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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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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楊州 檜巖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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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면적 323,117㎡
지정연도 1964년 6월 10일
제작시기 고려 충숙왕<재>15년(1347)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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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조선 왕실의 원찰2.2. 석물들의 수난과 새로운 회암사
3. 가람4. 발굴5. 비석
5.1. 선각왕사비
5.1.1. 보물 제387호
5.2. 지공선사 부도비
5.2.1.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6. 관련 문화재
6.1.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
6.1.1. 보물 제2012호
7. 외부 링크8. 사적 제128호9. 교통10. 같이보기

1. 개요

檜巖寺(址)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이다.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폐사되어 지금은 터만 남았다. 숭유억불 정책과 관련된 좋은 예시이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2022년에 유네스코 잠정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명칭 소재지
천보산 회암사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회암동 4) http://www.hoeamsa.or.kr/
회암사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96(회암동 21)
회암사지박물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1(율정동 299-1)

2. 역사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 명종 4년(1174년)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왔다 갔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어서, 회암사가 그 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의 일로, 천축의 승려 지공(指空, 1300∼1363)[1]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2] 266칸짜리 거대한 사찰로 중창했다고 한다.

충목왕 즉위년(1344년)에 나옹(懶翁, 1320-1376)이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우왕 2년(1376년)[3]에 나옹이 회암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중창하였으나, 이 일로 탄핵을 받아 경남 밀양시 영원사(靈源寺)로 가던 도중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2.1. 조선 왕실의 원찰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회암사의 주지였으며 고려 말 불교계에서 고승으로 추앙받은 나옹화상의 제자 무학대사를 (스승 나옹화상처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불교 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숭상하였다. 반면 불교를 싫어한 태종 이방원은 불교가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본격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다. 재위 중 원경왕후가 병에 걸리자 승려들을 불러 모아 '너희들이 평소에 그리 연마하는 도가 얼마나 효험 있는지 보자. 만약 아무 효과도 없으면 불교는 그 날로 조선에서 완전히 박멸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승려들은 정말 내일이 없다는 심정으로 절박히 기도했고,[4] 원경왕후의 병세가 완화되자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주는 걸로 답례를 했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태조, 정종, 세종, 세조 등 국왕들의 지원에 힘입어 회암사는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을 두었다. 조선 초기는 국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반대하는 신료들을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회암사는 역대 국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함경도에 있는 안변의 석왕사(釋王寺)[5]처럼 더욱 특별히 조선 왕실이 보호한 곳이다. 아무리 유교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도, 한번 왕실의 전통으로 정착하면 단지 '왕실의 전통'이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명분을 획득하였다. "유교에 어긋나기는 하는데, 역대 국왕들도 인정하셨고 손 안 대셨잖아. 그러고도 선왕들께서 잘못하셨다고 주장하냐?" 하고 물었을 때, "잘못하셨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6]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선왕들의 품위를 지켜가며 공격해야 하니 논쟁에서 불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신하들,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자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왕실 사찰'로 기능하는 이 거대한 이, 조선 유학자들의 눈에는 그저 타도해야 마땅할 사회의 악으로 비춰졌다.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며 회암사를 공격하였다.

명종 20년(1565), 불교를 많이 후원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문정왕후에게 지원받으며 회암사에 거처하던 승려 보우제주도귀양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 죽었고, 회암사 또한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6세기에 망했음은 임진왜란 무렵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군기시가 아뢰었다.

"각종 화포를 주조할 일을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중략)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 그 무게는 이 종보다 갑절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져다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도 조총을 주조하는데 주철이 부족하니, 그 군인들과 힘을 합해 실어다가 화포에 소용될 것을 제외하고 수를 헤아려 도감에 나누어 쓰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8년(1595) 6월 4일자 2번째 기사

즉 회암사는 1595년 이전에 폐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란기에 으레 있을 법한 화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폐찰된 시기가 적절히 맞아 유생들이 회암사에 방화를 하는 등 조직적으로 파괴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고 하므로 명종이 금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략) 다만 금년 봄에 송도(松都)의 유생이 음사(淫祠)를 태워버린 뒤로 사방에서 그것을 본받아 유림(儒林)들이 한갓 혈기의 용맹을 부려 방자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소문을 들으니 여항(閭巷)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기를, 혹은 회암사(檜巖寺)를 태우려고 한다 하며,

(중략)

대사성으로 하여금 관학 유생에게 알아 듣도록 타이르게 하라."
명종실록 명종 21년(1566) 4월 20일자 3번째 기사

심지어 위에 인용한 명종실록의 기록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의 의견인 "사신 왈(史臣曰)"이 있는데,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해서 일을 못하게 했느냐?'는 식이다. 즉, 회암사를 조용히 불태웠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제왕은 안팎의 분별을 엄격하게 하여 말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외간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구중 궁궐 깊은 곳에 날아들어 임금의 귀를 놀라게 하고 미혹되게 하기를 이와 같이 쉽사리 하였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간사한 말이 임금의 마음을 의혹시킴으로써 마침내는 왕의 말에 욕됨을 남겼으니 또한 애석한 일이다.

회암사의 석불 유물은 대부분이 목이 잘렸다. 사용하던 그릇들도 기단 아래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누군가가 그릇들을 계단 아래에 버렸다는 뜻이다. 사찰이 없어져도 재건하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회암사나 흥왕사처럼 큰 사찰이 조선 시대에 재건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회암사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선왕들이 인정하신 바'라고 하면서 절에서 역대 임금의 제사를 지내게 했겠지만, 이미 불타 없어진 마당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돈을 들여 절을 재건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후대의 국왕들은 회암사를 잊어버렸고, 유학자들이 원하던 대로 종묘가 왕실의 사당으로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 다만 불교 자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조선 국왕들은 선대왕들의 능침 관리를 인근 흥천사봉은사, 봉선사 같은 사찰에 맡겼고, 용주사처럼 원찰을 더 짓기도 했다.

2.2. 석물들의 수난과 새로운 회암사

폐사가 된 이후로 세월은 흘렀다. 순조 21년(1821)에 광주에 사는 이응준(李膺峻)이라는 유생이 '회암사 삼화상(三和尙)[7]의 비석과 부도를 없애고, 그 자리에 선친의 묫자리를 쓰면 대길(大吉)할 것'이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지공의 부도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다가 이응준은 지공선사비, 나옹의 부도, 무학대사비를 부수고 부도 안에 있던 금은으로 된 사리함도 훔쳤다.[8] 순조는 이 사건을 보고받고 범인을 유배 보냈다.

