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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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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478호
<colbgcolor=#315288> 수원 화성행궁
水原 華城行宮
Temporary Palace at Hwaseong Fortress, Suwon
<colcolor=#fff> 주소 경기도 수원특례시 팔달구 정조로 825 (남창동 6-2)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81,351㎡
건축시기 조선 시대, 1789년(정조 13년)
지정일 2007년 6월 8일
소유 경기도 수원특례시
관리 경기도 수원특례시
파일:external/file.dailian.co.kr/news1204187293_102985_1_m.jpg
정문인 신풍루와 그 뒤로 바라보이는 화성행궁 전경
1. 개요2. 역사
2.1. 훼손 및 복원
2.1.1. 복원 논란
3. 구조
3.1. 전각
4. 기타5. 외부 링크6. 대한민국 사적 제478호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남창동)에 있는 조선 시대행궁이자 화성유수부관아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원화성 내부 팔달산 동쪽 기슭에 있다.

화성행궁은 화성유수부의 관아로 지어진 것임과 동시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하여 수원에 거둥할 때에 머무는 행궁으로서 지어진 것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화성유수부의 관아로 사용되다가, 정조가 수원에 거둥하면 행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 있던 다른 행궁이나 관아들보다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추어 조성되었는데, 건립 당시에는 건물 21동, 576칸 규모로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이처럼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 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 조사 및 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조선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 유적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2. 역사

파일:수원화성 중심부 배치도.png
화성행궁 및 관아시설 배치도[1]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1793년, 청 건륭(乾隆) 58년) 1월 12일 [丙午] 2번째기사.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꾸고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다. 군영 폐단의 제거를 하유하다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한 사람을 두어 보좌하게 했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 전교했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재용을 많이 저축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다. 그런데 다행히 황천에 계신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을 입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좋은 자리를 잡아 영원토록 천억만년 끝없을 큰 운세를 정했으니, 이 땅의 소중함은 실로 주(周)나라의 풍(豊)이나 한(漢)나라의 패(沛)와 같이 융성할 것이다. 오직 이 곳을 잘 수호할 방도를 더욱 애써 치밀하게 하여 체모가 존엄하고 제도가 엄숙하여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나 소자(小子)의 정리로나 예법으로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종묘의 예절을 두고 먼저 백관(百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소중함에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다.

이곳 수원부는 현륭원〉 자리를 마련한 뒤로부터 관방(關防)이 더욱 중하여졌다. 아름다운 이 자연의 요해처에 달마다 꺼내 볼 〈사도 세자의〉 의관(衣冠)들을 길이 봉안하리라. 선대 왕때에 미리 행궁을 세워 먼저 우러르고 의지하는 생각을 붙였고, 영정을 그려 걸어서 혼정 신성의 정성을 대신하니, 어린애처럼 어버이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에 북받쳐 올라 절제할 줄을 모르겠다.
매년 3백 일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손꼽아 기다리고 바라던 것이 오로지 예를 행하는 하룻동안에 있었기에, 이미 배알을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수원부의 경계가 다하는 고갯마루에 거가를 멈추고 우러러 바라보며 머뭇거리노라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디어지곤 했다. 그래서 번번이 수신(守臣)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정성을 다해 수호하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당부했었다. 그러나 그의 직책은 한 고을의 원이요 그의 품계를 물어보면 3품직의 자리이다. 적임자를 얻어 그 일을 맡기는 것이야 벼슬의 높낮이에 관계될 것이 아니겠지만, 조정의 거조란 지위가 높지 아니하면 위엄이 서지 못하는 것이다. 관방에 대해서는 우선 제쳐두고라도 나의 행궁을 정리하는 여러 가지 임무를 어찌 3품의 고을 원에게 맡겨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일은 옛날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남한산성은 단지 방위하는 성의 역할만이 있을 뿐인데도 대신이 사(使)가 되고 유수는 문반의 경재(卿宰)로만 오로지 차임하면서도 방위의 일을 위해서는 무장(武將)이 남한산성에 통의(通擬)되었다. 그런데 더구나 이 곳 이 수원부의 소중함이겠는가.

