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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80045><colcolor=#fff> 계산주교좌대성당 桂山主敎座大聖堂 Our Lady of Lourdes Catheral, Daegu | |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0 (계산동2가) |
종교 | 가톨릭 |
교구 | 대구관구 대구대교구 |
지위 | 공동주교좌성당(Cathedral)[1] |
주임사제 | 이기수 비오 |
보좌사제 제1 | 서대원 스테파노 |
보좌사제 제2 | 백원기 루치아노 |
홈페이지 | 공식 홈페이지 |
건축 정보 | |
본당설립 | 1885년 12월 1일 ([age(1885-12-01)]주년) |
축성 | 1903년 11월 1일 ([age(1903-11-01)]주년) |
증축 | 1918년 12월 24일 ([age(1918-12-24)]주년) |
양식 | 고딕이 혼합된 로마네스크 |
성당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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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0(계산동2가)에 있는 성당.계산오거리 매일신문사 옆에 있다. 정식명칭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이지만, 통상적으로 '계산성당'이라고 많이 불린다. 범어 대성당과 함께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공동 주교좌 성당이다. 1898년에 본당을 세웠는데, 본당의 주보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계산성당에서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까지 이르는 골목길이 대구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대구신명학교 학생들이 이 골목에서 3월 8일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바로 옆에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이상화의 고택이 있다.
주교좌 성당이라 그런지 주일 미사가 매우 자주, 늦게까지 있다. 가장 늦은 미사가 일요일 오후 9시 30분. 판공성사 기간의 마지막 주일에는 고해소 줄이 꽤 길어지니 최후의 보루로만 이용하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대구 최초의 가톨릭 성당인 계산성당과 역시 대구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대구제일교회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본다는 것. 교파를 초월하여 계산동, 동산동 일대는 대구 그리스도교 역사의 출발지점이다. 인근에 대구 관덕정 순교성지,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캠퍼스,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청, 가톨릭신문 본사 등 천주교 시설이 있다.
2. 역사
건립 당시 현 위치와 서편 청라언덕[2] 전체 사이에 고민하다가 노인 신자들의 요청으로 현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정해졌다고 한다. 원래는 성공회 강화성당과 비슷한 한옥식 건물이었지만, 화재로 1901년에 전소되자[3] 새로 고딕식 성당을 지었다. 참고로 이 성당은 경상도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이다.1991년 보수한 현 계산성당 내부 성전 |
계산성당 정면의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
사적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문화재청으로부터 관리를 받고, 가끔씩 유지보수를 한다. 2016년 7월 현재 성당 북편 벽에 습기가 차는 현상이 나타나 배수로 공사를 진행했다. 아울러 천주교 대구대교구도 교구의 성지 보호를 명목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3. 여담
-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하다. 결혼식 주례를 보던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신랑 육영수 군, 신부 박정희 양이라고 소개한 일화의 그 장소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가톨릭 신자는 아니다.[6] 원래 가톨릭 성당에서 결혼식(혼인성사)을 올리려면, 신랑과 신부 중 최소한 한 쪽은 신자여야만 한다. 성당 결혼식은 단순히 예쁘고 멋있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가톨릭의 가르침대로 가정 생활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겠다는 다짐이기 때문. 신자도 아닌 두 사람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가 전쟁 중이라[7] 마땅히 결혼식 장소가 없었던 탓에 성당을 결혼식장으로 빌렸던 모양.
- 남구 대명동의 가르멜여자수도원,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더불어 도심지역에서 실제 종을 타종하는 몇 안 되는 곳들 중 하나다.[8] 때문에 삼종시간의 종소리를 들으면 마치 유럽에 여행을 온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제대 하단부 중앙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팔)가 안치되어 있다.
4. 사적 제290호
대한민국 사적 제290호 | |
<colbgcolor=#315288> 대구 계산동성당 大邱 桂山洞聖堂 | Gyesandong Cathedral, Daegu | |
<colcolor=#fff>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0(계산동2가)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천주교 / 성당 |
면적 | 4,137㎡ |
건축시기 | 1902년 |
지정연도 | 1981년 9월 25일 |
소유 | (재)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 |
관리 | 주교좌 계산대성당 |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clearfix]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나머지 하나는 범어 대성당.[2] 동산의료원과 개신교 선교사들 주택 새로 지은 대구제일교회가 있는 그 자리, 작곡가 박태준의 동무생각에 나오는 그 청라언덕이 여기 맞다.[3] 당시 일어났던 지진으로 제대의 촛대가 넘어지면서 화재로 이어졌다고 한다.[4]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5] 가톨릭 신자인 선동열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기사 오오 감동님[6] 박정희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무종교였지만 불자인 아내의 영향으로 조금이나마 불교에 대해 친화적인 행보를 보였고, 육영수 여사는 실제로 독실한 불교 신자다. 또한 박정희도 그래서인지 공식 약력에는 (종교가) 불교라고 돼 있다. 그렇지만 둘 다 천주교에는 호의적이었는지, 딸 박근혜는 천주교 미션스쿨과 예수회 계열 대학인 서강대학교 출신이고, 후일 냉담하고 사실상 최태민과 가까워지며 영세교에 빠져들긴 하나, 성심여자중학교 시절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던 바는 있다.[7] 결혼일이 1950년 12월 12일로 6.25 전쟁 중이었다.[8]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도 타종하긴 하나 주님 성탄 대축일에만 실제 종을 타종하고 그 이외에는 녹음본을 송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