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교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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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461호 | |
서울 청계천 유적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 서울 淸溪川 遺蹟(廣通橋地,水標橋址와 五間水門址)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오간수문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1가 (광통교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수표교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교통 / 교량 |
지정연도 | 2005년 3월 25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수량 / 면적 | 11,103㎡ |
정보 | 서울 청계천 유적 (광통교지,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 |
<colbgcolor=#006fb9> 오간수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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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五間水橋 / Ogansugyo청계천의 다리이다.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4번째 다리이다.
2.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종로6가)와 중구 장충단로 (을지로6가)를 잇는 위치에 있다.3. 역사
<colbgcolor=#006fb9> 오간수문 옛 모습 |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른다. 처음에는 수문이 3개였으나 1421년(세종 3년)에 장마로 개천이 범람하자 1년 뒤에 추가로 2개를 더 만들어 5개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 수리했다.#[3] 1760년(영조 36년)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다시 보수했다.
1907년(융희 원년) 일제가 청계천 물줄기가 원활하게 흘러간다는 명분 하에 오간수문을 헐었고 1년 뒤에는 근처의 성벽마저 철거했다. 이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 다리를 짓고 이름을 ‘오간수교(五間水橋)’라 했다.
<colbgcolor=#006fb9> 오간수교를 지나는 전차 |
<colbgcolor=#006fb9> 오간수문을 재현한 구조물[4] |
4. 구조
4.1. 오간수문
- 청계천 바닥에 선단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홍예를 얹었다. 홍예 위로 석축을 쌓았으며 석축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단석 사이마다 가로로 긴 돌 부재를 얹었다.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 엄연히 도성의 경계를 나타내는 방어 구조물이었지만, 아무래도 물이 나가다 보니 다른 문이나 성벽처럼 막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홍예마다 쇠창살을 두어 외부인이 멋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다만 하천의 범람 시 물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게 쇠창살마다 작은 철제 줄을 연결시켜 상황에 맞춰 언제든 열고 닫을 수 있게 했다.#
4.2. 오간수교
- 다리 동남단 약 50m 지점부터 황학교 동남단 약 60m 지점까지 청계천 남쪽 산책로가 막혀있다. 동 · 식물 서식환경 보호를 위해서라고. 대신 산책로가 끊기는 지점에 징검다리가 있어 북편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해놓았다.
5. 교통
- 지하철: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이 제일 가깝다. 8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가까운 역은 서울 지하철 2 ·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다. 14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하면 나온다. 대략 8분 정도 걸린다.
6. 여담
- 오간수문에 쇠창살을 두는 등 경비를 강화했음에도 죄인들이나 외부인들이 몰래 출입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던 듯하다. 명종 때 유명했던 도적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오간수문을 이용했다.#
- 그리고 쇠창살을 열고 닫게 만들었음에도 청계천을 제대로 준설한 적이 거의 없어 나중에는 토사와 부유물들이 쌓여 배수가 잘 안되었다. 이에 임시로 나무문 2개를 설치하여 활용했으나 영조 시절에는 그마저도 사용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1760년(영조 36년)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오간수문 역시 보수했다. 이 때 나무문을 헐고 전부 원래 모습대로 되돌렸으며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가 쓸려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버드나무가 심어진 오간수문은 한성 내 봄놀이 장소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colbgcolor=#006fb9> 오간수교 밑에 있는 청계천 준설 및 오간수교 관련 역사 전시물. 상단 왼쪽은 〈준천가〉, 오른쪽은 준천을 기념하여 영조가 쓴 글씨이며, 하단은 오간수교의 옛 사진과 준천 관련 기록화이다. |
- 오간수교 남쪽은 대한민국 패션쇼핑의 메카이다. 흔히 옷 사러간다는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가 바로 거기다. 평화시장부터 두타, 밀리오레, Apm까지 다 있다. 그리고 DDP도 바로 옆에 있다.
<colbgcolor=#006fb9> 오간수교 무대에서 주니엘이 부른 〈연애하나 봐〉 |
[1] 사진 출처 - 서울스토리.[2] 전부는 아니다. 딱 한 물줄기만 다른 곳으로 나갔다. 남산 북쪽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의 일부 지류가 광희문 인근에서 따로 갈라져 현재 DDP 자리에 있던 이간수문을 통해 빠져나간 것.[3] 이 때 사관은 ‘의심이 많은 왕은 내부 반란으로 쫓겨날까 두려워 오간수문을 척간[5]한다’며 광해군을 디스했다.[4]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5] 擲奸. 죄의 유무를 밝히기 위하여 캐어 살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