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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9:24:10

화서문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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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 행궁 <colbgcolor=#fff,#1f2023>화성행궁
성문 장안문(북문) | 창룡문(동문) | 팔달문(남문) | 화서문(서문)
수문 화홍문(북수문) | 남수문
장대 동장대 | 서장대
돈대 동북공심돈 | 봉돈 | 남공심돈 | 서북공심돈
적대 북동적대 | 남동적대 | 남서적대 | 북서적대
노대 동북노대
각루 방화수류정(동북각루) | 동남각루 | 화양루(서남각루) | 서북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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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문 북암문 | 동암문 | 남암문 | 서남암문 | 서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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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403호
수원 화서문
水原 華西門
소재지 <colbgcolor=#fff,#2d2f34>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4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면적 1동
지정연도 1964년 9월 3일
제작시기 조선 정조 20년(1796)

1. 개요2. 역사3. 기타4. 주변 시설5. 외부 링크6. 보물 제403호

1. 개요

華西門/Hwaseo Gate.

수원화성의 서문이자 보물 제403호. 그래서 이곳을 칭할 때 서문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334번지 소재.

2. 역사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의 부친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시에서 수원으로 이장할때 다른 수원 화성 성곽과 함께 건립되었다. 이름은 화성(華城)의 서쪽(西)이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문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塼築) 옹성(甕城)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이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지나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파일:qN5DvwX.jpg

한국 전쟁 때 남문인 팔달문과 함께 성벽 일부가 훼손된 걸 빼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보물로 지정되었다.[1]

3. 기타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어서 서장대장안문 쪽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화서문을 중심으로 팔달산 방면으로 화서 공원이, 장안문 방면으로 장안 공원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주로 노인들이 자주 오는 곳이다.

화서문 옆에는 서북공심돈이 있는데 이 공심돈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2]

수원시 팔달구화서동이 이 곳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4. 주변 시설

화서문 앞으로 팔달로가 지나가며, 화서문 안쪽 근처에는 선경도서관화성행궁이 있다.

5. 외부 링크

6. 보물 제403호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또한 주위를 돌아가며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이 뚫린 낮은 담을 쌓아 보호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1] 이는 옆에 위치해 있는 서북공심돈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서북공심돈은 내부 관람이 아예 불가능하며, 화서문은 내부 관람은 가능하나 장난을 절대 쳐선 안된다.[2] 남한산성에도 비슷한게 있는데 내부가 비게 한 것은 화성이 최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