숭유억불 국가인 조선의 국왕이 승려의 비석이나 부도를 부쉈다고 유배 보냄을 의아하게 여길 수 있지만, 조선왕실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학대사이성계의 건국공신인 데다가 비석도 태종이 명을 내려 변계량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고 공부(孔俯)가 글씨를 쓰게 하여 세운 것이기 때문이었다.[9] 태종의 명령으로 만든 비석을 부숴버렸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개국공신이므로, 무학의 사리탑을 부숨은 바꾸어 말하면 개국공신의 무덤을 훼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실의 권위와 체면이 달렸기 때문에, 범인을 모른다면 모르겠으되 아는 이상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 사건을 당시 경기도 관찰사 한긍리(韓兢履)가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무학대사비가 왕실과 관련되기에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의정 한용귀(韓用龜)는 '사리탑을 부순 것은 관을 열어 시신을 본 것과 같고, 비석을 부순 것은 임금의 글을 훼손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극형이 마땅하므로 사형에 처해야 하지만, 이런 경우에 직접 사형을 명령한 법조항이 없으므로 그에게 엄벌을 가한 뒤 섬으로 유배 보내고 섣불리 사면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뭘 이런 거까지 임금께 아뢸 필요가 있느냐는 취지로 말해서 순조한테 지적당한 좌의정과 우의정은 덤. 결국 다시 논의한 끝에 한용귀의 주장대로 사형을 감하여 장형을 가한 뒤 섬으로 유배를 보내었다.# 결국 이응준이 대길하지는 못한 듯하다.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와 부도를 세웠으며, 회암사터에서 700m 정도 떨어진 북쪽 골짜기에 따로 사찰을 지어서 이름도 똑같이 '회암사'라고 했다. 당시 부서진 비석의 일부는 새로 세워진 비석 주변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현재의 회암사 조선왕조실록에서 순조의 발언을 읽어보면, 순조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무학대사비가 자기 시대에 파괴되었음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또 분노한 듯하다.

순조 때에 새로 지은 동명의 '회암사'를 과연 고려 회암사의 후신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이 새로운 회암사는 이후에도 살아 남아서 이어졌고, 1922년 남양주 봉선사의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과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초상화)을 모시면서 중창되었다. 이후 1976년 호선(昊禪)이 큰 법당과 삼성각 · 영성각(影聖閣) 등을 중건함으로써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3. 가람

본래의 회암사 터는 산 기슭에 있어 약간 경사가 있지만 대체로 평탄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퍼진 부채꼴 모양 부지를 8단으로 나눠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하였다. 돌을 쌓아 만든 수로가 절을 둘러싼다는 점이 특이하다. 근처 계곡의 물을 끌어와 지상을 흐르게 한 듯하다. 이러한 구성은 고려시대의 건축지에서 종종 발견되는 점이다.

회암사 복원도를 보면 건물 배치가 경복궁 같은 궁궐과 흡사하다. 남문과 중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보광전(대웅전)과 그뒤로 몰려있는 주요 건물들의 배치 등에서 그러한 유사성이 드러난다. 단순히 구조 뿐만아니라 보광전 주위에는 궁궐이나 종묘 등에나 있는 박석[10]이 깔려있었고, 궁궐에서만 사용 가능하던 비싼 청기와도 출토되었다. 이성계가 집무하던 정청에 청기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말선초 때 문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회암사 중창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완성된 건물의 총 칸 수는 262칸이었다고 한다.[11] 또한 "사옥(寺屋)의 굉장미려(宏壯美麗)하기가 동국(東國)에서 제일이다." 하였으며, "비록 중국이라도 이런 절은 많이 볼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4. 발굴

회암사 터가 어디인지는 예전부터 전해왔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큰 절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1960년대에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몇 차례 조사가 있었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1997년이 되어서야 경기도박물관이 시범적으로 조사하여 비로소 회암사의 진짜 규모와 가람배치를 알게 되었다. 이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2016년에 완료되었다.

발굴 당시 무렵이 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된 시기와도 겹친 영향인지, 이 시점 이후의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선 회암사 복원이 양주시에서 공약으로 제시되곤 한다. 하지만 회암사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양주시 재정으로는 어림없고, 경기도 내지 중앙정부 주무관청인 문화재청의 예산 지원이 필수지만 아직 구체화된 계획은 없다.

회암사지 바로 옆에 군부대가 있는 것도 복원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지만, 기실 복원한 다음도 문제다. 그 넓은 대지에 그 큰 건물을 재건한 다음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사람 손이 닿지 않으면 목조 건물은 순식간에 퇴락한다. 재건한 사찰을 불교 종단에 맡겨 실제로 종교 시설로 기능하는 사찰로 유지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긴 하다. 회암사의 경우는 이미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이 원래의 터 근처에 이미 세워졌고[12] 중창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 사찰을 모체로 '종교 시설'로서의 회암사를 복구하는 것도 방법이 되긴 하다.

2006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실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관련기사

2012년 7월 발굴한 유물 및 경기도박물관 등지에 있던 유물들을 모아 양주시립 회암사지 박물관을 개장하여 회암사지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회암사의 사리탑에는 회암사의 창건주 지공과 그 제자 나옹의 사리를 지공이 가져온 석가여래, 가섭불, 정광불의 진신사리와 봉안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불법으로 반출되어 1939년 미국의 보스턴미술관이 한 업자로부터 사들여 보관해 왔다. 2004년에 처음 존재가 확인되고 2009년부터 반환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지지부진했는데, 2023년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때에 김건희 여사가 다시금 회암사 사리구의 반환을 요청해서 반환 논의가 재개됐고, 최종적으로 사리 반환이 합의되었다. # 2024년 4월 16일에 보스턴박물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사리는 18일에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19일 조계사의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회암사 3여래2조사 사리 이운 고불식이라는 이름으로 고불의식을 거행했다. 5월 19일에[13] 최종적으로 원래의 위치인 회암사에서 봉안대법회를 열어 사리를 봉안하게 된다. # 사리는 반환되었지만 사리장엄구는 반환되지 않고 대여 형식으로 내 주기로 합의되었고, 추후 추가 협의가 더 있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한편 조계종은 돌려받은 사리를 담을 사리구를 별도로 제작했다. #

5. 비석

5.1. 선각왕사비

5.1.1. 보물 제387호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떠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 해석문[14] #====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

고려국(高麗國)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 시(諡) 선각탑명(禪覺塔銘)

전조열대부(前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領藝文) 춘추관(春秋館)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지서연사(知書筵事) 신(臣) 이색(李穡)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상호군(上護軍) 제점(提點) 서운관사(書雲觀事) 신(臣) 권중화(權仲和)는 교지(敎旨)에 따라 단사(丹砂)로 전액(篆額)과 글씨를 쓰다.

공민왕(玄陵)께서 재위(在位)한 지 20년만인 경술년(1370) 9월 10일 왕사를 개경(開京)으로 영입(迎入)하여, 16일에 왕사가 주석하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왕사도 나아갔으며, 공민왕께서도 친히 행차(幸次)하여 지켜보았다. 왕사는 염향(拈香)을 마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말씀하기를 “금고(古今)의 과구(窠臼)를 타파하고, 범성(凡聖)의 종유(蹤由)를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의 명근(命根)을 베어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함께 떨쳐 버렸다. 조종(操縱)하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변통變通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있다.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교화 방법은 동일한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승려들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모든 응시자의 대답은 맞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리(理)에는 통하였으나 사(事)에는 걸리고, 어떤 이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가 일구(一句)의 질문에 문득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다. 환암혼수선사(幻庵混脩禪師)가 최후에 와서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에 대하여 낱낱이 문답하였다. 공부선(功夫禪) 고시(考試)가 끝나고 왕사는 회암사(檜嵒寺)로 돌아갔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8월 26일 공부상서(工部尙書)인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친서(親書)와 직인과 법복과 발우(鉢盂) 등을 보내어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칭(法稱)과 함께 왕사로 책봉하였다. 이어 송광사(松廣寺)는 동방(東方) 제일의 도량이므로 이에 거주토록 명하였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 가을에는 지공(指空)대사가 지시한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서 주석하라는 기별(記莂)이 우연히 생각나서 곧 회암사로 이석(移錫)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의 부름을 받아 회암사 법회(法會)에 나아갔다가 여기에 주거(住居)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왕사가 이르기를 “선사(先師)인 지공선사께서 일찍이 이 절을 중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병화(兵火)로 불타버렸으니 그 뜻을 계승하지 않겠는가?”하고, 이에 대중 승려들과 협의하여 전당(殿堂)을 확장하여 공사(工事)가 모두 끝나고 병진년(우왕 2, 1376) 4월에 크게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회향하였다.

