 겸 한국신문협회 회장,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이사를 역임했다. 1988년 12월 13일 국회 문공위 언론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했으며, 2002년에는 프랑스 리옹에서 걷던 도중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여 부상당하기도 했다.
2019년 <뉴스타파>에서 동생 이상희 전 의원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조용히 칩거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2023년 9월 14일 동생인 이상희 전 의원이 별세함에 따라 형제상을 당했다.
3. 수상 경력
- 청조근정훈장 (1985)
4. 둘러보기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004c97; border-right: 10px solid #004c97; text-align: center; margin: -0px -11px; margin-top: -12.5px; margin-bottom: -6px" {{{#!wiki style="margin-left:10px; margin-right:-17px;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display: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bgcolor=#ffffff,#1f2024> | }}}{{{#!wiki style="padding: 0px; display: inline-table; margin-top: -2px; margin-bottom: -8px" | <tablebordercolor=#ffffff,#1f2024><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f202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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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04c97> 신병현 → 김준성 → 서석준 → 신병현 → 김만제 → 정인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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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장관 | 권중동 → 정한주 → 조철권 → 이헌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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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처장관 | 김용휴 → 박찬긍 → 박세직 → 정관용 → 장기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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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구 | 장승태 | 정래혁 | 정석모 | ||
조종호 | 진의종 | 채문식 | 한영수 | ||
학계 13명 | 권이혁 | 김대환 | 김만제 | 김상협 | |
나창주 | 박봉식 | 박승재 | 박일경 | ||
서명원 | 안세희 | 윤근식 | 정의숙 | ||
한기춘 | |||||
국보위 대표 10명 | 김영균 | 노재원 | 박종문 | 서동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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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8명 | 김사용 | 김태청 | 윤길중 | 이범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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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 8명 | 강신명 | 김봉학 | 서경보 | 이병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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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계 3명 | 박태준 | 유기정 | 정수창 | ||
언론계 3명 | 방우영 | 이원경 | 이진희 | ||
향군 대표 2명 | 이맹기 | 이형근 | |||
노동계 1명 | 정한주 | ||||
재적 81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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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 갈봉근 | 강문봉¹ | 강문용 | 고재필 | 구범모 |
구임회¹ | 구태회 | 권갑주 | 권일 | 권중동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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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 이정식² | 이종식 | 이종찬² | 이진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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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판공파(叅判公派) 30세손 ○희(○羲) 항렬.(족보(1)족보(2))[2] 후임 경향신문 사장직은 정구호 편집국장이 맡았다.[3] 참고로 허문도, 이진희, 이원홍을 80년대 초반 '언론계 3악역'으로 부르기도 한다. #[4] 이진희 자신은 MBC <미디어비평> 2003년 5월 23일 방영분 전화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 하에서 했던 일이 정당했는지에 대해 "나는 얘기할 수 없고, 그건 역사의 평가에 맡기라"는 식으로 언급했다.[5] 일부에서는 정치와 관련없이 프로야구를 기획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본인이 주도한 프로야구인 만큼 초대 KBO 총재직에도 욕심낸 기록이 있는걸로 보아 정치적 목적과 개인적 목적 둘다 있었던 것이 맞을 듯하다.[6] 이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은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역할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