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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 }}}}}}}}} |
1. 개요
행궁(行宮) 혹은 이궁(離宮)은 군주나 왕족이 본궁 밖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건축물을 말한다. 왕이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숙소로 한번 결정하면 행궁이라고 불렸다. 임금이 어떤 곳에 행(行)하면 자연히 그곳이 행궁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번 행궁이 되면 이후에도 계속해서 궁궐과 같이 대우하였다.행궁의 목적은 크게 전란대비용과 휴양용(초수행궁), 능행용으로 나뉘지만, 이외에도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호, 봉안하기 위해 만든 전주행궁 같은 특수한 행궁이나 이태조 행궁 같은 저택형 행궁도 있다.
왕이 지방에 행차하는 순수는 고대부터 있었고[1] 왕이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 숙박할 리는 없으니 행궁 제도도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지만, 자세한 기록이 부족해 구체적인 목록이나 관리 실태를 알기는 힘들다. 그러다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뤄졌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더욱 제도화되어 수많은 행궁이 건립되었다. 특히 고려는 대규모 행궁을 건립하여 사용하였는데, 북쪽에 위치한 서경(평양)의 대화궁과 남쪽 동경(경주)의 조유궁[2]까지 전국 곳곳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대부분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陵幸, 왕 또는 왕비의 묘인 능에 가는 것), 원행(園幸, 세자나 세자빈의 묘인 원에 가는 것), 강무(講武, 군사훈련 성격의 사냥에 가는 것), 온행(溫幸)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왕이 행궁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영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왕이 임시로 머문 이후 정식으로 행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영변행궁과 영유행궁, 의주행궁이다.
조선 후기에는 외침을 당해 왕이 임시로 피신하면서 이용한 곳이나 미리 왕실의 보장처에 행궁을 마련하면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러한 목적에서 만들어진것이 강화행궁과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으로 이들 행궁은 산성 내부에 위치하여 외부의 적으로부터 왕을 보호하고자 세운 임금 전용 행궁이었다.
왕이 별 이유 없이 지방으로 이동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소모되었으므로 조선 시대부터는 예산 낭비를 막는다는 의미로 지방 순수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임금이 경기도 안쪽이나 온양온천 등 한양에서 가까운 지방까지만 주로 돌아다니면서 자주 쓰이지도 않는 행궁의 규모도 점차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당시 지방에 위치한 별궁과 행궁들도 대부분 불타면서 사실상 대규모 행궁과 이궁시대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부터는 남한산성 행궁과 강화행궁, 화성행궁과 같이 중대규모 행궁이 다시 중건되거나 건립되기도 하였다. 행궁제도의 전성기인 고려 시대 이후 쇠퇴하던 행궁제도는 광무 6년(1902)에 지어진 대한제국의 풍경궁을 끝으로 그 찬란했던 막을 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에 지어진 행궁들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던 안동별궁과 사동궁등도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에서 개발을 명목으로 강탈 후 철거했다. 현재 원형을 유지하는 행궁은 함흥본궁, 화성행궁, 남한산성 행궁인데 화성행궁과 남한산성 행궁은 완전히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고 함흥본궁은 한국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지만 모래가 아닌 잔디를 까는 등 잘못된 부분이 있다. 운현궁, 춘천이궁등 소수의 전각만 보존된 경우도 있다.
2. 고려 이전의 행궁
고대에도 행궁은 많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고려-조선시대 각종 전란으로 인한 소실 때문에 실물이나 운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사라졌다. 현재는 고대의 행궁은 대부분 찾아보기 힘들다.2.1. 신라의 행궁
- 포석정 - 현재 논란이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곳에 이궁이나 행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남궁 - 남궁은 행궁인지 이궁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지인' 이라는 기와가 발견된 시기가 통일신라 말기와 유사하다.
- 북궁 - 상황 진성여왕이 거주하는 용도로 쓰였고 본궁과 별개의 위치이나 평소 용도는 알기 어렵다.
- 적판궁 - 금입택 리스트 중에서 한자가 같은 '판적택'과 같은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본래 판적택은 김균정의 저택이었는데 아들 김우징이 왕이 된 이후에 아버지의 저택을 별궁으로 지정해 판적궁(적판궁)이라 불렀던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2.2. 후고구려의 행궁
2.3. 후백제의 행궁
- 금산사 - 금산사는 후백제의 임시행궁의 역할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이 이곳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 동고산성 - 후백제 도성 내에도 행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여부는 불분명하다.
3. 고려시대의 행궁
고려의 경우는 행궁이지만, 이궁과 동일한 지위를 누리었고, 일단 행궁의 규모 자체가 기본 중대규모이다. 거기다가 고려의 궁궐을 쌓는 방식인, 계단식 건축을 하였으니, 실제로 느끼는 규모는 조선시대 행궁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3.1. 개성지역의 행궁
- 수창궁 - 지어질 당시에는 이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고려 말기에는 법궁으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 북천동궁
- 수춘궁
- 연경궁
- 명복궁
- 양화궁
- 현덕궁
- 창락궁
- 승천부 대궐 - 지어질 당시에는 이궁이었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법궁의 지위도 같이 누렸다.
