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침 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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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 |
신륵사 神勒寺 | Silleuksa | |
<colbgcolor=#ff8c00><colcolor=#ffffff> 설립일 | 7세기? 14세기? |
소속국가 | 대한민국 |
주지 스님 | 법성 |
위치 | |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282) | |
외부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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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의 남한강변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산 속에 위치한 대부분의 절들과는 달리 평지에, 그것도 강변에 있다.
2. 상세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절 이름인 '신륵(神勒)'에서 륵(勒)은 굴레를 뜻한다. 고려 우왕 때 인근의 마암(馬巖)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자 미륵불 또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이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신륵사란 절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아마도 지세가 약한 곳에 절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남한강의 범람을 막아보고자 했던 바람에서 유래한 설화로 추측된다.1376년, 고려말의 고승 나옹은 회암사의 주지로 중창불사를 했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신륵사에 들렀다가 그대로 입적하였다.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을 그대로 신륵사에서 화장한 뒤 나온 사리를 회암사와 신륵사에 나누어 부도탑(보제존자석종)을 조성했다.
조선불교계는 나옹의 스승인 범승(인도 승려) 지공(指空), 나옹, 그리고 두 승려의 공동제자인 무학을 3화상(三和尙)이라고 부르며 불교의 조사(祖師)로 추앙하였고 민간신앙의 대상으로도 여겼다. 그리하여 나옹이 입적한 신륵사에도 조사당(祖師堂)을 세워 3화상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469년(예종 1년)에 세종의 영릉이 여주로 이장됐는데 이때 영릉의 원찰(願刹, 능침사찰)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가 신륵사를 원찰로 하자는 건의가 나와 왕실의 발원으로 1472년부터 대규모 중수를 시작했다. 이때 절의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기로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계속 신륵사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전탑이 있어서인지 고려시대에는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3. 문화재
- 보물 제180호 여주 신륵사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多層石塔)
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多層塼塔)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鍾)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鍾碑)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보물 제1791호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부도(八角圓堂形 石造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乾隆三十八年銘 銅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8호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極樂寶殿 三藏菩薩圖)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여주 신륵사 원구형 석조부도(圓球型 石造浮屠)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여주 신륵사 청동시루(靑銅시루)[1]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여주 신륵사 삼화상[2] 진영(三和尙 眞影)
신륵사 다층전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전탑이며 동시에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전탑이다. 모전석탑까지 범위를 넓혀도 경기도에서는 이 탑이 유일하다. 이 전탑은 화강암으로 7단의 기단부(基壇部)를 만들고 그 위에 벽돌로 6층의 탑신을 만든 후 옥개석(지붕돌)을 올려둔 형태인데 6층전탑이 아니라 다층전탑인 이유는 현재의 모습이 원형이 아니고 변형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탑 인근에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가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이 탑의 이름은 원래 나옹탑(懶翁塔)이었다고 되어있다. 나옹은 1376년 신륵사에서 입적했기 때문에 따라서 그의 이름이 붙어있는 이 탑은 나옹의 입적 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세워졌다고 볼 여지가 있게 된다. 또한 성화(成化, 1465~1487),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수리를 했다는 기록과 1726년(영조 2년)에 벽돌을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탑이 최소 3번은 수리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탑을 쌓을 때는 보통 홀수(3, 5, 7, 9) 층으로 쌓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 탑 역시 원래는 5층 또는 7층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6층 중 맨 윗층만 높이와 너비가 줄어들 뿐 나머지 층들은 높이와 너비가 거의 비슷해 전체적인 조형미와 안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는 후대에 다시 쌓는 과정에서 원형을 점차 잃다보니 이렇게 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탑신에 사용된 벽돌을 보면 반원 무늬 안에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벽돌과 아무 무늬가 없는 벽돌 2가지가 있으나 다시 쌓고 조립하는 과정에서 무늬를 감안해서 벽돌을 배열하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배열해뒀다. 또한 신라시대의 전탑들을 보면 벽돌간의 간격이 거의 없이 촘촘하게 쌓여 있는데 이 전탑은 벽돌의 위 아래, 옆 사이에 공간을 두고 백토(白土)를 채워 넣어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4. 여담
- 이 곳에서 보는 남한강이 꽤나 멋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이 사람들을 그냥 보내기는 싫었는지 주변이 개발되어 신륵사관광지가 조성되었다.
- 인근의 여주 도예단지에서는 매년 여주 도자기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 근처에서 여주의 또다른 관광테마인 황포돛배를 탈 수 있다. 매주 월요일과 강이 얼었을 때 말고는 매일 운영한다.
- 여주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갈 수 있는데 생각보다 오래 가야 일주문이 보인다.
- JTBC의 드라마 SKY 캐슬에서 잠깐 등장, 강준상의 무식함을 알리는 일종의 도구 역할을 했다.[3]
-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 스님이 이 사찰의 주지 스님으로 지냈다.
5. 능침사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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