이 때 대평(臺評)이 유생(儒生)의 입장에서 불교의 왕성(旺盛)함을 시기하여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들의 오고 감이 계속 이어져 밤낮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아 혹은 지나치게 맹신(盲信)하여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교지(敎旨)를 내려 왕사를 서울과 멀고 벽지(僻地)인 형원사(瑩原寺)로 이주(移住)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발을 재촉하여 가던 도중에 왕사가 병세가 있어 가마를 타고 삼문(三門)을 나와 못가에 이르러 스스로 가마꾼을 인도하여 열반문(涅槃門)을 통과할 때 모든 대중大衆이 무슨 이유인지를 의심하면서 실성통곡하므로, 왕사가 그들을 돌아보시고 말하기를 “노력하고 또 거듭 노력하여 나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가다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그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러 호송관(護送官)인 탁첨(卓詹)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심하니 뱃길로 가자” 하여 배로 바꾸어 타고 7일간 소류(遡流)하여 여흥에 이르렀다. 이 때 또 탁첨에게 부탁하기를 “며칠만 머물러 병을 조리하고 떠나자”고 하니 탁첨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륵사(神勒寺)에서 머물고 있는데 5월 15일에 탁첨이 또 출발하기를 독촉하므로 왕사가 이르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 하고, 이 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군민(郡民)들이 바라보니 오색(五色) 구름이 산정(山頂)에 덮여 있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 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 얻어 개인이 감춘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승려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 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대사가 입적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추증하고, 신(臣) 색(穡)에게는 비문(碑文)을 짓고 신 중화(仲和)로 하여금 단사(丹砂)로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게 하였다.

신이 삼가 대사의 행적을 살펴보니, 휘는 혜근(惠勤)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며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였다. 세수는 57년을 살았고 법랍은 38세였다.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이며,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俱)이니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로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어머니 정씨가 꿈에 금색(金色) 새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쪼다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충숙왕 7, 1320) 1월 15일에 탄생하였다.

나이 겨우 20살 때 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하게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선사의 지도를 청하였다.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선사가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충혜왕 5, 1344)에 회암사로 가서 주야로 홀로 앉아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고 유학할 뜻을 굳히고, 출국하여 무자년(충목왕 4, 1348) 3월 연도(燕都0에 도착하여 지공대사를 참방하고 법(法)을 물었는데 서로간의 문답이 계합(契合)하였다. 지정(至正) 10년(충정왕 2, 1350) 경인(庚寅) 정월(正月)에 지공대사가 대중을 모아놓고 법어(法語)를 내리니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나, 혜근(惠勤)이 대중 앞에 나와서 몇 마디의 소견(所見)을 토출(吐出)한 다음, 삼배(三拜)하고 물러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백팔대(百八代) 조사(祖師)이다. 그 해 봄에는 남쪽으로 강절(江浙) 지방을 두루 순례하고 8월에는 평산(平山)대사를 친견하였더니, 평산이 묻기를 “나에게 오기 전에 누구를 친견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서천의 지공대사를 만나 뵈었는데 일용천검(日用千劒)하라 하더이다”라 하였다. 평산대사가 이르기를 “지공천검(指空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일검(一劒)을 한 번 보여 보아라”고 하였다. 혜근이 좌구(坐具0로 평산을 덮여 씌워 끌어 당겼다. 평산은 선상(禪床)에 거꾸러져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혜근이 이르되 “나의 이 칼은 능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한 능히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평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 때 평산은 설암(雪嵒)이 전수(傳授)한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신물(信物)로 주었다.

신묘년(충정왕 3, 1351) 봄에는 보타낙가산(寶陁洛迦山)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상에 예배하고, 임진년(壬辰年)에는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千嵒)대사를 친견하였다. 천암은 그 때 마침 일천여명의 납자(衲子)를 모아 놓고 입실(入室) 자격고시(資格考試)를 열고 있었다. 이 때 천암이 혜근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혜근이 대답하니, 천암이 이르기를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기 전에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니, 혜근이 이르되 “오늘은 4월 2일입니다”라 하니, 천암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북방(北方)으로 돌아가서 연도(燕都) 법원사(法源寺)에 있는 지공대사를 두 번째로 친견하였다. 이 때 지공은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신물로 전해 주었다. 이에 다시 연대(燕代)의 산천(山川)을 두루 돌아보았으니, 소연(蕭然)한 한 한가로운 도인(道人)으로써 그 이름이 원조(元朝)의 궁내(宮內)에까지 들렸다.

을미년(공민왕4, 1355) 가을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대도(大都)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병신년(공민왕 5, 1356) 10월 15일 지공으로부터 수법(受法)한 기념법회(紀念法會)를 가졌는데, 순제는 원사(院使)를 보내어 축하하였고,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를 가지고 와서 선사하였다.

왕사가 가사 등의 선물을 받고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공적(湛然空寂)하여 본래부터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다. 이 가사의 휘황하고 찬란함이여!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하니, 이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왕사께서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구중궁(九重宮) 금구중(金口中)에서 나왔느니라” 하고, 곧 가사를 입고 염향(拈香)하고 성복(聖福)을 축원한 다음 법상(法床0에 올라 앉아 주장자(柱杖子)를 가로 잡고 몇 말씀 하고 곧 내려왔다.

무술년(공민왕 7, 1358) 봄에는 지공대사를 하직하고 기별(記莂)을 받아 귀국길에 올라 동쪽으로 돌아오는 도중 머물기도 하고 계속 오기도 하면서 청중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설법해 주었다. 귀국한 후 경자년(공민왕 9, 1360)에는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에는 공민왕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왕사를 개경(開京)으로 영입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헌납하였으며, 태후(太后)도 직접 찾아와서 보시(布施)를 하였다.
공민왕이 신광사(神光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왕사는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공민왕도 매우 섭섭하여 실망 끝에 말하기를 “이젠 불법(佛法)에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하니, 부득이 신광사로 갔다. 11월에 이르러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경기(京畿) 지방을 유린하였으므로 거국적(擧國的)으로 국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승려들도 공포에 휩싸여 왕사께 피난을 떠나시라 간청하였다. 왕사가 말하기를 “오직 생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적(賊)들이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요지부동하였다.