- 흥왕사
- 안화사
3.2. 개성지역 이외의 행궁
- 강화도 지역의 행궁
- 강도본궐 - 현재 추정 궁터로는 '고려궁지'라 명명되어 있으나,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 여몽전쟁 이후 허물어졌다.
- 연경궁 - 강도 연경궁으로 불린다.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 견자산 남쪽 아래 어딘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제포궁 - 현재의 강화중성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 승천부 신궐
- 경령전
- 마니산 이궁
- 흥왕리 이궁
- 삼량성 가궐 - 삼량성 안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도 터로 전하는 곳이 남아 있다.
- 신니동 이궁 - 정식명칭은 전해지지 않으며, 이궁이라는 표현이 기록되었다.
- 신니동 가궐 - 정식명칭은 전해지지 않으며, 가궐이라는 표현이 기록되었다.
- 강안전
- 용암궁
- 장봉궁
- 관서궁
- 인화리 이궁 - 현재 고려 궁터로 추정하는 곳이다.
- 신정리 이궁 - 현재 고려 궁터로 추정하는 곳이다.
- 선원사 - 현재 이궁터라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온다.
강화도 지역에서는 개성지역의 궁궐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들 궁이 행궁으로서의 지위는 개성지역의 행궁과 이궁들과 똑같이 동일하였다. 다만 현재 강화도에서 이궁이나 법궁으로 사용되었던 궁은 남아있지 않다.
- 경주 지역의 행궁
- 서울(남경)의 행궁
- 남경 별궁
- 남경 대궁 - 남경별궁과는 다른 궁궐로, 고려사에서 "남경 새 대궐" 이라는 문구를 쓴 것으로 보아서 남경지역에 대형 궁궐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위치는 지금의 청와대 위쪽으로 이후 조선의 궁궐과는 위치가 다르다.
- 강원도 지역의 행궁
- 기타 등등지역의 행궁
4. 조선시대 행궁
4.1. 경기지역의 행궁
- 화성행궁- 화성행궁은 현재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행궁로에 있으며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행궁이다.
- 회암사
- 수원행궁- 지금의 융릉 자리에 있었던 행궁이다. 또한 화성행궁과는 엄연히 다른 행궁이다.
- 이태조 행궁
- 연희궁- 현재는 서울에 속해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영역 밖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한성부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한성부의 범위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한성부에도 포함된다.
- 풍양궁
- 낙천정- 다른 말로 '낙천이궁'이라고 한다.
- 광주행궁
- 양주행궁
- 강화행궁
- 시흥행궁- 현재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지역에 속한다.
- 개성행궁- 고종 9년(1872) 3월. 고종의 개성 행차시에 사용되었다. 4박 5일 동안 이 곳에 머물렀다.
- 과천행궁
- 노량행궁- 용양봉저정이라고도 불리운다.
- 사근행궁- 경기도 의왕시에 터가 남아있다.
- 안양행궁 - 경기도 안양시 안양1번가 내에 표석이 남아있다.
- 안산행궁
- 월미행궁- 인천광역시 월미도에 위치한 행궁으로, 한때 복원이 계획되었으나 정확한 터를 찾지 못하여 계획이 좌초되었다.
- 이천행궁
- 파주행궁
- 풍덕행궁
- 통진행궁
- 부평행궁
- 낙생행궁
- 양천행궁
- 진위행궁
4.2. 경기지역 밖의 행궁
- 경상도
- 평안도
- 황해도
- 강원도
- 충청도
- 온양행궁
- 천안행궁
- 초정행궁 - 청주시에 위치한 초정약수터 인근에 지은 행궁으로, 세종대왕이 눈병 치료를 위해 사용하였으며 현재 복원되었다.
- 노은리 행궁- 명성황후가 머물렀던 행궁이 있던 터이다.
- 직산행궁 - 천안 직산에 위치한 행궁으로, 온양행궁 행차길에 주로 이용되었다.
- 목천행궁
- 전의행궁
- 보은행궁
- 신도안 행궁- 계룡산 행궁터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의 이궁이 있었으나 한양이 도읍이 된 이후 쓰이지 않았다.
- 전라도
- 함경도
[1] 고대는 친정의 의무가 강했고 삼국시대엔 전쟁이 꾸준히 잦았으며, 행정 시스템이 더 부실했기 때문에 왕이 전국 여기저기 직접 시찰한 일은 고려, 조선 때보다 오히려 고대에 훨씬 더 많은 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북한산 등에 있던 신라 진흥왕 순수비.[2] 다만 조유궁은 현종 때 경주에 있는 걸 헐었다는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고려왕조가 지은 행궁이 아니라 고려 초기까지 남아있던 신라 궁궐의 일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