지금부터는 수원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어 장용 외사(壯勇外使)와 행궁 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오직 대신이나 무장으로 특지를 받아 〈유수에 임명하고〉 또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라. 장용영을 설치한 지는 여러 해가 되었으나 장용영 장수의 칭호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은 외사(外使)가 나오기를 기다린 때문이다.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을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장용영의 문서들에는 대장이라고 호칭하기를 마치 어영사(御營使)를 어영 대장이라 호칭하는 것처럼 하며,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그 법식을 갖추되 역시 경리영(經理營)의 도제거를 삼공이 예겸하는 것처럼 하고 호위 대장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키라. 그리고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의 군수 물자와 군사들의 식량을 마련하고 조처하는 것에는 모두 경비에 의존하지 않게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재용을 저축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 까닭이다.
본래 수원의 읍치는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 자리에 있었는데, 1789년정조양주 배봉산(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기존 수원 읍치 자리로 옮기고, 수원 읍치를 팔달산 기슭으로 옮겼다. 이렇게 새로 조성된 수원 신읍치가 바로 수원화성이며, 화성행궁도 처음에는 수원도호부의 새 관아로 지어졌다. 즉,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관아 건물을 확장·증축하는 가운데 조성된 것이다. 이때문에 각 건물마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데, 그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잘 기록되어 있다.

1789년 10월에 현륭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이래,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방문하면서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고,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렀다. 혜경궁 홍씨에 회갑연 때에 맞추어 각 전각의 이름을 고치고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1796년까지 총 576칸 규모로 확장되었고, 비로소 행궁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조는 훗날 나이가 들면 세자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이곳 화성행궁에 기거하려고 했는데, 때문에 정조는 화성행궁을 "나의 행궁"이라 일컬으며 특별히 신경을 썼다. 1793년에는 본인이 장래에 기거할 화성행궁이 있는 수원을 어찌 종3품 도호부사에게 맡길 수 있겠느냐면서 종2품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고쳤다. 또한 화성유수로 하여금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여 화성행궁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정조가 마지막으로 행차한 것이 1800년 1월인데, 같은 해 8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났으니, 죽기 전까지도 화성행궁을 자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행궁에 기거하려고 했던 정조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 하였다.

정조 사망 직후인 1801년(순조 원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부왕인 정조의 진영을 봉안했다.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임금들이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1895년(고종 32년)에는 한성부에 있던 경기도관찰부가 화성행궁으로 이전하였다.

2.1. 훼손 및 복원

파일:화성 행궁 헤르만 산더 1906~1907년 촬영(국립민속박물관).jpg
구한말 화성행궁 신풍루의 모습[2]
화성행궁이 처음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가 아닌 대한제국 시기부터였다. 1905년(광무 9년)에는 수원공립소학교(現 신풍초등학교)가 우화관에 자리를 잡았고, 1907년(융희 원년)에는 집사청과 북군영이 철거되고 수원경찰서 건물이 지어졌다. 1910년 8월 29일에 국권이 피탈된 직후인 9월에는 화령전에 서구식 공공 의료기관인 수원자혜의원(現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이 개원하였고, 1911년에는 경기도관찰부가 다시 경성으로 옮겨가면서 수원자혜의원이 화령전에서 봉수당으로 이전하였으며, 낙남헌을 개조하여 수원군청으로 사용하였다. 여러 전각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부는 헐리고, 일부는 개조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신풍루·좌익문·중양문·유여택·봉수당·장락당·복내당 등의 건물이 남아 있었다.

화성행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1923년에 수원자혜의원이 병원 건물을 대대적으로 확장 및 신축을 하면서부터로, 이때 수원군청으로 사용하던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헐렸다. 수원자혜의원은 새 건물을 지은 이후인 1925년에 경기도립수원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낙남헌에 있던 수원군청은 1938년에 지금의 북수동 311-10번지 자리로 이전하면서 낙남헌은 빈 건물이 되었다.