수일 후 피난을 떠나시라고 간청함이 더욱 화급(火急)하였다. 이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었다. 의관(衣冠)을 갖추고 왕사께 절을 올리고 고하기를 “만약 대중이 절을 비우고 떠나면 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애버릴 것이오니, 원컨대 왕사의 뜻을 고수(固守)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장(土地神將)의 탱화를 보니 그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이 꿈에 만난 신인과 같았다. 신인의 말대로 홍건적들은 과연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에는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 공민왕께서 내시(內侍)인 김중손(金仲孫)을 파견하여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했다. 그리하여 을사년(공민왕 14, 1365) 3월 궁궐로 나아가서 있다가 퇴산(退山)을 간청하여 비로소 윤허(允許)를 받아 용문(龍門)·원적(元寂) 등 여러 산을 순례하였다. 병오년(丙午年)에는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으며, 정미년(丁未年) 가을부터는 청평사(淸平寺)에 주석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보암(寶嵓)대사가 원(元)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편에 지공(指空)대사의 가사(袈裟)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왕사에게 전달하면서 말하기를 “지공대사가 유언하신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기유년(己酉年, 공민왕 18, 1369)에는 다시 오대산에 들어가 머물렀으며, 경술년(공민왕 19, 1370) 봄에는 원나라 사도(司徒)인 달예(達睿)가 지공대사의 영골(靈骨)을 모시고 왔으므로 회암사에 조장(厝藏)하고 왕사는 스승의 이 영골탑(靈骨塔)에 예배를 올렸다. 이어 왕의 부름을 받아 광명사에서 여름 결제(結制)를 맺어 해제(解制)를 마치고 초가을에 회암사로 돌아와 9월에 공부선(功夫選) 고시를 베풀었다. 왕사가 살던 거실(居室)을 강월헌(江月軒)이라 하였다.

왕사는 평생에 걸쳐 세속문자(世俗文字)를 익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어떤 선비이든 시(詩)를 음영(吟詠)하자고 청해오면 붓을 잡자마자 곧 시게(詩偈)를 읊고, 마음속으로 깊이 구상하지 않으나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심원(深遠)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묵화로 산수(山水) 그리기를 좋아하여 수도(修道)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호라! 도(道)가 이미 통달되었으면 다방면에 능한 것이 또한 마땅하구나! 신 색(穡)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비명(碑銘)을 기록하고 명(銘)을 짓는다.

살피건대 위대(偉大)하신 선각선사(禪覺禪師)여!
기린 뿔이 하나이듯 희귀(稀貴)하도다.
역대 임금 지극 정성 왕사(王師)로 모셔
인천중(人天衆)의 안목(眼目)이며 복전(福田)이로다.
천만납자(千萬衲子) 한결같이 귀의(歸依)하옴이
샛강물이 바다에로 모임과 같아
나옹(懶翁)대사 높은 경지(境地) 아는 이 없어
갈고 닦은 그 도덕(道德)은 깊고도 넓네.
왕사께서 태어날 때 혁혁(赫赫)한 새 알
떨어뜨린 그 새 알이 회중(懷中)에 들다.
열반(涅槃) 때의 그 용마(龍馬)는 팔부(八部)인 천룡(天龍)!
입비사(立碑事)를 건의하여 윤허(允許)를 받다.
신비하신 그 사리(舍利)는 백오십오과(百五十五粿)
기도(祈禱) 끝에 분신(分身)함은 오백오십팔(五百五十八)
여천(驪川) 강물 길고 넓어 도도히 흘러
천강(千江) 유수(流水) 천강월(千江月)의 밝은 달이여!
분신(分身)이신 그 보체(寶體)는 공색(空色)을 초월(超越)
하늘 높이 비춘 달이 물속에 왔네!
높고 높은 왕사의 덕(德) 헤일 수 없고
만고(萬古)토록 우뚝하게 불멸(不滅)하소서.

선광(宣光) 7년(우왕 3, 1377) 6월 일
-해석자 국립문화재연구원-

5.2. 지공선사 부도비

5.2.1.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양주 회암사는 고려 후기 지공 선사가 방문하여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하자 크게 중창되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 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 이성계와 효령대군 등 불교를 신봉했던 왕실에서 예불을 올리기도 했다. 이 석비는 지공의 행적을 기록하였고, 부도와 한 쌍으로 배치되어 있어 탑비 성격의 부도비임을 알 수 있다. 사각형 대석을 높게 마련하여 비신을 올렸고, 다시 팔작지붕형의 옥개로 마무리하여 조선 후기 유행한 석비 양식을 함유하고 있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지공의 탑비는 원래 1378년 5월에 세워져 조선 시대 내내 잘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응준(李膺埈)이 1821년 무학대사 탑비와 함께 훼손하였다. 이 사실을 조정에서 알고 다시 세우도록 하여 1828년 중건되었는데, 현존하는 지공 선사의 부도비는 이때 건립된 것이다.

지공은 인도 출신으로 중국 원나라에 와서 활약했던 승려로 그 명성이 높아 고려 승려들도 원나라에 유학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지공은 1326년부터 1328년까지 2년 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물면서 금강산을 비롯하여 감로사, 통도사, 회암사, 화장사 등 여러 지역의 사찰을 순례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양주 회암사에도 그의 부도와 석등, 탑비가 건립되었다.
====# 해석문[15] #====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비(檜巖寺 指空禪師 浮屠碑)

서천(西天 : 인도) 제납박타존자부도명 병서(提納薄陁尊者浮屠銘 幷序)
벽상 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영 효사관 서연 예문관 춘추관사 우문관 대제학 상호군 한산부원군(壁上 三韓 三重大匡 門下侍中 判典理司事 領孝思觀 書筵藝文館 春秋館事 右文館大提學 上護軍 韓山府院君) 이색(李穡)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황주목사 황주진병마첨절제사(黃州牧使 黃州鎭兵馬僉節制使) 이희현(李羲玄)이 쓰다.

