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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1:36:52

혜화문


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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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0호 한양도성
혜화문
惠化門 | Hyehwamun
<colbgcolor=#bf1400><colcolor=#fff>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307
(혜화동 28-5)
건축시기 1396년 (창건)
1684년 (재건)
1992년 (복원)
시설 1동
이칭 동소문(東小門)
홍화문(弘化門)
파일:혜화문.png
<colbgcolor=#bf1400> 혜화문[1][2]
혜화문 변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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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혜화문(동소문) 헤르만 산더 1906~1907년 촬영(국립민속박물관).jpg
[ruby(1906~1907년,ruby=대한제국,color=yellow)]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사진이다.[3]
파일:1925年_혜화문.png
[ruby(1925년,ruby=일제강점기,color=fff)]
문루가 철거되기 불과 3년전의 사진이다.
파일:1928年_혜화문.png
파일:1928年_혜화문_2.png
[ruby(1928년,ruby=일제강점기,color=fff)]
당시 일제는 혜화문의 문루가 낡아서 수리보존이 어렵다는 이유로 문루를 철거했다.
파일:2020年_혜화문.jpg
2020년
원래 위치가 아닌 곳에 세워졌으며, 모습 자체도 원래의 혜화문하고 영 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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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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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한양도성의 4소문 중 동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307에 있는 조선한성 4소문 중 하나. '동소문(東小門)'으로도 불렸다.[4]

2. 역사

1396년(태조 5년)에 창건했고 조선시대 내내 한성에서 강원도,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태종 때 풍수적 문제로 북문 숙정문을 폐쇄한 후로는 사실상 북대문 역할을 했다. 원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창경궁 정문 이름도 '홍화문'이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쳤다. 언제 바꿨는지는 모르나, 창경궁 홍화문 창건 시기가 1484년(성종 15년)이기 때문에 아마 그 이후일 것이다.

1592년(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문루가 불탔고, 1684년(숙종 10년)에 재건했다. 1739년(영조 15년)에는 문짝에 불이 붙어 문을 못 닫자 한동안 어영청 병사들이 지키기도 했으며 5년 뒤에는 문루를 개수하고 현판을 새로 걸었다.

그렇게 몇백 년간 잘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관리 보수가 어렵다며 일제가 문루를 헐어버렸다. 석축과 홍예는 남겨두었는데 1935년에 남은 돌들마저 무너져 인근 초가집을 덮치면서 일가족 5명이 매몰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3년 뒤인 1938년에 일제는 동소문로를 뚫고 전찻길을 만들면서 남은 석축과 홍예마저 철거하여 구 혜화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시대 그림과 구한말 흑백사진에 담긴 《혜화문》 모습

현재 혜화문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복원공사를 통해 복원한 것이다. 다만, 원래 혜화문이 있었던 곳과는 약간(10m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사이에 해당 지역의 지형이 딴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939년 일제가 혜화동을 종점으로 하던 경성전차를 돈암동으로 연장하면서[5] 혜화문을 철거함과 동시에 언덕이었던 해당 도로를 전차 통행을 위해 토목공사로 평탄화 하였다. 따라서 혜화문이 있던 원래 터는 혜화문이 있을 때보다 7m정도 낮아진 것이다. 동소문로를 지나갈 때 보이는 좌우의 서울성곽 높이가 도로보다 꽤 높은 곳에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따라서 혜화문을 진짜 원래 위치에 복원하려면 도로 위 공중에 띄워야만 한다. 다시 흙을 쌓아 도로레벨을 혜화문 있던 당시 높이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했고[6] 결국 지금처럼 원래 혜화문 위치에서 수평으로 조금 옮긴 곳에 만들었다. 만일 원래 위치를 강조해서 동소문로에 만들어도 높이가 수직으로 맞지 않게 된다. 즉 원래 위치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7] 즉 현지의 지형 구조상 어떤 방법으로 복원하더라도 오리지널 위치에서 복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파일:舊_혜화문_현판.png
1994년 다시 만들어질 당시의 혜화문 현판[8]
파일:新_혜화문_현판.jpg
조선시대 현판을 본떠 복원한 2019년 현판
복원한 문의 세부적 모습도 그닥 꼼꼼하게 고증한 것 같지는 않다. 현판의 글씨 방향도 현대 국어에서 쓰는 방법인 좌 → 우 방향이고, 글씨 서체도 위엄없이 날려쓴 글씨체이다. 그래서 원본 현판이 있음에도 원본을 본떠 다시 제작하지 않은 건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받아 왔었다.

그러다가 2019년 11월 22일, 원래의 혜화문 현판을 본떠 제작한 현판으로 복원을 해 조선시대 당시의 정취가 조금은 되살아 났다. #

이 문의 별칭을 따 동소문로라는 도로명이 생겨났는데, 혜화동로터리 ~ 한성대입구역 구간이 창경궁로로 편입되면서 동소문로동소문(혜화문)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겨우 200m 정도라는게 위안. 또한 동소문동도 이 문의 이름을 따왔다.[9]

[1] 사진 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2] 위 사진은 현판이 교체되기 전의 사진이다.[3] 사진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를 할 수 있다.[4] 유명한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의 두 번째 문장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에서의 동소문이 바로 여기를 의미한다.[5] 1937년 돈암지구 도시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전차선 연장. 쉽게 이야기하면 신도시 개발하면서 지하철 노선을 연장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6] 종로구-성북구 경계인 해당지역은 대한민국 자동차 등록댓수가 지금의 1/100도 안 되었던 1970년대에도 전국에서 교통량이 많기로 알려진 곳 Top 10 안에 들었던 곳이다. 물론 지금도 장난아니고.[7] 물론 원래 위치에 구름다리를 만들어(마치 미아리고개 정상부 버스정류장 위 아치형 도로처럼) 그곳에 복원하고 아래에는 차량 통행용 터널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모양이 좀 우스꽝스러워진다.[8]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의 글씨이다.[9] 원래는 돈암동의 일부였으나, 1963년에 분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