화성행궁 복원사업은 화성행궁이 완전히 훼철된 지 63년 만인 1989년에 '수원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된 후, 위원회가 복원을 위해 경기도립수원병원의 이전을 건의, 경기도지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됐다. 경기도립수원병원은 1992년 12월 24일장안구 정자동으로 이전되었다. 뒤따라 북군영 자리에 있던 수원중부경찰서1998년 10월 14일에 마찬가지로 장안구 정자동 정자천천지구(정자1지구)로 이전되었고, 1999년부터 1단계 복원 사업에 착수하였다. 일제강점기6.25 전쟁을 거치면서 엄청난 훼손을 당했지만, 《화성성역의궤》가 남아 있는 덕분에 복원 사업이 이뤄질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옛 모습을 상당 부분 되찾았다. 1단계 복원 사업은 2003년 7월 말에 봉수당·득중정·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을 복원하며 완료되었고,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2007년 6월 8일에는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1단계 복원 사업이 끝난 직후 곧바로 착수한 2단계 복원 사업은 우화관과 별주 등 1단계 복원 사업에서 복원을 완료하지 못 한 나머지 부분을 복원하는 사업이었다. 신풍초등학교2013년광교신도시로 이전을 하고, 본래 자리에 있는 학교는 신풍초등학교 신풍분교장으로 분리하여 운영하면서 마지막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2019년 2월 28일 부로 신풍초등학교 신풍분교장을 폐교하고 건물을 철거하여 우화관을 복원하였다.

2단계 복원 사업은 2024년 4월 24일에 완료되었으며, 수원시는 개관식을 열고 일반에 공개하였다.# 훼손되기 시작한 지 119년, 복원에 착수한 지 35년 만에 화성행궁은 완전히 복구되었으며, 수원시나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의 적극적인 복원 지원 하에 사업이 완료된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별주에서 사용된 백자 제기와 같은 유물들도 새로 발견됐다.

2.1.1. 복원 논란

수원시와 수원교육지원청은 행궁 복원 2단계 사업을 2014년까지 완료하려고 계획을 잡았다. 이를 위해 행궁 옆에 자리한 신풍초등학교를 2013년까지 광교신도시폐교 후 재신설 이전하겠다고 한 것.[3] 그러나 신풍초등학교 역시 2014년 기준 117년이나 이어진 학교인데다 사실상 학교 이전이라기보다는 폐교나 다름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 관계자 및 동문들은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4]

그러다가 2012년 12월 28일 수원시신풍초등학교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 수원교육지원청에서 171억원 가량의 신풍초등학교 분할 납부 방식의 토지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올 5월까지 계약금과 매매 대금 86억 7,200만원을 지급하면서 늦게나마 2차 복원을 잡았고, 2013년 3월부로 신풍초등학교는 광교신도시로 이전, 기존 교사(校舍)는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임시로 분교장 형식으로 운영하다가 폐지되었다. # 현재는 강당 건물만 역사관으로 변경했고 모두 철거했으며, 이후 우화관, 별주, 장춘각을 비롯한 나머지 94칸의 복원을 2023년 12월에 마무리하면서 '화성 행궁 2단계 복원 사업'이 끝났다.

3. 구조

파일:external/b7d2b643f0873aaf4947e6f3197e78a45709c01a8d49dc85e6609f0774222b0b.jpg
화성행궁 조감도
화성행궁은 팔달산진산(鎭山)으로 삼고 전체적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3.1. 전각

신풍루(新豊樓)
파일:화성행궁 사진 01.png
화성행궁의 정문. 1789년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좌익문(左翊門)
신풍문을 통해 들어서면 곧장 나오는 문으로, 화성행궁의 중삼문(中三門)이다. 좌익(左翊)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1790년(정조 14년)에 지어졌다.
중양문(中陽門)
좌익문을 통해 들어서면 곧장 나오는 문으로, 화성행궁의 내삼문(內三門)이자, 봉수당의 정문이다. 좌익문과 같이 1790년(정조 14년)에 지어졌다.
봉수당(奉壽堂)
화성행궁의 정전(正殿)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東軒). 1789년 8월 19일에 상량하고 9월 25일에 완공되었으며, 처음에는 장남헌(壯南軒)이라 하였다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봉수당이라 이름을 고쳐 조윤형에게 현판을 쓰도록 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여기서 거행하였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923년에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4. 기타

무예24기보존회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며 대장금 등의 사극 촬영지로서 자주 쓰이고 있다.