가섭(迦葉) 108대 법손으로 백팔전(百八傳)을 이어받은 제납박타존자(提納薄陁尊者) 선현(禪賢)을 지공(指空)이라한다.
태정(泰定) 연간에 난수(難水) 가에서 천자를 뵙고 불법을 강론한 것이 천자의 뜻에 맞았다. 천자께서 담당 관리에게 해마다 옷과 양식을 하사하도록 지시하셨다. 대사께서 “이것을 위함이 아니다.”하시고는, 곧 동쪽으로 길을 떠나 고려 금강산(金剛山) 법기도량(法起道場)에서 예불을 올렸다. 그러나 천자께서 다시 부르시니 연경(燕京)으로 돌아가셨다.
천력(天曆) 초, 천자께서 조서를 내려 총애하는 중들에게 궁궐 안뜰에서 불법을 강론토록 하고 친히 참석하여 들었다. 이때 중들이 천자의 평소 은총만 믿고, 대사에게 대항하며 기세를 부렸으며, 자기들과 의견이 맞지 않음을 미워하여 불법을 강론하지 못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중들은 목이 베이거나 물리침을 당하였으며, 대사의 명성은 더욱 국내외에 떨쳐 드러났다.
지정(至正) 연간, 황후와 황태자께서 연화각(延華閣)으로 대사를 모시고 법을 물으니, 대사께서 “불법을 배울 자는 따로 있으니,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시고는 또 “만복을 누리소서. 만복 중에 하나가 모자라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하셨다.
대사께 바치는 주옥(珠玉)을 사양하며 받지 않으셨다. 천력(天曆) 연간 이후 10여 년 동안 잡숫지도 말씀하시지도 않으셨다. 입을 여시자 “나는 천하의 주인이다.”하시고, 또 후비들을 꾸짖어 “다 내 시녀로구나.”하셨다. 듣는 이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아무도 그 까닭을 묻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 위에 알려지자, 천자께서 “그는 불법의 왕이니 마땅히 그리 자부할 것이다. 어찌 우리 속세의 일과 관계있겠느냐!” 하셨다.
중원(中原)에 병난이 일려고 할 때, 대사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너희들은 아느냐? 나의 군사가 많다는 사실을. 아무 곳에 몇 만 명이 있고, 아무 곳에 몇 만 명이 있다.”하셨다. 거처하시는 절에 고려의 중들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느냐? 내 북을 쳐 공격할까 하다 그만두었다.”하셨다. 며칠 후 요양성(遼陽省)에서 급히 아뢰기를, “고려의 병사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하였다.
경사(京師 : 서울)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대사께서 항상 경사의 사람들에게 “속히 떠나라.”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자께서 북으로 출정한 사이에, 중원의 병마가 입성하여 부(府)를 세우고 북평(北平)이라 하니, 대사께서 말씀 하신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대사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이름은 사자협(師子脇)이요, 할아버지 이름은 곡반(斛飯)이니, 모두 가비라국(伽毗羅國)의 왕이시다. 나의 아버지 이름은 만(滿)으로 마갈제국(摩竭提國)의 왕이시고, 나의 어머니는 향지국(香志國)의 공주셨다. 형이 두 분이셨는데 이름은 실리가라파(悉利迦羅婆)와 실리마니(悉利摩尼)이다. 부모님께서 동방대위덕신(東方大威德神)에게 기도를 드려 나를 낳으셨다.
나는 어려서도 맑고 깨끗함을 좋아하여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고, 다섯 살에 스승에게서 외교 문서와 외국의 학문을 교육 받았지만 대략적인 뜻을 알았을 때 이들을 떠났다. 아버님께서 병이 드셨는데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점치는 이가 말하기를, “정실부인의 아드님께서 출가하신다면, 왕의 병환이 나으실 것입니다.”하였다.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에게 출가할 뜻을 물으셨을 때, 내가 얼른 대답하였다. 아버님께서 몹시 기뻐하시며,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으로 부르시면서, “누달라치파(婁恒囉哆婆)야,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막내라 처음에는 매우 어렵게 여기셨으나, 애정을 끊고 출가하기를 바라시니 아버님의 병환이 곧 나으셨다.
여덟 살 때에 삼의(三衣 : 비구가 입는 세 가지 가사)를 갖추고 나란타사(那闌陁寺)의 강사(講師) 율현(律賢)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가사와 오계를 받았다.『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을 배우다가 얻은 바가 있는 듯하여, 부처님과 중생과 허공과의 세 경계를 여쭈었더니, 스승께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 참 반야(般若)이니,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楞伽國 吉祥山)의 보명(普明)에게로 가서 더욱 깊은 진리를 연구하라.” 하셨다. 그때 내 나이 19세로, 분발해서 혼자 걸어서 스승을 정음암(頂音菴)에서 뵙고 인사를 드렸다. 스승께서 “중천축(中笁抵)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걸음 수효를 알겠구나?”하시거늘, 나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러나 암석 동굴에서 6개월을 좌선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으나 두 다리가 붙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나라의 왕이 의사를 불러 약으로 치료하자 바로 일어섰다. 나는 스승에게 “두 다리가 한 걸음입니다.”하니, 스승께서 가사와 바리때를 주시고 정수리를 만지며 수기(摩頂受記)하시기를, “산을 내려가는 한걸음이 곧 사자아(師子兒)구나! 내 법좌 밑에서 법을 얻어 세상에 나간 이가 243명인데 모두가 중생과 인연이 드물었다. 네가 나의 교화를 널리 퍼뜨려라. 가서 힘쓰라!”하시고, 호(號)를 소나적사야(蘇那的沙野)라 하시니 중국어로 지공(指空)이다. 나는 게(偈)를 지어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대중에게 “나아가면 허공이 활짝 트이고 물러서면 만법이 함께 완전히 가라앉는다.”라고 한 마디 크게 갈(喝) 하였다.
내가 처음 스승님을 뵈러 갈 때, 라라허국(囉囉許國)을 지나가는데『법화경』을 강론하는 자가 있기에, 내가 게(偈)로 그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단치국(旦哆國)에서는 남녀가 벌거벗은 채 섞여 살고 있었는데, 내가 그들에게 대도(大道)를 보여주었다. 향지국왕(香至國王)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내 조카이다.”하면서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는 사(師)가 스무 가지의 보리심을 허황되게 말하고 있기에, 내가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이치를 깨우쳐 주었다. 가릉가국(迦陵伽國) 바닷가의 구봉산(龜峰山)에는 범지(梵志)가 살고 있었다. 그가 “만 길(대략 30㎞)의 가파른 벼랑에서 떨어져 죽으면 인간계와 천상계에서 왕이 될 것이다.”하기에, “수행은 마음에 달린 것, 어찌 몸과 관계있겠느냐?”하고, 육바라밀(六度)과 십지(十地) 등의 법을 닦으라고 하였다.
마리지산(摩利支山)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내고 바로 능가국(楞加國)에 이르렀다. 스승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무봉탑(無縫塔)을 지키는 노승이 길까지 마중 나와서, 내가 터득한 것이 있음을 알고 설법을 청하였지만, 나는 탑만을 찬송하고 떠났다. 우지국(于地國) 군주는 이단사설을 믿었다. 내가 불살생(不殺生) · 부도(不盜) · 불사음(不邪淫)의 계(戒)를 지킨다는 것을 알고 기생을 불러 함께 목욕을 하라 하기에, 내가 죽은 사람같이 태연히 행동하였더니, 군주가 탄복하며 “이 사람은 비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하였다. 그 나라는 이단들이 나무나 돌로 수미산(湏彌山)을 만들면, 사람들은 머리 · 가슴 · 다리에 산 하나씩을 고정시키고 술과 안주를 차려 산에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많은 남녀가 그 산 앞에서 교합하였는데, 그들은 이것을 음양공양이라 하였다.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 미혹과 깨달음의 이치를 들어 그들의 사악한 근본을 살펴서 타파해 주었다.
좌리국(佐理國) 군주는 부처를 믿기에 내가 게로 아뢰니, 왕도 게로 답하였다. 내가 다시 게를 읊으니, 왕이 진주 몇 알을 시주하였다. 이 모임에 있던 비구니가 대중 앞으로 나와 “저 스승 이 제자의 중간은 누구입니까?” 하기에, 내가 갈(喝)을 한 번 하자, 비구니가 크게 깨닫고는 ‘바늘귀 속을 코끼리가 통과한다.’는 내용의 게송을 읊었다. 사자국(獅子國)에는 여래(如來)의 바리때와 부처의 발자국이 있다. 여래(如來)의 바리때 한 개만으로 만 명의 중을 배불리 먹이며, 부처의 발자국에서는 때때로 밝은 빛이 난다. 나는 모두를 보고 예불하였다.
마리야라국(麽哩耶囉國)은 범지(梵志)의 불법을 믿으므로 나는 들리지 않았다. 차라박국(哆囉縛國)은 불법과 이단을 함께 믿었는데, 내가 법좌에 기대어 한 마디 하니, 비구니 중에 말없이 뜻을 깨달은 이가 있었다. 가라나국(迦羅那國)도 이단의 도를 믿었다. 그 왕이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기에 내가『대장엄공덕보왕경(大莊嚴功德寶王經)』의「마류수라왕인지품(摩醯莎羅王因地品)」을 보여주니, 왕이 “법 밖에 또 바른 법이 있었소이다.”하였다. 이단의 무리가 해치려 하기에 바로 성을 빠져나오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호랑이가 다가오는 것을 시자(侍者)가 새 울음소리로 알아듣고, 나무로 올라가서 화를 피하였다. 내가, 시자(侍者)에게 “너는 새의 말을 들을 줄 아니, 나의 설법도 알겠구나?”하였더니, 시자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몽둥이로 스무 대쯤 아프게 때렸더니 이내 깨달았다.
신두국(神頭國)은 사막이 너무 넓어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를 형편이었다. 마침 열매가 복숭아처럼 생긴 나무가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 따서 먹었다. 그런데 두 개를 다 먹기도 전에 공신(空神)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으로 끌고 가버렸다. 넓은 전각에 몸을 바로하고 앉아 있던 노인이 “도둑아! 어째서 절을 하지 않느냐?”하였다. 내가 “나는 불도(佛徒)이다. 어찌 너에게 절을 하겠느냐?”하니, 노인은 꾸짖으며 “불도라면서 어째서 남의 과일을 훔쳤느냐?”하기에, “굶주림과 더위에 시달려서 그랬소.”하였더니, 노인이 다시 “주지 않은 것을 가진 것은 도둑질이다. 이제 너를 놓아주겠으니 계율이나 잘 지켜라.”하고는 “눈을 감아라.”하였다.
잠깐 사이에 이미 강 언덕 이쪽에 와 있었다. 쓰러진 거목 옆에서 차를 끓였는데, 알고 보니 그 나무란 것이 바로 큰 구렁이였다. 적리라아국(的哩囉兒國)에서는 여인이 교합할 것을 요구했다. 배가 고프므로 음식이나 구하려고, 허락하는 체 하면서 좋은 말이 어느 것이냐고 물었더니 사실대로 일러주었다. 내가 얼른 올라타고 달리니, 과연 나는 듯이 이내 다른 나라 국경에 이르렀다. 이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를 묶어 가더니 자기네 양을 지키라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동굴로 들어가 7일 밤낮을 선정을 닦으니, 흰 광채가 굴 밖으로 뻗었다. 그 사람이 눈을 치우고 들어와, 내가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옷과 보물을 시주하였지만, 받지 않았다. 남녀가 모두 보리심을 보이기에, 내가 길을 바로잡아 주었다.
얼마를 걸어도 사람을 볼 수 없었는데, 갑자기 길에서 사람을 만나 매우 기뻤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붙잡아 자기 왕 앞에 데리고 가 무릎을 꿇리며 “날이 가무는 것은 반드시 이 요물 때문인가 합니다. 이 요물을 죽이십시오.”하니, 왕이 “놓아주었다가 3일 뒤에 비가 오지 않거든, 그때 죽여도 늦진 않을 것이다.”하였다. 내가 향을 사르고 한 번 빌었더니 큰 비가 3일 동안 내렸다.
차릉타국(嵯楞陁國)에 있는 미치광이 중은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소머리 세 개를 땅에 늘어놓고 부들로 만든 둥근 방석을 그 위에 두고 말없이 앉는다. 내가 보고 불을 질러 태워버리니, 그가 “산하대지가 한 조각이 되었구나.”하며 부르짖었다.
아누지(阿耨池)의 중 도암(道巖)이 그 곁에다 풀로 지붕을 이은 작은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 사람이라도 오면 불을 지르며 “불을 끄라, 불을 끄라!”하며 부르짖었다. 내가 이르자마자 역시 “불을 끄라!” 함에, 내가 물병을 걷어차니, 도암(道巖)이 “애석하다, 오는 것이 왜 그리 늦는가?” 하였다.
말라파국(末羅婆國)에서는 부처 섬기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나 이단과 정도(불교)가 뒤섞여 있었다. 내가 파사론(破邪論)을 설했더니 이단의 도들이 바른 길(불교)로 돌아왔다. 성의 동쪽에 있는 보화상(寶和尙)은 그가 살고 있는 사방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씨앗을 담은 그릇 하나 놓아두곤 사람이 오면 김만 맬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씨앗을 들고 그의 뒤를 따르면서 뿌리니, 중이 “채소가 돋았다. 채소가 돋았다!”하며 외쳤다. 그 성 안에는 비단을 짜는 이가 있는데, 사람이 와도 말도 않고 비단만 짰다. 내가 칼을 들어 비단을 몽땅 끊어버렸더니, 그 사람이 “여러 해 동안의 길쌈을 오늘에야 끝냈구나.”하였다.
아누달국(阿耨達國)의 중 성일(省一)은 기와 굽는 굴속에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그을음을 얼굴에 바르고 춤을 추고는 다시 들어갔다. 내가 게로써 꾸짖어 주었다. 조사국(早娑國)의 중 납달(納達)은 수년을 길가에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어서 오시오.” 하고, 가는 사람을 보면, “잘 가시오.” 하거늘, 내가 방망이로 세 대를 때려 주었더니, 나에게 주먹 한 방을 날렸다.
적리후적국(的哩侯的國)에는 바라문의 법이 성행하므로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지나쳤고, 정거리국(挺佉哩國)은 진종(眞宗 : 불교)과 이단이 똑같이 행해지고 있다. 도적을 만나 알몸이 되기도 하였다. 녜가라국(禰伽羅國)왕은 나를 궁궐 안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청했다. 보봉(寶峰)이란 분이 경전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와 번갈아 법을 강연했다.
동쪽으로 여러 날을 걸어가니 높은 산이 나왔는데 철산(鐵山)이라 하였다. 흙도 돌도 풀도 나무도 없으며,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의 태양은 그 기세가 불같아서 화염산(火熖山)이라고도 했다. 7~8일을 걸어야 산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17~8개의 나라가 가로로 이어져 하늘에 닿았으며, 그 북쪽은 몇 천만리인지 알 수 없지만, 동쪽으론 강이 흘렀다. 양쪽 기슭이 높이 솟구쳐있어 다리를 놓아 건넜으며, 얼음과 눈이 녹질 않아 설산(雪山)이라 불렀다.
혼자 몸으로 굶주리다, 들에 있는 과일을 따먹으면서 서번(西蕃)의 경계에 도달했다. 내가 중국을 교화시키러 다니던 중에 북인도의 마가반특달(摩訶班特達)을 서번(西蕃)에서 만나 함께 연경(燕京)까지 왔다. 연경(燕京)에 거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 안서왕부(安西王府)로 가서 왕의 스승인 가제(可提)를 만났다. 가제(可提)는 그곳에 머물면서 법을 배우라고 하였으나, 나의 뜻은 두루 다니는 데 있었으므로 “나의 도는 자비(慈悲)가 근본이고, 당신의 학문은 이와 반대이니 어쩌려는가?” 하니, 가제(可提)가 “중생은 먼 과거로부터 지은 악업(惡業)이 헤아릴 수 없다. 내가 진언(眞言) 한 마디로 그들을 구제하면, 생사를 벗어난 하늘의 쾌락을 누릴 수 있다.” 하였다. 내가 “그대의 말은 망언이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람이 또 그를 죽이니, 살거나 죽거나 간에 서로 원수가 된다. 이것이 괴로움의 근본이다.” 하니, 가제(可提)가 “이단의 도이다.” 하였다. 내가 “자비(慈悲)는 참 불자요, 이를 거스르는 것이 그야말로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선물을 주었으나 물리쳤다.
서번(西蕃)의 마제야성(摩提耶城)에서는 사람들은 교화할 만하였다. 주술사는 나를 미워하여 독약을 섞은 차를 마시라고 했다. 때마침 사신이 수도로부터 와서 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반특달(班特達)을 스승으로 하여 서로 불법을 선양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가단(伽單)에서도 주술사가 나를 죽이려 하기에 떠나갔다.
하성(蝦城) 성주는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단의 무리들은 질투하여 나를 패서 이 한 대를 부러뜨렸다. 떠나려는 데도, 이단의 무리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며 길목에서 기다리므로 하성(蝦城)의 성주가 나를 촉(蜀)까지 호송해주도록 했다.
거대한 보현보살(普賢菩薩)상에 예불한 뒤 3년 동안 좌선하였다. 대독하(大毒河)에서 도적을 만나 다시 알몸으로 달아났다. 라라사(羅羅斯) 지역에 이르자, 중이 가사 한 벌을 주었고 여인이 작은 옷 한 벌을 주었다. 비로소 절에 시주하는 집안(檀家)의 공양 요청에 응할 수 있었다. 공양 요청을 받고 함께 간 중이 풀어 놓고 키우는 거위를 잡아서 삶아 먹으려 하였다. 내가 공양주(供養主)의 부인을 쳤더니, 부인이 그것을 보고 통곡을 했고, 중은 되레 화를 냈지만 쫓겨났다. 듣자니, 그 지방 관리들이 나의 모습을 조각해 세우고, 장마가 지거나 가물거나 질병이 돌 때면 빈다고 하는데,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금사하(金沙河)의 관문을 지키는 아전이 내가 여인의 옷을 입었고 머리칼도 자란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 인도의 글씨를 써서 보였으나 역시 알지 못하므로 억류되었다. 날이 저물어 후미진 바위틈에 누웠는데, 나도 모르는 잠깐 사이에 강 건너에 닿았다. 뱃사공이 나를 기이하다 여기고 절을 하였다.