화령전의 정문은 닫아놓은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닫혀있더라도 화성 행궁을 통해 화령전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매년 10월 28일,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의 협찬을 받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화령전봉향회) 측의 주도로 1년에 한번 대중에 개방되어 정조대왕[5] 어진을 볼 수 있다.

화성행궁에 큰 행사[6]가 있어 종로의 도로가 통제되면 심각한 교통 체증이 생긴다.[7] 장안동 정류장에서 팔달문 정류장까지 30분 가까이 걸릴 수도 있다.

멀리 산 위에는 거대한 불상이 보이는데 대승원이라는 절이다. 하지만 절은 의외로 작다.

오산시에서 진행하는 오산 시티투어의 코스 중 융건릉과 함께 둘 뿐인 오산시외 탐방코스다. 대부분의 시티투어 코스가 시내 구간을 도는 것을 감안할 때 특이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장면 일부를 화성행궁에서 촬영했다.

일본 후지TV에서 제작한 이방자 여사 전기 드라마 '무지개를 건넌 왕비'의 한국 촬영분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후지TV와 제휴관계에 있는 MBC에서 협조하여 일본 드라마 치고는 관련 고증이라든가 한국인 배우들의 연기가 괜찮다.

BBC2002 한일 월드컵 중계방송 오프닝(Match of the day) 중 상당수 장면이 이 곳 화성행궁에서 촬영되었다. 한국 관련 대표 이미지로 풍물패의 상모돌리기, 소리꾼이 도포에 갓까지 차려입고 장구를 치는 모습, 왕비의 전통 복식 등이 나온다.

EBS 딩동댕 유치원의 클로징에 나오는 딩동 태권도의 촬영지다.

여자배구단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가 23-24 시즌 통합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2024년 4월 13일에 화성행궁광장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팬페스타’를 개최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이재준 수원시장과 김기정 시의회 의장, 박광국 수원시체육회장, 박용규 경기도배구협회장, 신현삼 수원시배구협회장, 이영호 현대건설 단장 등이 자리했다.

5. 외부 링크

6. 대한민국 사적 제478호

1789년(정조 13년) 수원읍을 화성시 안녕면 일대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잠시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이나 북한산성 행궁, 온양행궁 등 여러 곳에 있었지만, 전국의 행궁 가운데 화성행궁은 규모에서나 격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이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8]를 옛 수원부 읍치자리로 옮기고,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모두 13차례 현륭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특히 1795년에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르면서 이름도 고치고 건물도 새롭게 지었다.

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 주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면서 건물이 철거되어 낙남헌만 남아 있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화성행궁 → 수원 화성행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문화재청 → 국가유산청)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24.05.17 고시)

7. 같이보기


[1] https://blog.naver.com/yk020428/222650382245[2]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 가능하다.[3] 일제강점기 때에 관아지, 객사지, 향교지를 학교로 전용하거나 군청이나 면사무소를 올려 버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유지인데다가 대다수의 관아, 객사, 향교는 마을의 중심지에 소재했기 때문이다.[4] 물론 이전 명분에는 도심 공동화로 인해 이 학교 및 주변 학교들이 텅텅 비어간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실제로 행궁동, 장안동 일대의 학령 인구가 줄어들고 있기도 하다.[5] 대한제국 때 추존되어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정조대왕의 정식 표현은 아니다.[6] 제야 타종행사, 화성문화제[7] 주로 수원KT위즈파크~팔달문 구간[8] 경기도 양주목 배봉산 자리. 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