운남성(雲南城) 서쪽에 있는 절의 다락집에 올라가 선정에 들었더니 그곳에 사는 중들이 와서 성으로 들어오라고 청하였다. 조변사(祖變寺)에 이르러 오동나무 밑에서 좌선을 했다. 그날 밤 비가 왔고, 날이 샌 뒤에도 비가 왔으나 옷이 젖지 않았다. 성(省)에 가서 비가 개기를 빌자 효험이 있었다.
용천사(龍泉寺)에서 여름 안거를 하면서 범어(산스크리트어)로『반야경(般若經)』을 썼다. 대중이 모여 살기엔 먹는 물이 부족해 용에게 물을 끌어들여 대중을 구제케 했다. 대리국(大理國)에서는 모든 음식을 물리치고 매일 호도만 9개씩 먹으며 살았다. 금치오(金齒烏)는 철오몽(撤烏蒙)의 한 부락이다. 나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나의 모습을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그런데 무뢰한들이 나의 찰흙상이 쥐고 있는 선봉(禪棒 : 禪師의 몽둥이)을 땅에 던졌으나 들지를 못하였다. 뉘우치고 사죄하고서야 제자리에 둘 수 있었다고 한다.
안녕주(安寧州)의 중이 “옛날에 삼장(三藏)이 당(唐)에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소리를 들을 줄 알았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이미 운남(雲南)의 말을 알고 있었던 터라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고, 성인과 범인은 길이 다르다.” 하였다. 그러자 중이 계(戒)와 경(經)을 설해 달라고 청하기를 정수리가 타고 팔이 타는 것처럼 재촉하였고, 관리와 백성들 모두 그리 하였다. 중경로(中慶路)의 여러 산에 있는 절에서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무릇 다섯 차례의 법회를 여니, 태자께서 나를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라라(羅羅) 사람들은 원래 부처도 중도 몰랐는데, 내가 라라(羅羅)에 온 뒤로 모두가 발심하여, 나는 새들도 염불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귀주(貴州)에서는 원수부(元帥府)의 관리들이 모두 계를 받으니 묘(猫) · 만(蠻) · 요(猺) · 동(獞) · 청(靑) · 홍(紅) · 화(花) · 죽(竹) · 타(打) · 아(牙) · 갈(獦) · 노(狫) 등 모든 오랑캐가 모두 기이한 채소를 가지고 와서 계 받기를 청하였다. 진원부(鎭遠府)에는 마왕신(馬王神)의 사당이 있다. 사당 앞을 지나는 배는 모두 고기로 제사를 지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가 부서진다고 하였다. 내가 한 번 큰 소리로 꾸짖고 배를 놓아 보냈다. 상덕로(常德路)에서는 금강(金剛)과 백록(白鹿) 두 조사와 관음(觀音)이 자신들의 모습을 조각했다는 상(像)에 예불하였다.
동정호(洞庭湖)에는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자못 많았다. 비바람을 멈추게 했던 것은, 내가 동정호를 지나갈 때, 마침 바람이 불고 파도가 용솟음쳤기 때문에, 삼귀(三歸)와 오계(五戒)를 중국어와 범어(산스크리트어)를 섞어서 설법했다. 이보다 앞서 제사를 지내는 이가 밤에 실로 짠 신을 올리고, 날이 밝으면 실로 짠 신을 모두 뜯어버렸다. 이후부터는 바치는 물건을 모두 없애고 소박하게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호광성(湖廣省)의 참정(參政)이 나를 쫓아버리려 하기에 “빈도는 인도 사람이다. 멀리서 황제를 뵙고 바른 법 펴시는 일을 도우려 왔다. 그런데 너는 내가 황제를 위해 축수하는 것을 원치 않으냐?” 하였다.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를 지날 때 눈앞에 신탑(身塔)이 우뚝이 섰는데 뼈조차 아직 썩지 않았다. 회서(淮西)의 관(寬)이 반야(般若)의 뜻을 묻기에, “삼심(三心 : 지성심, 심심, 회향발원심)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니라.” 하였다. 양주(楊州)의 태자(太子)가 자기의 배를 내어주어 나를 도성까지 전송해 주었다. 대순승상(大順丞相)의 부인 위(韋)씨는 고려인인데, 숭인사(崇仁寺)에서 시행하는 계(戒)에 나를 초대했다. 이윽고 난경(灤京)에 이르니, 이것이 태정제(泰定帝)의 지극한 대우를 받게 된 동기였다. 아! 대사의 여정이 이러하시니 실로 특이하신 분이라 하노라.
대사께서는 천력(天歷) 연간에 승복을 벗었다. 대부대감찰(大府大監察)인 한첩목아(罕帖木兒)의 부인 김(金)씨도 고려인인데 대사를 따라 출가하였다. 김(金)씨는 징청리(澄淸里)에 집을 사서 절로 개조하고 대사를 맞이하여 거처하시도록 하였다. 대사께서 절의 편액을 법원(法源)이라 하신 것은, 천하의 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가는 뜻을 취하여 자신을 여기에 비유하신 때문이다.
대사께서는 변발을 하고 하얀 수염에, 신기(神氣)는 검은빛으로 빛났고 옷과 음식 매우 사치스러웠다. 평상시 거처하실 때엔 근엄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지정(至正) 23년(공민왕 12, 1363년) 겨울에 내시가 오니, 대사께서 “나를 위해 임금에게 알려다오. 내가 생일 전에 떠나야 좋으냐? 생일 뒤에 떠나야 좋으냐?” 하시니, 장패향(章佩鄕) 속가첩목아(速哥帖木兒)가 왕명을 받들고 돌아와서 대사를 만류하매 한 겨울 잠시 머무셨다.
대사께서 또 “천수사(天壽寺)는 나의 영당(影堂 : 畵像을 모신 곳)이라.” 하시었다. 그해 11월 20일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돌아가셨다. 귀화방장(貴化方丈)은 대사께서 세우시고 대사께서 이름 지으신 곳이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성(省) · 원(院) · 대(臺)의 뭇 관리들이 위의를 갖추어 천수사(天壽寺)에 감실(龕室)을 모셨다. 다음 해 어사대부(御史大夫) 도견첩목아(圖堅帖木兒)와 평장백첩목아(平章伯帖木兒)가 향을 싸 가지고 와서 대사를 뵙고, 사용한 향과 진흙 바른 베, 매계수(梅桂水)를 모아서 육신을 소상(塑像)하였다.
무신년(공민왕 17, 1368년) 가을에 병란이 임박함에 성에서 다비식(茶毗式)을 하고 유골을 넷으로 나누어 달현(達玄) · 청혜(淸慧) · 법명(法明) · 내정인 장길록(內正 張祿吉)이 제각기 가지고 갔다. 대사의 도제인 달현(達玄)은 바다로 떠났고, 사도 달예(達叡)는 청혜(淸慧)에게 나눠 받은 유골과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년) 9월 16일, 왕명에 따라 회암사(檜巖寺)에 사리탑을 세우고 탑에 넣으려고 뼈를 씻다가 약간의 사리를 얻었다. 대사께서 인도로부터 오실 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사리와『무생계경(無生戒經)』2권을 가지고 오셨는데, 참정(參政)인 위대박(危大朴)이 서문을 썼다. 손수『원각경(圓覺經)』을 쓰셨는데 구양(歐陽)이 왕명을 받들어『원각경(圓覺經)』말미에 발문(跋文)을 썼다. 대사의 게송은 매우 많아 따로 기록하였으며 모두 세상에 퍼져있다.
운남(雲南)의 오(悟)는 보지 않은 일을 말할 수 있었는데, 7세 때에 대사를 따라 출가했다. 그 때 이미 대사의 나이는 환갑이셨고, 오(悟)의 나이 75세 되는 해에 대사께서 돌아가셨다.
길문강(吉文江) 인걸(仁杰) 스님의 말에 의하건대, ‘문인인 임관사(林觀寺)의 전 주지 달온(達蘊)은 불도를 수행하기 위해 갈수록 더욱 부지런히 했고, 사도인 달예(達叡)는 수 천리 밖에서 대사의 유골을 산 사람 섬기듯 하여 죽은 이를 전송함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한다. 나옹(懶翁)의 제자인 아무개(某)의 말에 따르면, ‘우리 스승께서도 일찍이 스승으로 모시었으니, 대사께서는 나의 조(祖)가 되신다.’하고, 대사의 제자이신 정업원(凈業院) 주지 묘장(妙藏) 비구니와 함께 연석(燕石)을 사서 회암사(檜巖寺) 벼랑에 세우고자 하니, 천륜으로 비유하면 효자이며 공손한 후손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대궐에 알려져 신 색(穡)은 명(銘)을 짓고, 신 수(脩)는 글씨를 쓰고, 신 중화(仲和)는 전자로 편액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신 색(穡)은 말한다. “대사의 몸은 이미 화장되어 네 곳으로 나누어졌다. 나머지 세 곳의 행방은 알 수도 없는데, 어느 곳에 탑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명문을 지어서 전승되기를 도모하는 자 누구이며, 붓을 들고 쓰려는 자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지공선사(指空禪師)께서는 여기에 계시는가? 저기에 계시는가? 자취를 더듬고자 하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억지로 하는 일인 듯하다.
신은 이에 대하여 유감이 없지 않으나 다만 황공스럽게 교지를 받들었으니 명을 붙인다. 명은 이러하다.

대사의 발자취는 서역에서 시작하였다.
만왕(滿王)의 아들이요, 보명(普明)의 수제자이다.
난경(灤京)에서 지우를 만나니, 참으로 좋은 때로다!
중화의 땅을 방문하는 일이 왜 그리 더디었던지.
님의 발자취가 가지 않은 나라 없으니
지붕 위의 암키와요 물에 던진 돌이라.
천력제가 승려를 사랑하여 불법은 더더욱 퍼졌다.
속세의 옷을 입고 계셔도 도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지고,
미친 듯 익살맞은 말씀은 사람들이 헤아릴 바 아니었고
병란을 예언하심에 빈틈없이 분명하니
선견지명 이러하심은 그대로가 도력의 정수라
의심하거나 비방하여도 대사의 마음은 평온하다.
사리가 환히 나타나자 숨을 죽이지 않은 이 없으니
누가 사람의 성품이 극에 맞지 않는다고 하리오.
이 땅 회암사에 자리 잡고 돌을 세워 기록해 두노니
혹시라도 와전됨이 없이 영겁까지, 영원하시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해석자 박경이-

6. 관련 문화재

6.1.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

6.1.1. 보물 제2012호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는 1565년(명종 20) 중종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명종의 만수무강과 왕비의 후손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로, 경기도 양주에 창건한 회암사(檜巖寺)의 낙성에 맞춰 조성된 것이다. 16세기 대표적 승려 보우(普雨)가 쓴 화기(畵記)에 의하면, 당시 석가약사·미륵·아미타불 등 모든 부처와 보살을 소재로 하여 금니화(金泥畵)와 채색화(彩色畵) 각 50점씩 조성했다고 한다. 이 불화의 발원자인 문정왕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던 여인이자 많은 불사(佛事)를 추진한 불교후원자였으며, 불화를 봉안했던 회암사 역시 조선 전기 가장 규모가 컸던 왕실사찰이었다. 따라서 이 약사여래삼존도는 16세기 문정왕후에 의한 대규모 왕실 발원 불사라는 역사적, 불교사적으로 매우 주목되는 사건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도는 본존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한 간략한 형식이고 적갈색 비단 바탕에 금니(금물)로 그려 매우 화려하다. 주존과 협시보살 간의 엄격한 위계를 두어 고려불화의 전통을 따랐으나, 갸름한 신체와 작은 이목구비 등 조선 초기 왕실발원 불화의 특징을 잘 반영되어 있고 당대 최고의 기량을 지닌 궁중화원들이 제작한 만큼 격조 있는 품위와 섬세한 필력을 보여준다. 당초 제작된 총400점의 불화는 대부분 산재되어 현재 미국과 일본 등지에 6점이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는 ‘약사삼존도’만이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다. 발원자와 발원 대상자, 발원 목적과 봉안장소 등 조성과 관련된 모든 사실이 뚜렷하게 밝혀져 있는 불화이자 조선 16세기 불화의 기준작으로 조선 전기 왕실불교의 활성화에 영향을 끼친 여성들의 활동과 궁중미술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는 작품이다.

7. 외부 링크

8. 사적 제128호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회암사지 → 양주 회암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9. 교통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옥정IC가 바로 앞 화합로에 접속한다. 버스로 회암사지.회암사지박물관 정류소가 가장 가까우나 주차장에 내려주며, 회암사지는 최소 0.7km, 회암사 부도까지 1.5km는 걸어야 한다.

또한 철도는 현재 수도권 전철 1호선 덕정역과 그나마 가깝고 추후 수도권 전철 7호선(도봉산포천선) 706정거장이 가장 가까워질 예정이다.

10. 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